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grapher Gil seung woo RAW novel - Chapter 141
141화 시간 지연
난 꽃 속에 파묻힌 에브리아를 힐끗 쳐다보며 웃음을 지었다.
“뭘, 그렇게 정신 팔고 있어. 영상도 중요하지만, 사진도 중요하다는 거 잊지 마. 빠져서는.”
나를 매의 눈으로 지켜보고 있던 현호 형이 웃으면서 한마디를 던진다. 내가 너무 넋을 놓고 지켜보긴 했다.
“이번 광고는 영상 작업이 중요하다고 들었어요.”
“아무래도 TV는 기능 중심의 광고가 잘 먹히니까. 유명 모델을 쓰는 것보다는 TV에 더 집중할 수 있게 화면 구성을 하는 게 중요하지.”
“근데 왜 에브리아를 단독 모델로 쓴 거죠?”
“그쪽 홍보팀 말로는 좀 글로벌한 느낌의 광고를 만들고 싶었다 나봐. 외국 모델 쓰는 거로 결정이 났는데, 마침 저번에 에브리아 씨가 찍은 영상이 있으니까, 고민할 필요 없이 그 모델로 가자고 결정이 난 거야.”
“결국, 저번에 찍은 영상은 도움이 된 거네요.”
“너무 좋아하지는 마, 인지도에 그렇게 큰 변화는 없을지도 몰라. 국내 쪽에서 이런 식으로 캐스팅된 외국 모델 중에 제대로 뜬 사람은 없으니까. 혹시나 너무 기대할까 봐 말해주는 거야.”
“저도 압니다. 뭐 대사가 있는 것도 아니고 광고 내내 나오는 것도 아닌데 특별히 기억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게 이상하죠. 냉정하게 말하면 병풍이 필요한 거죠. 꽃병풍.”
현호 형이 내 말을 듣더니 입을 열었다.
“화났냐? 그래서 대중적으로 인지도 상승이 어렵다는 말이지, 모델 개인으로는 큰 영광인 건 맞아. 관계자들 사이에는 분명 말이 돌 거고 말이야.”
난 오해했나 싶어, 고개를 저었다.
“전혀 화나지 않았어요. 그냥 저도 냉정하게 분석한 거죠. 저도 그 정도는 알아요. 그나저나 꽃값 엄청 들었겠어요.”
“인기 모델 섭외비의 10분의 1 정도니까 따지고 보면 그리 비싸지도 않아. 일단 작업이나 빨리하자. 컨셉은 알지?”
“··꽃처럼 피어나는 모습을 사진과 영상으로 담아야 하는 거죠? 되게 추상적인 컨셉인 거 알아요?”
“너니까 이렇게 조금이나마 생각할 여지를 주는 거지. 원래, 초보 사진작가였으면 포즈랑, 각도, 표정까지 정해놓고 찍으라고 명령해. 그러니까 영광인 줄 알고 어서 가서 사진이나 찍어.”
“아이고, 알겠습니다. 영광이죠. 네.”
“몇 달 전만 해도, ‘정말 형이라고 불러도 돼요?’라고 어색하게 묻던 네 모습이 겹친다. 어쩌다가 이렇게 변한 걸까.”
“이 정글의 세계에서 익숙해지기 위한 발버둥 정도로 생각해주세요.”
“시끄럽고, 여자친구 기다리잖아. 최고로 예쁘게 찍어줘.”
난 카메라를 들고 꽃들이 잔뜩 들어있는 커다란 상자에 누워있는 에브리아를 향해 다가갔다.
“언제 찍어?”
“이제 찍을 거야.”
“너무 꽃냄새가 많이 나서, 머리가 아파.”
“정말로, 빨리 찍어야겠네. 조명 설치 끝나면 촬영 시작할 거야. 그렇게 시간이 많이 걸리지는 않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여기에 계속 있다가는 죽을지도 몰라. 속도 이상해.”
“빨리 준비 좀 해주세요.”
난 에브리아의 투정에 사람들에게 외쳤다. 이렇게 외쳐봤자 크게 변하는 건 없을 테지만 이렇게 뭐라도 했다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
“오늘 컨셉은 ‘꽃처럼 피어난다’야.”
“어떻게 하면 될까?”
오늘 상자에 담긴 꽃들은 붉고 어두운 계열의 색이 많아. 덕분에 에브리아의 하얀 살결이 유난히 눈에 띄고 있다. 색깔의 대비를 통해서 화질의 우수함을 알리겠다는 목표겠지.
“어떻게 하고 싶어?”
“팔을 활짝 펼까?”
영화의 한 장면이 생각난다. 그 장면도 꽤 인상이 깊었긴 했다.
“너무 행동이 과해서 부담스럽다는 말을 들을 것 같아. 일단 그 장면도 넣어보자.”
안보이다가 나오면 효과가 더 좋을 것 같긴 한데. 난 소품팀 직원을 불렀다.
“챙모자에다가 꽃을 좀 달 수 있을까요? 숨어있다가 고개를 돌리면 화면 구성이 더 풍성해질 것 같아서요.”
“괜찮은 생각이네요. 소품 꽤 있으니까 금세 찾아서 만들어드리겠습니다.”
곧 모든 준비가 끝나고 촬영이 시작됐다.
“시작하면 열까지 세고 고개를 천천히 돌려, 알겠지?”
에브리아가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곧 현호 형에 의해서 시작 싸인이 떨어지고 나와 촬영 감독님은 사다리 위에서 에브리아에게 포커스를 맞췄다.
“컷!”
현호 형이 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뭐랄까, 표정이 좀.”
무슨 말을 할지 알 것 같아서 난 고개를 끄덕이고 에브리아를 바라봤다.
“에브리아, 표정이 좀 굳었어. 네가 고개를 돌리는 순간 세상이 환해진다는 느낌이 나야 해. 음·· 고개를 돌리는 순간 네가 기다렸던 사람이 웃으면서 서있다는 느낌이랄까?”
“알겠어.”
다시 시작 싸인이 떨어지고 난 에브리아를 카메라의 눈으로 바라봤다. 꽃 속에 파묻힌 에브리아의 모습은 잘 보이지 않는다.
“좋아! 그대로!”
멀리서 현호 형의 말이 들린다. 갑자기 시간의 흐름이 느리게 가는 느낌이 들었다. 에브리아 주변의 모든 사물의 미세한 움직임까지 느껴진다. 그녀의 입술이 살짝 열리면서 하얀 이가 보였다. 아직은 웃음기가 부족하다. 입꼬리가 조금씩 올라가며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지금이야. 난 이 이상한 감각이 무너질까 봐 숨조차 쉬지 못하고 손가락을 최대한 빨리 움직였다.
[등급을 초과한 사진이 찍혀 보너스 포인트가 지급됩니다.] [히든 특성을 얻었습니다] [인물사진을 2등급까지 올릴 수 있는 단서를 발견했습니다]기대도 하지 않은 상황에서 갑자기 이런 문구가 우수수 쏟아지니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모르겠다.
“영상은 이걸로 갈까? 예상보다 좋은 영상 나왔는데.”
현호 형이 주변 사람들에게 물었다. 나를 비롯해서 스탭 몇 명이 모니터 쪽으로 다가갔다.
“잘 빠졌는데요? 의외성도 있고, 표정도 좋고.”
“리터칭만 신경 써서 하면 이대로 가도 될 것 같습니다.”
“두 번 만에 오케이를 받아내네. 이거 기록 아니야? 장 감독 눈 까다로운 거 이 바닥 사람들은 다 아는 일이잖아.”
현호 형은 영상을 다시 보더니 우리를 보며 입을 열었다.
“저도 이유 없이 재촬영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건 제 기준보다 괜찮게 나왔어요. 더 할 이유가 없죠.”
“그럼 촬영은 이걸로 끝내는 건가?”
“오랜만에 일찍 가는 날도 있어야겠죠.”
그 말에 몇몇 직원이 환호했다. 난 상자에서 나오려고 하는 에브리아의 손을 잡아끌었다.
“되게 멋졌어. 어떻게 할래? 몇 장면 더 찍어볼까?”
“승우가 원하면 해도 괜찮아··.”
꽃향기 때문에 머리가 아프다는 말이 떠올랐다.
“그럼 그냥 가자. 파장 분위기잖아.”
그 말에 밝게 웃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는 결정을 잘했다 싶었다.
***
며칠 뒤 장현호는 직원들과 함께 회의실에 앉아 편집된 영상을 보고 있었다. 처음 삼 분의 일은 TV의 두께가 얇다는 설명과 함께 영상이 지나갔고 나머지 삼 분의 이는 세 가지 컨셉의 영상을 보여주면서 화질의 우수성을 알리는 내용이었다.
“처음 부분이 너무 시선을 끌기에 부족하지 않아?”
그 말에 직원 한 명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더는 줄였다가는 광고주가 요구한 내용을 담아낼 수가 없습니다.”
“내가 언제 줄이라고 말했어? 처음 부분이 늘어지니까 영상을 좀 조정하라고 말한 거잖아. 그리고 자연 영상도 너무 진부하지 않나. 어디서 본 듯한 장면이잖아.”
“어디까지나 색감이 뛰어나다는 거에 초점을 맞춰야지. 자연 영상이 앞쪽 영상 때문에 먹혀버리잖아. 자연 쪽은 다시 회의를 해보자. 저걸로는 안 될 것 같다.”
“차라리 모델 나오는 영상을 뒤로 빼버리죠. 그게 너무 임팩트가 강해서 뭘 놔도 부족해 보입니다.”
“그것도 괜찮고. 아무튼, 이건 안 돼. 다시 하자.”
그는 부하직원이 가지고 온 사진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리 리터칭이 있다고 해도 강렬한 느낌을 주는 사진이었다. 꽃 하나하나의 색감이 다 살아있었다. 이 정도로 색감이 다양하면 어수선한 느낌이 들기 마련인데 가운데 자리 잡은 모델의 표정이 그 어수선함을 꽉 잡아주고 있었다.
“젠장, 이러다가는 사진만도 못한 광고 소리 듣기 십상이지.”
그는 이 사진이 일 년 정도는 이 TV의 대표 화면으로 쓰일 거라는 것을 예감했다. 홈페이지는 물론이고, 각종 쇼핑몰에도 TV 속에 이 사진의 모습이 담겨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이 사진 덕분에 광고가 사람들 뇌리에 박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 되지. 벌써부터 그 녀석에게 기댈 수는 없는 일이야. 나도 자존심이 있지.”
그는 쓴웃음을 짓고 사진을 다시 한번 쳐다봤다. 정말로 크게될 녀석과 협업을 하게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
다음날 점심.
지금 이 순간 세상에서 가장 어색한 사람을 한 명 뽑으라면 그건 나일 것 같다. 러버걸스는 한 달 반 정도의 휴식을 마치고 내 앞에 앉아있다.
··아무 말도 없이 말이다.
“하하, 오랜만이라서 그런가. 길승우 작가님이잖아, 왜들 그러고 있어.”
마 실장님이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그녀들에게 말을 걸었지만, 그녀들은 차가운 눈빛으로 날 바라보고 있다. 그냥 자리에서 일어나서 나중에 작업할 때나 만나야겠다는 생각을 한 그 순간, 다정이가 입을 열었다.
“자, 여기까지.”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유아가 입을 열었다.
“오빠, 잘 지내셨어요?”
“되게 오랜만에 봐요. 좀 마르신 거 같다. 연서야 보고 좀 배워.”
“언니는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저도 나름 관리한 거라고요.”
“야, 연서 넌 각종 커뮤니티에 ‘비수기 연서 사진’이라고 올라왔어.”
“정말요! 아, 왜들 그런 사진 올리고 그래.”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눈만 깜빡거리고 있는데, 하연이가 입을 열었다.
“오빠, 연애한다는 소식 듣고 모두 화가 좀 났어요. 그래서 나름 벌을 준 거예요. 이름하여 3분의 침묵.”
“야, 무슨 내가 연애하는 데 너희가 화를 내고 그래.”
“몰라요, 아무튼 이 얘기는 여기서 이제 끝.”
그 주제로는 더는 말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굳건하다. 난 슬쩍 효미를 쳐다봤다. 그녀는 아무 일 없다는 듯 마 실장이 내어준 스케줄 표를 보고 있다.
“오늘 길승우 작가님이 여기에 모신 건, 우리 러버걸스가 다시 소속사로 돌아와 다음 앨범 준비를 하고 있다는 사진을 찍기 위해서야. 팬들이 궁금해하니까.”
그 말에 연서의 얼굴이 하얗게 변하며 입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실장님, 저 전에 입던 옷 안 맞을 것 같은데요.”
“연서야, 넌 특별 관리 대상이다. 회사에서 운동 끊어놓고 식단까지 정했으니까 남은 기간 열심히 해보자. 길승우 작가님, 염치없지만 우리 연서 리터칭 좀 신경 써 주세요.”
“하하, 네.”
잠시 후, 러버걸스 멤버들은 모두 짧은 청바지에 자신을 상징하는 색깔의 티셔츠를 입고 내 앞에 나타났다. 오늘 촬영을 위해 연습실에 임시 촬영장을 만들었다.
“근데, 오빠 이번 잡지에서 백희서 선배 찍은 사진 특이하고 좋던데요.”
민솔이가 눈을 반짝거리며 말했다.
“왜? 그렇게 찍고 싶어?”
“아·· 찍고 싶긴 한데, 어떻게 나올지 걱정돼요. 사진 보니까 그 선배님의 마음속까지 찍은 느낌이 들더라고요.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어요.”
“나도 아직 배워가는 단계야. 이번에 백희서 씨 사진이 그 상황하고 맞아떨어져서 우연히 건졌는데 그런 방식으로 찍으면 재미있겠다 싶더라.”
“저도 이번에 쉬면서 카메라 하나 샀어요. 취미로 이만한 물건이 없더라고요.”
예정이가 끼어들며 입을 열었다.
“덕분에 언니 SNS에 우리 못 나온 사진 천지에요. 오죽하면 홍보팀에서 좀 자제하라고 했을까.”
민솔이가 그런 예정이를 째려봤다.
“얘들아, 그만 좀 해. 그럼 승우 오빠 우리 이제 시작해볼까요?”
효미가 그들을 말리며 내게 말을 걸었다. 난 고개를 끄덕이며 카메라를 들었다.
“자, 얘들아. 이 사진은 정식으로 팬들에게 인사한다고 생각해. 그동안 팬들 덕분에 우리는 잘 쉬었습니다. 잘들 계시지요?! 하는 느낌이면 좋겠다.”
“네!”
내 말에 여덟 소녀는 합창하듯 동시에 대답했다. 난 조금은 변했지만, 더 매력적으로 보이는 그녀들의 모습을 사진에 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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