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armacy RAW novel - Chapter 76
76화.
76화 에필로그
댕댕댕, 청량한 울림에 고개를 들었다. 약국 문에 붙은 종이 흔들리며 약하게 여음을 만들었다.
“어서오세요오.”
조제실 안에서 약사가 목소리만으로 인사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지금 나갑니다아.”
경쾌한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잠시 기다리는 동안 약간은 긴장이 된다. 설렘에 가까운 긴장감이다. 흰 가운을 입고 머리를 하나로 묶은 약사가 조제된 약을 들고서 눈인사를 짧게 건네었다.
“안지영 님, 열도 있으시고, 감기에 위통에 잠도 잘 못 주무시나 봐요. 해열제랑 안정제가 따로 처방되어 있어요.”
약사가 폴리백에 흰 스티커를 붙이고 네임펜으로 약 이름과 용법을 크게 썼다.
“해열제는 여기 핑크색 알약이고요, 안정제는 조그마한 알약이에요. 안정제는 필요할 때 밤에만 드세요.”
“내가 늙으니 도통 잠이 안 와 가지고 초저녁에 깜박 잠이 안 들면 그냥 날밤을 새고 새벽까지 있는다니까. 어제도 왜, 그 드라마 제목이 뭐더라. 왜 있잖아, 눈 똥그랗게 뜨는 여자애 나오고 저녁 뉴스 전에 하는 거. 그거 보다가 깜박 앉은 채로 졸았는데 그러고 그 뒤로는 밤에 잠이 아주 죽어라고 안 와서. 밤새고 나면 머리가 더 너무 아프고, 속에서 신물이 넘어와 가지고. 이틀 전부터는 아주 몸도 떨리고 단단히 탈이 났지 했어. 이게 다 늙어서 그래.”
할머니가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한참 동안 고통을 호소했다. 약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를 다 들어주고는 부드럽게 말했다.
“네, 저런. 두통이랑 잠 못 자는 게 사실 누구한테 보여지는 부분도 아니라 제일 힘들어요. 너무 힘드시겠어요. 전에도 이 약 처방받으셨죠. 짜 먹는 제산제예요. 신물 넘어오는 증상 있을 때 드시면 되고요. 몸살 기운은 약 드시면 조금 나아질 거예요.”
건네준 약을 받고서도 할머니는 다시 약사에게 질문을 하였다.
“약사님, 이거 잠 오는 약, 많이 안 좋은 약이야 울 애들이 나 수면제 먹지 말라고 하도 성환데 안 먹으면 두통이 심해지니까 더 잠을 못자서…….”
“수면제는 아니고요, 비슷한데 조금 성분이 달라요 그래도 신경안정제는 아무래도 자주 드시면 그러니까, 평소에 따뜻한 대추차 같은 거 드시면 조금 더 편안하게 주무실 수 있어요. 요즘 날씨 춥잖아요. 찜팩 데워서 목 뒤에 두시거나 배 위에 올려 두시면 잠이 스르륵 올 때도 있어요. 저도 추울 때는 그렇게 하거든요.”
“그래, 그럼 그렇게 해 봐야겠다.”
“네, 네. 빨리 나으세요.”
처방전을 들고 기다리는 사람이 한 명 더 있는데, 늘어지는 할머니의 이야기를 다 들어주고 끄덕여 준 후에 약사는 다음 손님에게서 처방전을 받아 들었다. 아기 엄마는 흔약국에 오면 으레 그러하다고 생각하는지 별달리 독촉하는 내색도 없었다. 조제실로 들어가는 뒷모습을 보면서 남자는 다시 좀 더 차례를 기다렸다. 이번에는 아기 엄마가 빠르게 설명을 듣고서 약을 챙겨 갔다. 아기에게 안녕, 약사가 웃어 주며 비타민을 건네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제야 차례가 돌아온 남자를 향해 약사가 웃으며 물었다.
“어디 불편하세요 아님 필요하신 거…….”
약사가 말을 멈추었다. 웃음기가 사라진 얼굴이었다.
“저……, 혹시. 음…….”
“지후 아빠 맞아요.”
“아, 잠시만, 죄송해요. 못 알아뵀어요. 너무 기다리셨죠 계속 서 계셨는데, 어떡하죠. 이리로 여기 들어오셔서 잠깐 앉으시면…….”
당혹스러운 감정을 감추지 못하고 가흔이 허둥거렸다. 카운터를 열었다가 경국의 눈치를 보며 다시 내리고는 빠르게 주위를 훑었다.
“약국이 어디 앉으실 데도 없이 좀 지저분하죠.”
내내 서 있던 모습이 맘에 걸리는지 가흔이 말끝을 흐렸다.
“아니에요. 평소에 앉아 있는 시간이 길어서 서 있을 기회가 주어지면 서 있는 편이에요. 일하는데 내가 불쑥 찾아와 방해를 하네요. 그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아니, 아니에요. 그렇지 않습니다. 괜찮으시면 들어오세요.”
“그럼 잠깐 들어갈게요.”
열린 카운터 너머로 경국이 들어왔다. 안쪽으로 들어오시라 하고 보니 경국은 지후가 카운터 안쪽에 서 있을 때보다 훨씬 더, 몇 배는 더 많이 부담스러웠다. 도통 어울리지 않는 사람을 약국 안으로 모시고는 가흔은 여전히 안절부절못하였다.
“음……. 여기 의자에 앉으셔도 되고, 저기 뒤편에 공부방 거기도 괜찮으시면…….”
경국이 가흔을 향해 약간 소리를 내며 웃었다.
“나는 다 좋아요.”
이사장님이 저렇게 웃으시니 지후와 닮았구나.
가흔은 멍하게 경국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전혀 준비하지 못한 방문이었다. 한번 보고 싶다는 말씀을 전해 듣긴 했지만, 시간을 내어 장소를 정하고 부르시겠거니 하고만 생각했다. 가흔의 예상을 깨고 평일 오전, M&P 대표가 작고 후미진 약국으로 찾아왔다.
경국이 컴퓨터 앞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얼굴만 한번 보고 가려고 했는데, 어쩐지 조금만 이야기를 나눠 보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요.”
“이사장님, 말씀 놓으세요.”
경국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럼.”
가흔이 권해 준 의자에 자리를 잡고 경국은 맞은편 가까이에 앉은 가흔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고등학교 생활기록부에 있던 사진을 몇 번이나 떠올리려 했지만 눈이 총명해 보였다는 기억 외에는 희미하게만 남아 있었다.
가흔이 고등학교 3학년이 되는 봄이었다. 경국은 신학기 장학금 수혜자를 선정하면서 생활기록부에 결석 기록을 살펴보았다.
모친상.
편모 가정으로 기억하고 있었는데, 모친상이라니 싶어 물어보니 친척과 같이 지내는 걸로 안다고 교장은 대수롭지 않게 설명했다.
“지난겨울 기말 전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그 시험 성적도 떨어지지 않고 참 의지가 대단한 학생입니다. 이렇게만 하면 스카이에 진학도 가능하고 S대도 욕심내 볼 만하고요.”
경국은 마음이 쓰여 아이의 이름과 사진을 한 번 더 보았다.
“이 학생은 제가 따로 학비 외에 용돈도 같이 주고 싶습니다. 다른 학생들에게는 형평성 문제가 있으니, 교장선생님께서 다른 단체에서 받으신 후원금으로 해 주십시오.”
경국은 정가흔이 약대에 진학했다는 소식을 듣고서 여러 기준을 맞추어 가흔과 또 다른 학생 한 명에게만 입학금과 첫해 등록금을 지원해 주었다. 잘 견뎌 내 줘서 다행이고 기특했다. 선물처럼 준 등록금이나 정가흔이라는 이름은 이후로는 완전히 잊어버렸다. 지후가 공항에서 ‘가흔이가, 엄마가 돌아가시고……. 고등학교 2학년이었는데.’라고 말하던 순간 정가흔 이름 석 자가 정확히 떠올랐다.
흔약국 약사. 민지후가 빠진 사람이 정가흔이었다.
가흔이 머그잔에 티백을 넣어 와 경국에게 권하였다.
“녹차예요.”
“고마워.”
“저한테 하실 말씀이 있으셔서…….”
아마도 지후 모르게 찾아온 까닭이 좋지 않은 것이라 믿는 모양이었다. 입술을 깨물었다가 떼어 내는 모습을 보며 경국이 고개를 저었다.
“할 말이라기보다 얼굴이 선명하게 생각이 안 나니 궁금증을 참지 못하겠어서.”
“이사장님께서 저를 기억하세요 ”
가흔은 지후가 하는 말을 듣고서도 믿지 않았다.
찬후가 다니는 흔약국을 찾아보셨겠지. 지후가 만난다는 여자를 알아보고 기가 막히셨겠지. 승준이네 부모도 가흔을 못마땅해하셨는데 민경국 이사장님이라면 충분히 훨씬 더……, 얼마나…….
그래서 가흔은 다 괜찮을 거라며 편안해하는 지후와 다르게 마음을 졸였다. 승준의 부모도 가흔과 사귈 때에 승준에게는 가흔이 흡족하다, 예쁘다 내내 그러시고는 가흔 혼자 있을 때만 꼭 진심을 알리곤 했다. 잘난 아들을 고작 천애 고아에게 콩 한쪽 못 받고 보내 줘야 해 속이 쓰리다고, 네가 우릴 이해해야 한다고 몇 번이고 입버릇처럼 말하셨다. 마지막에 서병원과 결혼이 틀어지면서 가흔에게 퍼부었던 폭언을 생각하면 지금도 몸이 떨렸다.
지후 집안 역시 다르지 않겠지. 다만 우아하신 분들이니까 더더욱 말을 고르시겠지.
홀로 감내해야 할 무게를 가늠하며 그런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헐었다.
“저 고등학교 때 이사장님이 주시는 장학금을 받았어요. 그 명단에서 제 이름을 아직 기억하시는지 조금은 놀라워서요. 저를 정말 기억하고 계셨나요 ”
“그럼. 정가흔, 기특한 학생이었는데. 그래서 내가 고3 때는 따로 용돈도 줬는걸.”
가흔이 당황스러워하며 경국을 쳐다보았다.
“아, 저……. 혹시.”
“형평성 문제 때문에 교장선생님이 대신 전해 주셨지.”
“저, 저는 정말 정말 몰랐어요. 교장선생님은 복지 단체에서 들어오는 후원금이라고만, 그래서 제가 운 좋게 받는 거라고.”
“비밀 지켜 달라고 부탁했으니까.”
경국이 따뜻한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
“원래는 1년에 두 번 명단만 확인하고 장학금을 재단에서 줬는데, 용돈은 매달 말일 내가 직접 부쳤어. 교장선생님 이름으로.”
“어떻게 그렇게……. 돈도 그렇지만 몹시 번거로우셨을 텐데.”
가흔은 단 한 번도 날짜가 틀리지 않고 들어오던 용돈을 기억하며 목이 메었다. 정림이 주었던 아르바이트비에서 식대와 생활비를 사용하고 매달 들어오는 용돈은 한 푼도 헐지 않고 차곡차곡 모았다. 통장의 금액만큼 가흔에게는 살아갈 힘이 생겼다. 대학 첫 학기 등록금을 만들 수 있겠구나. 매일 희망이 자라났다.
“매달 돈을 부치면서 응원도 같이 부쳐 줬는데……. 대학을 갔다는 이야기를 듣고서는 잊어버렸지만 그땐 그랬어.”
가흔은 뭔가 말을 하려 입을 벌리다가 다시 다물고 으음……, 눈물을 참고 울음 덩어리를 삼키면서 다시 입을 벌렸다가 도로 다물었다.
내가 은혜를 원수로 갚는구나.
고개도 들 수가 없었다. 고맙습니다, 라고 말해야 하는데 고맙다는 말조차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무슨 소리이든 입 밖으로 나가면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 울면서 죄송하다고, 은혜를 이런 식으로밖에 갚지 못해 죄송하다고. 그렇지만 지후 선배는 포기할 수가 없다고, 용서해 달라고 배은망덕한 소리를 지껄일 입을 차마 벌릴 수가 없었다.
“뭐라고 불러야 할까. 약사님 ”
가흔이 시선을 낮춘 채로 고개를 저었다.
“그럼 이름 ”
“……네.”
가흔이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그래, 가흔아.”
“……죄송……합니다.”
가흔이 겨우 입을 벌려 용서를 구했다.
경국은 차분하게 되물었다.
“왜 그런 말을 하지 ”
결국엔 가흔의 차오르는 눈물로 시야가 부옇게 흐려졌다.
“저 이사장님 은혜 갚고 싶었거든요. 장학금 주신 거 다 갚아 드리고 좀 더 나은 사람이 되어서 ‘내가 이 아이 장학금 참 잘 줬구나.’ 그런 생각 드시게…….”
가흔은 억지로 눈물을 멈추고 발끝만 바라보았다. 아래로 내린 시선에 길고 큰 손이 잡혔다. 가흔이 손을 내민 경국을 올려다보았다. 잡아 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천천히 손을 올리자 악수하듯이 가볍게 쥐고는 손등을 두드려 주었다.
“충분히 그런 생각 들어.”
가흔은 경국의 눈을 보면서 망설이던 말을 결국 꺼내고야 말았다.
“이사장님. 저……. 그래도 지후 선배 계속 만나면 안 되나요 ”
가흔의 커다란 눈에서 참았던 눈물이 기어이 뺨으로 흘러내렸다.
“무슨 말이야.”
경국이 눈썹을 조금 굳히며 가흔을 바라보았다. 이해하기 어렵다는 표정이었다. 가흔 역시 경국을 쳐다보며 설명을 잇지 못했다. 똑바로 가흔을 쳐다보는 눈빛이 매서워 몸이 굳는 것만 같았다.
“무슨 말이야.”
경국이 똑같이 반복하여 물었다. 가흔이 용기를 끌어모아 겨우 답을 했다.
“……제가 너무 염치없는데요. 그런데…….”
“이런.”
경국이 당황스러워 내는 소리에 가흔이 움칫 어깨를 떨었다. 경국이 감정을 감추며 미소를 만들었다.
“지후가 얘기하지 않았니 ”
“무슨 이야기를…….”
“내가 비행기 표도 구해다 주고 지후 녀석 회사에서 펑크 낸 것도 커버해 주고, 그리고 데이트하라고 용돈도 따로 더 줬는데. 맛있는 거 안 사 주던 ”
“그러긴 했는데요…….”
“그런데 ”
“저를 보시면 저한테 따로 말씀하실 거라고 생각했어요. 오늘 그래서 그 말씀하시려고…….”
경국이 눈매를 찡그리며 고개를 기울였다. 턱을 조금 들어 올리고서 가흔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가흔이 저도 모르게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숙였다.
“내가 좀 딱딱해. 지후랑 찬후한테도 말투가 딱딱하다고 애들 엄마한테 그러지 말라고 하는 잔소리 자주 듣는데, 그래도 너를 울릴 줄은 몰랐어. 지후가 속상해하겠다. 아들 여자 친구 일하는 데 와서 울리기나 하니, 내가 좀 민망하고……. 그런데 내가 그렇게 무서웠나.”
“아니요, 아닙니다.”
가흔이 고개를 들자 경국이 가흔을 향해 웃음을 띠며 말했다.
“아들만 키우다 보니…….”
“네.”
경국이 한 번 더 웃었다. 조금 더 부드럽고 약간은 쑥스러워하는 웃음이었다.
***
성북구 **동 오래된 3층짜리 상가 건물 1층에는 흔약국이 있다. 원래 이름은 조흔약국이지만 누구나 오래 전부터 흔약국이라고 부른다. 30년 만에 한국을 방문하여 흔약국을 찾은 조정림 약사의 딸은 더듬거리며 말을 해 보려다가 결국 영어로 의사 전달을 하였다.
“어머니의 뜻을 알고 있었습니다. 정가흔 약사님이 부디 약국을 받아 주세요.”
딸은 남미에 살고 있었는데 장례식이 끝난 후에야 한국에 올 수 있었다. 천천히 흔약국을 둘러보고 오랜 세월 동안 먼지처럼 내려앉은 감정 때문에 눈물을 흘렸다.
흔공부방에는 유나와 승찬이 새로 들어왔고, 찬후는 미국으로 떠났다. 한 번씩 SNS로 소식을 알리면 세영은 영어라서 읽기 싫다며 투덜거렸다.
여전히 공식 약사는 정가흔 혼자이지만, 자리를 비울 때나 주말에는 미스코리아처럼 늘씬하고 멋진 성민이 도와주고, 연애를 시작한 신영은 소신과 의리의 여인답게 흔공부방에 들르는 횟수를 줄이지 않았다. 바람결에 서수현이 미국으로 갔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승준이 가족과 연을 끊고 미국으로 간 지 1년이 지난 즈음이었다.
흔약국은 저녁 시간에 사람들이 가장 많이 붐빈다. 처음엔 흔약국 약사 정가흔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일주일에 두세 번은 꼭 그 시간에 저녁밥을 들고서 약국에 들르는 남편 때문인지 알게 된 후, 약사는 잠시 고민을 했다.
그만 오게 할까, 아니면 아침, 점심, 저녁으로 나누어 방문해 달라 할까.
“야근하는 날은 따로 오지 말아요. 저녁밥 들고 오느라 야근 더 길어지는 것 같아서 싫어.”
남편은 약간은 상심하여 약사를 바라보았다. 저녁밥만 같이 먹으러 약국에 가는 건 아니었으니까. 약사가 생긋 웃으며 남편의 뺨을 감쌌다. 달콤하게 입을 맞추고 속삭였다.
“일찍 와서 더 길게 해요.”
“그럴게.”
남편은 순하게 고개를 끄덕였는데, 와아……. 다음날에 약국을 들어선 남자를 보고 내방객들은 더 술렁였다. 남자는 완벽한 슈트 차림에 어울리지 않는 일식집 도시락들을 양손으로 나누어 들고 있었다.
“가흔아, 지후가 야근이다. 식사 시간은 넘기지 않도록 해. 공부방 아이들 것도 있어.”
남자가 대기하는 사람들 숫자를 확인하려 내방객을 쓰윽 둘러보는 동안 흔약국에 낯선 침묵이 내려앉았다.
“밥 먹는 동안 내가 좀 도와주련 ”
가흔은 양손을 세차게 저으며 거절했다. 민경국이 나간 후에, 한동안 동네 할머니들에게 시달려야 했다. 경국의 정치인 데뷔 시절부터 얼마나 환하게 기억하시는지 다들 총기가 당장 수능 시험을 쳐도 될 정도였다.
가흔은 혜진이 들르는 날이 제일 좋기는 했다. 전산일도 잘 봐주시고, 아이들 숙제 검사도 꼼꼼히 해 주고, 약국 내방객이랑 이야기도 잘 나눠 주고, 무엇보다 입덧을 하는 중이지만 가흔은 혜진이 싸 주는 건 뭐든 잘 먹었다.
“처음 본 날 알았어. 내 도시락 약사님이 먹었구나, 하고서.”
혜진이 가흔이 밥을 맛있게 먹을 때마다 한 번씩 놀리듯이 말했다.
문을 열면 북유럽 동화 같은 종소리가 울리고 “어서오세요오.” 밝은 목소리가 반기는 흔약국, 그곳에 가면 정가흔 약사가 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