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rfect World RAW novel - Chapter 442
444화
따사로운 햇살이 내리쬐는 이른 봄날의 오후였다. 이날 리마시티 콜로세움을 찾은 범석은 검투사 대기실로 향하는 팀원들에게 작별을 고하고 홀로 복도를 따라, 맨 꼭대기 층으로 향했다.
오늘은 검투사로서 따라온 것이 아니라, 관객으로 이 자리를 찾은 탓이다. 월드컵 본선 개최지 선정 작업 때 푹 쉬었다고 마구잡이로 경기에 참여했던 탓에, 체력이 소진되어 오늘 본의 아니게 휴식을 취하게 되었다.
다행히 그동안 티엘라와 요시아가 팀 조직력을 잘 가다듬었고, 상대가 라카미의 이적으로 약팀으로 변모한 데절트 스콜피언즈였기에 안심이 되었다. 게다가 갓즈나이츠는 현재 목표한 승수를 상당 부분 쌓았기에, 이번 경기에서 패한다고 해도 그리 염려할 것이 없었다.
리그 29경기를 치른 지금 갓즈나이츠의 성적은 20승 5무 4패였다. 뭐 여전히 리그 5위를 달리고는 마찬가지이만, 8위인 볼케이노 파이어즈와의 승점 24점 차이를 유지하고 있었다.
앞으로 리그 경기가 9경기가 남았다는 점을 봤을 때, 목표인 7위는 무난히 달성하리라 보였다.
유리창 너머로 경기장의 전경이 보이는 VIP룸에 들어선 범석이 차분히 자리에 착석하고는 조용한 주변 분위기를 즐겼다.
‘프리시카를 살 충분한 자금을 마련했지만, 아직은 불안해.’
갓즈나이츠가 리그 7위에 머무르게 된다면 메인 스폰서인 채플린 전자로부터 총 6억 크랑을 받게 되어 있었다. 여기에 지난번에 월드컵 본선 개최권 로비과정에서 에이번드 정부로부터 받을 스폰이 상당했다.
당시 줄리앙 쪽 2표와 안젤라 계파, 리차드 계파를 설득하면서 16억을 받기로 했고, 마지막에 나머지 이브라힘 계파의 설득 과정에서 지대한 영향을 미치면서 추가로 13억 크랑을 받기로 해 총 29억 크랑의 스폰이 에이번드 정부로 부터 들어오게 되어 있었다.
덕분에 범석은 이번에 다가올 여름 이적 시장에서 퍼부을 자금을 최소 90억 크랑에 이르리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메인 스폰서, 정부 스폰서로 39억이 들어오고, 렌카의 ‘기원의 응답’을 사용할 테니 추가로 45억 크랑의 자금이 생겼다. 또한, 후반 시즌 일일 입장권 판매가 5억 크랑 이상으로 예상되고, 후반 시즌 시작 전에 팀 내에 남아있던 자금이 6억 크랑이 훨씬 넘었으니 추가로 12억가량의 자금이 더 플러스 되었다.
이 자금이라면 충분히 프리시카를 사고도 남을 터, 범석은 큰 근심을 덜었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미래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가 팔리는 장소는 월드 워커 옥션 마켓이라는 경매장. 어떤 미친 졸부 자식이 막대한 자금을 퍼부으며 그녀를 사가려고 한다면, 몸값은 천정부지로 오를 수가 있었다.
물론 프리시카는 보석이나 예술작품과 같이 오랫동안 그 가치를 보존되는 상품이 아니었기에 그 가능성은 무척 낮지만, 이에 대한 대비로 더욱 많은 자금을 확보해 놓고 있을 필요가 있었다.
“그러려면 리그 전 이외의 경기에서 좋은 성적으로 거두어야 해.”
리그 전 이외의 경기는 GA컵과 리그 컵을 뜻했다. 굳이 우승하지 못하더라도 막대한 자금이 들어올뿐더러 일일 입장권 수입도 크게 증가하게 되니, 이적 자금을 늘리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범석이 오늘 휴식을 취하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다가올 수요일에 리그 컵 준결승전 2차 경기가 열리는 원정에서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오늘 쉬는 편이 좋았다.
범석이 이런저런 상념에 빠져있는 사이, 경기가 시작되는지 양 팀의 검투사들이 경기장 내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는 의자를 끌며 창가에 가까이 간 다음, 응원 모드에 들어갔다.
아무리 패해도 그다지 상관없는 경기라지만, 이기는 편이 좋았다. 오늘 상대할 데절트 스콜피언즈팀은 안젤라 소유의 팀이기는 하지만, 단장으로 데레사가 있었다.
“자자. 다들 잘해봐라!”
경기가 시작되려는 찰라, 그가 머무는 방문으로 누군가가 노크를 했다. 혹시 기자나 열성 팬일지 모르던 탓에 범석이 CCTV화면으로 살펴봤지만, 손에는 카메라나 사인지 등이 들리지 않은 것으로 보아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관심을 끌기에는 충분한 인사였다. 바로 데레사였던 탓이다.
‘아니 저 애가 여기를 왜 찾아왔지? 나를 찾아올 이유가 없는데. 혹시 뭔가 낌새를 챈 것 아니야?’
범석의 마음에 불안감이 싹트기 시작했다. 안젤라의 구출 때의 일이 새록새록 기억난 탓이다. 당시 최대한 비밀스럽게 움직이기는 했지만, 워낙 서두르는 바람에 일 처리가 너무 허술했다. 눈치가 빠르다면 자신을 의심할 수 있으니,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이대로 문전박대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자칫 자신을 더욱 미심쩍어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는 수 없이 그가 방문의 록을 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오는 데레사를 바라보며 양팔을 벌리며 반겼다.
“어서 오십시오. 데레사 양.”
“안녕하세요.”
범석이 근처에 좌석을 끌어와 자신의 옆에 놓았다. 그리고 살짝 눈치를 살피고는 차를 가져오더니, 그녀에게 내밀었다.
“자자. 드십시오.”
“고마워요. 잘 마실게요.”
자신의 자리에 다시 앉은 범석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 그런데 제가 여기 있는 줄은 어떻게 알았습니까?”
“그냥 범석 씨께서 출전자 명단에 없기에, 이곳에 있나 해서 와봤죠. 여기가 원래 갓즈나이츠 팀 VIP 지정석이잖아요.”
“그렇군요. 하여간 잘 오셨습니다. 혼자 경기를 보기 적적했는데, 아주 잘 됐습니다.”
데레사의 시선이 어느새 경기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양 팀이 본격적으로 충돌을 빚으며 치열한 결전을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이 모습에 안심한 범석이 편히 의자의 안기려는 순간, 그녀의 질문이 터져 나왔다.
“범석 씨. 그런데 왜 지금껏 연락이 없었나요?”
“네, 네? 연락이라뇨?”
“월드컵 본선 개최지 선정 때, 저에게 좋아한다고 말씀 주셨잖아요? 그런데 두 달이 다되어가도록 연락도 하지 않다니 좀 이상하잖아요.”
데레사의 눈매가 가늘어져 있었다. 모르고서 봤다면 마치 연인에게 실망한 여자의 눈빛 딱 그것이었다. 뭔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판단한 범석이 머리를 긁적이며 어눌하게 대답했다.
“그, 그게 전에 실수해서 말입니다. 그때 호텔 카페에서 제가 데레사 양에게 큰 실례를 범하지 않았습니까? 그게 좀 미안스럽고 난처하더라고요. 그래서 연락을 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단지 그뿐인가요?”
범석이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요. 사실은 다른 이유가 더 컸습니다.”
“어떤 이유요?”
“안젤라 여사님 때문이죠. 전에 그분이 납치되었다가 구출되었다는 소식을 뉴스에서 들을 때, 심장이 조여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당시에는 안젤라 님이 바람을 피웠다는 사실에 실망해 데레사 양에게 고백했지만, 제가 너무 성급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데레사가 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안젤라가 아무도 몰래 바람을 피웠다는 사실은 자신이 꾸며낸 얘기였다.
물론 전에는 어머니가 자주 자신 몰래 여느 남정네와 밀월여행을 떠난 일이 많았지만, 한 번쯤은 의심의 눈초리로 자신을 바라보았어야 옳았다. 그런데 그는 경찰 조사가 진행되는 동안 가타부타 아무 말이 없었다.
‘오 범석. 저자는 내 정체를 알고 있을 가능성이 커. 반드시 무슨 의도를 이러는지 파악해야 해.’
그녀가 범석이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다고 의심하는 이유는 아주 많았다. MR보안이라는 뛰어난 정보조직을 휘하에 거느리고 있는데다가, 과거 최초로 청년기업연합회에 흑사회의 스파이가 있다고 밝혀낸 작자였다.
여기에 경찰의 안젤라 구출작전이 있던 시간에 마침 알리바이가 명확하지 않았고, 긴밀히 알아보니 그 작전의 최초 시행자가 일심회의 주축 멤버인 렉스터 경감이라고 했다. 또 어머니가 경찰의 호위 아래 병원에 입원한 다음 날, 그는 때마침 리차드 계파의 협조를 얻어 에이번드 지역이 월드컵 본선 개최권을 얻는데 큰 공을 세웠다. 리차드 계파를 움직일 수 있는 패는 안젤라 여사가 쥐고 있었는데, 경찰의 비호아래 비밀리에 입원하고 있었기에 그녀도 며칠 후에야 겨우 연락을 취할 수 있었다.
“그렇군요. 그럼 저에게 한 말은 없었던 것으로 하는 건가요?”
“아마도 그래야겠죠. 저는 어쩌면 데레사의 양아버지가 될 수도 있으니까요. 그때의 일은 제발 잊어주셨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입가에 서글픈 미소를 품은 데레사가 고개를 돌려 그를 지그시 바라봤다.
“하긴 그렇겠네요. 양부와 양녀 간의 사랑이 이루어질 수는 없으니까요.”
“네.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죠.”
“그런데 한 가지만 질문해도 되나요?”
“네. 물론입니다.”
“범석 씨께서 저를 사랑하기나 했나요?”
그 말에 범석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데레사도 상당한 미인. 사랑하는 여인 범위에 들기에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결코 그녀 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독이 든 사과를 먹을 자는 세상 모르는 순진한 백설공주 말고는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괜히 찝쩍댔다가는 자신만 피를 보았다.
하지만 부정을 표할 수는 없는 일. 바로 긍정을 표했다.
“그, 그야 물론 사랑했습니다. 다만 이루어질 수 없기에 안타까울 뿐이죠.”
그의 어색한 표정을 본 데레사가 슬그머니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범석이 진실을 말하든 거짓을 말하든, 이런 반응은 자신에게 유리했다. 작업을 거는데, 수월했기 때문이다.
‘어쨌든지 간에 범석 이자는 반드시 제거해야 해. 내 인생의 유일한 결점이라면 바로 이 작자니까. 아버지가 감옥에 간 이유도, 나의 모든 일이 실패로 돌아간 것도 모두 저자에 의해서야. 정말 죽였어도 진작에 죽였어야 옳았어.’
데레사가 살며시 자리에서 일어나 범석의 앞에 차분하게 나아간 후, 양손을 부여잡았다. 고운 자신의 손으로 느껴지는 원수의 거친 피부가 소름 끼쳤지만, 그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범석은 세계에서 최강 수준의 검투사 자리에 올라 있기에, 웬만한 암살자로는 성공하기 쉽지 않았다. 확실하고 완벽한 제거를 위해서는 안심하고 있는 그의 등 뒤에 서 있을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서로 사랑한다면 그 어떤 장벽도 소용없는 것 아닌가요?”
“그, 그도 그렇지만 저는 데레사의 양부가 될지도 모릅니다. 이건 극복하기 어려울 정도로 문제가 큽니다.”
“어머니와 저와 동시에 혼인하려면 그렇죠. 하지만 애정만 나눈다면 그다지 문제가 없잖아요?”
‘왜 문제가 없어! 등 짝에 칼 꽂힐 것이 빤한데 말이야!’
범석은 데레사의 애정공세가 소름끼쳤다. 호감도 제로에 육박하는 여인이 이런 행동을 해오니 받아들일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아마 그녀는 자신을 죽이려 하거나, 아니면 이용하려는 것이 확실해 보였다.
“그, 그야 그렇지만, 도덕적으로 문제가 생기니 이러는 것 아닙니까?”
“그래요? 그런데 왜 그런 걸 범석 씨께서 두려워하시죠?”
“아니 저희 연예 장면이 신문지상에라도 보도되면 어떻겠습니까? 분명 세간의 질타가 쏟아질 텐데, 당연히 걱정되죠.”
“하지만 범석 씨는 이성애자를 표방하며 이미 받고 계시잖아요. 그리고 저희 어머니와의 사이는 언론이 아직 모르고 있고요. 전 별로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녀가 살며시 다가오자 범석이 의자를 끌며 뒤로 물러섰다.
“하, 하하. 그렇기는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꺼려지는데요.”
“왜요?”
“전에 데레사 양은 저를 전혀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전 저를 사랑하지 않는 여인에게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괜히 마음에 상처만 입거든요.”
데레사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말했다.
“천만에요. 당시에는 놀라서 그랬을 뿐이에요. 갑자기 고백을 해오니 무척 당혹스러워 딱히 할 말이 없었거든요. 하지만 우리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보는 과정에서 저는 결국 깨달았어요. 제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범석 씨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에요. 어머니와 당신이 다정스럽게 걸어가는 장면이 떠올리자, 그렇게 질투가 날 수가 없었거든요.”
“그, 그렇습니까? 그, 그러셨군요. 하지만 저도 생각할 시간을 주십시오. 워낙 갑작스러운 일이라, 지금은 머리가 혼란스러워 대답할 수가 없군요.”
코너에까지 범석을 민 데레사가 마지막까지 가지 않고 뒤로 물러섰다. 아무리 그를 안심시키려고 하지만, 몸을 섞는 과정까지는 가기 싫었다. 될 수 있으면 자신의 청결한 몸을 유지한 채 그를 제거하고 싶었다. 그리고 어차피 이 방 천장에는 CCTV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어,암살 작업이 불가능했다.
“네. 그럴 수도 있겠군요. 좋아요. 당신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기다려주겠어요. 하지만 제발 이른 시간 내에 답변을 주셔야 해요. 너무 시간을 끌면 제 마음은 송두리째 다 타버릴 테니까요.”
“아. 네. 최대한 빨리 마음의 결정을 내리고 연락드리겠습니다.”
살며시 미소 지은 데레사가 그의 입을 검지로 막은 다음, 조용히 말했다.
“대신 거절은 받아들일 수 없어요. 전 언제나 당신 것이니까요.”
“네, 네. 그건 좀…….”
그가 대답을 끝내기도 전에 자리에서 일어선 데레사가 작별의 인사로 볼에 뽀뽀했다. 몸서리 칠 정도 끔찍한 느낌이었지만, 이 정도 희생 없이는 범석을 제거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럼. 범석 씨. 전 가볼게요. 다음에 뵐 때까지 안녕히 계세요.”
“아, 아. 네. 들어가십시오.”
곧이어 데레사가 손을 흔들며 방문을 빠져나가자, 범석의 몸이 의자로 푹 꺼져내렸다. 이거 암만 봐도 제대로 걸린듯싶었다.
지금 그녀의 행동으로 보아 무슨 낌새를 차렸다는 것이 분명해졌으니, 대책이 필요한다. 하지만 딱히 생각나지 않는다는 점이 문제였다. 무작정 피하는 방법이 있기는 하지만, 데레사가 계속 이런 식으로 달려들면 소용없는 일이었다.
‘썅. 나도 몰라. 어차피 그녀의 명줄은 내가 쥐고 있으니까. 계속 이러면 통쾌한 복수고 나발이고, 바로 끝내버린다.’
그는 이마에 흐르는 땀방울을 닦고, 땅이 꺼지라고 한숨만 내쉬었다. 그러더니 곧 데레사의 손길이 닿은 옷을 매만지며 뭔가를 찾기 시작했다. 혹시 도청장치가 장착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 작품 후기 ============================
이번 태풍은 그다지 문제가 없었네요. 이거 그냥 비구름이 지나간 기분입니다. 하하하.
그럼 모두들 즐거운 하루 되시고요. 전 내일 또 찾아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