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rfect World RAW novel - Chapter 58
58화
‘확실해. 레베카의 검이 분명히 휘어져 들어왔어.’
이상한 기분이 든 범석이 그녀의 검을 주시했다. 절대 검으로는 이런 변화가 일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심하다 할 정도로 떨리는 검끝을 보고는 눈을 반짝였다. 그녀의 검은 투 핸드 소드. 보통의 금속으로 만들어졌다면 저런 흔들림은 발생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저 검이 이 리듬의 원인 중 하나인 것 같군. 특수한 금속 재질 때문에 검 면이 휘어지게 한이 분명해. 후후후.’
범석이 싱긋 웃었다. 중요한 데이터를 하나 얻어냈으니 그다음부터는 일사천리였다. 휘는 무구중 기괴한 변화를 일으키는 무기를 찾으면 그녀의 특이한 검술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일단 연검은 아니야. 좀 비슷하게 보이지만 레베카는 검술에는 연검 특유의 촐싹거리는 면이 없어. 뭐랄까 육중하고 길게 뻗어 나가는 기분이랄까? 마치 채찍처럼 말이야. 그, 그래 채찍! 채찍이다!’
범석은 여유로운 표정을 지었다. 그동안의 검 세 하나하나를 파악하고 종합해 본 결과, 레베카가 검술에서 묻어나오는 특이한 형태의 움직임은 바로 채찍이었다. 그동안 경험한 게임에서 무수히 상대해봤기에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검과 채찍의 조합. 바로 레베카의 특이한 검술의 정체였다. 이제 모든 데이터가 갖춰졌으니, 적절히 상대하는 일만 남았다.
땡땡 땡.
1회전 종료를 알리는 종소리. 범석이 아쉬운 듯 혀를 다시며 뒤돌아섰다. 이미지가 생생하게 잡혀 있는 지금이 테스트하기 가장 좋은 시기였던 탓이다. 하지만, 그깟 1분 동안 상황이 달라질 리가 없었다. 그는 비너스가 가져온 원형 의자에 앉고는 정면에서 휴식을 취하는 레베카를 노려봤다.
‘기괴한 리듬의 정체는 알았지만, 그래도 조심을 해야 해. 레베카는 본연의 실력만으로도 충분히 센트롤 리그 급 검투사와 맞먹을 정도니까.’
잠시 후 시간이 됐는지 심판이 둘을 링 중앙에 세웠다. 그리고 서로의 검을 맞닿게 한 후 뒤로 물러서며 2라인드를 시작시켰다.
차창.
다시금 맞부딪쳐지는 검으로 사방으로 작은 불꽃들이 튀겼다. 힘껏 뒤로 물러선 범석이 얼굴을 향해 날아오는 검 끝을 과감하게 올려쳐서 튕겨냈다. 이에 레베카가 흠칫 놀라 더 이상의 전진을 멈추고 주위를 맴돌았다. 조금 전 그가 다른 때와는 달리 검 끝 부위를 막았던 까닭이다.
‘설마. 눈치를 챈 건가?’
연질로 된 자신의 검을 막기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 바로 끝 부분을 막는 일이었다. 그럼 휨이 최대한 줄어들어 변칙적인 공격을 수행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단지 1라운드에 자신 검술의 정체를 파악한 자는 지금까지 아무도 없었다. 그만큼 검술 자체가 완성도가 높았고, 들고 있는 검은 채플린 사의 기술이 총 집약된 뛰어난 무구였다.
그녀는 혹시 우연인가 싶어 연속적으로 검을 휘두르며 범석을 압박해 들어갔다.
차창. 창. 캉.
‘여, 역시 맞아. 확실히 눈치챘어.’
변화가 적은 검 중앙보다 빠르게 흐르는 검끝을 막기가 더욱 힘든 일. 수십 합을 같은 방식으로 막아내는데, 인정하지 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레베카는 불안한 눈빛으로 범석을 바라봤다. 아버지와 아멜리아밖에 모르는 자신의 검술을 단지 3분 만에 파악하다니, 그의 재능이 너무도 두려웠다. 만약 그가 뛰어난 신체능력만 있었다면, 이리 접전으로 이끌고 나가지 못할 것으로 생각됐다.
“대단하군요. 제 검술을 파악하다니요. 어떻게 아셨죠?”
“어떻게 알긴. 네 검과 변화만 보면 대충 답이 나오는 거지. 하여간 나도 놀랐다. 검과 채찍을 섞어 새로운 검술을 만들어 내다니 말이야.”
레베카가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칭찬은 고맙지만, 이 검술은 자신이 창안해 낸 것이 아니었다. 오랜 기간 월드리그 검투사로 활동해왔던 아버지와 연인 엘프인 아멜리아가 고심 끝에 개발해 내, 자신에게 전수해 준 것이었다.
“제가 창안하지는 않았어요. 제 아버지와 연인 엘프가 만들어냈죠.”
“그래? 대단하신 분들이군. 그래도 상당히 익히기 까다로웠을 텐데, 여기까지 능숙하게 다루는 너도 꽤 재능 있어 보인다.”
“고마워요.”
“후후. 고맙긴 사실대로 말했을 뿐인데. 자 그럼 본격적으로 시작해보지. 너무 길게 끌어봐야 좋지 않다고. 자 간다.”
느슨했던 범석의 검 격이 순간 현란하게 변모하며 그녀를 향해 쏘여졌다. 바짝 긴장한 표정을 짓기는 했지만, 레베카도 추호도 밀리지 않고 검을 종횡무진 휘두르며 맞상대했다.
하지만, 데이터를 얻은 범석의 검과 맞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가 특유의 빠른 속도로 압박을 가하자,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범석의 민첩은 90대 중반 즈음에 병기는 나름 가벼운 편인 카타나인 반면, 그녀의 검은 무게가 나가는 투 핸드 소드였다. 그의 검을 일일이 막기 위해서는 공격을 자제할 수밖에 없었다.
차창. 창. 캉.
“히얏!”
범석이 양손으로 가볍게 쥔 카타나가 완만한 궤적을 그렸다. 빠른 타이밍 다음에 이어지는 느린 검 격에 레베카의 검 세가 일순 흐트러졌다. 그의 검에 예측한 방향과 전혀 다른 곳으로 흘러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허리를 뒤틀어 간신히 막고는, 다급히 거리를 벌렸다. 중심을 잃은 중에 이어지는 상대의 공격은 치명적이니, 일단 피하고 보자는 의도였다.
그러나 기다렸다는 듯이 범석이 검이 성난 파도와 같이 밀려 들어왔다.
창.
맞부딪힌 검에서 번뜩이는 불꽃이 일어나며 레베카의 안면실드를 사정없이 때렸다. 그녀는 자신의 머리에 거의 다다른 채 멈춰 있는 범석의 검에 놀라며 황급히 밀어내고는 계속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상황은 그리 좋아지지 않았다. 상하좌우로 날아드는 그의 검에 극한까지 몸을 움직이며 피해야 했기 때문이다.
‘안 돼. 스피드에서 내가 전적으로 밀려. 대결을 파워 위주로 이어나가야 내게 가능성이 있어.’
그러나 한 번 빼앗긴 주도권을 다시 찾아오기란 무척 힘든 일이었다. 특히나 자신보다 강한 상대에게서 더더욱 그러했다. 지금으로서는 버티다가 공이 울리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럼 새롭게 수를 짤 수가 있으니, 지금보다 한결 나은 대결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그녀는 사력을 다해 검을 휘두르며 범석의 압박을 버텨나갔다.
때땡.
2라운드가 끝이 나자 레베카가 가쁜 호흡을 내쉬며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단지 3분의 격전이었지만, 정신이 번쩍 나는 아찔한 순간의 연속이라 크게 지친 상태였다. 그녀는 의자에 축 늘어진 몸을 기대고는 밝게 내리쬐는 조명등을 실눈으로 바라봤다. 아까까지는 아무렇지도 않았던 열기가 지금은 그리 원망스러울 수가 없었다.
곧이어 1분간의 휴식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가고 심판의 호출로 다시금 그녀는 링의 중앙으로 나아가야 했다.
‘역시 만만한 상대가 아니야. 자칫 실수했다가는 내가 당해.’
2라운드를 일방적으로 몰아쳤지만 범석은 결코 안심하지 않았다. 승부가 쉽게 갈리는 검투경기에서 이토록 길게 라운드를 이끌고 나간다는 사실은, 그녀와 자신의 실력이 그리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얘기를 뜻했다. 약간의 실수라도 하는 날이면, 상황이 역전되어 패배를 당할 수도 있었다.
그는 레베카와 한 번 검 끝을 맞대고는 심판의 신호와 함께 3라운드 경기를 시작했다.
창. 차창. 캉.
주도권을 얻기 위한 이들의 싸움은 치열한 양상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덕분에 3라운드는 1, 2라운드와는 달리 대등한 형태로 이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겉보기와는 달리 형세는 한쪽으로 급격히 기울여지고 있었다. 범석의 검 세에는 여유가 묻어나오는 반면 레베카는 급격한 체력소모로 검 끝을 자꾸 흐트러뜨리고 것이다. 그녀의 사용하는 변형검술은 체력소모가 극심하다는 단점이 있었다.
“헉헉……..”
간신히 힘을 내어 빠르게 달려가 검을 휘두르는 레베카. 아주 무난한 정석적인 공격이었기에 범석은 쉽사리 막을 수도 있었지만, 몸을 피해 궤적에서 비켜났다. 위험할 수도 일이었지만, 지금의 그녀로서는 별다른 연속동작을 취할 수가 없다고 생각했고, 또 좀 더 체력을 깎아내릴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 때문이었다. 검이 중간에서 막히는 것과 완전히 휘둘러지는 것과는 체력소모 자체가 틀렸다.
창. 차창. 창.
중반쯤 흐르자 레베카의 움직임이 급격히 줄어들었다. 일단 방어일변도 나가 체력을 비축하기 위해서였다. 비록 밀리는 한이 있더라도 상대가 실수했을 때 밀어붙일 힘을 남겨놓아야 했다. 지금으로서는 승리할 방법은 그 수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이 모습을 본 범석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댔다.
“이제 끝났군. 힘든 경기였다.”
“헉헉. 아직 이에요. 검투경기는 일격 싸움. 언제라도 기회를 잡으면 상대를 능히 쓰러뜨릴 수 있죠. 당신이라도 말이에요.”
그가 콧방귀를 끼며 검을 휘둘러댔다.
“흥. 검술은 상대를 죽이기 위해 만들어진 격투술. 투지를 잃는 순간 승패는 결정 난다. 그리고 기회는 잡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넌 지금 이 두 가지를 모두 잊고 있다. 그러니 결코 나를 이길 수 없다.”
냉정한 목소리와 함께 쏘여지는 범석의 검 격에 그녀가 매우 놀라 움찔거렸다. 그의 눈빛에서 쏘아지는 살기에 몸이 제대로 가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레베카는 온 힘을 다해 검을 내리쳤지만 빠르게 이동하며 궤적을 바꾸는 검 끝을 따라잡지 못했다. 이내 범석의 검이 그녀의 검을 휘어 감싸더니 세차게 퉁겨졌다.
“안 돼!”
쾅하는 소리와 바닥에 부딪힌 투 핸드 소드가 하늘 높이 솟아오르더니 경기장 밖으로 나뒹굴었다. 범석이 레베카의 검 특유의 탄력을 이용해 손과 손목에 강한 충격을 줬던 탓이다. 보통 때라면 충분히 부여잡을 수 있었지만, 체력비축을 위해 칼자루를 허술하게 잡고 있었던 터라 쉽사리 공략을 당했다.
그녀는 자신의 목줄기에 닿은 차가운 검을 느끼며 고개를 푹 숙였다. 상대에게 바란 실수를 자신이 저질렀다니 어이가 없었던 탓이다. 범석 같은 실력자를 상대로 전력을 다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살 행위나 마찬가지였다.
“경기 종료! 승리 오범석 선수!”
우와와와! 우와와와!
심판의 경기종료 신호와 함께 관중의 환호성 소리가 터져 나왔다. 3라운드의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들이 보여준 긴박감은 여느 검투 경기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명승부였다.
그리고 관중은 아니지만 개중에는 환희의 눈물을 흘리는 자도 있었다. 바로 마틸다였다. 프로에 진출해서 절망스러운 세월을 보내나 싶었는데, 백마를 탄 왕자처럼 나타난 훌륭한 주인님이 자신을 구원해 주었던 것이다. 그녀는 격한 감정에 바로 링 위까지 달려 나와 범석의 품에 안겼다.
“버, 범석님! 이제 범석님이 제 주인님이 되어주시는 거죠?”
상심한 레베카를 잠시 바라본 범석이 싱긋 웃으며 그녀에게 대답했다.
“물론이지. 앞으로 마틸다 너는 나를 섬기는 엘프가 될 거야.”
“흑흑. 정말 고마워요. 앞으로 잘 모실게요.”
마틸다의 눈 설과도 같은 머릿결을 쓰다듬는 그에게로, 몇몇 행사요원이 다가와 둘러쌌다. 검투 부분 경기가 모두 끝이 났으니 시상식을 할 차례였던 것이다. 그들은 링 위로 1, 2, 3숫자가 써져 있는 상자를 가지런히 놓은 후 범석과 레베카, 3, 4위전에서 승리한 힐라를 세우고는 사진을 찍어댔다. 그리고 잠시 후 회장쯤으로 보이는 노년의 신사가 올라오자, 간단한 시상식을 치르며 상장과 부상을 안겨주었다.
============================ 작품 후기 ============================
오늘 부터 퍼펙월드 1일 1참 들어갑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비축분이 쌓이면 그날 쓴 분량 모두를 올리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앞으로 많은 관심 부탁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