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rfect World RAW novel - Chapter 421
423화
“야! 아론! 너 도대체 뭐하는 놈이야!”
범석이 아론 안에 탑승하자마자, 대뜸 소리치고 있었다. 오늘 단단히 버릇을 고치려는 요량이었다.
아론이 홀로그램 화면으로 자신을 엘프화 시킨 다음 범석을 향해 긴장 어린 시선을 던졌다. 이적 협상이면 으레 늦을 줄 알았는데, 오늘은 무슨 연유인지 너무 일찍 나왔다. 아직 아론은 에이션트 워리어즈 훈련 캠프 전역에 뿌려놓은 초소용 버드카메라를 모두 회수도 못 한 상태였다.
– 주, 주인님 일찍 오셨네요. 호호호.
“일찍이나 마나! 너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야!”
아론이 시선을 피하며 시치미를 뚝 뗐다.
– 그게 무슨 말씀이신가요? 통 주인님께서 화내시는 영문을 모르겠네요.
“야! 내가 못 봤을 것 같아! 조용히 얘기한 때 솔직히 불어라!”
– 그다지 조용하시지는 않은데요.
“뭐얏! 너 오늘 당장 포맷 당해볼래!”
다급히 어색한 미소를 입가에 건 아론이 슬그머니 범석에게 다가섰다.
– 아니. 특별히 그렇다는 얘기가 아니라. 너무 화를 내시면 건강에 좋지 못하니, 진정하시라는 뜻으로 한 말이었죠.
범석이 죽일 듯이 아론을 쳐다보더니, 톤을 낮춰 말했다.
“좋다. 일단 네 마지막 소원이니, 조용히 말하지.”
– 아니. 주인님. 마지막 소원이라뇨? 그런 섭섭한 말씀을 하시면 제가 놀라잖아요.
“너 놀라라고 한 말 아니다. 이제는 못 참겠으니, 포맷해서 네 성격을 새로 설정하려고 한다. 다 네가 자초한 일이니, 날 원망하지 마라.”
아론이 대뜸 울상을 짓더니 흐느끼기 시작했다. 범석이 여인에게 약하니, 이 점을 파고들 요량이었다.
– 흑흑. 주인님 너무해요. 제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다고 그러세요. 전 주인님을 위해 충성을 다한 죄밖에 없어요. 흑흑흑.
하지만 아론의 의도는 전혀 통하지 않았다. 비록 그가 여인의 모습으로 있다고 하나, 기계인지 뻔히 아는 상황에서 범석이 넘어갈 리가 없었다.
“쇼하지 마라. 빤히 네 수작을 모를 리가 없으니까.”
– 하지만 전 정말 잘못한 것이 없다고요. 흑흑.
“잘못을 안 해? 너 죽고 싶냐?”
– 정말 없는 걸 어떻게 해요?
“그럼 아까 내 위를 스치고 지나간 날벌레는 뭐야?”
아론이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보지 못하기를 간절히 바랐는데 역시나 발각된 모양이었다. 갑작스럽게 그가 건물을 빠져나오는 바람에 화급히 되돌린다는 것이 그만 한 대의 버드카메라를 그의 머리 위로 날리고 말았다.
그래도 실토할 수는 없었다. 저리 화가 나 있으니, 사실대로 고하면 그대로 포맷을 당할 수 있었다. 최대한 발뺌을 하는 것이 신상에 좋았다. 다행히 좀 거리가 멀었기에, 변명의 여지는 남아 있었다.
– 혹시 그냥 날벌레가 아닐까요?
“이 겨울에 날벌레가 어디에 있어!”
– 뭐. 그야 그렇지만, 따뜻한 건물 안에서 살아남는 놈이 있을 수 있잖아요. 특히나 여기는 시설이 좋고, 항시 난방되는 장소가 많아 충분히 곤충이 살아있을 수 있다고요.
“야! 모기나 그렇지! 다른 놈들이 어떻게 살아남아!”
– 그럼 모기겠네요. 모기도 곤충이잖아요.
“자꾸 말장난 칠래? 모기가 그 거리에 있었으니 내 눈에 띄었겠냐! 너 모기가 얼마만 한지 모르는 것은 아니겠지?”
– 그, 그렇기는 하네요. 그럼 바퀴벌레가 아니었을까요? 바퀴벌레도 제법 크잖아요. 겨울에도 살아남고요.
하긴 바퀴벌레도 겨울에 발견에 된다는 말을 어디서 언뜻 듣기는 했었다. 하지만 범석이 본 놈은 바퀴벌레와 약간 생김새가 달랐다. 놈처럼 직선형이 아니라 좀 더 동그란 놈이었다.
범석이 천천히 시스템 조작 판 쪽으로 다가갔다. 저장 데이터만 확인하면 될 일이니, 아론과 쓸데없는 입씨름을 할 필요가 없었다.
“뭐. 확인해보면 알 일이지. 만약에 내 생각이 맞았다면 넌 오늘 제삿날이 줄이나 알아.”
아론이 긴장한 시선을 보내는 가운데, 범석이 시스템 내 모든 영상파일을 불러와 그 내용을 살폈다. 하지만 암만 찾아봐도 의심이 가는 영상자료는 찾을 수 없었다. 간혹 주차하기 위해 후면을 살펴보거나, 주행 시 근처를 지나는 차량의 모습이 담긴 파일이 전부였을 뿐이었다.
‘이 자식이 나를 바보로 아네. 아예 삭제해버린 모양이군. 하지만 못 찾을 내가 아니지.’
범석이 즉각 복구 프로그램을 불러왔다. 삭제한 파일을 찾기 위해서였다. 물론 로우 포맷을 해버렸으면 전문가가 직접 손을 보기 전에는 찾지 못하지만, 그랬다가는 아론의 운영시스템까지 같이 날아가 버리게 되었다. 빠른 포맷만 해도 아론은 세상과 하직인데, 그딴 작업을 했을 리가 없었다.
그가 곧이어 화면 상에 나열되는 삭제된 영상 파일을 보고는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오늘 날짜에 자신이 제이드와 만나는 시간대의 파일이 수도 없이 시야에 보이고 있었다.
그는 ‘에이션트 워리어즈 실내 훈련 캠프에서001.xxx’라는 영상 파일을 화면 상에 띄우고는 비릿하게 웃었다. 멀리서 한 붉은 머리칼의 엘프 하나가 몸매가 드러날 정도로 꽉 끼는 훈련복을 입고, 열심히 검술 수련하는 모습이 보이고 있던 탓이다.
“아론. 이제 변명하지 못하겠지?”
아론이 얼굴을 시퍼렇게 만들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범석이 복구 프로그램까지 만질 줄은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아론은 그가 여자만 후리러 다니는 난봉꾼이줄 알았지, 이런 난이도 있는 시스템 체크를 할 수 있는 줄 몰랐다.
아론이 곧 무릎을 꿇고 범석에게 싹싹 빌었다.
– 주, 주인님. 용서해 주세요. 제가 잘못했어요. 흑흑.
“용서? 네가 사실대로 고해바쳤다면 잘하면 해줬을지도 모르겠지. 하지만 넌 방금 주인인 나를 속였다. 이 점 때문에 절대 용서 못 하겠다.”
– 흑흑. 하지만 저도 어쩔 수 없었다고요.
“뭐가 어쩔 수 없어!”
– 흑흑. 어제 기자들을 피하기 위해 중앙 교통관제 시스템을 이용했잖아요. 놈에게 제공할 뇌물이 필요했다고요.
납득이 갈만한 변이었지만, 범석은 전혀 용서할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그랬다면 자신이 안으로 들어와서 소리치는 시점에서, 솔직히 대답했어야 옳았다. 분명히 살기 위해 늘어놓는 변이라고 생각됐다.
“흐흐흐. 아론 그걸 변명이라고 하는 거냐? 좀 더 그럴싸하게 해야 내가 믿지. 흐흐흐.”
그 말에 아론이 절망감에 빠져 그만 바닥에 무릎 꿇었다. 그러나 태초의 에니악이 그를 도왔는지, 범석은 길로틴 선언을 하지 못한 채 다른 곳에 시선을 빼앗기고야 말았다. 바로 조금 전 그가 띄어놓은 영상에서 해괴한 장면이 보였기 때문이다.
‘도, 도대체 이게 뭐야! 저 애가 왜 이렇게 열심히 훈련해? 말도 안 돼!’
그가 놀란 이유는 영상에 찍힌 엘프가 다름 아닌 프리시카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현재 정신 문제로 숙소에서 두문불출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있었다. 저리 열심히 훈련에 매진하다니, 범석으로서는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곧 납득이 간 듯 편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긴 우리 팀에서 영입할지도 모른다는 기사가 나왔으니, 저리 열심이겠지. 또 제이드 씨가 그녀에게 판매한다고 살짝 귀띔해줬을 수도 있는 일이고. 생각해 보니 별일 아니네.”
그 말을 옆에서 엿들은 아론이 간사한 표정을 짓고는 황급히 범석에게 다가갔다. 저리 결론을 지어버리면 그다음은 자신의 처형식이었다. 어떻게든 그의 신경 다른 곳으로 돌릴 필요가 있었다.
– 전 아니라고 봐요. 뭔가 확실히 이상해요.
“뭐가 이상하다는 건데?”
– 아니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아까 뉴스에서 봤는데, 주인님께서 기자들 앞에서 돈이 없어서 프리시카를 영입하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런데 그녀가 충격을 받지 않았다고요? 그건 말도 안 되죠. 최소한 오늘 하루는 훈련하지 말았어야 정상이에요.
범석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말을 들어보니 좀 이상해 보였다. 프리시카가 자신이 아침 녘에 기자들과 인터뷰한 내용을 TV에서 봤다면, 저리 멀쩡할 리가 없었다.
“혹시 훈련에 매진하고 있어서 뉴스를 못 본 것 아닐까?”
– 그건 더욱 말이 안 돼죠.
“어째서?”
– 제가 살펴본 바로는 지금 에이션트 워리어즈 숙소에 머물고 있는 엘프가 자그마치 120명이라고요. 120명. 그런데 그녀들 모두가 뉴스를 보지 못했다는 것이 말이 되나요?
하긴 그만한 팀원들이 있다면 누군가 하나쯤은 뉴스를 접했을 테고, 그럼 프리시카의 귀까지 들어갔어야 옳았다. 특히나 이번 뉴스는 프리시카 인생의 중대한 영향을 미칠 소식이었다. 동료가 모른척할 리가 만무했다.
“그렇기는 하네. 하지만 제이드 씨가 뉴스 소식을 접하고 프리시카에게 알려줬을지도 모르잖아? 그는 우리 팀에 부채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 정말 그런가요?
“확실히 맞다. 너는 괜한 쓸데없는 일에…….”
순간 범석이 말문을 잃어버렸다. 아까 제이드를 만났을 당시, 그는 중요한 일을 처리하느라 자신과 카렌의 염문설을 알지 못했다고 했다. 즉 이번 소식으로 염려하고 있을 프리시카에게 그 어떤 말도 했을 리가 없다는 소리였다.
‘무, 뭐야? 전혀 앞뒤가 안 맞잖아. 혹시 우리 팀에 부채가 없다는 사실을 진작부터 프리시카에게 말해줬나?’
하지만 범석이 고개를 흔들어댔다. 그래도 말이 안 되기는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언론을 통해 프리시카를 영입할 수 없다는 얘기를 했으니, 어쨌거나 그 소식을 접한 그녀는 근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럼 당연지사 확인 차 제이드에게 달려갔을 터였고, 그럼 그도 자신과 카렌의 염문설을 알고 있었어야 옳았다.
그는 등골에 얼음장을 퍼붓는 느낌을 받을 정도로 오싹함을 느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썅! 뭔가 있다!”
– 그렇죠. 확실히 뭔가 있죠?
“그래. 제이드 그 작자가 지금 나를 속이고 있는 것이 분명해!”
아론이 환희에 찬 표정으로 태초의 에니악을 향해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조상신의 가호로 오늘 자신이 살게 됐기 때문이다. 범석은 욱하는 성미가 있지만, 공에 대해서는 확실히 보답하는 합당한 면도 지니고 있었다. 자신으로 에이션트 워리어즈의 암수가 드러났으니, 이제 삶이 연장되었다고 볼 수 있었다.
그 사이 범석은 씩씩거리며 아론 내부를 돌아다녔다. 제이드가 어떤 수작을 펼치는지 유추해 볼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오늘 소식을 프리시카가 접하고도, 아무런 동요가 없다는 것은 일단 두 가지 의미가 있어.’
첫 번째는 바로 그녀가 갓즈나이츠로 오지 않기로 미리부터 못 박혀 있다는 점이었다. 아니었다면 오늘 소식을 접하고도 제이드에게 확인하러 가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그만큼 오늘 나온 뉴스는 프리시카에게 중대한 사건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는 근자에 프리시카가 다른 주인을 모시게 된다는 점이었다. 그녀가 저리 열심히 훈련에 매진한다는 것은, 정신적인 문제를 해소할 만한 이유가 있다는 뜻. 주인을 얻는 일 말고는 다른 경우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럼 결론은 제이드와 그녀 사이에 뭔가 오고 갔다는 얘기군. 가령 나를 속이는데 도움을 준다면, 주인을 얻게 해준다는 것 말이야. 아득. 프리시카 이것이 제이드와 작당해서 나를 물 먹이려고 했다. 이거지.”
범석이 창밖으로 보이는 에이션트 워리어즈 훈련캠프를 향해 날카로운 시선을 날렸다. 어쩐지 아까 제이드의 행동이 이상하다고 했다.
프리시카의 몸값으로 말도 안 되는 금액을 제시하는가 하면, 일주일이라는 시간을 자신에게서 빼앗아 가려고 했다. 분명 자신의 시선을 프리시카에게 돌리게 한 다음, 그 사이 다른 S급 검투사를 영입하려 했음이 분명했다.
그가 프리시카를 사기 위해서는 계속 자금을 보유하고 있어야 하니, 다른 S급 검투사를 구매할 수 없었다.
‘그런데 에이션트 워리어즈가 노리는 바가 대체 뭐야!’
대략 프리시카를 이용한 수작이 뭔지는 알겠지만, 범석으로서는 에이션트 워리어즈가 왜 그런 일을 벌이는지 도통 이해가 안 갔다. S급 검투사를 하나를 구매하는 일도 장난은 아닌데, 그들이 노리는 S급 검투사는 최소 둘 이상이었다.
반드시 프리시카를 팔아 총알을 마련해놓을 필요가 있었다. 아니라면 채플린 위스퍼의 돈지랄을 막아낼 재간이 없었다.
“분명히 프리시카는 개인 회사 성격의 검투 팀에게 판매되지는 않을 거야. 우리 말고는 프리시카를 사서 득을 볼 팀이 없으니까. 다들 에어리어 리그와 와이드리그에 노는데, 5~6년 후면 노화가 찾아오는 그녀를 데려와서 뭘 어쩌겠어. 물론 센트럴 리그 팀인 블루 버드라면 가능성이 있지만, 렉스터 경감님은 그녀를 살만한 돈이 없어. 분명 다른 곳이야.”
그럼 두 가지의 가능성이 남았다. 하나는 돈 많은 재력가에게 개인적으로 판매하는 방법이고, 남은 한가지는 월드 워커 옥션 마켓에 가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중 하나를 꼽자면 후자일 공산이 컸다.
전자는 사적인 판매이기에 팀 내부에서 꺼릴 테고, 결정적으로 프리시카로서는 계약서 상에 항목을 기재하기 어려우니 신뢰하지 못할 터였다. 하지만 후자는 관례상 늘 해왔고 문서작업이 가능한 일이었기에, 팀과 프리시카 모두가 만족할 수 있었다. 문제는 그랬다가는 에이션트 워리어즈으로서는 영입자금을 이른 시일 안에 마련할 길이 없다는 것이다.
범석이 머리를 마구 긁적거렸다. 에이션트 워리어즈가 도무지 뭘 노리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그는 다시 아론의 시스템 조작 판넬로 다가갔다. 혹시나 또 다른 정보가 될만한 영상이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론! 조금 전에 삭제한 영상 모두 되살리고, 모든 화면을 총동원해서 띄워.”
– 네. 알겠어요.
이내 아론이 삭제된 파일을 모두 복구하고는 모든 영사장치를 통해 공중으로 띄웠다. 대게가 엘프들의 일상이 담긴 영상으로 몇몇은 욕실에서 나신으로 목욕하는 모습과 옷을 갈아입는 장면이 몇몇 눈에 띄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날씨가 슬슬 풀리는 기미가 보이네요. 체감온도가 확실히 떨어졌습니다. 이 상태만 되도 좀 살만 하겠는데요.
그럼 모두들 더위 조심하시고요. 전 내일 또 찾아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