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rfect World RAW novel - Chapter 94
95화
레인보우호텔의 인질사건은 에이번드지역 내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극렬 여성단체 일원 중 하나인 글로리아가 인질로 잡히고, 엘프 애호가들이 보는 앞에서 강력 범죄를 일으키는 엘프가 사살되는 사건이 일어났으니 조용할 리가 없었다. 하지만, 이 이슈는 생각만큼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엘프 애호가들이 슬그머니 발을 빼버렸기 때문이다. 현행법상 강력범죄를 일으킨 엘프는 안락사시키게 되어 있었고, 경찰은 그녀를 생포하려다 20여 명 가까이 부상당한 상태였다. 이런 중대 사태에 보호해야 할 엘프가 죽음을 당하고 없으니, 명분에서 달리는 엘프 애호론자로서는 굳이 쟁점화시켜 문제를 크게 만들 필요가 없었다. 또 여기에 엘프가 인질사건을 일으켰다는 사실이 세간에 널리 퍼져봤자 좋을 일이 하등 없다는 점도 한몫했다.
덕분에 렉스터는 쉽사리 서류를 위조해 범석에게 다프네를 인도할 수 있었다.
“다프, 아니 라피네. 안녕.”
범석의 음성에 얼굴에 붕대를 둘둘 감고 있던 한 붉은색 단발머리의 엘프가 의료실 침상에서 벌떡 일어섰다.
“주인님! 오셨어요.”
범석은 귀를 팔딱거리며 간절한 눈빛을 짓는 라피네에게 다가가 등을 토닥여줬다.
“어때. 의료실은 지낼만해?”
“네. 편해요. 수잔님도 잘해 주시고요.”
침대 위에 걸터앉은 그가 싱긋 미소를 지었다.
“오 그래? 그런데 필요한 것이나 먹고 싶은 것은 없어?”
그녀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어댔다. 범석만 옆에 있으면 더 바랄 것이 없었다.
“없어요. 전 주인님 곁에만 있으면 돼요.”
“후후. 이럴 때는 솔직히 말하는 거다. 그래야 나도 기분 좋게 네게 선물도 하고 그러지. 빨리 말해봐.”
라피네가 꼼지락거리더니 서서히 입을 열었다.
“그럼. 쌍검이 가지고 싶어요. 두께는 반 뼘 정도 되고, 검신 길이는 1미터 50 정도 되는 검으로요. 시중에 많이 나와 있는 제품이니, 쉽게 구입하실 수 있으실 것이에요.”
“왜? 훈련이라도 하게?”
“네. 빨리 주인님을 위해 검을 휘두르고 싶어요.”
그때 뒤에서 카랑카랑한 수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 돼! 지금 함부로 움직이면 얼굴이 흉 질 수 있어. 당분간은 훈련 금지야.”
그녀가 뒤로 다가오는 모습을 본 범석이 양손을 벌린 채 어깨를 으쓱거렸다. 팀 탁터의 소견이 이러니 이사장인 그도 어쩔 수가 없었다.
“후후. 검을 사줄 수 있지만, 당장에 훈련은 불가능하겠다.”
“하, 하지만…….”
수잔이 원형의 의자를 침대 옆으로 가져와 긴 한숨을 쉬었다.
“휴~ 라피네. 인간 남성들은 예쁜 여인들을 좋아한단다. 그런데 훈련을 하다가 얼굴에 문제라도 생겨봐. 당장에 주인이 범석님이 싫어하실걸. 그러니 잠자코 내 말대로 해.”
라피네가 마구 고개를 끄덕였다. 엘프로서 주인에게 예쁨을 받고자 하는 욕구는 창조로부터 비롯된 본능이었다.
“네. 알았어요. 수잔님 말씀대로 할게요.”
흡족한 미소를 지은 수잔이 이번에는 그를 쳐다봤다.
“범석님도 이리 아시고. 절대로 라피네를 무리하게 해서는 안 돼요. 알았죠?”
“예. 알겠습니다.”
그녀가 라피네의 환자복 사이로 살짝 드러난 검은색 문양을 보더니 다시금 말했다.
“그런데 범석님. 라피네는 어디서 데려온 아이인가요? 왜 상체에 저런 문신이 새겨져 있는 것이죠?”
범석이 움찔했다. 라피네의 진정한 정체는 얼마 전 레인보우 호텔에서 글로리아를 인질 삼아 경찰과 대치했었던 다프네였다. 그렇기에 당연히 외부에 정체가 알려져서는 안 됐고, 성형수술을 통해 외모를 바꾸게 되었다. 하지만, 이도 안심이 안 되었던지 명성치가 대폭 깎임에도 불과하고, 이름까지 바꿔 라피네라 부르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조심하고 있는 마당에, 아직 자신의 여인이 아닌 수잔에게 그녀의 과거를 솔직히 말하기가 어려웠다. 결국, 렉스터가 꾸며준 내용대로 읊을 수밖에 없었다.
“그냥 엘프시장에서 사온 아이입니다. 나이가 먹도록 안 팔려서, 안쓰러워서 사왔죠.”
“엘프 시장에서 사온 아이의 몸에 저런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는 말인가요?”
“네. 전에 한 구매자가 사갔다가 저렇게 만들고 반품했다더군요. 그래서 9살이 되도록 팔리지가 않았습니다.”
하긴 저런 문신이 그려진 엘프가 팔릴 리가 없었다.
“아. 그렇군요. 그런데 어느 엘프시장에서 구매하셨어요?”
“글쎄요. 장사가 안돼 폐점하는 한 엘프시장에서 사왔는데요. 신경을 쓰지 않아서 이름은 잘 기억이 안 납니다. 왜 알아다 드릴까요?”
수잔이 바로 손사래를 쳤다. 그저 사소한 호기심에 시작된 질문에 그런 수고까지 끼치게 할 수는 없었다.
“아니에요. 그럴 필요까지 있나요.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말이데요.”
그녀가 얼버무리자, 범석이 바로 다른 화두를 꺼내 들었다. 라피네의 얘기를 오래 끌고 가봐야 좋을 것이 없었다.
“그나저나 비올렛에 대한 메디컬 테스트 준비는 잘 되어 가십니까? 아마도 얼마 안 있어 도착할 텐데요.”
비올렛이라면 이번에 갓즈나이츠에서 새로 영입해오는 전도유망한 기대주였다. 제법 명성도 높은데다가, 팬들의 기대치도 높아 영입만 된다면 팀에 상당한 도움을 주게 되었다. 리그경기에서도 제법 쓸모 있고, 팀 엠블럼 제품 판매에 많은 기어를 하리라 예상되고 있기 때문이다.
“네. 저희 쪽은 잘되어 가고 있어요. 아니 준비할 일도 별로 없죠. MRI 전신 진단기에 눕히고 한 번 스캔하면 되니까요. 그럼 세균성, 바이러스성 질환을 제외한 신체적 이상 유무를 자동으로 다 알려줘요.”
검투사의 건강상태 유무를 잠시간의 장비운용으로 모두 파악하니 참 편한 세상이었다. 정말 저번에 무리해서 고가의 의료장비를 갖추기 참 잘했다고 생각했다. 덕분에 검투사의 건강 유무도 쉽게 체크할 수 있고, 라피네의 성형수술도 남모르게 할 수 있었다.
“그렇군요. 참 편리한 기계군요. 그런데 의료실에 더 필요한 장비 없습니까? 가격만 맞는다면 구매해 드리겠습니다.”
“글쎄요. 웬만한 장비들은 모두 갖춰져서 특별히 필요한 것은 없어요. 다만, 한 가지 제안할 점이 있기는 있는데요…….”
“제안요? 뭡니까?”
“사실 장비들이 워낙 놀고 있으니, 이 점이 좀 안타까워요. 꼭 필요하기는 하지만, 자주 사용되는 물건이 아니거든요. 그리고 전자장비라 너무 사용하지 않으면 쉽게 고장 나고요. 그래서 다른 용도로 활용했으면 해서요.”
하긴 그랬다. MRI 전신 진단기는 경기 후 검투사단 전원이 스캔 받는 2시간 이외에는 사용될 일이 거의 없었고, 로봇팔 시술대는 라피네의 성형수술 외에는 계속 작동을 멈춘 상태였다.
“어느 용도로 말입니까?”
“예. 서비스 차원에서 팬들 소유의 엘프들에게 무료검진을 해주는 것이에요.”
가당치도 않은지 범석이 손을 흔들며 난색을 보였다. 뜻은 가상하지만, 만약 그랬다가는 난감한 사태를 맞이할 가능성이 아주 컸다.
“그건 안 되겠습니다. 수잔씨도 알다시피 일반 치료센터의 엘프 검진비는 가계에 부담될 만큼 비쌉니다. 만약 저희가 무료검진을 시행한다면 너도나도 팬이라고 자처한 다음 훈련 캠프로 찾아올 겁니다. 그렇다면 의료실은 금세 북새통이 되고 저희 검투사들이 치료받을 시간이 없게 될지도 모릅니다.”
“네. 그럴 것이에요. 하지만, 시즌권에 1회 검진권 한 장을 덧붙이면, 가능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저희 지역 아마추어 검투팀에게 몇 장씩 나눠주고요.”
그가 관심이 가는 듯 수잔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이거 제법 남는 장사라고 생각됐기 때문이다. 1년 시즌권의 가격은 1800크랑. 일반 치료센터의 검진비용이 그 이상으로 드는 것을 봤을 때, 팬이 아니더라도 진료를 받기 위해 시즌권을 구매하는 사람들이 나올 터였다. 그러다 보면 수중에 경기를 구경을 올 테고, 자연스레 팬층은 두터워질 터였다.
다만, 문제라면 팬들이 늘어나게 되면 지금의 시설과 인력으로는 대처할 수 없고, 일반 팬들이 훈련캠프에 들락날락 거리면 훈련에도 집중할 수 없었다.
“나쁘지 않은 생각이지만, 좀 무리가 따르겠습니다. 지금이야 모르겠지만, 팬들의 수가 많아지면 수잔씨와 엘프간호사 한 명 가지고는 모자랄 겁니다. 그리고 솔직히 검진만 가지고는 로봇팔 시술대로 사용될 일이 없을 것 아닙니까?”
“그 문제는 범석님께서 새로운 사업으로 진출할 의향이 있으시다면 충분히 해결돼요.”
“새로운 사업이라니요? 무슨 사업요?”
그러자 수잔이 바로 자신이 계획한 바를 늘어놓았다. 바로 스포츠 의료사업 분야에 대해서였다.
엘프를 활용한 프로 스포츠가 활성화되며, 신체능력이 탁월한 엘프들의 몸값은 기하급수적으로 비싸졌다. 한 예로 월드리그 최고 검투사의 몸값이 70억 크랑을 호가하는 점을 보면 충분히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프로팀들은 이 소중한 자산을 지키기 위해 아낌없는 투자를 마다하지 않았고, 전 세계적으로 스포츠 전문 의료법인이 성행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에 그녀는 의료 인력을 확충하고 전문적인 의료법인을 만들어 본격적으로 스포츠 의료 사업에 뛰어들고자 원하고 있었다. 만약 이 사업이 본 궤도에 오르게 된다면, 큰돈을 벌 수 있을뿐더러, 갓즈나이츠팀의 검투사들이 안심하고 진료받는 환경이 조성되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범석으로서는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었다. 뭔 놈의 여자가 배포가 이리 큰지, 무슨 얘기만 나오면 거창하게 돈 들어갈 구석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말이 좋아서 의료법인이지, 거대전문치료센터를 세우고 의료인력을 충원하는 일이 한두 푼 들어갈 사업이 아님은, 의료분야의 문외한이라도 충분히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자, 잠깐만요. 너무 앞서 가시는 것 아닙니까? 이런 사업을 펼치려면 돈도 돈이지만, 전문화된 인력이 많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저희는 아무것도 없지 않습니까? 대체 뭘 믿고 이런 사업을 추진하시려는지 제가 통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먼저 작게 치료센터를 지어 저희 팬들의 엘프와 에이번드 지역 내에 있는 아마추어 엘프검투사들을 대상으로 시작하자는 것이에요. 그들은 낡은 장비를 착용하고 안전시설이 미비한 훈련장에서 연습하다가 크게 다치는 경우가 많아요. 게다가 진료비도 없기에 일반 치료센터에서 보통의 치료를 받거나, 자연치유력에 맡겨 성장잠재성을 깎아 먹는 경우가 허다하고요. 당연히 숙련되지는 않지만, 일반 치료센터보다 진료서비스가 좋고 가격까지 저렴한 저희 치료센터를 찾아오지 않겠어요? 그러다 보면 노하우가 쌓이게 되고 입소문을 타며 인지도가 쌓이겠죠.”
범석이 약간이지만 긍정적인 신호를 외부로 드러냈다. 비록 적지 않은 비용이 소요되겠지만, 팬 서비스차원에서 또 지역 검투계에 기여 하는 차원에서 시행한다면 홍보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게다가 팬들의 수를 획기적으로 늘릴 수 있고, 치료를 병행하게 되니 적게나마 수입이 예상되었다. 당연히 전혀 나쁘다고만 치부할 수만은 없었다. 그리고 인지도가 쌓이면 훗날 많은 스포츠클럽을 상대로 큰돈을 벌 수 있었다.
“필요로 하는 장비와 인력은요?”
“1년에 몇 명을 예상하시는데요?”
“한 4만 명 정도로 상정해 주십시오.”
“그럼 일단 인원은 지금 의료실 인력을 포함해서 6명의 의사와 12명 가량의 엘프간호사가 필요해요. 그리고 진료실 6곳과 수술실 둘, 8인 입원실 6곳도 있어야 하고요. 또 MRI진단기 두 대와 로봇팔 시술대에 부수적인 진단장비가 더 필요해요.”
범석이 곰곰이 고민해봤다. 많은 사람이 오고 갈 테니 일단 치료센터는 훈련캠프 외부에 짓는 편이 좋았다. 이에 시청에서 인근의 땅을 구매하고 3층짜리 건물을 새로 지어야 했다. 이뿐만 아니라 새롭게 의료장비까지 추가 구매해야 하니, 모두 합치면 초기비용만 대략 4,500만 크랑이 소요될 것이라 예상되었다. 그리고 추가되는 의료인력으로 발생하는 한 해 인건비가 500만 크랑정도 되었다. 올해만 근 5,000만 크랑이 드는 엄청난 사업으로 범석으로서는 크게 부담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만약 이 의료 팬서비스사업으로 시즌권이 2만 매가 더 팔려나간다면? 그럼 갓즈나이츠 팀은 매해 3,600만 크랑의 수입이 추가로 발생 되었다. 여기에 환자들은 시즌권을 구매했으니 경기장으로 구경 올 테고, 분위기에 휩싸여 팀 엘블럼 제품에도 눈길을 돌릴 터였다.
‘이거 잘만 하면 초기 투자비용을 일 년 안에 뽑을 수 있겠는데. 나쁘지만은 않아.’
홍보만 잘되면 절대 손해 볼 사업이 아니었다. 자신 같아도 비싼 일반 치료센터를 찾아가기보다는, 시즌권을 구매해 더욱 좋은 시설에서 싸게 치료를 받고 싶을 것이 분명했다.
문제는 지역 의료계의 극심한 반발이 예상된다는 점이었다. 자신들 밥그릇이 줄어드는 데 그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 무시해도 별 상관이 없을 듯 보였다. 이 사업의 표면적인 명분은 시즌권을 구입한 팬에게 서비스하는 차원이고, 또 지역 아마추어스포츠팀을 위한 사회 기여차원에서 벌이는 일이기도 했다. 즉 일반환자는 거의 받지 않으니, 지역의료계에서 반발할 명분이 미약하다는 얘기였다.
그리고 솔직히 이곳 세상의 엘프 치료센터의 진료비용은 너무 비쌌다. 단지 MRI 전신 스캔 한 번 받고 의사의 말 몇 마디를 듣는 것만으로 수천 크랑을 지불해야 하니, 일반인들이 쉽게 이용할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이런 상황에서 지역 의료계의 눈치를 살피기 위해 자신이 이 좋은 사업을 미적거릴 이유가 없었다.
결정을 내린 범석이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한 번 추진해 보겠습니다. 수잔씨께서는 이에 제반사항에 대해서 좀 더 알아봐 주시고, 보고를 올려 주십시오.”
수잔이 활기차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냥 마음속에 담아놓고만 있던 계획이 실제로 실천되다니, 꿈만 같았기 때문이다.
“네. 알겠어요. 확실히 세세히 조사한 후 보고 드리겠어요.”
시계를 확인한 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 비올렛이 올 때가 되었기에 이만 훈련장으로 나가봐야 했다.
“그럼 전 이만 가봐야겠습니다. 비올렛이 올 때가 다되어서요.”
“아. 그렇군요? 그럼 가보세요. 저도 메디칼 테스트를 진행할 준비를 하고 기다릴게요.”
고개를 주억거린 범석이 라피네에게 손을 흔들고 의료실 문을 나섰다.
============================ 작품 후기 ============================
이제 추석 시즌이 다가왔습니다. 아무래도 조카들의 본격적인 침략이 예상됩니다. ㅠㅠ. 용돈도 용돈이지만, 이 자식들이 게임하자고 삼촌인 저를 방에서 쫓아내곤 합니다. 줘 팰 수도 없고, 일단 하루치 정도는 비축분을 만들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럼 모두들 좋은 추석 맞이하시고요. 전 내일 또 찾아뵙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