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rfect World RAW novel - Chapter 41
41화
8월 중순의 리마시티시민체육공원. 아침부터 찌던 날씨로 운동장이 후끈 달아오르고 있었다. 바람 한 점 없던 탓에 인공 조성된 숲은 고요하기 이를 데가 없었고, 근처 호수에는 잔물결하나 일지 않았다. 간혹 보이는 건물사이에는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며 작금의 더위를 일깨워 주었고, 도로를 따라 산보를 하는 노인들의 이마에는 구슬땀이 흥건히 맺혀 있었다.
“자자. 훈련에 집중하자.”
GA컵이 끝이 나고 사흘 만에 훈련에 참가한 갓즈나이츠팀은 해이한 분위기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더운 날씨와 시민공원 내 구경나온 시민들 때문이기도 하지만 최근에 팀 내에 부는 트레이드 열풍이 크게 작용해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이대로 두면 가을에 열릴 에이번드 세미프로 대회에 큰 지장이 일을 터,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물론 워낙 작은 대회이기에 우승을 해봤자 큰돈을 벌지는 못하지만, 내년 초봄에 열릴 승강토너먼트로 가는 길목에 열리는 대회라 집중할 필요가 있었다. 세미프로대회에 나오는 모든 팀들이 승강토너먼트에서 갓즈나이츠팀과 격돌한 팀이었기에 승강여부를 가늠하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결국 이대로 안 되겠다 싶은 범석이 축 늘어져있는 금발의 한 엘프를 바라봤다.
“스테파니. 이리 와봐.”
스테파니가 들고 있던 청룡도를 내리고는 그에게 다가왔다.
“네. 무슨 일이죠.”
“이적 건 때문에 그러는데 나랑 잠시 얘기 좀 나누자.”
그 말에 그녀의 얼굴이 화사하게 피어났다. 프로팀에서 이적이 왔다는 얘기는 언뜻 들었는데, 범석이 그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아, 여간 걱정이 아니었다.
사실 프로검투사와는 달리 아마추어검투사는 영입이 아주 간단했다. 복잡한 프로검투협회의 규약에 얽매이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 사회적 통념과 민법을 따르기 때문이다. 보통은 보따리 싸서 그냥 팀을 떠나면 되었고, 계약이 걸렸다고 한다면 해지 시 위로금조로 계약금의 두 배만 물어주면 되었다.
예를 들어서 조기 축구회를 다니던 어떤 아저씨가 이사를 이유로 부득이하게 팀을 떠나게 됐다. 그런데 소속 조기 축구회에서 팀 전력이 떨어진다고 그 사람을 이사 가지 못하도록 막을 수없는 이치와 동일했다.
하지만 그래도 상도의라는 것이 있었다. 만약 프로팀에서 새미프로를 표방하는 팀의 선수를 무리하게 데려간다면, 돈을 주고 선수들을 키워나는 새미프로팀으로서는 억울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프로연맹과 아마추어연맹은 이런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이런 도리에 어긋나는 이적을 시행하는 프로팀에게 행정적 불이익을 주는 조항을 마련하고 있었다.
이에 스테파니도 어지간해서는 임의대로 프로팀으로 옮겨가지 못했다.
“호, 혹시 저를 이적 시켜 주실 건가요?”
“으음. 그럴 생각이야. 총 3명에게 이적 제의가 들어왔는데, 모두를 보내 줄 거야. 다들 우리 팀에서 뛰는 목적이 바로 프로로 가기 위해서잖아. 좋은 기회가 생겼는데 내가 앞길을 막아서야 쓰겠냐.”
스테파니가 곧바로 허리를 90도로 숙였다. 전에 뛰던 팀이 강등을 한 후 근 3년간을 아마추어에서만 뛰었다. 이제 그가 허락을 했으니 프로가 되어 주인에게 면을 세울 수가 있게 되었다.
“범석님. 고맙습니다.”
고개를 주억인 범석이 주머니에 든 명함 몇 장을 꺼내 뒤적였다. 그리고 그 중 하나를 골라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바로 데블 스네이크 검투사팀의 트레이드 담당자의 명함이었다.
“그런데 연락이 온 프로팀이 한 곳 뿐이다. 여러 팀에서 이적 제의가 들어왔다고 뉘앙스를 풍겨났는데, 웬만큼만 튕기고 사인해라. 여기 아니면 갈 데가 없다. 그렇다고 먼저 연락하지는 말고. 내가 이적제의를 수락하면 바로 연락이 갈 테니, 그 때 이야기를 나누도록 해.”
“네. 알겠어요. 정말 감사드려요.”
“그래. 가봐.”
스테파니가 횅하니 운동 한편에 놓여있는 자신의 가방 쪽으로 달려갔다. 슈트를 입고 있던 탓에 명함을 따로 보관할 장소가 없었던 것이다. 훈련을 받다가 잊어버리면 그만큼 곤란한 일도 없었다.
따르릉. 따르릉.
흐뭇하게 스테파니의 활기찬 뒷모습을 바라보던 범석이 품안에서 울려대는 전자수첩을 꺼내들었다. 간이 액정화면에 특정 전화번호가 찍혀있는 것으로 보아, 전화가 온 모양이었다. 다만 생소한 번호라 범석으로서는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는 곧 수첩을 열어 통신용 홀로그램 영상을 띄웠다.
“여보세요. 누구십니까?”
영상에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30대쯤 보이는 호리호리한 사내였다. 그는 범석을 보자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 안녕하십니까? 저는 줄리앙이라고 합니다. 혹시 오범석씨 되십니까?
“네. 맞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시죠?”
– 사실 이적사항에 대해 한 가지 문의드릴 것이 있어서 말입니다.
범석이 은근히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 같아서는 그 어떤 이적문의도 달갑지 않았다. 이제 곧 세 명의 결원이 생기는 마당에 또 다른 팀원이 빠져나간다면 팀 분위기에 큰 악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대로 끊어버릴 수도 없는 일, 일단 들어보기로 했다. 자신과 오스칼을 비롯한 소유 엘프의 이적문의가 대부분이었기에, 이쪽이라면 바로 거절할 수가 있었다.
“어떤 이적 사항 말입니까?”
– 팀 인터넷 사이트에서 보니까 엠마양이 방출로 되어있는데 확실한 내용인지 알고 싶습니다.
엠마라면 흑사회 일원으로 자신의 팀에 들어온 여인이었다. 중간에 흑사회와 트러블이 있어 범석이 계약을 파기시키고 방출명단에 올려놓았다. 즉 아무런 조건 없이 얼마든지 데려갈 수 있다는 뜻이었다.
“엠마양에 관한 일은 저와 상의할 것 없이 바로 본인과 대화하시면 됩니다. 확인하셨다시피 방출명단에 올랐을 뿐만이 아니라, 얼마 전에 저희 팀과 계약관계도 종료되었습니다. 그럼 전 이만.”
통신을 끊으려는 순간 줄리앙이 손을 뻗었다.
– 자, 잠깐만요. 아직 용건이 남았습니다.
“아니 방금 전에 말씀 드렸지 않습니까? 그녀는 맘대로 데려가셔도 됩니다. 아무런 뒤탈이 없다고요.”
– 그게 데려가려고 하려는 것이 아니라, 범석씨께 몇 가지 궁금한 사항이 있어서 이렇게 전화를 드린 겁니다. 저는 사실 청년기업연합회의 회원입니다.
“청년기업연합회? 그런 검투사팀도 있습니까?”
– 하하하. 검투사팀이 아닙니다. 그저 젊은 경제인 연합회 정도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범석이 이마에 굵직한 근육이 꿈틀거렸다. 바빠 죽겠고만 별 쓰잘데기 없는 것들이 전화를 걸어 신경을 긁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경제하시는 양반이 왜 저한테 전화를 해쌌는 겁니까? 그리고 엠마의 이적이 댁들이랑 무슨 상관이라는 것이고요?”
잠시 곤욕스런 표정을 줄리앙이 이내 입을 열었다.
– 흐음. 얼마 전에 범석님께서 몇몇 기업체와 공공기관에서 지원금을 받으신 적이 있으시죠?
범석의 표정이 처참하게 구겨졌다. 그 사실을 안다는 것은 흑사회의 회원이라는 뜻. 그자들과는 더 이상 말도 섞기 싫었다.
“야! 이 섞을 놈아! 다시 돌려줬잖아! 나 니들 흑사회랑 얼굴 마주하기도 싫거든. 다시는 연락하지 마라! 또 연락하면 쫓아가서 반쯤 죽여 놓는다! 알았어! 몰랐어!”
– 자, 잠깐 뭔가 오해를 하시는 모양인데, 저희는 흑사회가 아닙니다.
“그럼 누군데!”
– 말씀 드렸지 않습니까. 청년기업연합회라고요. 절대 흑사회와 관계 있는 곳이 아닙니다.
범석이 길게 심호흡을 하고는 심기를 안정시켰다. 격분한 나머지 너무 막나갔다고 생각한 탓이다.
“아. 그래요? 그런데 왜 그 사실을 어떻게 알고 꺼내드는 겁니까?”
– 내부고발로 알게 된 사실이었습니다. 서류도 없이 자금의 이동이 있자, 이를 이상히 여긴 어느 의식 있는 기업체 사원이 저희들에게 알려왔습니다.
범석이 속으로 비웃음을 흘려댔다. 그 사실을 믿기에는 자신이 한심하지가 않은 것이다. 내부고발을 하려면 경찰등 공공기관이나 언론사에다 하면 되지 어디 요상한 이름딱지가 붙은 단체에 할 필요가 없었다. 아무래도 뭔가 시커먼 속내가 풀풀 풍겨오고 있었다.
“아. 그럼 더 이상 할 말이 없겠습니다. 저는 그 돈을 모두 돌려줬으니, 아무런 잘못도 없습니다. 그러고 경찰도 아닌 댁들하고 그 일로 대화할 필요성도 못 느낍니다. 이제 됐습니까?”
– 뭔가 계속 오해를 하시는데, 저희가 무슨 추궁을 하자고 이리 전화 드린 것이 아닙니다. 아까 말한 대로 그저 몇 가지 질문을 드리고자한 것뿐입니다.
확실히 무슨 꿍꿍이가 있는 듯 보였다. 하지만 이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일단 들어는 봐야했다.
“말씀하세요. 대답할 수 있는 것이라면 하죠.”
– 양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먼저 왜 엠마양이 그 팀에 붙어있는지를 묻고 싶습니다. 보아하니 흑사회와 사이도 좋지 않으신 것 같은데 말입니다.
“뭐긴요. 일단 엠마는 우리 갓즈나이츠의 팀원. 특별히 연봉이나 식대가 나가는 것도 아니니 인간의 도리 상 매정하게 쫓아 보내기란 힘들죠.”
– 아 예. 무슨 뜻인 줄 알겠습니다. 그럼 두 번째 질문을 드리죠. 지난 GA컵 4차전에서 그녀를 경기에 출전시켰는데, 그 연유가 뭡니까?
범석이 콧방귀를 진하게 뿜어댔다. 팀 내 일을 난생 처음 보는 작자가 관여하려고 하니 기분이 나빠진 탓이다. 하지만 얘기 못할 것도 없으니, 바로 대답했다.
“당시 엠마는 4, 5라운드에 출전했는데, 사실 그 라운드는 포기한 라운드였습니다. 그러니 아무나 나가도 상관없기에 내보낸 것뿐입니다.”
– 아 그렇군요. 그럼 특별히 흑사회를 위해, 그런 전략을 취하신 것은 아니라는 얘기군요.
“저기요. 부탁인데요. 걔들 얘기 좀 꺼내지 말아주시겠습니까? 기분 상당히 나쁘거든요.”
– 아 예 죄송합니다. 그럼 마지막으로 한 가지 질문을 더 드리겠습니다. 이대로 엠마양을 계속 팀에 두실 예정입니까?
범석이 머리를 긁적이며 입을 다셨다. 그 점은 정말 고민이었다.
“글쎄요. 팀의 분위기를 생각하면 나가줬으면 하는데, 계속 아무 말도 없이 남아있으니…….. 쫓아내기도 좀 그렇고. 하여간 그 일 때문에 저도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하지만 범석씨가 좀 과감히 나갈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보아하니 프로팀을 목표로 하시는데, 그리 정에 매달려서야 되겠습니까.
‘호오. 요것 봐라.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내.’
조언을 하는 듯 보였지만, 실상 엠마를 내쫓으라는 수작처럼 보였다. 물론 오지랖이 넓은 놈일 수도 있지만, 그렇기에는 그 전의 질문들이 너무 구차했다.
하지만 범석은 결코 티를 내지 않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래서 언젠가는 우리팀원 모두를 제 연인들만으로 채울 겁니다. 그럼 타 팀으로 이적 갈 이유도 없으니, 인정에 메일 필요가 없죠. 하하하.”
– 하하하. 재미있는 농담이시군요.
“하하하. 농담 아닙니다.”
한 동안 이들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뭔가 줄리앙이 할 말이 남았는지 입을 꿈틀거렸지만 도저히 꺼내지를 못하고 있었다. 범석의 예상으로는 아마 엠마를 쫓아내달라는 부탁이 아닐까 생각됐다. 하지만 워낙 자신이 두루뭉술하게 행동한 터라, 그로서도 어떻게 말해야할지 모를 것이었다.
지금까지 자신이 한 말을 언뜻 들으면 엠마를 내보낼 듯한 인상을 풍기기는 했지만, 다시 따져보면 계속 이대로 지내겠다는 말처럼도 해석할 수 있었다.
– 그, 그럼 이만 끊겠습니다. 질문에 답변해 주셔서 참으로 감사합니다.
아무래도 지금은 일단 뒤로 물러나는 듯 보였다. 범석도 바라는 바였기에 흔쾌히 쫓아 보내기로 했다.
“감사는 뭘.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바로 전자수첩을 닫은 범석이 멀리 떨어져서 검을 휘두르는 엠마를 바라봤다. 요 작자들이 뭐하는 놈들이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이름 제법 거창하니,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었다.
============================ 작품 후기 ============================
퍼펙월 연재를 한 주에 두번으로 올릴까 합니다. 비축분도 쌓이고 여유가 생겨서 가능할 듯 보입니다. 많은 성원 부탁드리고요. 뜻깊은 휴일 보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