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grapher Gil seung woo RAW novel - Chapter 138
138화 현대미술 작업
– 도움을 좀 줬으면 좋겠습니다.
몇 달 전에 나와 작업한 현대미술 작가 안훈주 씨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는 내가 전화를 받자마자 바로 본론을 말했다. 말인즉슨 잘 아는 후배 작가가 있는데 그의 작업에 내가 필요하다는 거였다.
“시간이 어느 정도 걸리죠?”
작업물의 해석이 어렵긴 하지만 현대미술을 하는 사람들은 세상을 보는 관점이 독특하다. 우리가 생각지도 못하는 행위로 자신의 개념을 설명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 최대 이틀 정도요. 아마도 하루면 끝날 것 같다고는 하는데, 제 작업이 아니라서 확실한 시간은 말해줄 수가 없네요.
하루 정도의 시간이야, 큰 부담 없이 낼 수 있는 시간이다.
“할께요.”
– 무슨 작업인지는 안 물어보십니까?
“제 사진 실력이 필요한 거죠?”
– 그··렇겠죠?
“스케줄 맞추고 같이 작업하면 될 것 같네요.”
지금 내게 필요한 건, 많은 경험을 쌓아서 미적 감각을 키우는 것이다. 예술 관련 일을 하고, 작가를 만나면 그런 감각이 발전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반갑습니다, 서영화라고 합니다.”
다음날, 안 작가님의 작업실로 가니 내 또래처럼 보이는 젊은 여자분이 안 작가님과 함께 나왔다. 곧 우리는 작업실 구석에 있는 탁자에 앉아 준비된 차를 마시며 얘기를 나눴다.
“두번째 작품들이에요. 전 첫 번째 작품들도 카메라를 이용했어요. 위태로운 청년들을 생각하면서 찍은 것들이죠.”
그녀는 첫 번째 발표한 작품집을 내게 내밀었다. 지금 봐달라는 뜻인 것 같아서 난 작품집을 폈다. 작품에는 건물 옥상이나 부서지기 일보 직전인 건물에서 위태로운 포즈로 서 있는 서영화 씨의 모습이 보인다.
“선배님이 제 전시회에 오시더니, 아쉬운 점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제가 그게 뭔지 물었더니, 의도는 알겠는데 사진작가를 쓴다면 더 주제를 명확하게 보여줄 수 있을 거라고 말이에요.”
“제가 그런 말을 했죠. 사진이라는 매개체로 주제를 전달하기 위해서는 사진작가와의 협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사진은 그냥 장면을 복사하는 데 멈추지 않는다는 점을 이 친구는 모르더라고요. 게다가 보시면 알겠지만, 사진가로서 자질도 없어 보이고 말이죠.”
“선배!”
안 작가의 말에 서영화 씨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그를 부르며 노려봤다. 서영화 씨의 사진은 나쁘다기보다는 평범했다. 보아하니 그녀가 직접 찍은 것도 아닌 것 같고 말이다.
“삼각대 세워 놓고 자동촬영 하셨나 봐요.”
“그게 보여요?”
“그럼, 보이죠.”
서영화 씨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자기 사진을 바라보고 있다. 이 작품의 문제를 내 관점으로 봤을 때 가장 큰 문제점은 사진을 복사기 정도로의 용도로 사용했다는 거다.
“영화 씨는 이 사진에서 한 가지 기능만을 사용하고 있어요. 있는 그대로의 묘사죠.”
“다른 건 뭐죠?”
“볼 수 없는 상상의 영역이죠. 카메라를 사용하는 사람이 지닌 관찰력과 감성이라고 할까?”
“전 잘 모르겠네요.”
“수많은 예술 작품이 있듯, 수많은 사진 작품도 있어요.”
“하아, 오늘 사진은 모두 길승우 씨께 맡겨야겠어요. 저에게 사진은 제 작품을 표현하기 위한 매개체에 지나지 않았으니까요.”
안 작가님은 우리 둘의 말을 듣다가 입을 열었다.
“자자, 그러면 말은 그만하고 둘 다 작업실로 가지, 오늘을 위해 모델들도 준비되어 있으니까 말이야. 나도 작업을 좀 해야겠고.”
난 서영화 씨와 그녀의 작업실로 향했다. 오늘 작업은 어떻게 보면 단순한 작업이었다. 벽화에서 사진을 찍는 사람들을 보고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커다란 종이에 여러 문양이나 소품을 그려놓고 그 위로 모델이 포즈를 잡으면 그걸 찍는 작업이었다.
“이건 모델들에게 입힐 옷들이에요.”
“직접 만들었나요?”
“네? 당연하죠.”
그림 솜씨도 보통을 뛰어넘는데 옷도 수준급이다. 사진 빼놓고는 다 잘하는 분 같아 보인다. 서영화 씨는 세 개 정도의 도화지를 펴고 있다. 나 역시 가지고 온 조명 기구를 설치했다.
“최대한 작품을 또렷하게 나오기를 원하시는 거죠?”
“그럼요. 여기에 제가 그린 그림의 색감을 하나하나 살려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이 옷의 디테일도 마찬가지고요.”
“알겠습니다.”
조금 기다리고 있으려니 모델로 보이는 두 명의 남녀가 작업실로 들어왔다. 그녀는 그들을 반기며 자리에 앉기를 권했다. 그리고 오늘 있을 작업에 관해 설명하고 그들이 해야 할 포즈 같은 것을 지정해줬다.
그중 인영이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 모델이 입을 열었다.
“결국, 누운 채 포즈를 잡으라는 거죠? 표정은요?”
“각 작품마다 나타내는 감정선이 달라요. 제가 알려드릴게요.”
그리고 곧 촬영이 시작됐는데, 처음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너무 표정이 일차원적이잖아요. 이건 현실을 이겨내고 꿈으로 향하는 여자를 나타낸 작품이란 말이에요.”
유명한 모델도 아니고 경력도 많지 않은데 바라는 바가 너무 많았다. 아까 슬쩍 어떤 식으로 모델을 뽑았냐고 물었더니 옷의 치수에 맞는 모델 중에 마음에 드는 외모를 지닌 사람을 뽑았다고 들었다.
“저기 서영화 씨.”
“네?”
“좀 나가주시겠어요?”
“네?!”
이렇게 가다가는 죽도 밥도 안 되겠다는 생각에 나는 그녀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그녀는 내 말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입을 열었다.
“지금 저보고 나가란 뜻인가요?”
“네. 그래 줬으면 하네요.”
“이유는요?”
“오늘 사진 촬영은 전적으로 제게 맡긴다고 하셨죠. 기억나세요?”
아까 전 만남에서, 분명 그녀는 내게 말했다. 영화 씨는 아까 한 말이 생각나는 듯 입을 열었다.
“하지만 의도가 충분히 표현되려면 제가 있어야 해요.”
“사진은 제게 맡기세요. 여기 영화 씨가 적어놓은 글 가지고 충분하니까 말입니다. 사진가는 사진가만의 시선이 있어요. 오롯이 영화 씨의 시선만 고집했다가는 삼각대를 쓴 것과 비슷한 결과가 나올 겁니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어요. 그럼 믿고 가겠습니다.”
조금 불쾌한 표정을 지은 서영화 씨는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갔다. 난 얼어붙은 모델을 향해 입을 열었다.
“시어머니는 갔으니까. 즐겁게 작업해보죠.”
“저기 좀 위험한 거 아니에요? 다시 작업해야 한다거나.”
인영 씨가 불안한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그 말에 덩달아 남자 모델 승진 씨도 불안해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오늘 사진은 제게 맡기기로 약속했습니다. 하루 진득하게 쓸 예정이고, 만약 또 와달라는 요청 있으면 상황에 따라 거절하셔도 됩니다.”
둘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날 바라보았다. 난 일단 그들에게 궁금한 점을 물어보았다.
“죄송한데, 경력이 얼마나 되죠?”
“전 이제 막 일 년이 되려고 해요. 잡지 쪽에서 촬영도 몇 번 했고요.”
난 승진 씨를 쳐다봤다. 그는 내 시선에 바로 입을 열었다.
“전 이제 활동한 지 6개월 됐습니다. 잡지와 쇼핑몰 촬영 경험이 있습니다.”
별다른 부가 설명이 없는 거로 봐서 아직 초보자로 봐도 무방할 것 같다. 약간은 심각한 상황이다, 영화를 예로 들자면 검증되지 않은 신인배우를 집어넣은 것이나 다름없다. 그것도 두 명이나.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연기력을 크게 필요로 하지 않는 작업이라는 점이다.
“여기 모여 봐요. 우리는 총 다섯 작품을 사진에 담을 예정입니다. 인영 씨가 하나 많아요. 인영 씨는 기쁨과 슬픔, 외로움을 표현해주시면 되고, 승진 씨는 분노와 욕망을 표현하면 됩니다. 간단한 작업이에요.”
온갖 미사여구로 작품을 설명했지만, 본질적인 감정은 이 다섯 가지다. 난 인영 씨에게 가장 자신 있는 감정 표현이 뭐냐고 물었다. 그녀는 ‘기쁨’이라고 대답했다.
“그냥 웃는다고 기쁨을 표현하는 건 아니에요. 뭐 때문에 기쁜지를 표현해야 하죠. 지금 인영 씨는 뭘 생각하고 있어요?”
“네? 그냥 웃음을 짓는다고··.”
“그냥 가까운 거부터 생각해요. ‘아, 오늘 되게 이상한 사람 만나서 힘들 것 같았는데, 없어져서 속이 시원하다’ 같은 진실한 감정.”
“두 분이 친하세요?”
“안 친하니까 이런 말을 하는 거죠.”
“와, 너무해! 하하.”
개인적으로 모델에 대한 욕심은 크게 없는 편이다. 잘 표현해주면 좋고, 좀 부족하더라도 어떻게든 감정의 골을 내가 메워가는 방향으로 작업을 했기 때문이다.
“손이 따로 놀아요. 포즈가 한정됐다고 해서 머리를 비우지 말아요. 몸의 움직임을 느끼고, 손끝 발끝까지 표현해 보세요. 어? 지금 아주 좋습니다.”
누군가의 인물 사진을 찍을 때면 난 평소보다 호흡을 적게 하고, 더 바라보고, 말을 건네고, 듣고, 교감하는 데 신경 쓰고 있다.
“승진 씨, 그렇게 과장되게 표현할 필요는 없어요. 지금 무슨 세계를 향해 이유도 없이 화가 나 있는 거 같아요. 그냥 소소한 분노에요. 예를 들면 게임을 잘하고 있는데 접속이 갑자기 끊어져서 모두 무효가 된다거나 하는 소소한 분노요.”
“너무 와닿는데요.”
난 사진은 의외로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작은 디테일을 보다 더 잘 발견할 수 있게 해준다고 생각한다. 뻔하고 과장된 것이 아닌 작은 뉘앙스나 제스처 같은 말이다.
“지금 인영 씨 입술의 움직임 아주 좋습니다. 입술만 찍어도 감정이 나와요.”
무조건 칭찬을 한다고 모델이 나아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칭찬이 생기를 주는 건 사실이다. 칭찬 한 번에 모델들은 좀 더 힘을 낼 수 있다고 생각하면 남는 장사다.
“승진 씨 지금 표현한 욕망은 음흉한 욕망 같아 보이네요. 나쁘지는 않은데 뭔가 갈구하는 욕망을 생각해줄 수 있어요? 예를 들면 돈이라든지··. 와, 표정 바로 나오는 거 봐. 그죠? 역시 돈이 최고예요.”
큰 어려움 없이 촬영을 마치고 난 모델들을 보냈다. 이 정도 사진이면 충분히 이해할 거로 생각해서였다. 난 그녀에게 전화했고 그녀는 바로 주변에 있었는지 금세 작업실로 들어왔다.
“일단 인화는 시간이 좀 걸릴 것 같고, 모니터로 보여드릴게요.”
“모델들은 갔나요?”
“네, 보냈습니다. 전 더는 찍을 것이 없었거든요.”
“안 작가님이 되게 겸손하고 예의 바른 사람이라고 승우 씨를 소개하셨어요.”
“저런, 안목이 별로시네요. 저 별로 겸손하지는 않아요. 근데 그 점이 뭐 문제가 됩니까?”
“··실력이 있으면 문제없죠.”
그녀는 내가 뽑은 A컷을 한참이나 말없이 바라봤다. 마음에 드는 건지, 아닌지 알 수가 없다. 한참 뒤에야 그녀가 입을 열었다.
“사진이 사물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게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겠네요. 누군가의 무엇에 대한 표현이었구나. 다른 방향의 예술이네요. 여기 이 표정들은 어떻게 잡아내신 거죠?”
“찾아낸 거죠. 저 표정을 잡아냈다기보다는 찾아낸 거예요. 그게 사진작가하고 일반인하고의 차이 중 하나겠네요.”
그녀는 한숨을 쉬더니 한발 물러서서 사진을 보다가 내게 말했다.
“이 작품은 더는 저만의 작품이 아니게 됐어요. 제 의도뿐만 아니라 길승우 씨의 생각이 담겨있으니까 말이에요. 선배님도 이 정도로 영향을 끼칠 줄은 몰랐던 거 같은데. 대부분의 사진가가 이렇게 찍나요?”
“모든 사진가는 자신만의 사진을 찍습니다. 똑같은 조건에서도 같은 사진은 나오지 않아요.”
“그냥, 제가 바보 같네요. 사진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면서 사진으로 작품을 표현하려고 했다는 게 말이에요. 이걸 온건하게 제 작품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연습이 필요할 것 같아요.”
오늘 찍은 사진으로 작품을 완성할 생각은 없어 보인다. 하지만 난 이 예술가의 생각을 존중하기로 했다. 사진의 가치를 알아차리고 자신의 관점으로 작품을 찍겠다는 생각을 지닌 거니 말이다.
“사진 학원도 있고, 요즘은 인터넷에 좋은 강의가 많으니까 도움이 되실 거예요.”
“아니요, 오늘 사진 보고 결심했습니다. 제게 사진을 알려주세요.”
“··네?”
뜻밖의 말에 난 당황하며 그녀를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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