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grapher Gil seung woo RAW novel - Chapter 14
15화 우연히 얻어 걸림
다음 날, 나와 미선이 누나는 출근하자마자 선생님의 호출을 받았다. 어제 사진을 보여준 이후에 미선 선배의 태도가 이상하다. 촬영장에서 돌아오는 내내 말도 걸지 않고 혼자서 한숨을 몇 번이나 내쉬는데 가시방석이 따로 없었다. 오늘도 내가 인사를 건네자 얼굴도 쳐다보지 않고 힘없는 목소리로 ‘응’이라고 대답한 것이 다다.
“네, 선생님. 부르셨어요.”
미선 누나가 말하자 정만종 선생님은 고개를 들고 입을 열었다.
“다름이 아니라 어제 찍은 사진 때문에 불렀어.”
“아, 어제 찍은 사진이요.”
“재영이 녀석한테 전화가 와서 좋은 사진 건졌는데 미선이 네가 찍었냐고 물어보더라고. 근데 이거 저 녀석이 찍은 거지?”
선생님은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미선 선배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승우가 어제 찍은 사진이에요. 사진·· 대단하죠?”
“어제 저 녀석 데리고 간 거야?”
“네, 그냥 실력 좀 알아보고 싶어서 데리고 갔는데 제 자신감이 하루 만에 무너졌어요.”
선생님은 그런 미선 누나를 지그시 바라보더니 책상을 손가락으로 치며 뭔가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러더니 뭔가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일단, 이건 영화 스틸 컷은 아니야. 그러니까 미선이 네가 자신감을 잃을 필요는 없어. 나머지 사진을 비교해보면 알거 아니야.”
“하지만 선생님. 사람들이 원하는 건 잘 찍은 여러 장의 사진이 아니라 인상에 남는 한 장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점에서 승우의 사진은 절 기죽게 하기에 충분했어요. 저 다경이하고도 언니 동생하면서 지낸지 꽤 됐거든요. 근데 이런 얼굴이 있는 줄은 몰랐어요. 근데 얜 하루 만에 이런 표정을 찾아내고 찍었다는 거 아니에요.”
저기, 누님. 제가 일부러 찾아낸 게 아니라 우연에 우연이 겹쳐서 그런 사진이 나온 겁니다. 그리고 그 촬영장에서 건진 거의 유일한 사진이기도 해요. 자기는 멋진 사진 수백장 뽑아내고서 왜 저러는지 모르겠네. 자, 선생님도 어서 말을 해줘요. 이런 사진 별 거 아니니 신경쓰지 마라고.
“미선아, 그게 재능이라는 거다.”
저기, 선생님?
“··”
“재능 있는 사진작가는 그냥 티가 나. 전체적인 수준을 보자면 네가 훨씬 나은 데 저런 녀석들은 기본적인 실력은 없는데도 반짝이는 재능을 끼워 넣고는 하는 거지. 세상에 괴물은 많아. 이런 사진 하나에 흔들렸다가는 이도저도 아니게 된다.”
“하지만.”
“내가 이 스튜디오를 이끌 날은 얼마 남지 않았어. 특히 야외촬영은 체력의 한계를 느끼는 경우가 많지. 내년부터 너하고 영효를 중심으로 스튜디오를 정비할 생각인데 이러면 곤란해. 넌 너 나름대로의 길을 잘 개척하고 있다. 잊지 말고 나가봐. 그리고 승우는 좀 남아라.”
미선 선배가 나가자 선생님은 화면을 보며 말했다.
“이 사진, 좋은 사진이다. 인물 사진에서 좋은 사진작가의 기본은 인물의 새로운 이미지를 만드는 거야. 보통 이런 작업은 인물에 대한 통찰력이 타고 나거나 인물에 대한 이해도를 높여야 하는데 넌 전자인 거 같구나.”
“그냥 우연히 얻어 걸린 건데요.”
“그건 상관없어. 하지만 이건 스틸 컷은 아니야. 스틸 컷은 기본 적으로 영화 내의 한 장면을 생생하게 잡아내거나 영화 속 인물, 그러니까 배우가 연기하는 인물의 표정을 잡아내야 하는 것이 본연의 임무다.”
“그렇죠.”
“이 배우의 사진은 영화 속 인물과 아무런 관련은 없지. 배우 자체의 사진이다.”
“죄송합니다. 스틸 컷은 처음이라.”
“아니, 난 너를 비난하는 게 아니야. 대략이나마 내가 알고 있는 것을 알려주는 거지. 이 사진은 좋은 사진이다. 나도 이 배우를 알아. 이런 표정을 잡아내는 건 굉장한 재능이다. 하지만 아쉬운 점도 있어.”
“뭘까요?”
“한 걸음 더 다가가는 거. 클로즈업 하는 것 보다 한 발자국 내딛는 게 더 좋은 표정을 잡아낼 수 있는 확률이 높아. 다른 사진도 살펴봤는데 넌 아직 일정 거리를 유지하고 있더구나. 나머지는·· 일단 너 모레 나랑 촬영을 한 번 같이 가 보자.”
선생님은 마지막 말을 남기고 날 내보냈다. 난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본능적으로 고개를 끄덕인 뒤에 밖으로 나왔다. 이래도 되는 건가. 사실 나 여기서 1년은 구를 생각을 하고 들어온 건데 3일 만에 이렇게 대단한 재능의 소유자 취급을 받아도 될까? 사실 다 카메라빨 이라고 하면 믿는 사람은 없겠지. 이렇게 된 이상 능력치를 올려야겠다.
“뭐, 어떻게 된 거냐? 미선 누나 왜 그래?”
들어온 지 2년이 됐는데 선생님과 한 번도 촬영을 못해봤다는 경험의 소유자가 내게 말을 걸었다.
“아, 어제 제가 촬영장에서 찍은 사진이 좀 문제가 있었나 봐요.”
“그지? 그래 사진이 그렇게 만만한 게 아니다. 너도 이번에 갔다 와서 느꼈을 거야. 아, 이번 주는 내일이 휴일인 거 알고 있지?”
그러고 보니 어제 스케줄 회의할 때 들었던 것 같다. 여기는 남들처럼 주말에 쉬고 그러지 않고 주중에 하루나 이틀 스케줄을 조정하여 쉰다고 했다. 많이 쉬면서 많이 경험해야 좋은 사진이 나온다는 선생님의 지론에 따라서다.
“만손 선배 있으면 또 선생님 몰래 불러내서 잡일 시켰을 텐데 나가버려서 다행이야. 겨우 제대로 쉬어보겠네. 야, 너도 푹 쉬고 모레 보자.”
하루하루가 정신이 없다. 스튜디오에 들어간 지 삼 일 됐는데 온갖 풍파는 다 겪은 기분이다. 모레 선생님 촬영 따라가는 것이 기대가 되긴 하는데 뭘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 지 알 수가 없다. 혼자서 터벅터벅 집으로 돌아오는데 내 핸드폰이 울렸다. ‘신상우’란 이름이 화면을 비췄고 난 통화 버튼을 눌렀다.
“길 선임! 우리 길 선임. 지금 시간 돼? 아니, 시간 안 돼도 얼른 사람 없는 데로 달려가. 좀 있다가 영상 통화 할 거야.”
그리고는 통화가 끊겼다. 이건 또 무슨 일이냐. 난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골목으로 들어갔다. 골목으로 들어가자마자 다시 핸드폰이 울렸고 난 통화 버튼을 눌렀다.
“반갑습니다. 우린 러버걸스에요~!”
작은 핸드폰 화면으로 8명의 소녀들이 얼굴이 붙이며 인사를 해왔다. 난 놀라서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꺄르르’하며 핸드폰에서 소녀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리고는 한 소녀가 나를 향해 물었다.
“음악뱅크에서 우리 사진을 찍어주신 분이라고 샤이보이님한테 들었어요. 너무 반가워서 이렇게 전화 드렸어요.”
“네, 누구요?”
“아, 상우오빠요.”
아이고 상우 형, 닉네임이 샤이보이십니까. 소를 때려잡을 정도의 덩치와 실력을 가진 분의 닉네임치고는 너무 언밸러스 한 거 아닙니까.
“오빠 덕분에 우리 빵 떴어요.”
“전 인생 사진 건졌어요.”
“저도요.”
“저도요! 그렇게 예쁘게 나온 사진 처음이었어요.”
“엄마도 몰라보겠다고 했어요. 하하.”
“또 찍어주시면 안 돼요? 자꾸 사람들이 보정했다고 그래요.”
“저희 얼마든지 시간 내드릴 수 있어요!”
정신이 하나도 없다. 뭐가 뭘 어떻게 대답해야 되는 거야?
“조용히 좀 해봐. 작가님이 정신없으시잖아!”
다행히 누군가가 나서서 대표로 말할 생각인가 보다.
“인사치레가 아니라 정말로 저희 작가님한테 부탁 좀 하려고 해요. 저희 사진 좀 찍어 주시면 안 될까요? 대표님도 페이 넉넉하게 챙겨주신다고 꼭 부탁한다고 하셨거든요.”
이 소녀는 나도 아는 애다. 분위기가 차분하고 상우 형이 가장 좋아하는 멤버라고 해서 얼굴이 좀 매치가 됐다. 이름이 아마 효미였지?
“저기, 저 정말로 초보거든요. 그 사진은 우연히 얻어 걸린 거예요.”
“히이잉, 정말 안 되세요?”
최근 들어 ‘우연히 얻어 걸림’이라는 설명이 많아진 것 같다. 효미씨의 애교 섞인 부탁에 심장이 요통 치는데 화면 속에서 갑자기 시커먼 남자 얼굴이 쑥 들어왔다. 와 놀라라.
“어이, 길 선임. 정말 안 되겠어? 정말 부탁한데잖아.”
“상우 형, 그거 개뽀록 이었다니까요.”
“시간 언제 되는데.”
“아 형. 또 찍으면 분명히 실망할 텐데.”
“그 뒤로 사진 많이 찍었는데 길 선임 사진의 반도 따라가는 사진이 없었다더라. 그래서 내가 그랬어. 걱정하지 말라고. 길 선임은 내 부탁이면 뭐든지 들어줄 거라고 했지. 하하하!”
막무가내로 밀어붙일 작정인가 보다. 그래, 콘서트 본다고 탈영까지 감행했는데 좋아하는 아이돌의 부탁이니 뭘 못하겠어.
“언제부터 우리가 그렇게 끈끈한 사이가 됐습니까··”
“정말 시간 없어?”
“아니, 내일 쉬긴 하는데.”
“애들아, 들었지! 내일된대. 내일! 내가 뭐라고 했어! 내 부탁이면 내일이라도 당장 올 거라고 했지.”
“저기 형!!!”
“야, 기다려 봐봐. 얘네들 난리 났다. 내일 스케줄 째고라도 너하고 사진 찍겠다고 난리야. 끊어봐! 조금 뒤에 또 연락할게.”
난 집으로 돌아오는 골목에서 핸드폰을 멍하니 들고 있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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