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rfect World RAW novel - Chapter 492
494화
“그러다가 지면 톡톡히 망신을 당하실 텐데요?”
“당해도 내가 당한다. 네가 당할 망신이 아니니 상관 마라.”
“휴~ 자신감이 대단하시네요. 정말 그 배포가 놀라울 지경이군요.”
“그래서 짚겠다는 거야 말겠다는 거야? 싫으면 그냥 하고.”
아멜리에가 피식 웃으며 검이 떨어진 방향으로 게걸음을 걸었다. 짜증 나는 호의지만,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여기서 자신이 당하면 팀은 필패였다.
“당연히 사양할 리가 없죠. 호의. 감사히 받을게요.”
“후후. 감사까지…….”
그녀가 검을 주으며 말했다.
“그런데 한 가지만 물어도 될까요?”
“오브 컬스~ 얼마든지.”
“혹시 자키드씨에게도 이런 기회를 주실 건가요?”
“이미 줬다.”
아멜리에가 쌍검을 교차하며 피식 웃었다.
“후후. 왜요?”
“당시 자키드 씨도 평정심을 잃고 있었거든.”
“그럼 설마…… 저도?”
“맞다. 너도 평정심을 잃었기에 다시 기회를 준거다. 그런 식으로 널 쓰러뜨리면 왠지 찝찝해서 말이야.”
“아니 그런 어처구니없는 짓을 왜 해요? 제가 그렇게 만만해요?”
“그런 뜻이 아니다. 내가 전에 말했잖아. 최강의 자리는 상대를 이긴다고만 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고 말이야. 특히나 이 검투 경기는 더 그래. 매년 몇 번씩 수십 년간 싸울 텐데, 그 중 한번 안 질까? 그런데 그때마다 간단히 최강의 자리가 바뀌어 봐라. 그럼 최고란 의미가 퇴색되겠지. 안 그래?”
“그렇기는 하죠. 그런데 그게 이 일과 무슨 상관이죠?”
“간단해. 사실 사람들 대부분은 자신이 남들보다 뛰어나다고 착각하거든. 그렇기에 최고의 자리는 자신 스스로 잘났다고 생각해서 올라서는 것이 아니라, 남들이 인정했을 때야 비로써 올라서게 되지. 아니라면 모두가 최고일 테니까. 즉 내가 최강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서는 대중과 너희 검투사들에게 인정을 받아야 한다는 뜻이야. 그런데 오늘 네가 이 상태로 지게 된다면 오늘의 컨디션을 탓하며 네 머리 위에 내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거지. 그래서 다시 기회를 주는 거다. 네가 수긍할 때까지 말이다.
”
아멜리아가 멍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봤다. 최고를 향한 열정에 놀란 것이다.
기록만을 따지는 검투계에서 저런 사상으로 최고를 노리는 자가 정말 있을지 몰랐다. 바보 같은 짓으로 보이기도 했지만, 그녀는 지금 심각했다.
아무래도 오늘 지게 된다면 그에게 마음속 깊이 굴복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런 짓거리는 그 누구도 쉽게 하지 못했다.
‘저, 절대 져서는 안 돼. 반드시 이겨야 해!’
아멜리에가 흐트러진 심기를 가다듬고 쌍검을 차례로 곧추세웠다. 곧 그가 공격해 올 것임을 알고 있었던 탓이다. 범석은 지금 기수식을 취한 후 그녀에게 날카로운 시선을 날려대고 있었다.
기가 죽을 수 없던 아멜리에가 소리쳤다.
“오세요!”
“후후. 물론이지.”
순간 빛을 발한 창끝이 그녀의 면전으로 날아오고 있었다. 빠르고도 무거운 일격이라, 아멜리에가 뒤로 힘껏 점프하며 피했다. 아까 무리하게 막다가 검을 놓친 기억이 떠오른 탓이다. 하지만 그의 창끝은 멈추지 않고 바닥에 충돌함과 동시에 기괴하게 꺾이며 아멜리에의 무릎을 향해 날아갔다.
“이얏!”
아슬아슬하게 쌍검을 동시에 내려 창을 막은 아멜리에가 급히 상체를 틀었다. 그가 다시 거리를 좁히더니 펀치를 날린 탓이다. 정말 한시도 방심할 수 없는 상대라고 생각한 그녀가 측면으로 빠지며 공격거리에서 벗어났다.
뒤이어 쏟아지는 간결하고 빠른 공격들.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은 아멜리에가 바삐 검을 휘둘러 타점을 흐트러뜨렸다.
차창. 창. 창. 캉캉.
격돌이 벌어질 때마다, 아멜리아의 표정은 더욱 심각해져 갔다. 원심력이 담긴 창을 계속 막느라, 손목이 마비되는 느낌을 받았던 탓이다.
과거 처음 이 둘이 맞붙었을 때는 아멜리에가 우월한 힘을 바탕으로 일방적으로 공격을 퍼부으며 그를 궁지로 몰아갔다. 하지만 이제는 역전이 되어 그녀가 범석의 파워를 못 이기는 실정이 되었다. 물론 그때만큼 현격한 차이는 아니었지만, 아멜리에로서는 정말 격세지감이 느껴지는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크으. 이런 날이 올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날카로운 바람이 안면 근처에서 스치는 느낌에 아멜리에가 기겁하며 몸을 피했다. 헬맷을 착용해 바람이 느껴질 리 만무하지만, 범석의 창끝은 그런 착각을 일으킬 만큼 맹렬했다.
참으로 두려운 상대라고 절절히 느낀 그녀가 두 눈을 파르르 떨었다. 그는 오만하지만, 그만한 실력이 뒷받침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대로 패할 수 없었던 아멜리에로서는 사력을 다해 상대할 수밖에 없었다.
‘후후. 역시 이 정도는 하는군. 하지만 무구에 의지한 검술이라 확실히 한계가 있어.’
범석이 바라본 아멜리에의 실력은 예상 그대로였다. 노련한 동작에 실수는 없고, 간혹 펼치는 예리할 정도의 공격까지. 역시나 한때 한 시대를 풍미했던 전설적인 존재답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창의 리치로 변형검의 변화가 쓸모없어진 지금. 그녀에게는 자신과 비슷한 수준으로 싸울 저력이 없었다.
그가 창을 힘차게 휘두르며 압박해나갔다. 거의 기력이 다해가는 상대였지만, 방심할 이유는 없었다. 이번 대전에서 패한다면 그는 톡톡히 망신을 당했다.
“자. 계속 밀어붙여!”
“다들 조심해! 누군가 먼저 당하면 끝장이야!”
한편 양 팀 간의 본진 대결도 치열한 양상으로 번져가고 있었다. 그동안의 교전으로 이미 양 팀의 진형은 무너졌고, 검투사들은 난전으로 변한 결투의 장에서 검과 창을 휘둘러댔다.
이 중에서 가장 돋보이는 존재는 단연 프리시카였다. 노환을 겪는 라카미로, 세계 검투사 순위 7위까지 치고 올라선 보르미아를 한껏 밀어붙이며 승부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었던 것이다.
순위 차이는 겨우 3단계뿐이지만, 이들 간의 실력 차이는 너무도 컸다.
어느새 프리시카의 거친 몸동작에 검과 방패를 잡은 두 팔이 하늘로 튕겨져 올라간 보르미아가 눈을 부릅떴다. 열린 몸을 향해 프리시카의 검이 빠르게 뻗어오기 때문이다. 이내 허리 인근에 강력한 타격을 당한 보르미아가 바닥을 구르더니, 몸을 경직시켰다.
“자. 됐다!”
프리시카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자신의 다음 상대를 찾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녀는 곧 한 녹색 머리칼의 여인을 확인하고는 급하게 뛰어갔다. 바로 마델이었다. 그녀는 마침 요시아를 꺾고 다른 채플린 위스퍼 검투사와 맞상대하는 렌카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마델! 어딜 가! 넌 내 상대다!”
불연 듯 고개를 젖힌 마델이 표정을 구겼다. 그녀는 검투사 순위 10위에 올라있었지만, 프리시카를 상대하기에는 실력이 다소 모자랐다. 그래도 그녀를 등 뒤에 놓을 수는 더욱 없는 일. 칼자루를 쥔 손에 잔뜩 힘을 불어놓고는 거칠게 날아오는 검을 튕겨냈다.
‘이런 안 되겠어. 우리 편이 불리해.’
한참 범석을 상대하고 있던 아멜리에의 시선이 자꾸 본진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여전히 수적으로는 대등하지만 프리시카에게 계속 팀 내 핵심급 검투사들이 차례로 당하는 바람에, 채플린 위스퍼의 기세가 눈에 띌 정도로 꺾였다.
이러다가 마델조차 당하기라도 하는 날이면, 전세는 급격히 갓즈나이츠로 기울어지게 되었다.
그때 범석이 그녀를 향해 뚝 한마디 내던졌다.
“아멜리에. 뭐해! 설마 또 봐달라는 거야!”
번뜩 정신을 차린 아멜리에가 다시 시선을 그에게 집중했다. 하긴 지금 그녀가 본진을 걱정할 처지가 아니었다. 아멜리에도 본진만큼 위험한 상황이었다.
“그렇지는 않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시고 오세요!”
“당연히 그래야지.”
짜증스러운 얼굴을 푼 범석이 거대한 파도와 같은 형상으로 그녀를 엄습해갔다. 사방을 점하듯 쏟아지는 창격은 이동조차 힘들게 할 정도로 매서웠다.
순간 검을 타며 미끄러지는 창끝이 아멜리에의 안면을 스쳐 지나갔다. 완벽히 방어하기는 했지만, 그것이 문제였다.
지금 그녀의 동작 하나하나는 범석의 뇌리에 아로새겨지며 적적한 대응법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후후. 이제 곧이다.’
범석은 승부의 결말이 목전에 왔음을 깨닫고 있었다. 새롭게 적용하는 창격의 변화가 잘 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벌써 몸에만 스친 것도 여러 번. 이대로 승부를 이끌고 나간다면, 결국 아멜리에는 실수를 범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
“자. 간다!”
기묘한 변화를 일으키며 회전하는 몸과 함께, 연이은 창격이 그녀에게 쏟아졌다. 여전히 잘 버티고 있지만, 검을 쥔 손은 서서히 힘을 잃기에 어디까지 갈 줄은 몰랐다. 그래도 그녀는 없는 힘까지 끌어내어 상대했다. 여기서 지게 되면 영원히 범석의 밑줄에 설 것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 이거 오범석 검투사와 아멜리에의 대결과 달리, 갓즈나이츠 본진의 공세가 너무 느슨한데요. 거의 승리를 점한 상태임에도 서로 눈치만 보고 공격의 끈을 놓고 있습니다. 이러다가 오범석 검투사가 당하기라도 하는 날이면 이 좋은 기회를 놓칠 수 있습니다.
– 그러게 말입니다. 지금 무슨 영문이지 모르겠군요.
중계진들의 우려에도 불과하고 갓즈나이츠 본진은 전혀 기세를 올릴 생각을 하고 있지 않았다. 현재 수적 비율은 7대 5. 2명이나 많은 상황이라 손쉽게 승부를 결말지을 수도 있는데, 양 본진 간의 전투는 지루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마치 무승부를 바라는 듯한 형상처럼 보이기에, 팬들의 불만도 높았다. 그도 그럴 것이 갓즈나이츠가 첫 라운드 승을 가져가면, 이번 경기에 승리한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거지? 충분히 이길 수 있는데……. 공격을 전혀 안 해.”
“그러게 말이야. 이번 라운드에 승리한다면 채플린 위스퍼로서는 정글전에 뛰어들 수밖에 없다고. 그럼 우리의 승리가 자명해.”
하지만 갓즈나이츠 검투사들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범석이 아멜리에에 승리하기를 원하고 있기에, 여기서 경기를 끝낼 수는 없었다. 휘하 엘프로서 또 연인으로서 승리를 잠정적으로 미루더라도 그의 의지에 따르고 싶었다. 그리고 가만 보니 승부가 그리 오래가지는 않을 듯 보였다.
“이얏!”
아멜리에는 점차 궁지에 몰렸다. 계속되는 범석의 공격을 간신히 막기만 할 뿐, 역공은 꿈도 꾸지 못했다. 그리고 이후 최후의 시간이 도래했다. 그의 세찬 내려치기에 두 팔이 밀리면서 반월날 부위에 오른쪽 어깨를 베인 것이다.
퉁겨져 떨어져 나간 검 한 자루가 땅에 구름과 함께, 범석의 절제된 올려치기가 이어지자 남을 검 하나도 크게 뒤로 젖혔다. 그는 곧 두 손을 역으로 꺾으며 창대 뒤쪽 모로 아멜리에의 목 언저리를 깊게 베어버렸다.
“크으윽…….”
힘없이 바닥에 무릎을 꿇는 그녀가 도저히 범석을 바라볼 생각도 못한 채 앞으로 고꾸라졌다. 완벽한 패배. 이제 아멜리에도 자신이 세계 최강이 아님을 인지했다. 그는 이제 도저히 넘어설 수 없는 벽이 되어, 저 높은 곳으로 향해 가고 있었다.
‘후후. 끝났군. 자. 그럼 이번 라운드를 끝내버릴까?’
그리 긴 시간이 남지는 않았지만, 승리를 따내는 일은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었다. 아멜리에가 당한 장면을 본 나머지 채플린 위스퍼 검투사들이 지레 겁을 먹고 뒷걸음질을 치던 모습이 생생히 포착되고 있었던 탓이다. 수적으로도 밀리고 사기까지 저조한 상황에서 범석까지 합류하니, 승리는 너무도 당연했다.
곧 동료와 함께 채플린 위스퍼 검투사를 공격을 가한 범석이 끝내 대장인 아비스를 잡아 2라운드 승을 따냈다.
와아아아!! 와아아아!!
“갓즈나이츠 잘했다! 너희가 최고다!”
“자. 이대로 리그 우승까지 잘 부탁한다!”
겨우 2라운드가 끝났을 뿐이지만, 경기장은 홈팬들의 환희에 찬 메아리로 가득했다. 마치 경기가 끝난 듯한 그 행동들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제 갓즈나이츠가 선제공격을 펼치는 멍청한 짓만 하지 않으면, 승리는 떼놓은 당상이었다. 세계 3대 정글전 명수가 있는 상황에서 갓즈나이츠가 숲 속에서 패한다는 것이 결코 말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절망을 느끼고 떠나는 몇몇 원정팬들을 보면 충분히 알 일이었다.
“축하해요. 주인님! 이제 저희가 이긴 것이나 다름없어요.”
다이아나가 환하게 웃으며 더그아웃으로 들어오는 범석을 마중했다. 다만 약간은 걱정스러운 기색이 좀 띄웠는데, 그의 의중을 아직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아멜리에를 이긴 일에 도취하여, 3라운드도 전면전으로 가자면 여간 골치가 아니었다.
“뭐. 운이 좀 좋았다. 아멜리에가 거기서 본진에 귀환하지 못할 줄 누가 알았겠냐. 후후후.”
“네. 그런 면도 좀 있었죠. 그런데 주인님 3라운드는 어떻게 하실 건가요?”
“글쎄다. 이번에도 주력이 나가야 하지 않을까? 정글전을 펼쳐 1승을 더 올려야지.”
“그럼 오늘 전면전은 하지 않으시는 건가요?”
범석이 피식 웃었다. 아멜리에를 이긴 이상, 채플린 위스퍼에는 미련이 없었다. 이제 갓즈나이츠는 이대로 쭉 우승으로 가면 될 뿐이었다.
“당연히 안 하지. 내가 골 볐냐? 이제 나에게 필요한 것은 월드리그 우승 트로피뿐이다. 너도 그렇게 알고 있어.”
그 말에 다이아나가 밝게 미소 지으며 경기장을 바라봤다. 그렇다면 정말 다행히 아닐 수가 없었다. 그동안 범석의 고집으로 쉬운 경기를 어렵게 풀어간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제 단독 1위에 오른 마당이니, 앞으로 남은 경기들을 적절히 풀어나갈 수 있다면 우승 가능성은 아주 높았다.
‘좋아. 이 승점 3점을 반드시 지키겠어. 그럼 우승이야.’
이날 갓즈나이츠는 예상대로 승리를 거두고 승점 3점을 얻어냈다. 강력한 우승 경쟁자인 채플린 위스퍼를 꺾어 얻어낸 결실이라 그리 달콤할 수가 없었다. 이제 시즌 종료까지 26경기가 남은 상황이라 안심할 수 없지만, 그래도 갓즈나이츠에게는 알찬 밑거름이 된 승리였다.
============================ 작품 후기 ============================
모두들 즐거운 주말 되시고요. 전 내일 또 찾아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