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rfect World RAW novel - Chapter 508
510화
하늘이 점차 붉게 물들고 있었다. 이제 곧 해가 지려지려는지 사위가 어두워지고 있었다. 하나둘씩 켜지는 콜로세움 천장의 조명등. 관중들의 시선이 집중되는 가운데, 양 팀 검투사들이 하나둘씩 입장 터널에서 나와 경기장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동시에 양 팀 팬들의 외침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응원 팀의 승리를 기원하는 구호였다. 다행스러운 일은 갓즈나이츠 팬들도 만만치 않다는 것이다. 숫자에서 밀리는 그들은 일당백을 자처하며 목이 쉴세라 소리쳐 댔다.
“갓즈나이츠 이겨라! 이기면 우승이다!”
“채플린 위스퍼! 반드시 승점을 지켜라! 동률만 돼도 우리가 우승이다!”
원정팬의 성원에 화답하듯 손을 흔들며 걸은 범석이 경기장 중앙에 우뚝 섰다. 그리고 자신을 향해 짙은 눈빛을 보내오는 아멜리에를 바라보더니 싱긋 웃었다. 그녀는 오늘 상대 팀의 중추. 여유로운 모습을 보여, 자신에 대한 두려움을 새삼 일깨우게 해줘야 했다.
“여어! 아멜리에. 잘 있었지!”
들은 척하지 않고 고개를 팩 돌리는 아멜리에. 이를 본 범석이 약간 원망의 눈초리를 담아, 자신의 응원단 쪽 상측에 있는 VIP룸을 바라봤다. 갓즈나이츠의 승리를 기원했던 프리츠 사장이 정작 자신을 위해서는 별로 해준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사장이 사위를 아끼는 마음에, 아멜리에에게 약간만 수작을 부렸어도, 오늘 승리는 당연히 갓즈나이츠의 것이었다. 그녀는 프리츠 사장의 휘하 엘프였다.
‘쳇. 프리츠 사장님. 전 말뿐인 응원은 필요 없는데요.’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가문에 종속된 프리츠 사장이 아멜리에에게 쉽사리 고이로 패배하라고 말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어쩌면 잘된 일일지 몰랐다. 우승을 위한 마지막 경기에 부정을 끼워 넣어, 승리의 기쁨을 반감시킬 필요는 없었다. 어쨌든 승리하면 당연지사 우승은 갓즈나이츠였다.
진형의 맨 앞에 선 범석이 모두를 향해 소리쳤다.
“모두 추행진을 구성해!”
갓즈나이츠의 진형이 삼각형 형태로 진형을 갖추기 시작하자, 아멜리에를 비롯한 채플린 위스퍼도 진형을 구성하기 시작했다. 형태는 방진. 역시나 저들은 1라운드에서 무승부를 노리고 있었다. 어차피 비기기만 해도 목적을 이룰 수 있는 경기였기에, 무리하게 공격할 필요는 없었다.
아멜리에가 손에 든 채찍으로 바닥을 힘껏 후려갈기며 말했다.
“자! 모두 철저히 방어만 한다! 내가 명령할 때까지 절대 자신의 자리를 지켜! 알았지!”
“넷! 언니!”
무정한 그녀들의 외침에 범석이 인상을 찌푸렸다. 채플린 위스퍼의 전력에 방진이라니, 너무해 보였다.
“야. 이거 너무 치사한 것 아니야! 너희가 방어만 하면 어쩌자는 거야!”
“물론 그렇지만, 오늘은 예외에요. 우리는 반드시 우승해야 하니까요. 그리고 방진은 엄연히 검투 경기의 전략 중 하나에요. 저희가 그다지 못할 짓을 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요?”
날카롭게 쏘아붙이는 아멜리에로 범석이 목소리 톤을 낮췄다. 틀린 말은 아니기 때문이다.
“야. 그래도 너무하잖아. 너희가 보통 검투 팀도 아닌데, 방어 일변도가 웬 말이냐?”
“상관없지 않나요? 저희가 무슨 일을 벌이든 갓즈나이츠가 이기면 그뿐이니까요. 뭐 아니면 패하면 되는 일이고요. 승부란 냉정한 법. 자신의 처지와 여건하에서 최상을 결과를 얻어내면 그만이에요.”
물론 그렇지만, 검투 계 전체를 볼 때는 그렇지 않았다. 너무 방어에만 치중하면 경기가 지루해지고, 결국에는 이에 실망한 팬들은 다른 스포츠로 취향을 바뀌게 되었다.
하지만 이 사실을 말하자니, 구차해 보였다. 아멜리에는 주인만을 위하는 존재. 프리츠 사장이 채플린 위스퍼팀의 승리를 바라고 있다고 아는 이상, 팬들의 존재는 의미 없었다. 그리고 갓즈나이츠도 방어전을 전혀 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범석이 이를 갈며 그녀를 노려봤다.
“좋아. 네 말대로 승리하면 그만이겠지. 하여간 그 말한 것을 나중에 후회나 말라고! 2라운드에서는 서로 처지가 바뀔 수도 있으니까.”
그 말에 아멜리에가 지그시 그를 바라봤다. 확실히 그의 말도 맞았다.
1라운드에서 갓즈나이츠가 승리를 먹어간다면 채플린 위스퍼는 2라운드에서 상당한 어려움을 경험해야 했다. 처지가 서로 바뀌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계속 주력이 경기에 참여할 수는 없는 노릇. 충분히 뒤집을 수도 있었다. 채플린 위스퍼의 2진은 갓즈나이츠 2진보다 강했다.
“후후. 쉽게 그렇게 되나 보죠.”
“그래. 두고 보면 알겠지.”
그 말을 한 범석이 휘하 검투사를 다독이며 마지막 전투 준비에 들어갔다. 심판석의 심판진 움직임이 부산해지는 모습을 본 것이다. 이제 곧 경기가 시작되게 되었다.
– 삐이익!
경기 시작을 알리는 호각소리. 하지만 양 팀 모두는 듣지 못한 양, 제자리에 머물며 상대방을 노려볼 뿐이었다. 갓즈나이츠로는 섣불리 공격을 감행할 수 없는 노릇이었고, 채플린 위스퍼로서는 굳이 공격해 들어갈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잠시 잠깐 흐르는 긴장감 넘치는 침묵. 하지만 곧 범석의 외침에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졌다.
“모두 돌진해!”
꼭지를 뾰족이 세우며 돌진해 들어가는 갓즈나이츠. 이들에게로 두 개의 채찍이 동시에 날아왔다. 이에 맨 앞에서 앞장서 나가던 범석이 허리를 숙여 뒤로 흘려버리고는 그대로 빠르게 내달렸다.
이오니스와 랜드라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막아야 할 상대는 아멜리에였다.
게다가 그의 뒤에는 티엘라와 프리시카가 따르고 있었다.
“프리시카! 티엘라! 저 채찍들 막아!”
외침과 동시에 범석에게로 두 채찍이 또다시 날아왔다. 이번에는 아멜리에의 것들이었다. 현란한 굴곡을 타고 쏘여지는 것을 보니 분명했다. 그는 창을 한 손에 잡음과 동시에 허리에 꽂혀진 카타나 꺼내 들고 내리쳐지는 편끝을 튕겨냈다.
탕. 타탕.
다시금 휘어지듯 휘몰아치며 날아드는 채찍의 향연. 익히 예상하고 있었던 바였기에, 그가 다시금 창과 검을 교차해 막아내었다. 그리고 바로 앞에 있는 넨시아의 방패를 발로 걷어찬 후, 그대로 공중을 향해 힘껏 도약했다.
양다리를 지면에서 떼는 점프는 무척 위험한 행동이지만, 어쩔 수 없다. 아멜리에를 잡기 위해서는 근접해야 하는데, 그녀는 진형 맨 끝에 있었다.
“무리수를 두시는군요!”
짧게 소리친 아멜리에가 양손을 튕겨, 그를 향해 두 개의 편 끝을 동시에 날렸다. 이에 카타나를 휘둘러 하나의 채찍을 튕겨낸 그의 양팔과 몸통으로 나머지 하나의 채찍이 휘감아오고 있었다. 이제 이대로 바닥에 내리치면 범석을 제거할 수 있는 순간. 아멜리에가 환희의 미소 지으며 오른쪽 팔을 크게 내리그었다.
쾅!
거칠게 내팽개쳐지는 범석의 몸이 바닥을 굴렀다. 보통 때 같았으면 승리의 환호를 내질렀을 상황이지만, 아멜리에의 표정은 정 반대의 형상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다른 때와 달리 감촉이 이상했던 것이다.
이윽고 몸을 일으키는 범석이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양손으로 채찍을 부여잡았다.
“후후후. 무리수는 무슨 무리수! 넌 나에게 속은 거다.”
이 말을 던진 직후 범석이 힘껏 채찍을 잡아당겼다. 두 손의 완력을 한 손이 버틸 수는 없는 법. 아멜리에는 곧 왼손에 든 채찍을 버려야만 했다.
힘없이 끌려오는 채찍을 잡은 범석이 힘껏 팔을 휘저어 관중석 쪽으로 던졌다. 이제 남은 채찍은 셋. 거기다가 아멜리에는 바로 자신의 코앞에 있었다.
–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당한 줄만 알았던 오범석 검투사가 아무런 데미지 없이 일어서더니, 아멜리에의 채찍 하나를 빼앗았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이죠.
아나운서의 질문에 해설자가 감탄한 표정으로 말했다.
– 이거 아멜리에가 제대로 당했는데요. 방금 오범석 검투사가 무리하게 점프를 시도한 이유는 바로 아멜리에의 공격을 유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 그렇지만, 아멜리에의 중력기술이 그대로 먹혀들어가지 않았나요?
– 네. 물론입니다. 확실히 그를 바닥에 패대기쳐버렸죠.
– 그럼 족히 못 해도 부분 행동 불능상태에 빠졌어야 했는데, 그는 지금 무사하지 않습니까?
– 네. 맞습니다. 다만 오범석 검투사가 낙법을 시행했다는 점이 문제지요. 느린 장면을 보시면 알겠지만, 그가 떨어져 내리는 순간 모든 몸 부위가 지면을 자연스럽게 흐르며, 몇 바퀴 바닥을 구르는 장면이 있습니다. 아무리 아멜리에의 중력기술이 최강의 타격이라고는 하지만, 저런 식으로 힘을 분산시켜버리면 아무런 소용이 없죠.
느린 영상을 바라본 아나운서가 심히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낙법이 완벽하게 펼쳐진 것을 확인했던 것이다.
– 그, 그렇군요. 아. 이거 정말 대단한데요.
– 후후. 그렇죠. 역시나 체술의 대가라고나 할까요? 다른 검투사와 달리 오범석 검투사는 체술에도 일가견이 있지 않습니까?
– 네. 그 점은 널리 알려진 바라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 하하하. 네. 그나저나 아멜리에가 고생 좀 하게 생겼습니다. 오범석 검투사에게 중력 기술이 먹혀들지 않음을 깨달았으니, 채찍 공격에는 한계가 있을 테니까요.
아나운서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채찍으로 때려봤자 행동불능 상태에 빠지지 않으니, 이제는 아멜리에의 유효한 채찍공격 기술은 한가지뿐이었다.
– 네. 맞습니다. 이제 편 끝의 철촉을 이용한 공격밖에 없죠. 하지만 컨트럴이 어려우니 오범석 검투사가 쉽게 당할 것 같지는 않은데요.
– 당연한 얘기입니다. 이제 아멜리에는 한가지 선택을 해야 할 겁니다. 쌍검을 들든 아니면 채찍을 포기하든 말입니다. 그리고 제 예상으로는 쌍검이라고 예상됩니다.
– 네. 중력기술이 실패한 상황에서 오범석 검투사를 면전에 두고 통하지 않는 채찍을 사용할 수 없는 일이니까요. 하여간 이거 재미있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중계진들의 예상대로 아멜리에가 쌍검을 꺼내 들었다. 역시나 이 상황에서 범석을 바로 앞에 두고 채찍을 쓰기는 어려웠다. 그녀는 양손에 든 검을 교차시킨 후, 범석을 지그시 바라봤다.
“역시 범석 님이시네요. 이런 꼼수를 숨기고 있었다니 말이에요.”
“후후. 꼼수는 무슨……. 다 내 실력이지.”
웃고는 있지만, 범석은 입에서는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혹시나 몰라 한번 무리수를 둬봤지만, 성공할지는 미지수였었다. 그만큼 그녀의 중력기술은 무서웠다.
하지만 이제 얘기는 달라졌다. 한번 성공했으니, 다음에도 성공하지 말라는 보장은 없었다. 아니 한번 경험을 했으니, 이후에는 더욱 완벽하게 낙법 기술을 실행할 수 있었다. 이제 그녀의 채찍 공격은 무용지물이 된 것이다.
아멜리에가 긴장한 시선으로 앞뒤를 연달아 둘러보았다. 앞에는 범석이 있고, 뒤에는 프리시카가 이끄는 갓즈나이츠 본진이 있었다. 양쪽 다 부담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큰일이야. 범석 님을 견제하느라, 방진에 힘을 보탤 수가 없어.’
방진을 구성 시 진형을 유지하는 힘은 앞줄에서만 나오지 않았다. 양옆과 뒷줄에서 밀어주는 힘이 있어야 비로써 굳건한 방어태세가 나왔다. 그런데 지금은 범석에게 신경을 쓰느라, 그녀는 방진에 제대로 힘을 보탤 수가 없었다.
그가 달려온다면 막아야 하기에, 힘을 따로 다른 쪽에 배분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채찍을 포기하는 바람에 갓즈나이츠의 본진을 공격하는 것도 어려웠다.
하지만 갓즈나이츠도 범석이 빠져나감으로써 돌진력이 약해지기는 마찬가지였다. 쉽사리 뚫리지만 않았다.
“반드시 뚫어야 해! 그래야 우리가 이길 수 있어!”
본진 간의 밀고 당기는 형태가 이어지는 가운데, 아멜리에가 앞으로 나왔다. 범석을 마크하기 위해서였다. 일대일 대전을 벌인다면 패할 공산이 크다는 사실을 알지만, 그만 잡으면 이번 라운드는 자신들 승리였다.
그녀가 뒷줄 맨 끝에 있던 카네로아도 불렀다. 본진이 불안해질 수도 있지만, 그를 확실히 제압하기 위해서는 지원이 필요했다.
“카네로아! 나와! 나와 함께 범석 님을 쓰러뜨린다.”
“네. 언니!”
서서히 범석에게 다가서는 아멜리에가 다시금 카네로아에게 말했다.
“절대 무턱대고 덤비면 안 돼. 네가 당하면 끝장이니까.”
“네.”
“그리고 범석님이 유인하면 절대 따라가지 마. 저들이 계속 프리롤을 추가시키면 난전에 빠져들 수 있어.”
카네로아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녀도 오랫동안 검투사 생활을 해왔기에, 아멜리에의 걱정을 모를 리가 없었다. 자신들이 갓즈나이츠 본진에 가까워지면, 저들은 난전 작전을 시행할 수 있었다. 그럼 1라운드 전황이 불리하게 흘러가게 되었다.
“네. 알고 있으니 염려하지 마세요.”
이 모습을 인근에서 지켜보던 범석이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저들을 상대할지, 이만 본진으로 복귀할지가 고민인 탓이다. 아무리 그라도 아멜리에 외 1인을 동시에 상대하기란 위험성이 아주 컸다.
그렇다고 이대로 물러나기도 어려웠다. 자신이 복귀하면 저들도 복귀할 테고, 그럼 또 지루한 공방전이 펼쳐지게 되었다. 하지만 여기서 이긴다면 승리가 확실했다.
‘좋다. 한 번 해보자. 정 안될 것 같으면 도망치면 되지 뭐.’
카타나를 도로 칼집에 꽂아넣은 범석이 장창을 허리 부근에서 수평으로 뉘었다. 봉선창법을 곧바로 펼쳐 보일 참이었다. 일반적인 기술로는 저 둘을 동시에 상대할 수 없었다.
“자! 와랏!”
그의 외침과 동시에 아멜리에와 카네로아가 힘껏 땅을 박차며 달려나갔다. 그리고 범석의 인근에 근접하자마자 손에 든 검을 일제히 뿌려댔다.
이윽고 휘몰아치듯 회전을 보이는 장창이 세 개의 검을 휘감듯이 튕겨내고는 카네로아의 복부를 향해 빠르게 날아갔다. 일단 가장 약한 상대를 없애고 보자는 의도였다. 그녀만 없다면 아멜리에를 손쉽게 상대할 수 있었다.
창.
하지만 그의 의도는 회전하는 아멜리에의 쌍검에 막혔다. 그녀도 자신의 필살기를 펼쳐 보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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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들 즐거운 하루 되시고요. 전 내일 또 찾아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