Perfect World RAW novel - Chapter 408
410화
“휴~ 그건 제가 오히려 자키드씨에게 할 말인데요.”
범석의 한숨 섞인 말에, 자키드가 눈을 부릅떴다.
“뭐야! 너 지금 뭐라고 했냐?”
“모르시고 하시는 말씀이십니까? 지금 자키드 씨가 저를 이길 것 같습니까? 이렇게 평정심을 잃은 상태에서 말입니다.”
그 말에 자키드가 표정을 풀고 그를 지그시 쳐다봤다. 평정심을 잃었다는 것은, 집중력을 잃었다는 말과 동일한 뜻이었고 이는 곧 패배를 의미했다. 특히나 상대가 범석이라면 더욱 그랬다.
“내가 집중력을 잃었다는 뜻이냐?”
“네. 물론입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내가 집중력을 잃다니 말이 돼!”
“제 말이 맞습니다. 이해되지 않는다는 것은, 단지 자키드 씨가 자신의 상태를 모를 뿐입니다.”
자키드가 심호흡을 크게 내쉬며 자신의 상태를 살폈다. 그간 범석의 행동으로 보아 헛소리를 늘어놓을 리가 없으리라 판단한 탓이다. 그리고 잠시 후 혼란한 머릿속의 잡념을 확인하고는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지금 자신은 범석을 어떻게든 빨리 이기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런 상태에서는 절대 그를 제압할 수 없었다.
“그, 그렇군.”
“아셨다니 다행입니다. 그런데 혹시 감독이신 렘란트 님이 충고를 보내지 않았습니까?”
자키드가 통신기가 붙어있는 자신의 헬멧 옆을 툭툭 거리며 말했다.
“그런 일은 없었는데…….”
범석이 은근한 시선으로 다크 하이아나즈 더그아웃을 바라봤다. 멀리 떨어져 있다지만, 렘란트 라면 제자의 상태를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아무런 경고 없었다니 좀 이상했다.
지금의 자키드를 내버려 두었다면 필패. 감독으로서 또 스승으로서 조언을 아끼지 말았어야 함이 옳았다. 렘란트는 뭔가 오늘 경기를 통해 다른 목적을 이루려 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렘란트님은 도대체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이전에도 나의 약점이 실제로는 약점이 아니라는 것을 자키드 씨에게 말해주지도 않았잖아.’
전후 사정으로 봤을 때 확실한 것은 렘란트는 자키드의 패배를 원한다는 것이었다. 감독으로서 절대 있을 수가 없는 일이지만, 스승으로서는 가능한 일이었다. 패배는 검사에게 수치지만, 발전의 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자키드는 자신을 경쟁자로 여기고 있기에, 패배의 수모는 아주 컸다.
범석이 다시 자키드를 바라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쯧쯧. 그러니 진작에 좀 잘하지.’
자키드는 검투계에서 자유분방의 대명사로 통하고 있었다. 프로에 진출하기는 전에는 스승의 감시하에 부단히도 검술 수련에 매진했지만, 이 점이 독이 됐는지 프로에 와서는 상당히 해이해진 모습을 보여왔다.
난생처음의 자유와 막대한 연봉, 도시의 환락은 시골뜨기인 그를 현혹하기에 충분했고, 팬들의 환호, 언론의 관심은 마음속 깊이 교만이 스며들게 했다. 물론 렘란트가 감독으로 부임한 이후 나아진 면은 있지만, 자유분방함은 여전했다.
아마 범석 자신이 스승이라도 따끔하게 혼쭐을 내고자 했을 터였다.
‘좋아. 렘란트님에게는 신세가 진 일이 있으니까. 보답해 드려야겠지.’
렘란트는 자키드의 스승이기는 하지만, 젤소미나에게는 부모와 같은 자였고, 리자를 만나게 해 준 은인이었다. 자키드가 정신을 차리면 골치 아프기는 했지만, 따끔한 패배를 안겨 보답하는 것이 인간의 도리였다.
“아무래도 감독의 입장이시라 본진에 신경을 쓰고 있었나 봅니다. 또 자키드 씨가 평정심을 잃은 시간은 아주 짧았으니 알아채기 어렵겠죠.”
“뭐. 그렇다고 치고, 그런데 왜 너는 이 기회를 통해 나를 쓰러뜨리지 않고, 충고한 거지? 내가 정신을 차려봐야 네게 하등 좋을 것이 없을 텐데.”
“후후. 아까 제가 한 얘기 어디로 들으셨습니까? 저는 완벽한 상태의 자키드 씨를 쓰러뜨리고 싶을 뿐이라고요. 그래야 나중에 딴말하지 않거든요. 사실 세상에는 자신의 부족함을 모르고, 패배와 실패를 남의 탓, 환경 탓으로 돌리는 사람이 의외로 많습니다.”
그 말에 자키드가 두 눈을 부라렸다. 마치 자신을 패배의 부끄러움도 모르는 천박한 놈처럼 취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뭐가 어쩌고 어째! 너 지금 나를 뭘로 보는 거야!”
“화내실 필요 없습니다. 세상사 이치가 그렇다는 거지, 특별히 자키드 씨를 지칭한 것은 아닙니다.”
“이놈. 말은 잘한다! 좋다. 반드시 이번에 네놈을 쓰러뜨려, 지금의 말을 후회하게 하겠다. 각오해랏!”
자키드가 다짜고짜 범석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는 바닥을 향하고 있던 검끝을 들어 올려 자키드를 맞이했다.
맹렬한 기세로 내려쳐 지는 장검을 범석이 자신의 카타나를 비스듬히 세워 옆으로 흘리고는 발을 들어 그의 무릎을 찼다. 빠른 로우킥으로 자키드의 상태를 알아보기 위한 공격이었다. 좀 서두르는 감이 있어, 이전처럼 평정심을 잃은 상태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런 공격이 내게 통할 줄 아느냐!”
가볍게 피하고는 연타를 날리는 자키드를 보며 범석이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이로써 그가 충분히 집중력을 가지고 공격하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된 것이다. 그렇다면 온 힘을 다해 그와 맞서 쓰러뜨리기만 하면 될 뿐이었다.
“하하하. 저도 통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조롱이라 여긴 자키드가 오만상을 찌푸리며 그를 향해 검을 뿌려댔다. 어떻게든 저 건방진 입을 다물고 하고 싶을 심정이었다.
범석이 사방을 점하듯 날아오는 검을 하나씩 쳐대며, 기세를 끓어 올리기 시작했다. 아슬아슬하게 신체 일부를 스치는 공격도 있었지만, 개념 치 않았다. 승부를 결정짓는 수는 정확한 타격이 들어간 공격뿐이었고, 자키드를 제압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위험도 감수해야 했다.
“자. 간다!”
육중한 몸무게를 실은 일격이 대기를 가르며, 이마를 향해 날아왔다. 이에 범석이 슬쩍 발목을 뒤틀어 측면으로 회피했다.
충분히 막아낼 수도 있었지만, 이런 공격을 일일이 다 막다가는 유리한 수를 점할 수 없었다. 무거운 공격이 아무런 막힘없이 휘어졌다가는 시전자가 오히려 중심을 잃으며 위기에 빠져들게 되었다.
하지만 이런 범석의 의도는 여지없이 빗나갔다. 자키드가 여유롭게 검을 중간에 멈춘 후 허리를 가를 듯 바로 가로로 내질렀던 탓이다. 그는 다급히 뒤로 점프해 피하는 것도 모자라, 검면을 내려서야 겨우 막아냈다.
청명한 금속음 뒤로 범석이 주변을 휘휘 돌며 조심스러운 움직임을 보였다.
‘휴~ 만만치 않군. 역시 자키드 씨다워. 잘못 하다가는 내가 당하겠어. 이거 괜히 충고를 늘어놓았나?’
수많은 시간 동안 게임을 해온 범석은 다양한 직업을 거치며, 수많은 전투법을 익혀왔다. 그 실력은 단연 이 게임에서도 으뜸으로, 이제 신체능력까지 수준급에 올라선 이상 누구도 범석을 이길 자는 없었다. 하지만 검술과 평지 전에 국한한다면 얘기가 달라졌다.
걸출한 검술가인 렘란트의 밑에서 수십 년간 수련한 자키드도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그 긴 세월 동안 전장에서 익히 전투 센스가 어디를 가지는 않지만, 훌륭한 스승 밑에서 체계적인 교육을 받은 일도 무시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범석은 결코 질 마음이 없었다.
지금까지 자키드에게 떨어놓은 오만이 있는데, 여기서 당한다면 그야말로 개망신이었다. 죽는 한이 있어도 패배는 허락할 수 없었다.
그는 바로 땅을 박차고 자키드를 향해 내달렸다.
창. 차창. 깡. 창창.
여러 번의 교전 직후 서로가 거리를 벌리며 떨어지자, 범석과 자키드의 두 눈이 경기장 서쪽으로 향해졌다. 본진의 상황을 살피기 위해서였다. 이들은 지금도 철교에서 밀리고 밀리는 공방전을 벌이며 치열한 접전을 벌여나가고 있었다.
흐뭇하게 웃은 자키드가 범석을 바라봤다.
“이거 우리 싸움이 어이없이 끝날 공산은 없겠는데. 저리 대등한 대결을 벌이니, 저들 중 누구도 우리에게 올 아이들은 없겠어.”
“대등하지 않아도 안 옵니다.”
“그게 무슨 소리지?”
범석이 해쭉 웃었다. 아직 그는 스승인 렘란트의 의도를 모르고 있었던 탓이다.
자키드가 자신에 패배당하기를 원하는데, 그가 다른 다크 하이에나즈 검투사를 이쪽으로 투입할 리가 없었다. 그리고 범석도 이쪽으로 올 갓즈나이츠 검투사가 있다면 당장에 막을 터였다. 뭐 승리할 기회를 이런 식으로 놓친다면 홈 팬들이 불만을 토로할지도 모르겠지만, 막상 상황을 보니 괜찮을 듯 보였다.
지금 스탠드를 가득 메운 관중은 자신과 자키드의 일대일 승부의 결과를 목말라하듯 초조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양 팀 감독들이 우리를 신뢰하고, 팬들도 이 싸움의 결말을 보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자키드가 스텐드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주억거렸다. 범석이 느낀 팬들의 시선을 그라고 모를 리가 없었다. 지금 관중은 입도 뻥긋하지 못한 만큼 긴장된 상태였다.
“그렇군. 그럼 팬들의 성원에 보답해야겠지? 얼마 시간이 남지 않았다고.”
“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그럼 다시 갑니다.”
세차게 발을 구른 범석이 엇박자로 스텝을 밟으며 자키드에게 접근했다. 이런 기교에도 자키드는 안면을 향해 날아오는 카타나를 가볍게 튕겨내고는, 그대로 그와의 거리를 좁히며 종횡무진 검을 휘둘러댔다.
“헉헉. 아. 이거 미치겠네.”
연달아 검을 맞부딪친 범석이 잠시 뒤로 물러나 심호흡을 몰아쉬었다. 장시간 이어온 격렬한 싸움이 계속 이어지자 심신이 지친 탓이다.
이런 상태라면 실수가 튀어나올 수도 있는 일, 극히 조심해야 했다. 그와 자키드의 승부는 사소한 판단오류에 결정이 나게 되었다.
그만큼 현재 이들의 실력은 우열을 쉽게 판가람 낼 수 없을 만큼 대등했다.
자키드도 크게 지쳤는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범석에게 달려들었다.
“자. 시간 없다. 빨리 와라.”
곧 둘의 신형이 교차하며 여러 번의 충돌이 벌어졌다. 추호도 밀리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힘껏 검을 휘둘러댔지만, 체력적인 한계는 어쩔 수 없는지 검격에서 느슨함이 묻어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와중에 자키드는 득의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체력적으로 우위에 있는 자신이 좀 더 원활한 공격을 수행할 수 있다고 생각한 탓이다.
“범석아. 아직 멀었구나. 아무래도 어미 젖도 더 먹고 와야겠다. 하하하.”
그래 봐야 피차일반이었다. 무리한 공격을 지속해서 퍼부었던 자키드도 만만치 않게 지쳐있었다.
“잘난 체하지 마십시오. 지금 입에서 똥물이 기어나오고 있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습니다.”
허공에서 충돌한 검에서 불똥이 튀겼다. 이미 이들의 검은 헤벌쭉 웃고 있는 노인의 입처럼 잔뜩 이빨이 빠져있었다.
이에 자키드가 예비용 검을 꺼낼 만도 했지만, 여전히 지금의 검을 고집했다. 창을 내려놓은 범석이 예비용 검이 있을 리가 만무했던 것이다.
가뜩이나 그가 불리함을 안고 싸우는데, 여기서 자신이 검까지 바꾼다면 수치를 스스로 자처하는 일이었다.
자키드가 잔뜩 어깨에 힘을 주고 힘껏 검을 휘둘렀다. 손상이 심한 범석의 검을 부러뜨려 이번 승부를 결정지으려는 것이다.
괴이한 파공음을 들은 범석이 급격하게 스텝을 밟아 옆으로 비켜났다. 정면에서 맞선다면 검이 두 동강 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는 상체를 스쳐 지나가는 묘한 감각에 삐쭉 머리가 섰다. 정말 힘만큼은 인정해 줄 수밖에 없었다.
차. 차창. 창. 깡.
이 둘의 싸움은 절정에 다다르고 있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범석과 자키드는 자신의 명예를 위해 마지막 남은 힘을 끌어내어 격전을 벌여나갔다. 검이 몸을 스치는 위기의 순간 여러 번. 하지만 이들은 절대 물러나지 않았다. 어떻게든 이번 승부를 여기서 끝을 내려는 모양이었다.
“자. 여기서 끝을 내자!”
“저도 원하는 바입니다!”
무리하게 검을 내리치는 자키드를 본 범석이 안쪽을 파고들며 몸통 박치기를 시도했다. 그의 팔뚝이 등을 강하게 내리찍었지만, 범석은 상체만 약간 내릴 뿐, 그대로 낮은 무게중심을 이용해 그대로 밀어젖혔다.
이에 자키드가 뒷걸음질쳤지만, 그 와중에도 힘껏 허리를 젖히며 또다시 그를 향해 검을 내질렀다. 하지만 이런 근접 상태에서 제대로 검격이 나올 리가 없었다. 바로 범석의 카타나에 여지없이 가로막혔다.
“야! 안 떨어져!”
소리를 내지른 자키드가 칼자루를 잡은 한쪽 손을 놓은 다음 범석의 어깨를 부여잡았다. 불리한 무게 중심으로 인한 힘의 밀림을 해결함과 동시에 공격을 실행하기 위해서였다. 곧 그는 범석의 어깨를 내리누르며 한 손에 든 장검을 깊게 찔러넣었다.
‘와, 왔다. 기회다!’
위험하지만 확실히 기회였다. 검을 한 손으로 집었다는 것은, 곧 파워의 약화였다. 그는 슬며시 뒤로 물러나 공격을 피하고는 바로 자키드의 칼자루를 양손으로 움켜잡았다. 그리고 바로 몸을 돌리며 그대로 짧게 되치기를 해버렸다.
“크아아악!”
이내 발이 미끄러지며 자키드가 바닥에 굴렀다. 중심을 잡아보려고 했지만, 몸도 지치고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터라 미처 대비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범석의 체술이 빛을 발하는 순간. 그는 늦을세라 그대로 바닥에 엎어져 있던 자키드의 목줄기를 주저 없이 베어 버렸다.
와아아아! 와아아아!
초조한 마음으로 결과를 기다리고 있던 홈 팬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환호를 보냈다. 지금 남은 시간은 고작 1분여. 양 팀이 본진이 상당수 남아있던 터라 무승부는 기정사실이었지만, 더 큰 승리를 범석이 얻어낸 것이다.
일대일로 자키드를 쓰러뜨렸다는 것은 그가 자신이 최강임을 증명했다는 뜻이었다. 이제 리마시티 홈팬들은 세계 최강의 검투사를 보유하게 되었다.
범석이 서서히 얼굴과 몸을 경직시켜가는 자키드를 바라보고는 팬들을 향해 주먹 쥔 팔을 번쩍 들어 올렸다. 패배로 말미암아 절망감에 빠진 그에게는 미안한 노릇이었지만, 승자의 즐거움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는 곧 경기가 끝이 나자, 무승부를 이룬 휘하 검투사들과 함께 의기양양 더그아웃으로 돌아갔다.
============================ 작품 후기 ============================
역시 우리나라 양궁은 최강입니다. 다른 나라가 근래에 급격히 실력을 좁혀와 걱정했는데, 기우인듯 보이는 군요. 이 상태로 간다면 금메달 네개도 무리가 아닐 듯 보입니다. 하하하.
그럼 모두들 즐거운 하루 되시고요. 전 내일 또찾아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