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rfect World RAW novel - Chapter 500
502화
“후후. 라카미. 운이 좋군.”
범석의 지나가며 흘리는 말투로 라카미가 쌍심지를 켜며 쏘아봤다. 팀이 패배했으니 기분이 좋을 리가 없는데, 조롱 비스름한 언사가 날아오니 심기가 상했던 탓이다.
“뭐가 말인가요?”
“으음. 한껏 기세를 올렸는데, 내게 패하면 그런 망신도 없었잖아. 하지만 본진이 무너져서 1라운드를 패했으니, 네가 책임질 부분이 없고? 안 그래?”
“그럼 제가 범석 님에 당하리라고 생각한 건가요?”
“그럼 아니야?”
너무도 뻔뻔한 그의 표정에 라카미가 입을 다물며 고개를 돌렸다. 확실히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자신들 패배가 자명했다. 지금까지 그의 창격을 막은 방패를 든 손은 마비로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이를 본 범석이 코웃음을 치고는 더그아웃으로 걸어갔다.
“프리시카! 1라운드 때 왜 공격해 들어갔어!”
더그아웃에 들어선 범석이 실내를 가득한 냉랭함에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지금 감독인 다이아나가 프리시카를 앞에 두고 큰 소리로 야단을 치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쯤 승리로 기뻐해야 할 더그아웃이 이런 소란에 휩싸여 있다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가 다이아나에게 다가가 옆구리를 콱 찔렀다.
“다이아나. 무슨 일이야? 우리 팀이 이겼는데, 칭찬은 못 해줄망정 대체 왜 이래?”
다이아나가 프리시카를 노려보던 시선을 거두고, 범석을 바라봤다.
“이기기는 했지만, 상당히 위험했어요. 자칫 잘못했으면 저희가 패할 수도 있었거든요. 휴~”
“그게 무슨 소리야? 결과를 보니 완전무결한 승리던데? 우리 쪽 피해는 하나밖에 없었다고?”
“그건 운이 좋아서 그래요. 상대가 저희의 돌출행동에 놀라서 실수한 것이 호재가 되었을 뿐, 프리시카의 전략이 올바로 맞아떨어진 것이 아니었어요.”
범석이 딱히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그는 프리롤로 뛰며 이롤리타와 라카미에 집중하고 있었기에, 본진의 전황이 어떤지 잘 몰랐다.
“그래? 한번 1라운드 플레이 영상을 보여줘 봐.”
“네. 잠시만 기다리세요.”
다이아나가 감독 석에 있는 컴퓨터로 1라운드 플레이 장면을 허공에 영사시켰다. 그리고 빠르게 초반 화면을 넘기고 문제의 영상 부분만을 느린 화면으로 그에게 보여주었다.
‘이런 확실히 문제가 있군.’
범석도 다이아나의 의견에 공감하는지, 영상을 바라보는 눈이 절로 찌푸려졌다. 느린 화면으로 보지 않아도 프리시카가 얼마나 무리한 작전을 시행했는지 알 수 있었던 탓이다.
돌격 도중에 적의 진형이 측면 쪽으로 흔들려 쉽게 분단할 수 있었지만, 그전까지는 에이션트 워리어즈의 진형은 공고하기 그지없었다. 이 상태에서는 함부로 진입해 들어가기보다는 치고 빠지는 전략으로 적진형을 흔들어놓아야 하는 것이 정석이었다.
긴 한숨을 내쉰 범석이 프리시카를 바라봤다. 그녀처럼 경험 많은 검투사가 이런 실수를 했을 리가 만무하니, 뭔가 다른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프리시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그, 그게…….”
“혼 안 낼 테니까 사실대로 말해. 네가 이런 식으로 경기를 플레이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아서 그래. 보통이라면 내가 이롤리타와 라카미를 쓰러뜨릴 때까지 기다렸어야 옳았는데 말이야. 설마 내가 못 미더웠냐?”
“그, 그건 아니고요. 사실…….”
“사실 뭐?”
한참을 꾸물거린 프리시카가 기어이 대답하기에 이르렀다. 엘프란 주인의 물음에 거짓을 늘어놓거나, 침묵할 수 없는 존재였다.
“라카미 언니를 배려해 주느라 그랬어요. 올해면 은퇴인데, 주인님에게 당해 오늘 패전의 멍울을 안게 되면 너무 불쌍하잖아요. 가뜩이나 근래에 먹튀라고 욕을 먹는데, 오늘까지 이런 식이면 검투사를 정점을 찍는 이 시점이 오욕으로 남게 돼요. 그래서…….”
범석이 피식 웃었다. 프리시카의 팔자 좋은 걱정이, 그의 흥미를 동하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라카미는 주인 있는 검투사. 기존의 다른 검투사들보다 훨씬 사정이 나은 편이었다.
“후후. 네가 그런 걱정을 왜 해? 정말 불쌍한 애들은 본진에 껴있던 주인 없는 엘프들이지. 안 그래?”
“그, 그렇기는 하지만, 전혀 남 얘기 같지가 않아서요.”
그가 묘한 시선으로 프리시카를 바라봤다. 그녀는 현재 나이가 30이었고 과거 최강자에 올랐던 경험이 있었다. 아마도 이 점 때문에 라카미에게 동질감을 느꼈을지 몰랐다. 그녀도 과거 지금의 프리시카와 비슷한 시절을 경험했다.
“흐음. 그렇군. 그러고 보니 라카미와 너는 비슷한 점이 아주 많지. 확실히 라카미를 통해 네 장래의 모습이 보였을 거다. 하지만 배려는 확실히 오버다.”
“네?”
“라카미는 한 때 최강자에 오르고 그 후에도 꾸준히 좋은 성적을 거두며 이 검투계에 확실한 발자취를 남긴 검투사다. 비록 나이가 들어 과거의 실력을 보이고 있지 못하지만, 누군가에게 동정을 받을 만큼 한심한 존재가 아니다. 그래서 나도 온 힘을 다해 쓰러뜨리려고 했던 것이고. 그리고 네가 몰라서 이러는지는 모르겠지만, 라카미는 너를 경쟁자로 생각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만약 라카미가 네 동정을 눈치채게 되는 날이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냐? 아무리 생각해봐도 자존심에는 큰 상처를 받을 걸? 그러니 다시는 이런 행동을 하지마라. 알았지?”
납득이 갔는지 프리시카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녀 자신도 누군가 그런 배려를 당한다면 기분이 나빴을 터였다.
“네, 네. 알겠어요. 다음부터는 조심할게요.”
“그래. 좋다. 그럼 네 자리로 가서 쉬어라. 3라운드에도 뛰어야 하니, 체력을 축적해야지.”
“네.”
프리시카가 돌아가자 범석이 다이아나를 옆에 앉히고, 동석했다. 이제는 그녀를 다독거려줘야 했기 때문이다.
다이아나는 에어리어 리그 검투사 출신이었고, 감독으로서의 기간도 짧았다. 지금이야 갓즈나이츠라는 월드리그 유수의 팀을 지휘하며 인정받고는 있지만, 자격지심이 없을 수가 없었다.
창단 초기에 들어온 유망주들은 모르지만, 상위 리그에 올라온 직후 범석이 영입한 검투사들은 세계적으로 알아줄 만큼 명성이 높은 엘프들이었기에, 그녀들을 거느리고 리그를 치르기가 여간 부담스럽지가 않을 터였다. 특히나 프리시카는 더욱 심했다.
“다이아나. 근래에 들어와서 많이 힘들지?”
“아, 아니에요. 전 주인님에게 봉사한다는 생각에 늘 기쁜 마음으로 감독직을 수행하고 있어요.”
“그렇지만 최근에는 좀 그럴 거 아니야? 내가 데려오는 아이들은 다들 크게 인정받은 검투사이고, 또 올해는 작년과 달리 치열한 우승 경쟁까지 벌어지니 신경이 예민할 것 아니야?”
다이아나 고개를 주억거리며 순순히 인정했다.
“네. 조금 그런 면이 없지는 않아요. 프리시카 같은 아이가 저와 상반된 전략으로 경기를 치르면, 제가 세운 전략이 뭔가 문제가 없나 고민할 수밖에 없어요. 그리고 올해의 우승 경쟁은 무척 치열해 부담스러운 것도 사실이에요. 채플린 위스퍼보다는 5점을 앞서고는 있지만, 이 때문에 더욱 불안해요. 마치 쫓기는 기분이 들어서 말이에요. 만약 오늘 경기에서 비기고, 또 다른 경기에서 패배하면 동률. 그럼 저희는 2위로 떨어지게 돼요.”
“으음. 그렇겠지. 하지만 너무 부담 갖지는 마라.”
“하지만 부담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어요. 제가 감독인 이상 숙명과도 같으니까요. 만약 지금의 갓즈나이츠 전력으로 우승을 못한다면 저는 감독으로서 실격이에요. 그만큼 우리 갓즈나이츠는 강해요.”
범석이 입맛을 다셨다. 좀 스쿼드가 부족하기는 하지만, 확실히 갓즈나이츠는 강했다.
“하긴 그렇지. 하지만 세상사 모두가 자신들 마음대로 되지는 않는 법. 채플린 위스퍼나 리얼 히어로즈 같은 팀이 있는 이상, 우리가 목표를 이루지 못한다고 너를 원망하지는 않는다.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거든. 아니 사실은 지금까지 너무 잘해줘서, 네게 고마울 정도다.”
“그렇지만 주인님은 우승을 원하시잖아요?”
“우승이야 당연히 원하지. 검투사로서 또 한 팀의 주인으로서 자신의 팀이 최강이 되는 것은 아주 큰 즐거움이니까. 하지만 내가 두는 주안점은 즐거움 그 자체지, 우승이 아니다. 그리고 그 즐거움은 너희로 인해 비롯되지. 그러니 네가 우승에 대한 부담감 때문에 또 휘하 검투사에 대한 자격지심으로 힘들어한다면, 난 결코 우승 따위는 필요 없다. 차라리 그럴 바에는 2~3등을 하며 모두가 행복하게 지내는 편이 낫지.”
다이아나가 두 눈을 깜짝거리며 그를 쳐다봤다. 주인이라서 하는 말이 아니지만, 다른 인간과는 전혀 상반된 모습이 대단해 보였다. 보통이라면 우승에 집착하며 자신을 닦달했어야 옳았다. 물론 이 모두가 범석이 이 게임을 하는 목적이 놀이의 연장인 탓이기는 하지만, 그녀로서는 알 리가 없었다.
“저, 정말 우승을 못해도 괜찮겠어요?”
“물론 그렇다고 일부러 우승하지 않을 필요는 없지만, 정 어쩔 수 없다면 하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니 마음을 편안히 가져라. 그러면 팀 분위기도 좋아질 테고, 우승할 가능성은 더욱 높아진다.”
살며시 미소 지은 다이아나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네. 주인님 말씀대로 할게요.”
“후후. 그래. 그럼 돌아가서 2라운드를 대비해라.”
“네.”
다이아나가 급히 감독석으로 돌아가 즐거운 마음으로 2라운드 출전자 명단을 짰다. 이번 출전자는 후보와 일부 주전이 포함된 2진급 검투사들이었다. 이번에도 주력을 출전시켜 2연승을 노려볼 수도 있었지만, 핵심급 검투사들의 체력을 염려해서 피했다. 휴식 없이 연달아 경기를 뛰게 되면 그만큼 큰 부담을 안았다.
“자. 모두 최선을 다하되, 즐겁게 플레이를 해. 너희가 패배해도 우리 주력이 반드시 승리해, 다시 앞서 나갈 테니까. 알겠지?”
“넷.”
다이아나의 주문을 들은 2진급 검투사들이 더그아웃 밖을 나섰다. 하지만 말처럼 즐거운 플레이가 가능할지는 모르겠다는 표정들이었다. 1라운드를 내어줘 부담스러운지, 에이션트 워리어즈가 이번에도 주력을 출전시켰기 때문이다. 비록 다소 지치기는 했지만, 그녀들은 갓즈나이츠의 2진보다 훨씬 강했다.
우와아아아! 우와아아아!
경기장 내로 울려 퍼지는 팬들의 함성과 함께 2라운드에 나섰던 갓즈나이츠의 2진 검투사들이 풀이 죽은 채로 더그아웃으로 돌아왔다. 검방을 착용하고 철저히 방어에 나섰지만, 10여 분도 안 되어 철저한 패배를 당했기 때문이다.
이롤리타와 레비아에 의한 중앙돌파는 그녀들이 막기 어려울 정도로 대단한 위력이 있었다.
하지만 이들을 반기는 다이아나의 얼굴에는 잔뜩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패배는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나름 나쁘지 않은 성과를 올렸기 때문이다. 이들의 노고로 에이션트 워리어즈의 주력은 많이 지쳤을 터이니, 3라운드의 승부는 갓즈나이츠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게 되었다.
“좋아. 다들 수고했어. 3라운드는 우리 주력이 확실히 먹을 테니, 너무 염려하지 마.”
“네…….”
여전히 풀이 죽은 목소리를 한 2진급 검투사들이 조용히 자신들 자리에 착석했다. 다이아나의 위로에도 패배에 대한 실망감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자. 에이션트 워리어즈 3라운드는 어쩔 참이냐?’
범석은 깊은 관심을 두고 전광판을 주시했다. 에이션트 워리어즈가 과연 3라운드에 누구를 내보낼까 궁금했기 때문이다.
2라운드의 승리 이후에 맞이하는 갓즈나이츠의 주력. 여기서 지친 자신들 주력을 내보내 일말의 기대감을 가질 것인가, 아니면 주력의 휴식을 위해 2진급을 내보낼 것인가는 앞으로 갓즈나이츠가 전략을 세우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전자라면 3라운드에 갓즈나이츠가 승리했을 시, 바로 4라운드에서 또 주력을 출전시켜 경기를 끝내는 편이 좋았고, 후자라면 편히 3라운드를 가져온 후, 다시 4라운드에 2진을 내보내 결과를 보고, 5라운드까지 승부가 갈지 안 갈지가 결정되었다.
그리고 잠시 후 뜬 명단을 본 범석이 희미한 미소를 입가에 걸었다. 에이션트 워리어즈가 후자를 선택한 탓이다. 지금 전광 판에는 2진 검투사의 명단이 뜨고 있었다.
‘한번 5라운드까지 가자 이건가? 나쁘지 않지. 전혀 연전을 펼칠 필요가 없으니까.’
5라운드까지 가게 되면 갓즈나이츠의 체력 소모가 더 크지만, 핵심급에 한해서 그렇지 않았다. 2진급을 상대하니 편안히 3라운드를 가져올 수 있고, 이 승리를 바탕으로 4라운드에서 갓즈나이츠에서 2진급을 내보낼 수 있으니 핵심급 검투사는 아주 편안한 경기를 수행할 수 있었다.
연전을 뛸 필요도 없고, 에이션트 워리어즈의 주력과는 단 한 번만 더 싸우면 되기 때문이다.
“자. 그럼 가볼까. 후후.”
범석이 일어서서 더그아웃 밖으로 나갔다. 2진을 상대해야 했기에, 그는 별 부담감이 없었다. 아무리 에이션트 워리어즈가 탄탄한 스쿼드를 보유하고 있지만, 2진이 이롤리타 레비아가 낀 주력보다 상대하기가 어려울 리가 없었다.
– 삐이익!
경기 시작과 함께 양떼를 엄습하는 늑대와 같이 달려나간 범석이, 에이션트 워리어즈 검투사들이 밀집해 구성한 방진을 향해 힘껏 장창을 휘둘렀다. 탄탄히 구성된 탓에 분단에는 실패했지만, 상대팀 검투사들은 우왕좌왕 진을 흐트러트리며 뒤로 물러났다.
그의 강력한 일격 뒤에 쏟아져 들어오는 선봉 집단에 겁을 집어먹은 탓이다. 현재 갓즈나이츠는 채택한 진형은 봉시진인데, 주요 특징이 바로 6명의 선봉으로 비롯되는 강력한 돌파였다.
“뭐해 막아! 돌파를 허락해서는 안 돼! ”
테를리의 간절한 외침에도 에이션트 워리어즈의 2진 검투사들은 제대로 된 반항도 못하고 그대로 중앙을 내어줬다. 이에 범석은 뒤로 밀려나며 몸을 휘청거리는 44번 검투사의 이마에 그대로 창을 먹이고는 힘껏 공중으로 뛰어올라 우측 날개 부분에 있던 32번 검투사와 28번 검투사의 방패를 그대로 긁어버렸다. 그리고 건너편 너머로 착지한 후, 좌측 진형으로 달려가 테를리와 무구를 강하게 맞부딪쳤다.
그녀는 대장이었기에 쓰러뜨리기만 하면 바로 3라운드 경기 끝이었다.
============================ 작품 후기 ============================
하루 종일 비가 내렸습니다. 늦가을 내는 비는 추위를 알리는 징조라는데, 좀 걱정이 되네요.
그럼 모두들 즐거운 주말 되시고요. 전 내일 또 찾아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