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armacy RAW novel - Chapter 75
75화.
75화
정림을 만나고 온 날 슬픔에 젖어 있던 가흔이 떠오른다. 혼자 정림의 죽음을 감당할 가흔의 모습에 홀로 엄마를 보냈던 어린 가흔이 겹쳐져 심장이 에였다. 카운터에서 뒷사람에게 순서를 양보하고 지후는 옆으로 비켜섰다. 울고 있을 가흔이 자꾸만 상상이 되어 미칠 것만 같았다. 초조하게 시계만 바라보는데 위이잉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발신자를 확인하고서 지후는 깊게 숨을 내어 쉬었다.
“네, 아버지.”
그래, 지금 어디야.
음성만으로는 경국이 상황을 알고 있는지 모르는지도 알아챌 수 없었다.
“공항입니다.”
김무영 파트너가 전화 왔던데, 집에 무슨 일 있냐고 묻더라.
지후가 입을 한 번 꾹 다물었다가 떼어 냈다.
“아버지, 죄송합니다. 제가 지금 한국 가야 합니다. 가흔이가……, 아버지. 그 사람 이름이 가흔이에요. 가흔이 엄마 돌아가신 후 돌봐준 분이 계신데 걔한테는 그분이 전부거든요. 가족도 친척도 없어요. 그분이 갑자기 돌아가셨습니다. 가까운 친구들도 다 사정이 있어 가흔이 혼자…….”
지후야.
차분한 목소리였다. 지후는 눈을 질끈 감았다. 어떻게 설명해도 아버지를, 아니 그 누구도 납득시키기 어려울 일이었다.
“이해하시기 어려우시겠지만, 제가 지금 못 가면 평생 후회할 것 같습니다. 가흔이, 엄마 돌아가셨을 때 고등학교 2학년이었어요. 혼자 장례 치렀는데…….”
지후는 손을 들어 이마를 감쌌다. 이런 이야기들을 맥락 없이 늘어놓을수록 더 상황을 엉망으로 만들기만 할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 저는 이제 인연이라는 글자 뒤에 숨고 싶지 않습니다.”
잠깐 동안의 침묵 후에 민경국이 평소처럼 나직한 어조로 물었다.
내 기억이 맞다면 정 씨였지. 정가흔. 우리 고등학교 졸업생. 그 아이가 흔약국 약사가 되었니
“아…….”
경국의 물음이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어 지후는 답하지 못했다.
네가 만나는 사람 일부러 알아보지 않았다. 네 설명을 들으니 기억이 나. 약대에 진학했다는 것도 기억나는군.
“어떻게…….”
경국이 허허 웃었다.
내가 그 학교 이사장이야. 당연히 전부는 몰라도 눈에 띄는 학생은 알아. 장학금도 내가 선별해서 주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가흔을 굳이 포장하거나 숨길 생각은 없었지만 경국이 가흔을 기억한다면 고등학교 때부터 사정을 환하게 알 테고, 그런 가흔을 경국이 어떻게 판단할지는 짐작할 수 없었다.
민지후.
“네.”
비행기 표는 구했어
지후가 경국의 물음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내일 오전 동경행만 있습니다.”
내가 알아보마.
“아, 아버지.”
이야기는 서울 와서 나누도록 하자. 가야 한다고 마음먹었으면 늦지 않게 가 봐. 김무영 파트너에게는 네가 직접 설명하고 죄송하다고 말씀드려. K전자 프로젝트에서 뺀다고 해도 그건 김무영 파트너 소관이니 나는 그다지 할 말이 없고.
“아버지……. 그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버지.”
지후는 뜨거워지는 눈을 누르며 보이지 않는 경국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택시 안에서 지후는 핸드폰을 확인했다. 가흔에게서는 답이 없고 전화는 여전히 받지 않았다. LA공항에서 두 시간 후 출발하는 비행기를 타고서 인천에 도착하자마자 택시를 타고 경기도 안성시로 가 달라고 부탁했다. 가흔과 연락이 닿지 않아 마음 요양원으로 전화를 걸어 조정림 약사의 장례식이 치러지는 협력 병원 주소를 받았다.
열세 시간 남짓 비행기를 타고, 다시 공항에서 꼬박 두 시간 넘게 차를 달려 병원에 도착하니 이미 어두운 밤이었다. 날씨가 요 며칠 사이에 추워지기도 했지만, 병원 앞에 부는 바람은 더욱 차게 느껴졌다.
붉은 전광판 표시를 따라 찾아 들어간 장례식장은 지하 1층에 위치하고 있었다. 초라하다 싶을 만큼 작은 규모의 장례식장에서 패널에 떠 있는 ‘조정림’이란 이름을 확인하였다.
5호실은 가장 구석에 있고, 가장 크기가 작은 호실이었다. 이미 늦은 시간이라 가흔은 장례식장에 머무르고 있지 않을 것 같았지만 지후는 정림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 5호실로 향하였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정림의 미소가 한 번씩 생각났다. ‘민, 민.’이라고 지후를 불러 주던 목소리와 순수함만 남은 눈동자로 바라보던 시선, 안아 올렸을 때 생각보다 너무 가벼웠던 몸체와 붉은 장미 꽃다발을 받고서 기뻐하던 표정이 번갈아 기억이 났다.
‘다시 오겠습니다.’
인사를 하자 지후의 손을 꼭 잡고서 정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인사를 이런 식으로 지킬 수밖에 없어 죄송했다. 5호실 앞에는 교실에서 사용하는 크기만 한 책상이 놓여 있었다. 그 위에 가로로 길게 방명록이 펼쳐져 있었지만, 적혀진 이름은 거의 없었다.
장례식장으로 들어가는 입구 천장에 설치된 패널에는 ‘조정림’ 이름 아래 상주 이름이 있었는데 아무도 찾아볼 수 없었다.
지후는 구두를 벗고 안으로 들어섰다. 방문객이 없는 쓸쓸한 장례식장은 텅 비어 다른 불은 모두 끄고 영정 앞 작은 등만 밝혀져 있었다. 영정 사진 속 정림은 안경을 쓰고, 희고 짧은 머리를 단정하게 관리하고서 지후를 바라보았다. 딱딱한 표정이지만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눈매와 다문 입술은 이지적이고, 약간은 냉정하고, 고집이 세어 보였다. 가흔을 거둬 주고 돌봐준 정림은 고집보다는 심지가 더 깊고 굳은 분이셨다.
지후는 사진 속 정림을 바라보며 한 걸음 안으로 더 들어갔다. 천천히 무릎을 꿇으며 절을 올렸다.
늦어서 죄송하다는 말을, 가흔이를 돌봐주셔서 고맙다는 인사를 속으로 전하고 바닥에 붙은 이마를 떼었을 때, 문득 지후는 고개를 비스듬히 뒤로 돌렸다. 다만 숨소리와 시선일 뿐이었지만 어두운 공간 너머 가흔이 느껴졌다. 식장 뒤편 불빛이 들지 않아 어두컴컴한 모서리에서, 검은 상복을 입고서 커다란 눈에 눈물이 고여 가흔이 지후를 바라보고 있었다.
“……가흔아.”
사람을 목소리가 아닌 감정으로 부를 수 있는지 몰랐다. 꿈처럼 제 목소리가 뿌연 안개 속에서 흩어지는 기분이었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이 착각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눅눅한 어둠 속에서 지후가 일어섰다.
“가흔아.”
조금 더 명확해진 부름이었다.
“가흔아.”
지후가 가흔 앞에 다가가 무릎을 접으며 앉았다. 가흔의 몸에서 젖은 향냄새가 났다. 불투명하고 무거운 어둠 속에서 검은 옷을 입고 창백해진 가흔이 지후를 보았다. 눈물을 가두어 검은 밤 호수처럼 반짝이는 눈이었다.
“나 왔어.”
가흔이 으으으, 소리를 내며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지후가 깊이 구부러진 가흔의 등을 쓰다듬었다. 몸을 구부리고 있어 그런지 가흔이 아이처럼 작고 애틋하게 느껴졌다. 작고 어둡고 쓸쓸한 장례식장, 죽음이 드리워진 어두움 속에 버려진 아이처럼 가흔은 또다시 홀로 가라앉고 있었다.
“가흔아.”
가흔은 등을 들썩일 뿐 고개를 들지 않았다. 지후가 떨리는 등을 다독이며 말했다.
“혼자 힘들었지.”
“어어어…….”
가흔이 갑자기 아이처럼 소리 내어 울었다. 이렇게 우는 모습은 단 한 번 본 적도, 상상해 본 적도 없었다. 지후가 엎어진 아기를 안아 주듯 가흔의 팔 아래로 손을 넣어 끌어안았다. 몸을 지후에게 기댄 채로 가흔은 울기만 했다. 눈물로 만들어진 사람처럼 계속, 지후의 목덜미가 흥건하게 젖도록 울었다.
“엄마……. 엄마, 엄마아…….”
가흔이 길 잃은 아이처럼 엄마를 불렀다.
“응.”
“……울 엄마, 돌아가셨을 때. 어어어, 어어엉.”
“응.”
지후는 가흔의 등을 쓰다듬고 머리를 만지며 울음으로 다 알아들을 수가 없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나 어어어엉 너무 무서웠는데. 진짜 무서웠는데…….”
지후가 떨리는 가흔의 몸을 힘주어 끌어안았다.
“그래, 알아.”
열여덟 살 가흔이 엄마를 보내던 장례식에서도 이렇게 있었겠구나. 홀로 검은 구석에 앉아 어둠 속에 잠식되어…….
엄마가 없어진 세상은 지후가 알던 세상이 아니었다. 아무리 따스한 품을 내어 주어도 아버지도 친척도 그 누구도 엄마는 아니었다. 엄마라는 세상이 무너졌는데, 가흔은 홀로 추락해야 했다. 지후의 목소리가 아픔으로 갈라졌다.
“혼자 있게 해서…… 미안하다.”
“나는, 어어어,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기다리는 내가 싫고. 바보 같고.”
지후의 뺨이 눈물로 젖었다. 가흔의 눈물과 지후의 것이 뒤섞여 서로의 뺨을 적셨다.
“미안, 미안……. 미안해.”
가흔이 지후의 잘못이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지후는 울음이 잦아들 때까지 가흔을 품에 가두었다. 가흔을 안고서 등을 쓰다듬으며 그 슬픔을 조금이라도 나누어 받을 수 있다면, 무엇이든 포기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한참을 울던 가흔이 고개를 들지 않고 물었다.
“어떻게…… 왔어요.”
“신영이.”
“응.”
“화내더라. 내가 집에서 정한 여자가 있다던데 ”
가흔이 품속에서 조금 고개를 움직였다.
“그런 여자 없어.”
가흔이 그제야 지후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나는, 선배가……. 서병원…….”
“서병원은 권승준이고.”
“차녀.”
서지현이라니. 하아, 지후가 짧게 한숨을 쉬었다.
“절대 아니야. 개인적으로 따로 만난 적도 없어.”
가흔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흔아. 왜, 너는 나를 믿지 않아 홍정미나 서지현이나 난 모르는 사람이나 마찬가지야. 알잖아. 쭉 그랬어. 내가, 너한테만 다 줬잖아. 도시락도 참고서도 속마음도.”
지후의 목울대가 크게 움직였다. 가흔이 손을 뻗어 지후의 떨리는 입술에 손가락을 올렸다.
“그래, 입술도.”
지후가 조금 찡그리며 웃었다.
“나쁜 녀석. 다 줬는데 늘 번번이 네가 나를 버렸어.”
가흔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또 권승준이라고 생각했어. 길고 오래된 사이에 내가 끼어들었구나. 이 악물고 이번에도 물러나 줬는데. 왜 이렇게 울면서……. 너 왜 혼자야!”
가흔이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승준이랑은 선배 만난 후 한 번도 돌아가겠다는 생각한 적 없어요. 그리고 나……, 고등학교 때는 아니었어요. 그냥, 너무 두려워서. 선배를 너무 좋아하는 내가 너무 두려워서.”
지후가 고개를 비스듬히 돌리며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나쁜…….
가흔이 다시 울음을 터트렸다.
“나는 왜……, 선배 앞에서는 계속 초라하기만 할까요. 나 진짜 괜찮은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선배 앞에서는 초라했어.”
“그렇지 않아. 한 번도 그랬던 적 없어.”
지후가 가흔의 눈물을 닦아 냈다. 그러는 동안에도 남아 있는 울음 때문에 가흔은 몸을 떨었다.
“울지 마.”
가흔이 눈물을 매단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나를 구해 줘.”
가흔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나를 떠나야 하는 너를 존중하려 죽을힘을 다해 노력했어. 그러면서 나를, 그리고 너를 들여다보려 했어. 고등학교 시절 완성되지 못한 연애 때문이 아니야. 그리고 너는 결코 내게 가엾거나 불쌍하고 초라한 사람도 아니야.”
지후가 조금 웃었다.
“피로 맹세할 수도 있어. 너는 붉은 마커로 엉터리 맹세를 했지만.”
가흔의 핏기 없는 얼굴에 약한 웃음이 떠올랐다.
“웃어, 그러면 내가 널 구해 줄게.”
지후가 가흔의 흘러내린 머리칼을 부드럽게 정리하였다.
“그 말은, 가흔아……. 열아홉 살 민지후가 할 수 있는 최고의 고백이었어.”
가흔이 울음을 참으려 입술을 깨물었다.
“정가흔, 너와 함께 있었던 열아홉의 날들이 내 인생에 가장 찬란한 시절이었어. 그래서 정가흔은 빛나는 조각이 되어 내 몸속에, 여기에.”
지후가 심장을 툭툭 두드렸다.
“여기에 박혀 있어. 그러니 그걸 잃고는 내가 제대로 살 수가 없어. 다만……, 남은 날들을 그저 살아 내고 또 살아 내겠지.”
지후가 가흔의 눈을 바라보며 고백했다.
“그러니, 이번엔 네가 나를 구해 줘.”
지후의 뺨으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손을 들어 가흔이 지후의 눈물을 만졌다. 웃음 끝에 다시 울음이 터져 가흔은 지후의 품에 몸을 기대었다.
지후는 팔을 둘러 가흔을 깊이 껴안았다. 가흔의 심장 박동이 지후의 가슴에 고스란히 전해졌다. 깊고 어두운 곳 뒤편에 숨겨져 있던 찬란한 조각이 다시 빛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