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rfect World RAW novel - Chapter 507
509화
쾌청한 봄날의 오후 무렵이었다. 범석과 휘하 엘프들은 수건과 속옷등의 장비를 챙기기에 여념이 없었다. 오늘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서는 준비해야 할 것이 아주 많았다. 채플린 위스퍼와의 오늘 승부의 결과로 올해의 월드리그 우승이 결정되었다.
그가 방안 한족 구석에 놓여 있는 낡은 카타나를 무심코 바라봤다. 어느 이름없는 상표가 달린 이것은 범석이 최초로 검투사가 되며 사용한 무구였다. 채플린 스포츠와 장비스폰서 계약을 맺은 직후 사용하지 않지만, 부적 겸해서 보관하고 있었다.
‘후후. 그러고 보니……. 8년이나 됐군…….’
카타나를 본 범석이 피식 웃었다. 아마추어리그 시절 잠시 잠깐 썼던 것이라 큰 손상은 없었지만, 손잡이와 검집에 제법 얼룩져 있었다. 정말 세월의 여파를 알 수 있는 흔적이라 할 수 있었다.
가방을 모두 챙긴 그가 어깨에 둘러매고 모두에게 소리쳤다.
“다. 챙겼으면 모두 나가자!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지만, 서두른다고 손해날 것은 없다.”
“넷!”
그가 방을 빠져나가자, 휘하 엘프들이 줄줄이 뒤를 따랐다. 이들은 에스컬레이트를 타고 1층으로 내려가서는 미리 대기하고 있던 무인 전동차를 타고 주차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아론을 타고 채플린 위스퍼 팀의 홈인 제온 시티로 갔다.
펑! 퍼펑! 펑!
제온 시티 콜로세움은 거의 축제를 방불케 하는 행사가 벌어지고 있었다. 상공에는 채플린 위스퍼의 승리를 기원하는 홀로그램 영상과 글귀가 그려지고 있었고, 그 주변으로는 축포가 연달아 터지고 있었다. 그리고 주변 도로에는 경쾌한 연주를 펼치는 밴드가 행진하며 길을 지나던 행인들의 눈길을 끌고 있었고 콜로세움 외곽 곳곳에는 표를 구하지 못한 홈팬들이 무수히 모여 자팀에 대한 열렬한 응원을 펼쳤다.
‘후후. 준비가 철저한데. 시작부터 우리의 기를 죽이시겠다? 하지만 거기에 넘어갈 갓즈나이츠가 아니지.’
범석이 무심코 콜로세움을 내려다보는 시점. 아론이 긴 선회를 멈추고, 서서히 지면으로 내려서기 시작했다. 밑에서 대기하고 있던 세계각지에서 모인 기자들은 갓즈나이츠의 등장을 보고 일제히 몰려들기 시작했다. 올해 월드리그 우승을 결정짓는 역사적인 순간을 카메라에 담으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덕분에, 아론은 하강을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워낙 밀집된 터라, 내려설 공간이 마땅치 않았던 탓이다.
– 주인님. 어떻게 하죠. 기자들 때문에 착륙할 수가 없습니다.
팔짱을 낀 범석이 슬며시 자리에 앉았다. 그로서도 딱히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아무리 급해도 기자들의 머리를 깔아뭉개고 착륙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뭐. 보안요원들이 해결해 주겠지.”
그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입구 앞에서 바리케이트를 치던 보안요원들이 호각을 불며 달려왔다. 아무리 촬영이 중요하다지만, 오늘 무대에 오를 주인공을 밖으로 쫓아낼 수는 없었다.
“다들 물러서 주십시오! 대체 뭣들 하시는 겁니까!”
기자들 무리를 파고든 보안요원들이 특유의 완력으로 밀어 공간을 마련했다. 덕분에 겨우 안착한 아론의 문이 열리며 범석이 걸어나왔다.
동시에 무수하게 터져 나오는 플래시에 그가 손등으로 눈을 가렸다.
“오 범석 검투사! 오늘 경기 자신 있습니까!”
“오 범석 검투사! 오늘 컨디션이 어떻습니까!”
“지난번 사건 때문에 채플린 위스퍼와 승점이 동률이 됐는데. 기분이 어떠십니까! 그때 경기에만 오 범석 검투사 뛰었으면 무승부 이상의 결과를 얻을 가능성이 많았을 테니, 오늘 어려운 상황을 맞이하지 않았을 것 아닙니까?”
무수히 쏟아지는 기자들의 질문에 당혹스러울 만도 했지만, 범석은 차분히 미소를 지으며 간략하게나마 대답했다. 몰려든 기자들이 고마웠던 탓이다.
이들 덕분에 자신들에게 적의를 지닌 홈팬들은 멀찌감치 떨어진 채 접근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만약 지금 둘러싼 자들이 채플린 위스퍼의 팬들이고 갖은 야유가 쏟아졌다면, 다소나마 휘하 검투사들의 사기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하하하. 컨드션 좋고, 오늘 경기도 자신이 있습니다. 그리고 지난 사건도 연연하지 않습니다. 오늘 이기면 우승은 당연히 우리 차지니까요.”
“그렇군요. 그럼 오늘 경기에 임하는 마음가짐은 어떻습니까? 어찌 됐든지 간에 우승을 결정짓는 중요한 일전이 아닙니까?”
“하하하. 별것이 있겠습니까? 당연히 이기서 지금까지 성원을 아끼지 않은 저희 리마시티 팬들에게 우승의 영광을 돌리겠다는 것이죠.”
“아. 네. 그렇습니까? 그럼 혹시 오늘 채플린 위스퍼와 어떻게 싸우실 생각인지 말씀 주실 수 있습니까!”
범석이 방금 질문을 던진 기자를 향해 윙크하며 말했다.
“그건 비밀입니다. 이에 관한 내용은 경기를 보면 알 것이니, 따로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아. 그래요? 그럼 마지막으로 오늘 주의해야 할 상대 검투사를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피식 웃은 범석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그야 빤한 질문 아니겠습니까? 당연히 아멜리에겠죠. 그녀의 쌍편술과 쌍검술은 주요 관심대상입니다.”
범석이 자리를 떠나려고 하자, 또 다른 기자 한 명이 마이크를 들이대며 소리쳤다.
“혹시 아멜리에에 대한 공략법을 가지고 있는 것이 있습니까?”
“네. 물론입니다. 바로 저죠. 그녀는 절대 제 상대가 아닙니다.”
“하하하. 대단한 자신감이시군요.”
“자신감이 아니라, 결과가 그리 말해주고 있습니다. 전 그녀와 일대일로 상대해서 패한 역사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개인전보다 단체전에서 강하지 않습니까? 검투 경기는 홀로 싸우는 경기가 아닙니다만……?”
범석이 무심한 눈초리로 그 기자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하지만 제가 막으면 그뿐입니다.”
그의 자신감 넘치는 기자가 꿀 먹은 벙어리가 된 양 입을 다물었다. 확실히 그라면 아멜리에를 막고도 충분히 남음이 있었다.
그사이 범석이 기자들에게 양해를 표하고 출입구로 안으로 들어섰다. 시합 전 심력 낭비는 그로서는 피하고 싶었다. 오늘 시합은 그만큼 중대했고, 어려웠다.
이에 기자들이 연이어 뒤따르던 다이아나와 프리시카에게 질문 공세를 던졌다. 그녀들의 대답도 만만치 않은 뉴스거리가 되었다.
“여어. 범석 군. 그간 잘 있었나?”
입구에서 그를 부르는 사람은 다름 아닌, 채플린 위스퍼의 프리츠 사장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드레스를 잘 차려입은 레베카도 함께하고 있었다.
범석이 그녀에게 눈짓으로 인사하고, 프리츠를 향해 말했다.
“하하하. 프리츠 사장님 아니십니까? 여기까지 무슨 행차십니까?”
“자네 얼굴을 보러 왔지. 좋은 관람석을 마련해줘서 고맙기도 하고.”
범석이 밝은 미소를 지어 보냈다. 그는 훗날 장인어른이 될 자. 그 정도 성의 표시는 당연했다. 어차피 비어있을 VIP룸인데, 빌려주지 못할 리가 없었다.
“하하하. 뭘 그걸 가지고 그러십니까? 어차피 저는 가지도 못할 자리를 드린 것뿐인데요.”
“아. 그런가? 그래도 고맙지. 아니었으면 졸지에 일반VIP석에서 구경할 뻔했으니까. 사실 내가 가문 내에서는 제법 짬밥이 밀려서 말일세. 후후후.”
“하하하. 그렇군요. 채플린 가문 분이 좀 많습니까?”
“그렇지. 아버님에 숙부님들. 아저씨들에 형님들과 사촌 형제들까지 정말 장난 아니게 많지.”
“그것도 다 복이죠.”
“후후. 복은……. 약간 촌수가 벌어지는 친척은 이름이 생각 안 나 곤란할 때가 많다네.”
“아. 딴에는 그럴 수도 있겠네요. 하하하.”
슬며시 미소 지은 프리츠가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나저나 오늘 경기는 이길 자신이 있나? 조금 전 기자들과 하는 말을 엿들어보니 꽤 자신감이 넘치는 것으로 보이는데?”
“뭐. 그렇죠. 기자들 앞에서 진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습니까? 질 것 같아도 이긴다고 해야죠.”
“하긴 그렇겠군. 하여간 꼭 이기게. 갓즈나이츠도 우승을 한 번 해봐야지.”
범석이 물끄러미 그를 바라봤다. 프리츠는 채플린 가문의 일원. 채플린 위스퍼가 아닌 갓즈나이츠의 승리를 기원하다니 좀 미심쩍었다.
“진심으로 저희가 이기기를 바라시는 겁니까?”
“당연하고말고. 가문보다는 가족이 우선 아닌가? 자네가 잘되면, 우리 레베카가 좋아할 테니, 내가 어찌 갓즈나이츠의 승리를 바라지 않겠나?”
힐끗 레베카를 바라본 범석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나름 납득이 가는 말이기 때문이다. 확실히 가문의 팀보다는 사위의 팀이 더욱 관심이 갈 수밖에 없었다.
“이거 이러다가 저희가 이기면 사장님께서 곤란해지시는 것 아닙니까?”
“아니. 내가 곤란할 일이 뭐가 있겠나?”
“레베카가 바로 저희 팀의 검투사니까요.”
“뭐. 그렇기는 하지만, 아무 상관이 없지. 어차피 레베카는 오늘 경기에는 출전하지 않으니까 말일세.”
그건 맞았다. 범석은 레베카의 특수성을 생각해서, 오늘 경기에서 제외했다.
가문의 팀과 상대하기 부담스럽기에, 특별히 배려한 것이다. 그녀가 경기에 참여한 상태에서 갓즈나이츠가 승리한다면, 프리츠사장과 레베카는 가문 사람들로부터 묘한 시선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아예 팀 응원석에도 앉히지 않을 생각으로 오늘 아버지인 프리츠 사장을 모시게 했다.
“후후. 레베카가 오늘 경기에서 제외된 이유가 바로 그것이죠.”
“혹시 솜씨가 딸려서 그런 것은 아니고?”
이 대답과 동시에 프리츠가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레베카가 허벅지를 꼬집어 오는 것이다. 사실이기는 하지만, 아버지인 그가 직접 언급할 필요가 없었다.
“아버지!”
“하하하. 그래. 미안하다. 내가 실언을 했다.”
“다음에 또 그러시면 저 화낼 거예요.”
“알았다. 알았어.”
콧김을 내뿜은 레베카가 고개를 팩 돌렸다. 이에 범석이 난감한 듯, 시선을 피했다. 근래에 경기에 참가시키지는 않은 것이, 그녀에게는 앙금으로 남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아무래도 다이아나에게 잘 말해, 내년에는 출전 빈도를 높여주는 편이 좋다고 생각됐다.
그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변명을 늘어놓았다.
“하하하. 사장님. 레베카는 출중한 검투사입니다. 근래에 그녀를 경기에 잘 참여시키지는 않은 이유는, 창술을 연마할 시간을 준 것이지 실력이 떨어져서가 아닙니다. 제가 가르치는 창술을 완벽히 습득하는 내년쯤에는 자주 경기에 나갈 겁니다.”
“아. 자네에게 그런 의도가 있었군. 내가 괜한 오해를 했네. 하하하.”
“네. 맞습니다.”
살며시 레베카의 눈치를 살핀 프리츠가 범석을 향해 말했다.
“그나저나 나는 이만 가봐야겠네.”
“아니 벌써 가시게요?”
“후후. 경기를 앞둔 자네를 계속 붙들고 있을 수만은 없지 않나?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만 여기서 빠져줘야겠지.”
맞는 얘기지만, 범석이 긍정을 표할 수 없었다. 여기서 고개를 끄덕이면 그만한 실례가 없었던 탓이다.
“전. 괜찮습니다만…….”
“아닐세. 할 얘기도 다 했고, 이만 가봐야겠네. 그럼 잘 있게나.”
“네. 그럼 어쩔 수 없죠. 들어가십시오.”
프리츠와 레베카가 떠나가자, 범석이 급히 검투사 대기실로 향했다. 다들 기다리고 있을 테니, 여기서 머뭇거릴 시간이 없었다. 검투사 대기실에서는 오늘 경기의 전략전술에 대해, 최종 점검하는 시간이 있었다.
와아아아! 와아아아!
두 시간 후. 검투사 대기실을 나와 더그아웃에 도착한 범석은 장내를 가득 메운 인파를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중요한 경기라 만석이 될 줄은 알았지만, 저리 열띤 응원을 펼칠 줄은 몰랐다. 미리 연습이라도 한 듯, 제온 시티의 홈팬들은 조직적이고 장엄한 응원을 선보이고 있었다.
‘미치겠군. 아예 작정했어.’
제온 시티는 채플린 가문의 기반이 되는 도시로, 주민 대다수가 직간접적으로 그들 가문의 영향력 속에 있었다. 당연히 응원팀에 대한 충성도도 높을 뿐만 아니라, 이런 행사가 있다면 만사 제쳐놓고 달려와 손을 거들기 일쑤였다. 하지만 오늘은 정말 도가 지나쳤다.
모두가 일정한 응원복을 입고, 전면에 보이는 리더를 따라 절도있는 응원을 보이고 있었다. 마치 사관학교 체육대회에 온 것이 아닌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젠장. 그래도 우리가 이긴다. 검투 경기가 학교 운동회가 아닌 이상 응원점수는 없을 테니까.”
그의 혼잣말에 전염이라도 된 듯. 휘하 검투사들이 자신들의 무구를 손질하며 차분히 시합이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그녀들도 자신들을 위해, 또 주인을 위해 오늘 경기에서 반드시 승리하고 싶었다.
다이아나가 범석에게 다가서더니 말했다.
“주인님. 걱정하지 마세요. 반드시 저희가 이길 거예요.”
“당연하지. 오늘만큼은 나도 전력을 다할 테니까.”
“네. 저희 아이들도 사력을 다해 뛸 거예요.”
범석이 비릿한 미소를 짓더니, 꽉 쥔 주먹과 손바닥을 맞부딪혔다.
“후후. 그렇겠지. 우리 주인 있는 엘프와 없는 엘프가 어떤 차이가 있는지 확실히 보여주고, 갓즈나이츠가 강하다는 사실도 뼈저리게 느껴주게 하자고.”
“네. 그래요. 저도 성심껏 도울게요.”
자리에서 일어난 범석이 모두를 한 번씩 둘러보더니 목청껏 소리쳤다. 경기 전 기세를 북돋는 일은 아주 중요했다.
“자! 반드시 오늘 승리를 따내자!”
“넷! 주인님께 꼭 승리를 바치겠어요!”
“경기에 출전하면 절대 기죽지 말고, 확실히 놈들을 밀어붙여야 한다! 알겠지!”
“넷! 저희는 절대로 밀리지 않아요!”
“좋다. 그럼 너희만 믿겠다! 자 그럼 모두 밖으로 나간다!”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주억거린 범석이 더그아웃 밖을 나섰다. 아직 경기가 시작되려면 좀 시간이 남았지만, 그 전에 할 일이 있었다.
스트레칭이었다. 격한 운동 전에 해야 할 필수 코스지만, 오늘은 약간 다른 의미를 담을 필요가 있었다.
바로 저 열띤 응원에 절대 굴하지 않겠다는 의지 표현 말이다. 양 팀의 전력이 크게 차이 나지 않으니, 얼마만큼의 의지를 갖느냐에 따라 승패가 결정될 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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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들 즐거운 주말 되시고요. 전 내일 또 찾아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