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rfect World RAW novel - Chapter 463
465화
‘그런데 프리시카는 왜 저래? 지금 웃을 상황이 아닌데.’
기분이 좋았던 범석이 안면 실드 속의 음영에 드러난 프리시카의 얼굴을 보더니 다소 미심쩍은 감정이 피어올랐다. 찰나에 불과한 시간이지만 그녀의 표정에서 미소를 확인한 탓이다. 아주 살짝이라 긴가민가하지만, 최소한 범석이 보기에는 그랬다.
그가 황급히 프리시카가 내뻗은 검을 쳐내고는 뒤로 물러났다.
‘서, 설마. 지금까지의 운이 프리시카가 의도한 것인가?’
범석이 그리 생각하는 이유는 세 번의 위기 상황에서 그녀로 말미암아 모면한 횟수가 2번이나 됐고, 이롤리타를 부분 행동시키는데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운과 우연도 여러 번 반복되니 범석으로서도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도, 도대체 왜?’
이런 범석의 의문은 오래지 않아 풀렸다. 그녀는 이런 짓을 해야 할 분명한 이유가 있었던 탓이다.
바로 자신의 노기를 풀기 위해서, 이번에 승리를 바치는 것 말이다. 다만 문제는 그게 정말 가능하다는 것이다. 아무리 세 명을 동시에 상대하느라 집중력과 힘이 분산하고 있다지만, 자신의 동작을 미리 파악하고 적절한 대응을 하기란 쉽지만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프리시카였다. 자신과 자키드, 아멜리에 이외에는 상대할 자가 없다고 알려진 검투사였고, 경쟁의식에 자신의 전투방식과 버릇을 철저히 분석한 치밀함도 가지고 있었다. 이 점만을 봤을 때는 어쩌면 가능해 보일 수도 있었다.
그가 프리시카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자신의 추론이 맞는지 또 프리시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확인해 보기 위해서였다.
“자. 그럼 다시 시작해 볼까?”
그가 다가오자 프리시카가 힘차게 달려들 검으로 내리쳤다. 정말 이때만큼은 고의성이 있었는지 미심쩍었다. 범석은 창대로 막은 다음 곧바로 크게 휘두르며 그녀의 허리를 노렸다.
허공을 가르는 파공음과 함께 측면으로 달려드는 라카미.
범석이 창대를 쥔 손을 꽉 움켜잡고는 창을 그대로 원을 그리듯 휘둘렀다. 그리고 뒤로 물러나 있는 프리시카에 다시 달려드는 척을 하더니, 다시 스텝을 달리해 라카미를 향해 창끝을 뻗었다.
“그런 수에는 절대 당하지 않아요!”
여지없이 그녀의 검에 막힌 범석의 중심축을 따라 회전했다. 그러더니 라카미의 얼굴 부위에 창대가 근접하자 힘껏 안쪽으로 당겨졌다. 반원날을 이용한 공격이었다. 익히 예상했던 바였기에 라카미는 상체를 크게 뒤틀어 피했지만, 살짝 중심을 잃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윽고 범석이 그녀를 향해 창을 깊게 찌르며 프리시카의 행동을 살폈다.
‘자. 여기서 어떻게 할 거냐? 프리시카.’
프리시카의 선택은 동료를 구원하는 일이었다. 라카미에게 날카롭게 쏘여지는 창격을 검으로 내리쳐 궤적을 변경시킨 것이다.
범석이 다시 물러나며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일단은 합격이었다. 만약 여기서 그대로 자신에게 달려들며, 라카미를 못 본 척했다면 프리시카를 가만히 놔두지 않을 참이었다.
‘후후. 일단 당연한 절차는 지키겠다. 이거지?’
마크맨들의 강자를 상대로 한 연합 플레이에서 가장 우선시 되어야 할 덕목은 어떤 경우라도 쓰러뜨리는 일이었다. 그리고 여기에는 동료의 희생을 감수하는 조건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는 반드시 상대를 쓰러뜨려야 한다는 전제가 깔렸어야만 했다. 동료를 희생시켰는데, 상대를 향한 공격이 실패한다면 손해가 막급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에 프리시카의 조금 전 행동은 당연한 행동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범석이 이딴 것을 왜 따지느냐? 바로 프리시카의 의도를 확인해보기 위해서였다. 지금 교묘한 플레이로 자신에게 이득을 주려는 행동이, 어떤 생각에서 비롯되었느냐는 그의 앞으로의 선택에 크나큰 영향을 주었다.
‘일단 나를 엿먹이려는 의도일 가능성은 적군.’
지금 일생일대의 위기에 빠진 프리시카가 현재 범석에게 내밀 수 패는 총 두 가지였다. 하나는 싹싹 빌며 용서를 구하는 길이었고, 또 하나는 그가 월드 워커 옥션 마켓에서 자신을 구매할 수 없게 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라카미를 구하는 행동으로 후자일 가능성이 크게 낮아졌다.
순리대로 풀어 간다는 것은 외부인에게 자신의 이번 수작을 숨기려고 한다는 뜻. 범석에 대한 불순한 의도는 없다고 볼 수 있었다. 만약 후자였다면 그녀는 이번 대결에서 티가 나도록 봐주는 척하다가, 협회에 제소한 다음 협박을 당해 이번 경기에서 수작을 부렸다고 고했어야 옳았다.
그럼 이 영상자료를 토대로 범석은 곤란한 처지에 빠져들었을 것이었고, 절대 자신이 프리시카를 구매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었다.
그가 창대를 가로로 눕히고는 프리시카를 쳐다봤다.
“우리 프리시카 운도 좋네. 지옥에서 살아 돌아왔으니 말이야.”
프리시카가 밝게 미소 지었다. 혹여 자신의 의도를 범석이 눈치챘나 싶었던 것이다. 조금 전 위기에 처했던 자는 자신이 아니라 바로 라카미였다. 당연히 범석의 지금 흘리는 말은 다른 의미라고 해석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영문을 알 수 없었던 라카미가 범석을 노려봤다. 곧이곧대로 해석해, 이번 그의 플레이에 함정이 있었다고 파악한 것이다.
“아니 우리 프리시카가 범석 님에게 쉽게 당할 것 같나요? 천만의 말씀이에요. 저와 연합한다면 그 누구도 저희를 이길 수는 없어요.”
그가 난해한 표정으로 라카미를 쳐다봤다. 뭐라 위로의 말씀을 올려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던 탓이다. 지금은 구원을 받았지만, 그녀는 곧 프리시카에게 단단히 뒤통수를 맞을지 몰랐다.
“흐흠. 하지만 너희는 1라운드에서 나한테 졌잖아?”
“그, 그건. 단지 실수였을 뿐이에요. 범석 님께서 그런 어처구니없는 방법을 사용할 줄은 몰랐다고요.”
“실수라? 최강의 수준에 오른 검사 간의 승부의 향방은 대부분 실수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모르나? 그건 변명에 불과해.”
라카미가 입을 달싹거렸다. 그의 말은 전혀 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최강에 자리에 오른 검투사들은 신체적 능력과 검술이 상당한 수준에 올랐다는 뜻. 실력이 미달해 당하는 경우는 흔히 발생하지 않았다. 물론 범석 같은 괴물 같은 자에게는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2대 1이라는 수적 우위가 있으니 충분히 커버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하, 하지만 단 한 번뿐이에요. 다시는 실수 따위를 할 저희가 아니라고요.”
범석이 한쪽 다리를 끌며 이제야 도착한 이롤리타를 검지로 가리켰다.
“그럼 쟨 왜 저러는데? 이롤리타가 당한 건 너희와 나와의 실력 차이에서 비롯된 일이냐?”
“그, 그건…….”
라카미가 입을 꾹 다물었다. 다리를 절뚝거리는 이롤리타를 보자 더는 할 말이 없었다. 실수와 실력 차가 아니라면 사고뿐이데, 이를 변명으로 대자니 너무도 구차했다.
범석이 고개를 젓더니 또다시 뒤로 물러났다. 이롤리타는 기동성이 없기는 하지만, 검을 휘두를 줄은 알았다. 괜히 여기 머물면서 3명의 공세를 당할 필요는 없었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빨리 덤비기나 하라고.”
바라는 바였기에 라카미가 칼자루를 꽉 움켜잡고, 프리시카를 바라봤다. 동시에 달려들자는 신호였다. 괜히 범석과 말씨름을 해봐야 자신들만 손해였다.
“프리시카 빨리 가서 범석 님을 쓰러뜨리자. 이대로 우리가 당하면 그만한 망신도 없어.”
“네. 저도 알아요. 언니!”
범석을 공격하는 라카미의 손이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방금 대화에서 당한 타박을 조롱으로 알아듣고 분기를 뿜어대고 있는 것이다. 이 때문인지 그녀의 검을 뻗는 동작 하나하나가 크고 힘에 넘쳤지만, 그만큼 깊이가 떨어졌다. 이 정도의 공세라면 범석으로서는 너끈히 물리칠 수 있었다.
그는 스텝을 방정맞을 정도로 분주히 움직이며 계속해서 라카미를 도발해 나갔다.
“이거 라카미 무서운데. 공격을 막을 때마다 손이 마구 저려.”
그 말에 더욱더 광분한 라카미가 프리시카의 공격에 뒤이어 바로 강하게 검을 내리쳤다. 엄살을 떨고 있음을 모를 리가 없었다. 지금 그의 표정에는 여유로움을 넘어 평온함까지 엿보일 정도였다.
‘좋아. 이제 곧 프리시카가 움직일 거다.’
거칠게 허공을 가로지르는 라카미의 검을 본 범석이 살짝 프리시카의 행동을 살폈다. 지금이라면 그녀가 수작을 부려도 라카미에게 모든 책임이 돌아갈 가능성이 아주 컸다. 그녀는 흥분했는지, 종종 핀트가 어긋나는 연합 플레이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범석은 아주 당혹스러운 장면을 목격할 수 있었다. 라카미가 검을 내리치려는 찰나에, 앞에 서 있던 프리시카가 갑작스럽게 횡으로 이동하며 검을 빠르게 휘저은 것이다. 이내 라카미의 검은 프리시카의 등을 강하게 타격했고, 그녀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라, 라카미 언니 왜?”
“프, 프리시카…….”
얼굴색이 하얗게 질린 라카미가 바닥에 쓰러지는 프리시카를 바라봤다. 이런 중요한 경기에서 팀킬을 했다니, 곤욕스러웠던 것이다. 프리시카는 앞서 있었기에, 이번 실수는 분명히 자신의 책임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책할 겨를도 없이 급히 검을 휘둘러야만 했다. 범석의 파상공세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 아니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지다니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라카미 검투사. 너무 큰 실수를 했군요.
– 그, 그러게 말입니다. 이롤리타가 부분 행동불능 상태에 빠져든데다가 여기에 프리시카까지 당했으니, 승패는 거의 기울어졌다고 봐야 하겠군요.
중계석에서도 라카미에 대한 성토가 터져 나왔다. 그만큼 그녀가 벌인 실수는 아주 치명적이었다. 팀킬은 종종 발생하는 사고이기는 하지만, 이 상황에서는 절대 나오지 말았어야 했다.
아나운서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중계를 계속 이어나갔다.
– 그럼 이번 2라운드는 끝이 난 것이나 다름없군요. 솔직히 라카미 혼자 오 범석 검투사를 막을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 네. 그렇다고 볼 수 있겠죠.
아나운서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말했다.
– 아니 그런데 왜 이런 사태가 벌어지게 된 걸까요? 해설자님은 어떻게 보십니까?
– 글쎄요. 일단 첫째로는 S급 검투사 간의 연계 플레이가 그다지 원활하지 않았다는 데에 있습니다. 워낙 걸출한 검투사들이니, 지원 역할을 제대로 수행 본 적이 없었을 터. 상호 간의 플레이에 다소 문제가 발생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둘째는 역시나 라카미 검투사에게 있습니다.
조금 전 오범석 검투사를 공격할 때, 너무 흥분했어요. 이전에 서로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평정심을 유지했어야죠.
그 사이 라카미가 범석의 창대에 복부를 얻어맞고는 허공에 떠올랐다. 당혹감과 흥분에 휩싸여 있던 그녀로서는 감히 범석의 공세에 그리 오래 버텨낼 수가 없었다. 곧 라카미의 가슴에 창끝을 박은 그가 저 멀리 떨어진 곳에서 주춤주춤 물러서며 본진을 향하는 이롤리타를 쳐다봤다. 마지막 정점이 그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내 관심을 끄고는 프리시카의 옆을 천천히 스쳐 지나갔다. 이롤리타를 해치우면 자신과 검투계 모두 역사적인 순간에 맞이하게 되지만, 다소 찝찝한 승리였기에 이쯤에서 그만두는 편이 좋다고 생각한 것이다. 게다가 이롤리타는 기동성을 잃었기에, 본진을 찾아가면 부담이 되었다.
“이거 프리시카. 고마운걸. 덕분에 쉽게 이겼어. 오늘 일은 필시 참조하지.”
행동불능 상태에 빠져들어 범석의 목소리는 들을 수 없었지만, 프리시카가 환하게 미소 지었다. 그의 표정을 보니 그다지 나쁜 투의 말로 생각되지 않았던 탓이다.
그녀는 편안히 눈을 감고는 앞으로의 핑크빛 미래를 연상하였다.
와아아아! 와아아아!
프리시카와 라카미가 쓰러지고, 이롤리타가 전투력을 크게 잃자 2라운드의 승부는 급속도로 에이번드에게 기울어졌다. 주전력이 셋이나 당한 상태에서도 범석이 멀쩡하니 1라운드보다 상황이 좋지 못하다고 할 수 있었다.
곧 그의 측면 지원을 받은 에이번드 본진은 켈로트의 본진을 산산이 깨뜨리고 2라운드에서도 승리했다.
그리고 이날 에이번드는 3승 1패로 4강전으로 향하는 티켓을 거머쥐었다. 무결점의 완승을 차지할 수도 있었지만, 그랬다가는 주력의 체력 손상이 너무 심했다. 아무리 프리시카의 동조가 있다지만, 에이번드의 2진으로는 켈로트의 검투사를 상대할 수는 없었다.
“자. 오늘 하루는 모두에게 자유시간을 준다. 푹 쉬고 내일 아침 일찍 대표팀 훈련 캠프에서 보자. 단 시차 적응문제로 주인을 만날 때는 리마 시티 시내로 국한한다. 따로 매니저를 붙일 테니, 이를 어기면 상당한 대가가 따를 거다. 알았나?”
8강전의 승리가 기뻤던지, 클라크 감독이 라커룸에서 모두에게 휴식을 선사했다. 비록 오늘 해가 거의 다 갔기에 짧은 시간에 불과하겠지만, 에이번드 검투사들에게는 이만한 선물도 없었다.
갓즈나이츠 출신의 검투사들이야 항시 범석과 함께 있기에 별 불만이 없었지만, 블루버드에서 차출되어온 검투사들은 달랐다. 몇 주간 훈련 캠프와 콜로세움에서 살았기에, 주인을 본지가 꽤 오래되었다.
분주하게 짐을 싼 그녀들은 전자수첩을 꺼내 주인에게로 전화를 걸었다.
“자. 우리도 가자.”
범석도 휘하 엘프들을 데리고 자신의 집인 갓즈나이츠 훈련캠프로 향했다. 뭐 대표팀 숙소에 남아있어도 상관없지만, 은근한 부담감을 안고 휴식을 즐기기가 싫어 그만두기로 했다. 혹시나 대표팀 관계자 중 누군가가 찾아와 여러모로 귀찮게 할 수도 있었고, 감독의 마음이 바뀌어 휴가를 반납하고 전술 훈련을 해야 하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는 일이었다.
곧 그는 휘하 엘프들과 함께 콜로세움 앞까지 찾아온 아론을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럼 뭘 해야 하나?’
정작 갓즈나이츠로 돌아온 범석은 때아닌 고민에 빠져들었다. 막상 와보니 할 일이 없었던 것이다. 물론 상당 기간 팀을 나가 있었기에 팀 내 사무업무가 무척 쌓여있겠지만, 반나절도 안되는 휴가에 서류를 붙들며 보내기는 싫었다. 차라리 잠을 자면 잤지, 이 보석같은 시간에 그런 따분한 일은 못했다.
그때 먼 하늘에서 푸른 색 차량이 날아오고 있음을 본 범석이 미소를 지었다. 할 일이 막 생각났던 것이다.
============================ 작품 후기 ============================
아. 이거 참 신작 쓰기 힘들어서요. 전문서적은 역시 어렵군요. 5권 밖에 안되는데, 벌써 몇 달째 붙들고만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한글로 써져 있다는 사실에 만족을 해야겠죠. 많이 알려졌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활성되지 않은 분야라 이런 책이 있다는 사실이 정말 다행한 일이거든요.
그럼 모두들 즐거운 하루 되시고요. 전 내일 또 찾아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