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rfect World RAW novel - Chapter 470
472화
“가서 뭐 어쩌려고!”
자키드가 노기를 뿜어내는 왕을 쳐다봤다.
“아니 어르신도 방금 저 자식이 놀리는 것을 듣지 않으셨습니까? 제가 어떻게 화가 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가서 한 대 쥐어박고 명예롭게 퇴장당하게? 쓸데없는 짓 말고 가만히 있어라. 지금 나서지 않아도, 곧 놈과 싸울 장이 마련된다. 정 분하면 그때 가서 네 힘을 보여라.”
그러자 뒤따라온 해밀턴이 싱글벙글 웃으며 자키드의 어깨를 두드렸다.
“크크크. 그래 천하의 바보가 되고 싶지 않으면 왕의 말대로 네가 참아라. 저런 어쭙잖은 도발에 넘어가면 네 스스로 바보라고 인정하는 꼴이다.”
“하, 하지만……. 저놈 하는 꼴이…….”
순간 해밀턴의 날카로운 눈이 빛을 발하자, 자키드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는 평소에는 넉살 좋은 노친네이지만, 한 번 화를 나면 스승인 렘란트가 와도 말리지 못했다. 지금은 닥치고 조용히 있는 편이 신상에 좋았다.
다시 해맑은 미소를 지은 해밀턴이 왕을 바라봤다.
“커험. 그럼 가지.”
“네. 형님.”
경기에 출전한 모든 검투사가 한데 모여 진지한 논의를 벌이고 있었다. 아무리 다섯만 승부대결에 출전한다고 하지만, 무승부가 펼쳐진다면 승부가 결정될 때까지 대표 검투사를 내보내야 했다. 당연히 출전 검투사 5인에 선출되지 않았더라도 넋 놓고 있을 수만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전광판에 대전 명단이 뜨자 스텐드가 전체가 들끓었다. 에이번드의 5명 출전자의 맨 앞자락에 범석이 있음을 본 것이다.
“도대체 어찌 된 영문이야? 왜 오범석 검투사가 선봉이 되는데?”
“글쎄? 감독이 뭘 잘못 먹은 것 아니야? 어째서 저런 대진을 짰지?”
“뭐. 그래도 무슨 생각이 있겠지. 클라크 감독은 에이번드 대표팀을 월드컵 결승까지 올린 사람이라고. 별생각 없이 이런 짓을 벌였겠어?”
“하긴 그렇기도 하겠네.”
의문을 표시했지만, 팬들의 소요는 얼마 되지 않아 진정되었다. 에이번드 대표팀을 월드컵 결승까지 올려놓은 클라크와 검투사들을 믿은 것이다.
그 사이 양 팀의 출전 검투사 다섯이 앞으로 나와 자리했다. 승부대결이 시작되려는 순간이었다.
‘으음. 일단 첫 번째는 아스라인가?’
현재 이라트의 승부대결 출전 검투사는 선봉이 아스라, 2위는 에우리네, 중견은 왕, 부장은 해밀턴, 대장이 자키드였다. 일반적인 승부대결 전략과 벗어난 선택으로 아예 작정하고 범석을 잡겠다는 의도로 보였다.
지금 저들은 공격성 뛰어난 아스라로 에이번드의 승부대결 검투사 넷을 쓰러뜨린 다음, 방어능력이 뛰어난 에우리네와 1대1 승부에서 뛰어난 면모를 보이는 왕과 해밀턴으로 범석의 체력을 고갈시킬 참이었다. 그리고 자키드로 최종 승부를 펼쳐 이번 승부대결에서 승리할 요량이었다.
덕분에 선봉으로 나선 아스라가 당황한 기색을 역력히 드러냈다. 범석이 첫 번째라면 그녀가 첫 번째로 나선 의미가 전혀 없었다.
“아, 안녕하세요. 그런데 의외군요. 범석 님이 선봉이라니요?”
“후후. 뭐 그럴 수도 있는 거지. 원래 선봉은 젊고 공격적인 성향이 강한 검투사가 맡잖아. 내가 바로 그런 검투사 중의 하나이고 말이야.”
아스라가 시작시각이 다가옴을 확인하고는 자신의 검을 뽑았다. 대략 1미터 정도의 검인데, 반월 형태의 두터운 검신이 인상적이었다. 저런 중검이라면 자칫 잘못 스쳐도 행동불능에 빠져들 수 있었다.
“그렇기는 하겠군요. 그런데 범석님. 검을 뽑으셔야죠. 곧 경기가 시작될 거예요.”
“상관없다. 경기가 시작되고 검을 뽑아도 늦지 않는다. 너는 전혀 내 상대가 되지 않으니까.”
그의 자만심 가득한 발언에 아스라가 따지러 들려고 했지만, 다가오는 심판에 의해 제지당했다. 곧 시합이 시작될 예정이었다. 심판이 주변에 배치된 버드카메라를 확인하고는 번쩍 들었던 손을 내리며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경기 시작!”
동시에 아스라가 힘껏 앞으로 점프하며 칼자루에 손을 가져다 대는 범석의 머리 위로 반월도를 내리쳤다. 공중에 몸이 떠있으면 몸의 이동이 자유롭지 못해 위험하지만, 지금은 빠른 공격이 필요하기에 이런 공격패턴을 채용했다.
상대가 검을 뽑기 전이기에 안전하다고 믿었을 뿐만 아니라, 잘만 하면 초반 기습으로 범석을 쓰러뜨릴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럼 저 오만한 코를 납작하게 해줄 수 있었다.
“각오하세요! 이얏!”
허공에서 긴 포물선을 그리는 반월도의 궤적을 힐끔 바라본 범석이 슬며시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노린 바대로 아스라가 방심하며 빠른 기습을 펼쳐 오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그는 이번 대전에서 검을 뽑을 생각이 없었다.
범석이 곧 상체를 앞으로 숙이며 그녀의 품 안을 파고들고는, 그대로 검을 쥔 손목과 허리를 끌어안고는 그대로 엎어 쳐 버렸다. 그리고 반월도를 뒤틀어 아스라의 목을 단숨에 그었다.
어이없어하는 표정으로 몸이 경직되어가는 아스라. 이를 잠시 멍하니 바라보던 심판이, 범석이 힐끔 시선을 던지자 그제야 승부결과를 알렸다.
“오, 오 범석 승!”
순식간에 첫 번째 대결이 끝나자, 홈팬들이 모두 일어나 얼싸안고 고함을 질러댔다. 범석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이렇듯 이른 시간 내에 결착 지어질지는 몰랐다.
왕이 가만히 뒤로 돌아서는 범석을 바라보더니, 애꿎은 자키드의 머리를 후려갈겼다. 그가 머리를 부여잡고는 왕을 노려봤다. 마침 헬멧을 벗고 있었던 터라, 꽤 아팠다.
“아니. 어르신. 갑자기 또 왜 때립니까! 제가 뭘 잘못 했다고요!”
“이놈아! 방심하면 너도 한순간에 저렇게 되니, 조심하라는 거다! 범석 저놈 꼼수가 장난 아니다. 이리저리 휘둘리다 보면 그냥 한 방에 가는 거다.”
“아니 제가 바보입니까! 저런 한심한 수에 넘어가게요!”
“아까 네놈 하는 짓을 생각하니, 넘어갈 것 같으니까 하는 말 아니겠느냐! 하여간 저놈과 붙게 되면 정신 똑바로 챙기고, 절대로 도발에 넘어가지 마라. 괜히 우리 망신시키지 말고!”
자키드가 입을 삐쭉 내밀었다.
“그럼 잘나신 어르신께서 이기시면 되지 않습니까? 말하는 본새를 보니 거의 천하무적이신 것 같은데요.”
“이놈아 내 나이에 저런 창창한 젊은 놈을 어떻게 이기냐?”
자키드가 게슴츠레한 눈으로 왕을 쳐다봤다. 말이 막히면 꼭 나이를 들먹이면서 윽박질렀다. 솔직히 개조인간으로서의 나이는 왕이 훨씬 적었다.
“쳇. 신체나이는 저보다 적으면서요…….”
“그래. 이놈아. 솔직히 네 말대로 내가 너보다 신체 나이는 적다. 그런데 너무 적어서 모두 개발시키지 못한 걸 어떻게 하느냐! 하여간 입만 살아서……. 쯧쯧쯧.”
해밀턴이 역정을 부리던 왕이 어깨를 부여잡았다.
“왕. 조용히 해라. 에우리네가 출전한다. 이번에는 볼만할 테니, 집중해라.”
왕이 자리에 일어서는 에우리네를 주시했다. 그녀는 세계 최강의 검방 검투사. 방어로 일관한다면 아무리 범석이라도 쉽지 않았다. 게다가 그녀는 오늘을 위해 특별한 무구를 준비했다. 바로 갓즈나이츠 후미검투사들의 주요 무구 포지션 중 하나인 듀얼 실드였다. 어차피 공격할 의향이 없으니 검은 필요 없었다.
그녀가 양손에 쥔 타워실드를 서로 부딪히며, 장창을 들고 걸어나오는 범석을 바라봤다.
“우리 아스라를 아주 손쉽게 쓰러트렸더군요.”
“뭐. 여유지. 방심한 애만큼 요리하기 쉬운 상대는 없으니까.”
“하긴 그렇죠. 하지만 전 다르다는 사실을 잘 아시죠?”
범석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에우리네가 들고 나온 듀얼 실드가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듀얼실더는 범석이 검투계에 선보인 새로운 역할모델, 그 위력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녀가 완벽히 익히기만 했으면, 이번 대결은 무척 힘겨워질 터였다.
게다가 범석은 반드시 승리해야 하는 반면, 그녀는 5분만 시간을 끌면 되었다. 이런 처지의 차이는 그를 더욱 부담을 더욱 가중시켰다.
“잘 알지. 그런데 너 듀얼 실드 사용법은 완벽히 익히고나 있냐? 분명 가르쳐주는 사람도 없었을 텐데?”
“그 점은 걱정하지 마세요. 제 작년부터 권투 코치를 초빙해, 차근차근 기본기를 쌓았으니까요. 그리고 최근에서야 완성을 보았고요.”
범석이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녀가 듀얼 실드의 의미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탓이다. 이러면 정말 곤란했다.
“쳇. 그 얘기는 또 어디서 들었냐? 난 단 한 번도 언론에다 그런 소리를 흘린 적이 없는데.”
“후후. 갓즈나이츠의 비너스와 아겔리아의 전투 모습을 보면 다 알만한 내용이죠. 전투 방식이 권투와 거의 흡사해 모를 수가 없거든요.”
“쩝. 그러냐?”
입맛을 다신 범석이 착잡한 표정으로 전투 자세를 취했다. 제한시간 5분 안에 그녀를 쓰러뜨리려면 촉각도 아껴야 했다. 여유를 부리다가는 시간이 초과 되어 무승부로 이번 대결을 마무리 해야 할지도 몰랐다. 그럼 자신은 물러나고 티엘라를 비롯한 나머지 검투사들이 왕과 해밀턴, 자키드를 상대해야 했다.
“경기 시작!”
심판의 호령과 함께 범석이 세차게 창을 가로를 휘둘렀다. 그 강맹한 힘에 주눅이 들만 했지만, 에우리네는 방패를 교차해 가져다 대었다. 곧 귀청이 떨어질 듯한 타격음과 함께 방패가 크게 진동했다. 하지만 그녀의 자세는 추호의 흐트러짐도 보이지 않았다.
‘이거 심상치 않은데. 방어가 장난이 아니야. 그런데 에우리네 저것 중견이면서 이딴 방어기술을 왜 익힌거야!’
창끝을 되돌린 범석이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투덜거렸다. 중견이 듀얼 실드의 소양을 쌓다니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뭐 그녀로서는 자키드와 그를 비롯한 최강 3인방을 막기 위한 고육책으로 익혔지만, 범석으로서는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이얏! 간다!”
그가 연속적으로 강력한 타격을 날리며 에우리네를 공격해 들어갔다. 듀얼실더를 공략하기 위해서는 자세를 무너뜨릴 필요가 있었기에, 거세게 몰아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팔꿈치를 허리에 바짝 붙인 안정된 자세에서 그의 창을 적절히 튕겨내었다.
이를 봤을 때 확실히 듀얼 실더에 숙달된 것으로 사료되었다.
‘젠장 할. 두 번째부터 이렇게 체력을 빼버리면 안 되는데…….’
에우리네가 쉽게 공략당하지 않자 범석의 마음이 다급해졌다. 다섯을 모두 상대해야 하는 마당에 뜻밖에 복병을 만났으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라면 승리를 하더라도 그가 입을 체력적 데미지는 아주 컸다. 하지만 그녀를 쓰러뜨리지 않고서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그는 장창을 계속 휘두르며 에우리네의 빈틈을 찾아 나갔다.
쾅. 콰쾅. 쾅쾅.
범석이 순간 그녀에게 옆쪽으로 빠르게 이동했다. 제대로 공격이 먹혀들지 않으니, 빠른 이동으로 뒤를 점해볼 생각이었다.
물론 에우리네의 이동 반경이 적기에 그 가능성은 낮았다. 그가 몇 보를 움직여 위치를 변경해도 살짝 몸만 틀면 되니 등을 내어줄 리가 없었다. 그러나 그런 작은 동작에 빈틈이 나올지 모르니 해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회전의 축이 되는 에우리네의 오른발을 향해 창을 힘껏 뻗었다.
“그런 잔수에 당하지는 않아요!”
바로 상체를 숙여 바닥을 파고드는 창끝을 막은 에우리네가 바로 대시하며 몸을 날렸다. 아무리 듀얼 실더가 방어 일변도의 전투를 수행하지만, 공격을 전혀 하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가벼운 몸통 박치기나 방패 모서리를 통한 잽 공격을 할 수 있었다. 이에 범석이 바로 뒤로 점프함과 동시에, 창으로 그녀의 방패를 힘껏 두드리며 측면으로 미끄러지듯 피했다.
타격의 힘으로 공중에서 이동한 것이다.
덕분에 몸통 공격이 실패로 돌아간 에우리네가 그 고운 얼굴을 찡그리며 범석을 바라봤다.
‘역시 범석님의 센스는 보통이 아니야. 창의 타격을 이용해, 내 대시 공격을 피하다니 말이야……. 아무래도 공격은 자제해야겠어. 엄연히 내 목적은 어떻게든 오랫동안 범석 님을 붙들고 있는 것이니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겠지. 그리고 운이 좋아 5분의 시간을 끌어 이번 대결로 무승부로 만들면 내가 승리한 것이나 마찬가지야. 당연히 내가 서두를 이유는 없어.’
에우리네는 굳건한 방어자세를 취했다. 정면 전체가 방패에 가로막혀 있었던 터라, 공격할 곳을 마땅히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이 모습에 뒤에서 관전하던 자키드가 난데없이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내심 자신의 경쟁자로 생각하는 범석이 에우리네에게 고전하자, 짜증이 난 것이다.
“아니. 뭐 저런 아이를 쓰러뜨리기 뭐가 어렵다고 이렇게 시간을 끌어. 후딱 해치우고 내게 와야지. 저 자식 오늘 뭘 잘못 먹었나?”
“후후. 자키드. 너를 이긴 저놈이 고전하니, 배알이 꼴리냐?”
왕의 조롱에 자키드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제가 왜 배알이 꼴립니까? 그냥 저놈 하는 꼴이 한심해서 해본 말이죠.”
“뭐가 한심한데? 너라면 저 범석이라는 놈보다 잘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으냐?”
“당연하지 않습니까? 에우리네. 저 아이는 지금까지 저에게 한 번도 이긴 적이 없었습니다! 앞으로도 마찬가지고요.”
왕이 한심하다는 듯 그를 지그시 바라봤다. 검술은 저리 출중한 놈이 대세를 보는 눈이 이리 없는지 안타까웠다.
자신이 보기에는 자키드는 범석보다 더 고전하리라 생각되었다. 신체적 능력이 거의 비슷한 상황에서 전혀 공격할 생각 없이 두 개의 방패를 사용해 방어에만 몰두한다면, 공격자가 파고들 구석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쯧쯧쯧. 자신이 강하다는 생각에 남을 한 없이 약하게 보다니, 네놈의 한심함이 극에 달했구나.”
“그럼 에우리네가 저보다 강해졌다는 겁니까?”
“멍청한 놈아 누가 너보다 강하다고 했느냐? 약자도 약자 나름의 생존법칙이 있다는 얘기지. 지금 에우리네 저 아이는 저놈과 네놈의 상대법을 찾아내서 지금 세상에 꺼내 보였다. 어차피 상대되지 않으니 철저히 막아버린다는 거지. 아마 조금만 있으면 네놈도 리그 경기에서 제법 고생 좀 할 거다.
저런 성과를 봤으니, 다른 팀에서 듀얼 실더를 악착같이 키워낼 테니까 말이다.”
왕이 이렇게 말하니, 자키드로서도 새삼 다른 눈으로 에우리네를 바라봤다. 하여간 범석을 저리 고전하게 할 정도라면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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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늘 부터 추석 연휴네요. 모두들 즐거운 추석 맞이 하시고요. 전 내일 또 찾아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