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rfect World RAW novel - Chapter 472
474화
“후후. 한번 말만 뻔지르르한 젊은 아해의 솜씨를 보자!”
왕의 검이 범석을 향해 날아들었다. 예리한 궤적을 그리며 주변을 압박해 들어가는 검압에 그는 긴장 어린 눈빛으로 창을 휘둘러나갔다.
지금 왕의 손에서는 아주 정통적이고 노련함이 가미된 수준 높은 검술이 펼쳐지고 있었다. 기교보다는 수 싸움을 우선시했고, 빠름 보다는 물 흐르는 듯한 자연스러움을 강조하는 검식을 사용했다.
마치 오랫동안 연마된 검을 보는 느낌이랄까? 이런 상대에게는 절대 실수는 금물이었다. 최악의 경우에는 단숨에 당할 수도 있을뿐더러, 못해도 수에서 밀리게 되었다.
결국, 범석은 왕과 상대함에 있어, 한 수 한 수에 정심을 쏟아부을 수밖에 없었다.
“탸핫!”
범석이 창끝을 깊숙이 밀어 넣으며 왕의 복부를 노렸다. 그는 검을 역으로 꺾어 튕겨낸 후, 바로 앞으로 내달리며 검끝을 날렸다.
이내 강한 불꽃이 튈 정도의 충동과 함께 서로 다른 두 무구가 허공에서 맞부딪혔다. 그리고 창과 검의 힘겨루기가 이어지자, 왕이 인상을 찡그리며 뒷걸음질을 쳤다. 여지없이 힘에서 밀려버린 것이다.
“고, 고놈! 힘이 아주 장사구나!”
왕이 재빨리 검을 물리고는 측면 쪽으로 스텝을 밟으며 빠져나왔다. 힘 대결은 역시 무리라고 판단한 것이다. 이에 범석이 뒤쫓기는 포기하고 그 자리에서 호흡을 가다듬었다. 쉽게 당할 자가 아니었기에 수를 아끼자는 의도였다. 지금은 2위로 나선 에우리네와 상대하며 얻은 체력 소모를 생각해야만 했다.
양손으로 창대의 중심축을 잡은 그가 묘한 시선으로 왕을 쳐다봤다.
‘그런데 이상하군. 아무리 초반이라지만, 너무 공격적이야. 난 왕님이 방어 일변도로 나갈 줄 알았는데…….’
몇 합을 주고받은 지금 공격적인 수를 많이 쓴 자는 바로 왕이었다. 이번 승부대결에서 그가 자신의 체력을 소모하게 하기 위해 방어에 치중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던 범석으로서는 고개를 갸우뚱하게 할만한 일이었다. 그래도 전혀 나쁘지만은 않았다.
아니 다행이라고 하는 편이 옳았다. 왕이 공격에 주를 두면 그에게는 하등 나쁠 일이 없었다.
그는 곧 방어자세를 취하고는 왕을 기다렸다.
“역시나 정통파 검수답게 이거 만만치 않습니다. 조심하지 않으면 오히려 제가 당하겠는데요.”
“후후후. 당연한 소리. 난 평생을 검을 익혀온 검사다. 네놈이 아무리 타고난 재능이 뛰어나도 쉬이 상대할 수는 없을 게다.”
그 말에 범석이 고개를 흔들어대며 말했다.
“그게 무슨 겸손의 말씀이십니까? 왕님은 신체적인 면이 좀 떨어져서 그렇지, 검술 면에서는 저를 많이 앞섭니다. 노련미에 수를 보는 안목까지 정말 감탄스러울 정도입니다. 실상 조심해야 사람은 바로 저입니다.”
“후후. 아해가 제법 보는 눈이 있구나.”
“당연하지 않습니까? 딴에는 저는 현재 세계 최강의 검투사입니다. 최소한 상대가 어느 정도 실력을 지녔는지쯤은 잘 알고 있습니다. 아마도 오늘 왕님과 상대하면서 많은 가르침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왕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입에 걸었다. 범석이 존경을 표시해오니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후후. 그리하냐? 오냐 내가 오늘 네게 진정한 검술이 뭔지를 보여주겠다.”
그 말을 한 왕이 득의양양 표정으로 검을 힘껏 내질렀다. 그리고 창대에 막히자 바로 연속적으로 휘저으며 그를 압박해갔다.
연신 뒷걸음질을 치며 간신히 공격을 막아내는 범석을 바라본 자키드가 희미한 미소를 입가에 그었다. 범석이 왕에게 밀려서가 아니었다.
사실 그는 왕이 처참하게 패했으면 하는 바람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지니고 있었다. 그동안 뒤통수를 후려 맞은 횟수가 수도 없이 많았던 탓이다.
게다가 매일 잔소리에 꾸중이 연발이었고, 항시 바보 취급을 받으며 무시를 당했다.
“캬~ 범석이 저놈 언제봐도 대단한 놈이란 말이야. 하여간 사람을 가지고 노는데 일가견이 있어.”
옆에서 그의 혼잣말을 엿듣던 해밀턴이 물끄러미 바라봤다.
“자키드 그게 무슨 소리냐?”
“간단히 말해서 곧 왕 어르신이 패한다는 소리입니다.”
한 참 공격을 퍼붓는 왕을 잠시 바라본 해밀턴이 말했다.
“지금 왕이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는 것 같은데, 당해? 어째서 그런 장담을 하는 것이냐?”
“후후. 범석 저누마가 왕님에게 밀려요? 지나가는 개가 다 웃겠습니다. 그 정도의 실력자였다면 제가 놈에게 패하지도 않았습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던 해밀턴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현재 세간에서는 자키드보다 범석의 실력을 우위에 두고 있었다. 그리고 왕은 자키드와 대련을 펼쳐 단 한 번도 승리를 점한 적이 없었다. 힘의 역학 관계상 범석이 저리 밀리고 있다는 사실이 좀 이상해 보였다.
“으음. 일리가 있는 얘기군. 그런데 어째서 저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그야 간단합니다. 세상에서 젊은 놈의 객기만큼 무서운 것이 없는데, 더 무서운 것이 바로 늙은이의 꼰대정신이기 때문이죠.”
“꼰대정신?”
“네. 그런데 이 꼰대정신이라는 것이 제법 오묘합니다. 이치에 맞는 추궁에는 불같이 화를 뿜어대는데, 독이 담긴 감언이설에는 봄볕 아래 눈처럼 여지없이 녹아내립니다. 지금 왕님의 경우가 바로 후자죠.”
대충 눈치를 챈 해밀턴이 인상을 찌푸렸다. 자신도 나이 많은 노인이기에 달갑게 들릴 리가 없었다.
“자키드. 네가 우리에게 불만이 아주 많았던 모양이구나. 아무래도 나중에 잠시 시간을 내서 따로 한 번 봐야겠다.”
자키드가 바로 박장대소를 하며 검지로 해밀턴을 가리켰다.
“하하하. 그게 바로 꼰대정신입니다. 절대 진실 된 충고가 귀에 들어오지 않죠. 크크크.”
“이놈의 자식이!”
해밀턴이 벌떡 일어남과 동시에 범석의 창끝에 복부를 강타당한 왕이 허공을 날았다. 그리고 바닥에 떨어지며 구름과 동시에 심판의 판정이 이어졌다.
“경기 끝! 오 범석 승리!”
멍한 표정을 지으며 왕을 바라보는 해밀턴. 배꼽을 잡고 뒤집어지는 자키드. 그 가운데 겸연쩍은 표정을 한 범석이 쓰러져있는 왕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이런 왕님께서 그런 실수를 하실 분이 아닌데……. 하여간 오늘은 제가 운이 좋았습니다.”
손을 맞잡은 왕이 자신의 다리를 원망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봤다. 공격에 치중하는 바람에 스텝이 약간 꼬여, 범석에게 공격의 빌미를 제공했다. 참으로 아쉬운 일로, 두고두고 한이 맺힐 듯 보였다.
“하는 수 없지. 모두가 실수를 범한 내 잘못이라고 할 수 있네.”
“절대 아닙니다. 저는 항시 영상을 통해 왕님의 플레이를 지켜보고 있기에, 이런 실수를 거의 하지 않으신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습니다. 정말 운이 좋지 못한 것뿐입니다.”
“그야 그렇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우리 같은 실력자들 간의 대련에서 승패란 하늘이 정해주는 것. 다 내가 감내해야 할 일이네.”
고개를 저은 범석이 긴 한숨을 내리 쉬며 자리를 털고 일어서는 왕을 바라봤다.
“휴~ 그리 생각하신다면 저로서는 뭐라 할 말이 없습니다. 그저 당당히 패배를 인정하시는 왕님이 존경스러울 따름입니다.”
“후후. 당연한 일이네. 진정한 검사에게 패배란 승리를 위한 양식. 당연히 인정해야지.”
그 말을 들은 범석이 매우 감탄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 그렇군요. 오늘 제가 검술뿐만 아니라, 검사로서의 도리에도 큰 배움을 얻는 것 같습니다. 정말 오늘 왕님의 가르침을 마음 깊이 새기겠습니다.”
“후후. 알아들었으면 됐네.”
아쉬운지 돌아가는 왕의 어깨가 축 늘어져 있었다. 이런 그를 맞이하는 자키드는 오묘한 표정으로 웃음을 참느라 죽을 둥 살 둥했고, 해밀턴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시선으로 쏘아보고 있었다.
“왕. 아주 잘해줬구나. 아주 훌륭해.”
“아닙니다. 형님. 부끄럽기 그지없습니다.”
“부끄러워? 아니 다행이군. 나 같아도 저런 병신같은 수작에 당했으면, 쪽 팔려서 얼굴을 못 들지. 어떻게 하는 꼬락서니가 저기 자키드만도 못하냐?”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해밀턴이 배를 움켜잡고 어깨를 들썩거리며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는 범석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 멍청한 놈아! 네놈은 지금 저 어린놈에게 놀아나고 돌아온 거다! 뭐? 진정한 검사에게 패배란 승리를 위한 양식이라고? 아무래도 넌 그냥 접싯물에 코 박고 뒤지는 편이 낫겠다. 실상을 알면 창피해서 못살 테니까. 쯧쯧.”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던지 왕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형님. 지금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제가 뭐에 놀아났다는 겁니까?”
“정 궁금하면 자키드 놈에게 물어보거라. 나보다 저놈이 더 잘 아니까. 에잉 한심한 것하고는……. 쯧쯧쯧.”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왕을 보자 자키드가 결국 참지 못하고 폭소를 터뜨리며 나뒹굴었다. 이를 본 해밀턴이 못마땅한 듯 입술을 꽉 깨물고 결투의 장으로 걸어나갔다. 지긋한 어르신을 가지고 논 범석에게 예의라는 것을 단단히 가르쳐줄 요량이었다.
그는 심판의 입장 사인이 나가도 전에 범석을 손가락질로 불렀다.
“이놈! 감히 어르신을 놀려! 단단히 버릇을 고쳐줄 터이니, 빨리 나오거라!”
자리에 앉아 잠시 휴식을 취하던 범석이 물끄러미 해밀턴을 바라봤다. 뭔가 단단히 역정이 나 있는지 그의 안면 실드 안으로 비치는 표정이 가히 볼만한 정도로 일그러져 있었다. 그리고 지금 왕은 자키드를 구타하며 자신을 죽을 듯이 노려보는 중이었다.
‘젠장. 눈치깠네. 해밀턴 님까지 이런 식으로 넘기면 자키드 씨를 상대하기 하기 편했을 텐데. 하여간 노친네들 눈치 빠른 건 알아줘야 해.’
속으로 투덜거린 범석이 해밀턴의 도발을 무시하고 심판을 주시했다. 미리부터 나가 휴식시간을 줄일 필요는 없었다. 세 명을 상대하느라 지쳐있었기에, 그에게 휴식은 아주 간절했다.
이런 그의 무시에 화가 났는지 해밀턴이 노성을 퍼부어댔다.
“이놈! 빨리 나오지 않고 뭐하는 게냐!”
“참나. 얼마 되지 않는 휴식 시간인데, 좀 쉬게 내버려 두십시오.”
“이놈이 그래도!”
해밀턴의 언성이 커지자, 심판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노인이 젊은이의 잘못을 꾸중하는 것이야 당연한 일이지만, 여기는 실력으로 모든 것을 판가름하는 프로의 장이었다.
절대 티가 날 정도로 상대하게 위압감을 주는 행동을 해서는 안 됐다. 게다가 심판의 눈에는 범석은 그 어떤 잘못도 하지 않았다.
아니 아까 왕과 상대함에 있어, 예를 다하기까지 했기에 훌륭한 청년이라고 여겨졌다.
결국, 심판의 입에서 경고성 발언이 튀어나왔다.
“해밀턴 님. 그런 발언은 자제해주십시오. 지금 수많은 관중이 저희를 보고 있습니다.”
“아니. 저놈이 내가 나오라는 데도 나오지 않잖은가!”
“지금은 휴식시간입니다. 당연히 오 범석 검투사는 휴식을 취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니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십시오. 계속 이러시면 실격처리하겠습니다.”
그러자 해밀턴이 입을 꾹 다물었다. 자신이 실격처리가 되면 왕의 복수를 해줄 길이 없었다. 그리고 자키드는 세 명만 싸운 범석을 상대해야 했고, 만약 이때 범석이 승리하게 되면 오늘 패배에 대한 모든 과실이 자신에게 전가되게 되었다.
‘하는 수 없지. 잠시 기다리는 것뿐이니, 내가 참아야지.’
잠시 후 경기 시작 시각이 다 되어가자, 심판이 범석을 불렀다. 그는 차분히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창을 양쪽 어깨에 걸치고 앞으로 나왔다. 그리고 자신을 노려보는 해밀턴을 정중한 예의로 응대했다.
“이런 저명하신 해밀턴과 대결을 펼치게 되다니, 참으로 영광입니다.”
“지랄하지 말고. 그 입 닥쳐라! 네놈의 간계를 내 모를 것 같으냐!”
“아. 그게 무슨 섭섭한 말씀이십니까? 전 그저 검도계의 큰 어르신인 해밀턴 님을 존경해 마지않아 말씀 올리는 것뿐입니다.”
해밀턴이 바로 허리에 찬 검을 거친 몸동작으로 뽑았다. 그의 수작이 통하지 않음을 보여주려는 간접적인 의사표현이었다.
“난. 왕 저놈과 다르다. 네놈의 수작에 절대 넘어가지 않으니, 단단히 각오하는 편이 좋을 게다.”
“아. 그렇습니까? 이런 아쉬운데요.”
기어이 본심을 털어놓은 범석이었다. 아부가 통하지 않으니, 도발로 바꿔보려는 것이다. 다행히 해밀턴은 티가 날 정도로 노기를 뿜어대고 있었다.
“이제 실토하는군. 역시나 왕이 당한 게로구나.”
“뭐. 어쩔 수 없는 일 아닙니까? 심리전도 싸움의 일부분이니까요.”
“하긴 그렇지. 심리전에 당한 놈이 등신이지.”
표정을 진중히 하고는 호흡을 가다듬은 해밀턴이 순순히 인정했다. 맞는 말이기도 하지만, 지금 범석이 도발을 시도하려는 낌새를 눈치챘던 탓도 한몫했다. 괜히 역정을 내봤자 심기만 어지러워질 뿐이니, 지금은 앞으로의 대결에 집중할 필요가 있었다.
“후후. 그렇죠. 하지만 제발 해밀턴님은 아니기를 빕니다. 왕님은 너무 싱거웠거든요.”
“알고 있다. 그래서 돌아간 후 단단히 혼쭐을 내줄 참이다.”
“그래요? 하지만 해밀턴님이 꾸중할 계제는 아닌 듯 보이는데요?”
“그게 무슨 소리냐?”
“지금 해밀턴님의 심기는 크게 흔들리고 있습니다. 검과 자세를 보면 충분히 알 수 있는 일이죠.”
해밀턴이 자신의 마음가짐과 자세를 체크한 후, 그를 노려봤다. 아무런 이상도 없었던 것이다.
“이놈! 혀가 아주 뱀의 그것과도 같구나! 감히 누굴 속이려 드느냐!”
“아. 그러십니까? 모르시면 어쩔 수 없고요. 하여간 다행입니다. 해밀턴 님이 이런 마음의 흔들림을 눈치를 못 채시다니요. 아무래도 이번에도 제가 쉽게 이길 것 같습니다.”
그 말에 해밀턴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지금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자신의 평정심을 깨기 위한 수작임을 모를 리가 없었다. 만약 그의 말에 넘어가 지금의 자세를 무너뜨린다면, 패배는 너무도 자명했다.
곧이어 심판이 경기 시작을 알리자, 해밀턴이 바로 눈을 뜨고는 날아오는 창격을 튕겨냈다.
============================ 작품 후기 ============================
메리 추석입니다. 구름 한 점 보이지 않아, 보름달도 아주 잘 보이네요.
그럼 모두들 친척 러쉬 조심하고요. 전 내일 또 찾아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