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rfect World RAW novel - Chapter 469
471화
한 나무에 올라 이라트 진형을 바라보던 범석이 입맛을 다셨다. 이라트 대표팀 검투사들이 방진을 구성한 채 꼼짝 않고 대기하고 있었던 탓이다. 8명의 검방이 전방과 측면을 방패로 철저히 막고 있었고, 안에 있던 네 명의 검투사도 한치의 방심도 보이지 않고 자리하고 있었기에 공략이 용이하지 않았다.
‘역시나 아무 움직임도 보이지 않는군. 이러면 전혀 파고들 구석이 없겠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범석이 근처 나무에 올라있던 티엘라를 바라봤다.
“어때 티엘라. 저격이 가능하겠어?”
“글쎄요. 전혀 틈새가 없어서 어렵겠어요. 지금 활을 쏜다면 화살만 낭비하는 꼴이 될 거예요.”
“혹시 좋은 방법이 없을까?”
“이 상태에서는 어떤 수도 통하지 않을 거예요. 일단 저 진형을 흐트러뜨려야 뭘 해도 할 수 있어요.”
넌지시 이라트 진형을 바라본 범석이 중앙에 머리 하나가 더 올라 있는 검투사를 손가락으로 가리며 말했다. 덩치가 워낙 컸던 터라 쉽게 몸을 숨기지 못하는 자였다.
“혹시 저거 빈틈이 아닐까? 머리 하나가 통째로 나와 있잖아?”
“풋. 저분은 자키트 님이시잖아요. 설마 빤히 보고 있는 상황에서 제 화살에 당하시겠어요.”
“그런가? 그럼 자키드 씨가 다른 데를 보고 있으면?”
“글쎄요? 그건 해보지 않고서는 모르겠는데요. 다른 검투사라면 모르겠지만, 자키드 님이라 역시…….”
하긴 자키드는 범석만 없었다면 세계 최강의 자리에 올랐을 자였다. 주의력이 흐트러졌다고 화살 공격이 반드시 성공한다는 보장은 못 했다.
“뭐. 그렇기야 하지. 하지만 시도할 필요는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자키드 씨의 시선을 끌어볼 테니, 저격을 준비해라.”
“네. 주인님.”
나무 아래로 뛰어내린 범석이 숲을 헤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한번 자키드의 암살을 시도해 볼 참이었다. 실패하면 화살 낭비를 초래하는 꼴이지만, 솔직히 말해서 이번 1라운드에서 화살 한 발 제대로 쏴볼지 의문이었다. 그러니 한 번 시도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는 중앙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후 측에서 평지 쪽으로 나아갔다.
“어이 자키드 씨! 거기서 뭐 하십니까!”
순간 자키드의 고개가 좌측으로 팩 돌아갔다. 범석은 자신의 머리위에 있는 유일한 검투사였다. 관심이 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보면 모르냐! 대기하고 있다! 그런데 넌 그냥 숲에 짱박혀 있지 뭐하러 나왔냐!”
“하하하. 얼굴만 내민 자라 한 마리가 보이기에 한 번 구경나왔습니다! 워낙 큰 놈이라 관심이 가네요!”
“자라? 여기에 자라가 어디 있어! 설마 너희 콜로세움에는 자라도 키우냐?”
“후후. 설마 그럴리가요! 그냥 제가 이라트 진형을 자라로 착각한 것 뿐입니다. 자키드 씨가 머리가 꼭 자라 머리 같더라고요!”
순간 스텐드에서 한바탕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범석의 도발에 호응을 보내는 것이다. 여기에 자키드가 넘어가 그를 쫓는다면 에이번드는 아주 기회를 맞이하게 되었다.
자키드가 얼굴을 붉으락푸르락 만들고는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뭐! 이 자식아! 너 당장에 내게 죽어볼래!”
“아니 잠시 착각할 것을 가지고 그리 난리십니까? 하지만 정 오시겠다면 말리지 않겠습니다. 하하하!”
자키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자 날카로운 파공음을 해치며 화살 하나가 날아들었다. 티엘라가 저격을 시도한 것이다. 하지만 화살이 그의 머리에 다가가기도 전에, 원형으로 휘둘러지는 검에 가로막혔다. 왕이 자신의 검으로 쳐낸 것이다. 그가 불끈 쥔 주먹으로 자키드의 머리를 힘껏 쥐어박았다.
“이런 멍청한 놈아! 그딴 도발에 넘어가면 어쩌자는 거냐!”
여전히 얼굴을 붉힌 자키드가 왕을 쳐다봤다.
“왕 아저씨도 참. 제가 그깟 화살에 당할 것 같습니까!”
“누가 그런 걱정을 한 댔느냐! 그 급한 성질을 탓하는 거지! 너 그 성질머리 언제 고칠 거냐!”
“그럼 어떻게 합니까? 저 자식이 계속 놀리는데요!”
“그래도 참아야지! 지금 저놈을 쫓아가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라서 그래! 너 대체 언제 철 들려고 이러냐!”
자키드가 입을 삐쭉 내밀었다. 정말 근래에 들어와 들어서 짜증의 연속이었다. 스승인 렘란트가 감독이 되지를 않나, 검도계의 저명인사인 왕과 해밀턴이 팀에 들어와 매일 갈구지를 않나. 정말 하루하루가 괴로워 못살 지경이었다.
“아니 설마 제가 저놈에게 당한다는 겁니까?”
“당연하지. 빤히 숲으로 유인하는 것 같은데, 거길 들어가서 네가 이길 것 같으냐? 어림도 없는 소리 하지 말고 닥치고 진형이나 유지하거라.”
“아참. 안 들어가면 되지 않습니까?”
다시금 왕의 주먹이 자키드의 머리를 강타했다.
“퍽이나 안 들어갔다! 내가 네놈 성정을 빤히 아는 데 그 말을 믿을 것 같으냐! 닥치고 빨리 방패 뒤로 와서 앉기나 해!”
하는 수 없이 자리에 주저앉은 자키드가 헬멧 밖으로 들릴 정도로 구시렁거렸다. 범석에게 복수할 기회가 눈앞에 있는데, 가만히 앉아만 있자니 불만스러웠다. 그래도 왕이 저리 노성을 지르며 만류하니 참아야만 했다. 아무리 그라도 검도계의 큰 어른뻘 되는 왕에게 개길 수는 없는 일이었다.
‘휴~ 역시나 안 되나? 그나저나 큰일인데. 자키드 씨의 유일한 약점이 급한 성정인데, 저 왕이라는 자에게 컨트롤 되고 있으니 말이야. 앞으로 다크 하이에나즈는 무섭게 크겠어.’
자키드가 도발에 넘어가지 않자 범석이 바로 숲 안으로 들어갔다. 좀 더 시도해볼 수도 있는 노릇이지만, 왕이라는 자에게 꼼짝도 못하는 자키드를 보자 포기했다. 그리고 지금 중앙에 있는 렐리와 딜리아가 활을 꺼내 시위를 먹이고 있었다. 막지 못하지는 않겠지만, 괜히 모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었다.
다시금 제자리로 돌아온 그는 1라운드가 종료될 때까지 기다리기만 했다.
우우우우~ 우우우우~
경기장 내로 관중의 야유가 퍼지는 가운데, 양 팀 검투사들이 더그아웃으로 돌아갔다. 1라운드 경기 20분 내내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은 적대 팀에 대한 조롱과 경멸이었다.
그리고 이는 중계진들이 마찬가지 심정이었다. 경기 내내 이들은 중계다운 중계를 하지 못했다. 만약 이런 경기만 펼쳐진다면 어쩌면 밥숟가락 놔야 할지 몰랐다.
– 예상했던 대로 양 팀 모두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군요. 지난 4강전 때도 이러더니, 결국 결승까지 이런 어이없는 경기가 벌어졌습니다. 팬들이 야유를 보낼 만도 하죠.
아나운서의 말에 해설자가 착잡한 표정으로 말했다.
– 그러게 말입니다. 아무리 경기 특성상 월드컵에서는 방어전략이 주를 이룬다고 하지만, 이건 너무합니다. 전혀 칼도 부딪치지 않고 경기를 끝내는 법이 어디에 있습니까?
– 네. 맞습니다. 공격다운 공격은 티엘라가 쏜 화살이 고작이지 않습니까? 그래도 4강 전에는 양 팀 간에 화살 공방전이라도 있었죠. 이게 대체 뭔지요…….
– 그래서 하는 말인데요. 아무리 봐도 저는 검투 경기 규정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아니 어떻게 말입니까?
– 다른 격투 경기처럼 일정 시간 동안 전투를 벌이지 않거나, 의지가 없다면 경고를 먹이는 것 말입니다.
해설자가 바로 고개를 흔들었다. 그건 좀 무리였다.
단체전인 검투는 다른 격투스포츠와 달리 전략적인 면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저 치고받고 싸우는 경기가 아니라 지형을 이용하고 상대 팀의 의표를 찌르는 전략을 통해 승부를 가리기에, 한층 더 재미있는 전투가 벌어졌다. 그래서 규정도 매우 단순한 편이고, 경기장 규격도 지름 100미터의 원형 형태만 이룬다면 어떤 지형도 상관없는 자유를 부여했다. 그런데 여기서 아나운서의 말대로 그런 규제를 포함한다? 그럼 각 팀의 지형과 전략 선택의 자유도가 많이 제한되었고, 검투 경기만의 큰 특성을 스스로 없애는 꼴일 수도 있었다.
– 아마 그건 좀 어려울 겁니다. 검투는 단순한 격투 경기와 달리 전략적인 면을 아주 중시합니다. 그런 규제를 넣는다면 문제의 소지가 아주 많습니다.
– 하지만 저런 경기가 계속 벌어진다면, 팬들이 실망할 것 아닙니까?
– 으음. 그렇기야 하지만, 단판 승부로 운명이 결정되는 월드컵이니까 어쩔 수 없겠죠. 그리고 솔직히 말해 이런 일이 벌어진 적이 처음은 아니지 않습니까? 바로 지두 지역에서 월드컵 경기가 펼쳐졌을 때 말입니다.
지두 지역은 파피란시티 콜로세움을 홈으로 두고 있는 포레스트 엘프즈가 있었다. 이곳은 아예 경기장 전체가 숲으로 도배되어 있기에, 상대 팀이 받는 압박감은 아주 대단했다.
덕분에 그 지역에 월드컵 경기가 벌어졌을 때에도 오늘과 같은 일이 연속해서 발생했고, 연방 프로 검투 협회에서 이 일에 대해 심각한 논의를 벌인 적이 있었다.
– 네. 그렇기는 하군요. 당시에도 한 참 시끄러웠죠.
– 하지만 그 월드컵 이후에도 콜로세움의 방문하는 팬들의 발길은 줄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팬들도 지형과 전략의 자유도를 해칠 수 있는 제한을 바라고 있지 않는다는 얘기입니다.
– 으음. 말씀을 들어보니 그렇기도 하겠군요. 네 알겠습니다.
중계진들이 자신들의 불만을 토로하는 가운데, 범석이 불편한 표정을 하고는 더그아웃에 들어섰다. 짜증이 나기는 그도 매한가지였다. 정말 이런 경기는 더는 하고 싶지 않았다.
헬멧을 벗은 범석이 부서지라 벤치에 앉았다.
“젠장 할 미치겠군. 이기려고 정말 이런 짓까지 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네. 그냥 확 공격해 들어가?”
그때 감독 석에 앉은 클라크가 물끄러미 그를 쳐다봤다. 왠지 불안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월드컵 우승에 대한 절실한 미련이 없다지만, 굳이 일부러 패할 필요가 없었다. 범석이 화가 나 공격해 들어간다면, 에이번드는 필패였다.
“아서라. 지금의 우리 전력으로는 평지 전에서 이라트 대표팀을 절대 못 이긴다. 비록 저들이 바라는 바이지만, 우리가 승리하는 길은 승부대결뿐이다.”
“그건 저도 압니다. 그냥 짜증이 나서 이러는 겁니다.”
“뭐. 어쩔 수 없잖아? 서로가 유리한 지형에 들어서면 필패가 확실한데, 어떻게 싸움이 벌어지겠냐? 그저 편안히 휴식한다는 셈 치고 가만히 있어라.”
범석이 스텐드를 가득 메운 관중을 가리키며 말했다.
“하지만 오늘 관객들은 큰돈을 주고 입장했습니다. 이런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이면 저희 팀의 새로운 시즌에 대한 기대감을 접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 수입에 문제가 생긴다고요.”
“후후. 퍽이나 그러겠다? 너도 잘 알 텐데? 오늘 팬들이 야유를 보내는 상대는 양 팀 모두가 아닌 바로 적대 팀이라는 사실 말이다. 괜히 어쭙지않은 변명을 늘어놓으며 전면전 펼칠 생각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라. 내가 이따가 재미있는 상황을 연출해 줄 테니까.”
“재미있는 상황이라뇨?”
클라크가 의자를 돌려 그를 뚫어지리라 바라봤다. 이거 벌써 가르쳐줘도 괜찮을지 의문이었던 탓이다. 하지만 얼마 안 가서 입을 열었다. 미리 알고 있다면 준비할 시간이 있으니 그만큼 유리했다.
“승부대결에서 너를 선봉으로 세울 셈이다.”
그 말에 범석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선봉은 가장 먼저 나와서 승부 대결을 펼치는 포지션이었다.
“아니 그게 말이 됩니까? 대장으로 있어도 체력이 될까 말까인데, 선봉에 서라고요?”
“응.”
“왜요?”
“네가 대장으로 있으면, 3명이나 4명하고만 싸울지 모르니까. 그럼 이겨도 완전무결한 승리라고 할 수 없다.”
범석이 살며시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보아하니 클라크는 위험을 감수하고 자신의 이름을 높여주려고 하고 있었다.
“후후. 괜찮겠습니까? 지면 감독님께서는 무지하게 욕먹을 텐데요. 그런 말도 안 되는 승부대결 전략을 들고 나왔으니까 말입니다.”
“상관없다. 이기지 못한다면 너와 난 바보가 될 테지만, 누구도 대놓고 욕은 못한다. 그만큼 우리 에이번드 대표팀은 이번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뒀다.”
범석이 차분히 자리에 앉았다. 어렵기는 하지만, 재미있는 미션이라 만족스러웠던 것이다.
“좋습니다. 받아들이죠.”
“그래. 그럼 나머지 라운드에서는 가만히 있어라. 1라운드 초반 때처럼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그러다 체력이 고갈되면 승부대결에서 지장이 크다.”
“네. 알겠습니다. 아예 대놓고 누워있죠.”
곤란한 표정을 짓던 클라크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범석이 경기 중에 누워있다면 성의가 없다고 많은 질타가 쏟아지겠지만, 도발이라고 얼버무리면 되었다. 그리고 아무리 전투가 벌어지지 않는다지만, 나무 위에 올라가 쭈그려 앉아 있는 것과 편히 눕는 것과는 체력 소모가 같을 수 없었다.
분명 어느 정도는 승부대결에 도움이 될 터였다.
“그건 네 마음대로 해라. 그럼 2라운드도 잘 부탁한다.”
“네. 알겠습니다.”
이후 범석은 2라운드에도 출전했다. 1라운드를 20분 모두 뛰었지만, 전투가 벌어지지 않았기에 체력이 소모되지 않았던 탓이다. 결국, 그는 2라운드 내내 숲 속 시냇가 근처에서 편히 누워 휴식을 취했다.
– 경기 종료! 승부 대결로 들어간다!
5라운드가 끝이 나자 범석이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몸에 묻은 먼지를 털어냈다. 이런 모습에 원정팬들이 야유를 보냈지만, 그는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그들이 질러대는 노성이 홈팬들이 범석을 연호하는 소리보다 클 리가 없었다. 범석은 곧 동료와 함께 숲 밖의 평지로 나와 대기했다.
잠시 후, 철교 위로 건너오는 자키드가 목청 높여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오범석! 너! 그따위로 행동할래! 경기 중에 누워있는 게 말이 돼!”
“하하하. 안 오시니 그런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런 도발에도 넘어가지 않다니, 자키드 씨 생긴 것 답지 않게 제법 정신수양을 쌓았나 봅니다! 저 두 손 두 발 다 들었습니다!”
그 말에 콧김을 세차게 뿌린 자키드가 그를 향해 달려나갔다. 하지만 곧 왕의 제지에 막혀 다시금 멈춰 섰다.
왕이 그의 뒤통수를 냅다 후려갈기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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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하루 되시고요. 그럼 전 내일 또 찾아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