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rfect World RAW novel - Chapter 466
468화
“저기. 어디로 가시죠?”
엘리베이터에 함께 탄 로스에 질문에 범석이 전자 키의 넘버를 확인하며 말했다.
“11212호실로 갑니다.”
“아. 그래요? 그럼 저희 건너편 방이네요.”
그 말에 마가렛이 더욱 당황하며 안절부절못했다. 이거 졸지에 방문 앞까지 감시를 받게 되었던 탓이다. 그녀는 로사와 헤어지면 바로 호텔을 빠져나가려고 했었다.
범석이 득의의 미소를 지으며 차분한 투로 대답했다.
“아. 이런 우연도 있군요.”
“네. 그런데 내일 언제쯤 나가실 건가요? 이것도 인연인데, 함께 아침 식사를 했으면 좋겠는데요.”
마가렛이 얼굴이 아예 새하얗게 질려버리고 있었다. 범석이 약속한다면 꼼짝없이 내일 아침까지 머물게 생긴 것이다.
이런 마가렛의 표정을 살며시 바라본 그가 고개를 흔들어댔다. 좋은 기회이기는 하지만, 너무 몰아세워도 좋지 못했다. 그리고 저 로사라는 여자는 너무 뻔뻔해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남녀가 호텔에서 머문다는 사실이 어떤 의미인지 빤히 알면서 계속 치근덕거리니, 약간 짜증이 났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모르는 척 외면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글쎄요. 저는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대표팀 훈련 캠프로 돌아가야 해서요. 식사는 훗날 인연이 생기면 같이 하시죠.”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신 로사가 112층 버튼을 눌렀다. 하긴 속한 에이번드 대표팀도 4강전에 오르게 되었으니, 소속 검투사들에게 무한정 휴가를 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날이 바뀌면 사흘 후 월드컵 준결승 전이 벌어지니, 시간이 촉박할 수밖에 없었다.
“뭐. 그렇다면 어쩔 수 없겠죠.”
“이해해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엘리베이터는 금세 112층에 도착했다. 문이 열리자 범석은 마가렛과 데리고 중앙의 복도를 따라 자신이 머물 방으로 향했다. 얼마 후 방문 앞에 도착하자, 범석은 로사에게 눈짓으로 인사하고는 마가렛과 11212호실로 들어갔다.
‘호오. 역시 VIP룸 답네.’
그의 시선에 가장 먼저 띄는 것은 실내 안쪽에 위치한 전기 벽난로였다. 여름이라 작동을 하고 있지 않지만, 방의 운치를 살려주기에는 아주 좋았다.
천장에는 3개의 크리스털 샹들리에가 방을 따라 ‘ㄱ’자로 배치되어 있었는데 아련한 불빛으로 실내로 아늑함이 번져나가고 있었고, 거실 겸 방 안에는 고급스러운 2인용 침대와 둘이 다정스럽게 다과를 즐기는 있는 평면 유리 테이블도 있었다.
그가 TV 옆에 있던 냉장고 문을 열었다. 맥주가 있나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술을 마시면 긴장감이 다소 완화되었고, 갈증을 풀 수분도 필요했다.
맥주 2병을 꺼낸 범석이 거실 소파에 앉아있는 마가렛을 불렀다.
“마가렛. 우리 한잔하자.”
“술을요? 준결승이 나흘 후잖아요? 괜찮으시겠어요?”
“상관없어. 개조인간이 아니더라도 맥주 한두 병쯤은 그다지 지장 없다는 것 잘 알잖아. 그리고 다음 경기는 리마 시티 콜로세움에서 벌어지고 상대는 아르칸이다. 아주 여유만만이지.”
아르칸 대표팀은 지난 월드리그에서 우승한 채플린 위스퍼가 주축으로 있는 팀으로, 이번 월드컵 우승팀 중 하나로 손꼽히는 다크호스였다. 당연히 난관이 예상되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그는 여유만만이었다.
“아니 아르칸 대표팀은 강팀이잖아요? 그런데 여유만만해요?”
“후후. 그렇지. 하지만 보수공사가 완료되고 리마 시티 콜로세움에서 경기한다면 걔들 우리에게 절대 못 이긴다.”
“어째서요?”
“주축 검투사 중 셋이 채찍을 사용하는데, 그 중 둘은 다른 무구를 다루는 데에 잼병이라 상대하기가 상당히 쉽다. 물론 나머지 하나가 아멜리에라는 사실이 좀 문제지만, 숲 지형 전투를 잘 모르기에 그녀도 여유롭기는 마찬가지다.
오죽했으면 채플린 위스퍼가 원정에서 포레스트 엘프즈를 단 한 경기도 이기지 못했을까?”
“아. 그래요? 다행이네요.”
“그래. 그러니 자 한 잔 받아라. 솔직히 우리가 여기서 할 만한 것이 술 먹는 것 이외에는 없잖아.”
이 말을 하고 난 범석이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던 잔에 맥주를 따랐다. 그를 힐끔 바라본 마가렛이 잔을 들더니, 혼자서 홀짝 한 모금을 마셨다. 그 후에 흐르는 미묘한 정적. 잠시 후 멋쩍었는지 그녀가 맥주 한 잔을 냉큼 모두 다 들이켰다.
범석도 술을 비우고 양쪽 잔에다 다시 맥주를 채웠다.
“천천히 마셔라. 그러다 취할라……. 너 원래 술 잘 못 마시잖아.”
“아니에요. 전에는 그랬는데, 직원들과 회식하다 보니 지금은 많이 늘었어요. 저희 직원들 꽤 술 잘 마시거든요.”
“으음. 하긴 몸을 쓰는 자들이 술은 잘들 하겠지. 자. 그럼 한 잔 또 할까?”
“네.”
허공에서 부딪친 술잔이 다시금 비워졌다. 이번에는 마가렛이 술병을 기울였다. 이들은 술을 들이켜고는 또다시 침묵 모드에 들어갔다. 평상시에는 농담도 섞어가며 친근하게 잘도 대화했지만, 오늘만큼은 달랐다. 이 넓은 호텔 VIP룸에 단둘이 서로 마주하고 있다는 사실이 서먹서먹했던 것이다.
‘미치겠군. 이거 괜히 좋아했나? 이러면 안 오니만 못하잖아.’
달리 한 말이 없던 범석이 다시금 냉장고로 갔다.
“어디 가세요?”
“안주나 할 겸 치즈 좀 가져오게. 그냥 마시니 입이 쓰다.”
“아. 네.”
냉장고를 뒤지는 범석의 뒷모습을 바라본 마가렛이 피식하고 웃었다. 유아독존 양 살아가던 그가 분위기가 좀 바뀌었다고 자신을 어려워하는 모습이 귀여웠기 때문이다. 다른 때 같았으면 혼자 잘난 체하며 주변이 떠나갈세라 입을 놀렸을 터였다.
그녀가 잔을 내려놓고 범석을 바라봤다.
“범석 님 안 씻어요? 온종일 플레이를 하느라 힘들었을 텐데, 피로를 푸셔야죠.”
“벌써?”
“제가 씻고 싶어서 그래요. 오늘 하루 너무 더웠는데, 샤워도 제대로 못 했어요.”
“아, 아. 그래.”
범석이 바로 자리를 털고 욕실로 들어갔다. 경기 후 샤워를 했지만, 초여름의 이른 더위에 약간 몸이 끈적끈적거렸다.
샤워기의 물소리가 들려오는 가운데 마가렛이 홀로 술을 마셨다. 준비된 술은 기껏해야 맥주 2병. 그녀에게는 부담되지만, 못 마실 것도 없었다. 그리고 모든 술을 다 비웠을 무렵. 범석이 잠옷으로 갈아입고 나왔다.
“금세 나오시네요?”
“원래 남자는 빨리 씻어.”
“그래서 더럽다는 얘기를 듣는 거예요.”
범석이 인상을 팍 구기고 그녀를 쳐다봤다.
“그럼 여기서 때 밀랴? 네가 모르는 듯해서 지금 말하는데, 솔직히 너보다 내가 더 깨끗해.”
“에이. 거짓말…….”
“거짓말 아니다. 혹시 내가 하루에도 몇 번씩 샤워하는지 아냐? 일어나자마자 씻고, 식전 아침 훈련 후 또 씻고, 오전, 오후 훈련 후에 또 씻고, 밤에 잠들기 전에도 씻는다. 밀고 싶어도 나올 때가 없어.”
“큭. 알았어요.”
헛바람을 내뱉은 마가렛이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뒤이어 욕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욕조의 물이 차오르고 있는 모습에 지긋한 눈으로 바라봤다. 그는 샤워만 하고 나왔으니, 욕조의 물을 받을 필요가 없었다. 분명 자신을 위해 준비하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정말 범석은 세심한 부분까지 여인들을 생각해 주는 남자였다.
그녀가 욕조 물에 손을 담그더니, 작게 읊조렸다.
“아. 차가워.”
하지만 그 세심함에는 꼭 모자란 부분이 있어서 불만이었다. 여름이라고 욕조물을 얼음장으로 만들어놓을 필요는 없었다.
‘뭐. 범석 님이 날 생각해준다고 얼음을 띄어 놓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지.’
마가렛이 자신의 옷을 벗어, 타월 걸이에 걸어놓았다. 그리고 샤워기를 틀어 몸에 물을 적시고는 샴프를 시작했다.
‘그런데 내가 언제부터 범석 님을 범석 님으로 불렀을까?’
샤워기의 물살에 거품을 씻겨내리는 마가렛이 상념에 빠져들었다. 처음 그를 만난 날은 LHN본사 빌딩 근처였다.
처음에는 지역 내 유망한 검투사를 본다고 해서 기대가 됐지만, 만남의 계기가 된 사건을 듣고 기가 막혀 한 참을 멍하니 서 있었던 기억이 있었다. 자신도 혀를 내두를 만큼 보안이 철저한 LHN빌딩에 단신으로 침투해 그룹 총수인 발바르회장을 만나겠다니 어이가 없었던 것이다.
차라리 당당히 찾아가 대면을 요청하는 편이 더 가능성이 많은데도, 자존심상 그럴 수 없다며 굳이 무력을 통해 뚫겠다는 그 허황함이 가소롭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는 해냈다. 자신도 절대 뚫지 못하는 보안을 힘으로 부수고 들어가 발라르 회장과 대면한 것이다. 그리고 단지 3크랑을 강탈하러 왔고, 5크랑을 받고 2크랑을 거슬러주는 장면에서는 아예 배꼽을 잡았다.
‘아마. 그때서부터였을 거야. 범석 님의 당당한 저 모습이 존경스러웠으니까. 나는 그렇지 못했거든.’
그때까지 마가렛은 음지에서 활동하는 크래커. 전산망을 침투해 은행의 불법 자금을 빨아먹는 재미로 세상을 살았기에, 당당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렇기에 저런 삶도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의 충격은 실로 말할 나위가 없었다.
‘그래서 나도 범석 님처럼 살고 싶었지. 그리고…….’
마가렛이 가장 감동한 일은 그가 저런 미친 짓거리를 한 이유였다. 단지 3크랑만을 강탈했을 때 그다지 욕심이 없는 자인 줄은 알았지만, 연인인 글로리아를 위해 위험을 자처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한 여성에게 그런 사랑을 베풀어주는 남자는 지금은 물론이거니와 엘프 탄생 이전 과거에도 흔하지 않으리라 생각됐다. 아마 이 때문에도 그를 부르는 호칭이 딱딱하게 바꾸었는지도 몰랐다.
자신의 호감을 끊어 범석과 글로리아의 사랑을 지켜주기 위해서 말이다.
순간 마가렛이 샤워기를 쥔 주먹을 불끈 쥐고는 눈가를 날카롭게 세웠다.
‘그런데 도대체 연인이 몇 사람이나 되는 거야! 내가 정말 한심해서 말이야.’
곧 그녀가 체념한 눈빛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래도 그는 어느 여인에게 건 최선을 다했던 것이다. 이는 자신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과거 흑사회에게 납치당해 불러냈을 때, 그는 죽음의 덫으로 인도한 자신에게 하등 원망의 눈빛도 날리지 않았고, 더 나아가 위로까지 해주었다. 정말 그때의 고마움과 미안함은 평생을 두고 잊지 못할 기억이 되었다.
“휴~”
샤워를 마친 마가렛이 차가운 욕조 물에 몸을 담그고는 부르르 떨었다. 차갑긴 확실히 차가웠다. 하지만 그의 성의이니 받아들여도 나쁘지 않은 듯 보였다. 그리고 여름의 더위를 날리는 데에는 찬물 세욕 이상의 것도 없었다.
“오래 기다리셨죠?”
타월로 물기 머금은 몸을 가리며 나온 마가렛. 마침 새로 가져온 맥주를 병째로 나발을 불던 범석이 곁눈질로 바라보더니, 살짝 몸을 떨었다. 은은한 샹들리에 불빛에 비친 고운 피부. 촉촉이 젖은 검은 머리카락. 여기에 생기 어린 밝은 미소까지. 정말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우리 마가렛 정말 예쁘다.”
“원래부터 예뻤어요. 새삼스럽기는요.”
“후후. 그래서 누누이 예쁘다고 말해왔잖아.”
“하지만 오빠는 모든 여자에게 그렇게 말하잖아요.”
범석이 슬며시 잔을 내려놓으며 밝게 웃었다. 그녀에게는 정말 오래간만에 들어보는 오빠 소리였다. 처음 만난 날 마가렛은 자신을 향해 그리 호칭했지만, 공적인 업무가 대면하다 보니 어느 사인가 딱딱한 범석 님으로 바뀌어 있었다.
“오랜만에 들어보네.”
“뭘요?”
“아니다.”
마가렛이 길게 한숨을 몰아쉬었다.
“휴~ 오빠도 그러고 보면 참 싱거워요.”
“뭐가 싱겁냐? 나만큼 진득한 사람이 세상천지에 어디 있어?”
“뭐 평소에는 그렇지만, 꼭 결정적인 순간에 반드시 얼버무리잖아요.”
“내가 뭘?”
“휴~ 그런 게 있어요.”
마가렛이 음성 명령으로 침대맡 스텐드를 제외한 모든 불을 껐다. 그리고 침대 위에 걸터앉고는 범석을 바라봤다.
“우리 그만 자죠. 그동안 회사 일로 바쁜 나날을 보냈더니 피곤해요.”
“아. 그래? 뭐 그러지 뭐.”
범석이 자리에 일어서더니, 테이블을 치우고 빈 술병을 문 옆에 내려놓았다. 아직 잠자리에 들 시간은 아니었지만, 그도 오늘 시합으로 많이 지쳐있었기에 잠이 간절했다.
범석이 이불을 가지고 나와 소파에 둥지를 틀었다.
“거기서 주무시게요?”
“그래. 같이 한 침대에서 잘 수는 없잖아.”
마가렛이 입을 삐쭉 내밀었다. 저래서 방금 싱겁다고 타박한 것이다. 꼭 결정적인 순간에, 저리 몸을 뺐다. 정말 몇몇 연인을 사귀고 있는 사내 같지가 않았다. 물론 범석은 호감도 관리를 위한 이런 행동을 보이는 것이지만, 그녀가 알 리 없었다.
“아니 에이번드 대표팀의 희망을 어떻게 그런 데에 재워요. 그러다가 밤새 몸에 이상이라도 생긴다면 다 제 책임이 되잖아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데? 너도 잘 알잖아. 이 방도 겨우 얻은 것 말이야.”
마가렛이 침대 한쪽 옆을 비워놓고 그를 불렀다.
“이쪽으로 오세요. 단 손만 잡고 자기에요?”
범석은 식도가 순식간에 마르는 느낌을 받았다. 정말 에이번드 대표팀을 위한 것이지, 아니면 자신을 유혹하려는지 구별이 되지 않은 탓이다.
‘보통 여자가 저런 말을 하면 허락한 건데? 혹시 어디서 분위기라도 탔나? 평상시대로라면 아직은 아닌데…….’
범석이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이불을 들었다 내려놨다 하더니 결국에는 다시 소파에 누웠다. 남은 호감도 2쯤은 평상시 대화로 올릴 수 있으니, 모험을 걸기가 싫었다.
만약 순수한 마음으로 저런 말을 토해냈는데, 여기서 자신이 덮쳐버린다면 정말 끝장이었다. 아마 한동안은 마가렛의 등쌀에 피골이 상접할 것이 빤했다.
전에 수잔의 사건으로 학을 띤 터라, 웬만해서는 모험을 걸기가 어려웠다.
“됐다. 난 여기서 잘란다.”
그 말과 동시에 베개 하나가 날아오더니 범석의 안면에 그대로 꽂혔다. 그의 무심함과 무감각에 대한 최소한의 응징이었다. 그래서 화가 풀리지 않았는지 마가렛이 버럭 소리쳤다.
“오빠! 절 정말 에이번드의 역적으로 만들 참이에요!”
고개를 살짝 들어 그녀를 바라보는 범석이 몸을 일으켜 소파에 앉았다. 이 정도라면 어떤 사람도 눈치를 챌 수가 있었다. 예의상 한 권유를 거절했다고 화를 내는 자는 없었다.
============================ 작품 후기 ============================
참 여름 같은 날씨입니다. 친구와 약속이 있어서 외출했는데, 햇살에 살갗이 따갑더라고요. 오랜 기억에는 추석 때는 꼭 잠바나 긴팔을 입고 다닌 기억이 나는데, 이제는 반팔로도 덥네요. 확실히 환경이 많이 변하기는 한 모양입니다.
그럼 가을 더위 조심하시고요. 전 내일 또 찾아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