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grapher Gil seung woo RAW novel - Chapter 157
157화 얼굴없는 가수
의 앨범 재킷 덕분에 난 방송계 쪽에서 좋은 인연을 몇 만들 수 있게 되었다. 방송이 끝나고 내 앨범 재킷을 중심으로 한 인터넷 논란 때문에 팬층은 두터워졌고, 이 이슈에 관심을 두게 된 사람들은 왜 그런 사진을 찍게 되었는지 궁금해했다.
그리고 란 편성에 공개한 내 사진은 이 모든 논란을 잠재우기에 충분했다.
“길승우 이사님, 오늘 부르건 꼭 좀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서요.”
“그 이사님이라는 소리 좀··.”
“지위가 사람을 만드는 겁니다.”
“어떤 영화에서 많이 듣던 얘기 같습니다만.”
“같이 음악 사업하는 친구 중에 항정수라는 친구가 있습니다. 저랑은 다르게 인디 음악 중심으로 본전만 유지하자는 생각으로 회사를 꾸리고 있는 친구인데, 요즘 좀 문제가 생겼답니다.”
“음악 쪽에 대해서는 아무런 지식이 없는데요.”
“음악 쪽이 아니라 사진 쪽 관련입니다.”
“하하, 앨범 재킷인가요? 요즘 그 소동을 겪고도 저한테 찍고 싶으신 건가?”
“사진을 볼 줄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비난에 휩쓸리지 마십시오. 전 PD한테 고맙다고, 술 한잔 산다는 얘기를 몇 번이나 들었는지 모릅니다. 아, 앨범 재킷은 아니고, 프로필 사진 관련 문의입니다.”
“프로필 사진이요? 신인 들어왔나 보네요. 뭐 그 정도는 쉽게 찍을 수 있죠. 어떻게 찍어주길 원하고 있죠?”
“그게·· 사진을 찍어본 적이 거의 없답니다. 물론 친구들끼리 생활 사진 정도는 있겠지만, 이게 좀 특이한 게··, 가수 라비에 대해서 아십니까?”
“몇 년 전에 들어본 가수 같은데. 신인인가요?”
“아니요, 데뷔 5년 차에 정규 앨범도 2장이나 냈고, 싱글 앨범도 낸 중견 가수죠. 문제는 이 가수가 얼굴없는 가수라는 겁니다.”
“아·· 그렇군요.”
얼굴없는 가수 마케팅은 흔하지는 않지만, 전혀 없지도 않다. 보통 가창력보다 외모가 뒤떨어지거나, 개인적인 사정으로 이런 일을 벌이는 경우가 많다.
“맡아주시겠습니까?”
“네,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닐 건데요 뭐.”
“그럼,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이제 점심시간인데 밥이나 같이 할까요? 하하하.”
그렇게 난 대표님과 전망 좋은 레스토랑에서 단 둘이 스테이크를 썰고는 음악 기획사로 향했다.
클로버 기획사라는 곳이었다.
“정 대표한테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그분 얘기로는 사진으로는 세계에서 적수가 없을 거라고 하던데.”
대표님이 또 과장스럽게 날 소개했나 보다. 항상 이럴 때 부끄러움은 내 몫이다.
“··한참 모자랍니다. 대표님이 절 너무 좋게 보고 계시는 거죠.”
“그분이 허튼소리 할 분은 아니죠. 어느 정도 실력이 있어야 대접해주는 분이거든요. 아무튼, 우리 라비 말인데··.”
라비란 이름을 듣고 그룹이 아닌가 생각했는데, 여자분이고 목소리도 굉장히 여성적인 가수였다. 청아한 목소리를 지녔다고 해야 하나?
그나저나 항 대표님은 머뭇거리더니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무슨 사정인지 모르겠다. 난 재촉하기보다는 말없이 기다리기로 했다.
항 대표님은 무언가 결심한 듯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 친구가 옛날 아이돌이었어요.”
“··네?”
“크게 망해서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4명으로 이뤄진 여성 그룹의 에이스 역할을 했었죠. 그게 한 15년 전인가··. 내가 우연히 라이브 무대를 봤는데, 꽤 잘하더라고. 노래는 형편없었지만 언젠가 되겠다 싶었지. 그런데 거기서 사고가 터졌어요.”
“무슨 사고요?”
“모 남자 가수와 스캔들이 터졌나 봐요. 문제는 그 가수 팬덤이 막강했다는 거죠. 그래서 라비가 무대에 오를 때마다 그쪽 팬들이 엄청난 야유를 보냈고, 무대 공포증이 공황장애로까지 이어졌습니다. 결국, 그 후에 가수는 관두게 됐죠. 근데 시간이 꽤 지나서 저하고 연이 닿게 됐습니다.”
“어떻게요?”
“제가 그래도 한 기획사의 대표다 보니까 무명 작곡가들에게서 곡이 좀 와요. 이런 말하면 그렇지만, 데모 테이프를 듣는데 작곡가 목소리보다 더 잘할 수 있는 가수가 없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연락을 했죠.”
“그렇게 된 거군요.”
“라비 갠 아직도 공포가 좀 있어요. 그 당시 팬덤에서 꽤 독한 짓을 많이 했나 보더라고요. 중소기획사에 무명 아이돌이니 지켜줄 사람도 없어서 악의를 온몸으로 맞아야 했죠.”
“근데 왜 갑자기 얼굴 공개를 하시는 거죠?”
“··아깝다는 말이 어울리겠네요. 이런 말 하면 좀 이상하겠지만 전 그녀의 노래가 그녀의 외모와 상관이 있다고 생각해요. 라비가 얼굴을 공개한다면 단순히 음악으로 들었을 때와는 느낌이 다를 거라고 확신하고 있죠. 외모에 좌우되지 않고 음악을 듣는다는 게 내 알량할 신념이었는데 몇 달 전에 녹음실에서 라비가 노래 부르는 걸 보니까··.”
대표는 그때가 생각난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노래 부르는 표정이 너무 좋더라고요. 노래만 들었을 때 드러나는 단점이 외모로 덮어지는 경지였어요. 음악은 영원하다지만 유효기간은 존재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좋은 노래가 이대로 사장되는 건 아니다싶은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일단은 사진 공개부터 해보려고 합니다. 라이브 무대는 아마도 무리겠죠. 뭐 하나씩 천천히 해야겠죠.”
난 기나긴 설명을 듣고 회의실에서 그녀를 기다렸다. 뭐 저렇게 얘기를 해봤자, 수많은 연예인과 작업을 한 내 눈에는··.
“안녕하세요, 라비입니다.”
··몹시 매력적인 누님이었다. 얼굴, 피부색, 목소리, 게다가 몸매까지 예쁜 데다가 분위기가 미쳤다고 해야 하나? 이런 걸 우아하다고 표현해야겠지? 이 외모를 내가 사진에 온전하게 담아낼 수는 있을까?
“··저기.”
“죄송합니다, 생각했던 외모가 아니라서요.”
“좀 이상한가요? 죄송해요, 얘기는 들었는데 오늘 화장도 제대로 안 하고 왔어요.”
“··화장 안 한 얼굴인가요.”
편안한 원피스 차림의 그녀의 단아한 미모는 충분히 매력을 발산하고 있었다. 사실 이곳에서 그녀를 기다리면서 그녀의 과거 모습을 찾아보았다. 인터넷상에는 영상 하나 없고, 촌스러운 앨범 재킷 사진뿐이었다. 해상도도 낮아서 얼굴 추측이 힘든 그런 사진. 그래도 기대치를 최대한 높였는데, 그 기대치를 뛰어넘는 분이 오셨다.
난 마음을 다잡고 그녀를 향해 입을 열었다.
“어떤 모습으로 팬들과 만나고 싶으세요?”
“네?”
“사진을 공개한다는 건, 라비 씨의 음악을 사랑하던 팬들과 대면하는 자리라고 생각해요. 이 경우는 제 의견보다 라비 씨의 의중이 아주 중요하죠.”
“하하, 대표님 말이 맞네요.”
“뭐가요?”
“어린 나이에 경험 많고 사진 잘 찍는 분을 소개해준다고 하셨거든요. 말씀하시는 거 보니까 감이 오네요. 글쎄, 어떤 모습이 좋을까요··. 그냥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좋다고 생각했어요.”
“노래를 부르는 모습이요?”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아쉽게도 전 노래를 부를 때 부담이 많이 돼요. 무대에서 노래하는 법을 잃어버린 반쪽짜리 가수죠.”
난 잘 알려진 모델의 모습을 사진에 담기 전에, 그들의 배경이나 취향을 어느 정도는 공부한다. 그 과정은 나와 피사체 간의 심리적인 간격을 좁혀주는 데 일조한다. 이건 제한된 시간 내에 좋은 사진을 만드는 가장 쉬운 방법의 하나다.
가수의 배경과 취향은 음악이 우선이다. 가수의 본모습을 찍기 위해서는 음악부터 들어야 한다는 것이 정만종 선생님의 철칙이었다.
“시간 많으시면 저한테 음악 설명 좀 해주실 수 있어요?”
“네? 저야, 시간 많은데 괜찮겠어요? 바쁘신 분이라고 들었는데.”
“사진 급하지는 않죠?”
“그렇긴 한데, 전 오늘 당장 촬영하는 줄 알았어요.”
“라비로 데뷔한 지가 얼마나 되셨어요?”
“5년 조금 넘었죠.”
“그 정도로 내키지 않아 했던 얼굴인데, 좀 더 정성을 들여서 공개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시간은 없어도 만들어야죠.”
그렇게 라비 씨와 나의 작업은 시작됐다. 마케팅의 일환이 아니라, 어찌 보면 암울한 과거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 뭔가 세심한 작업이 필요하다는 나름의 판단이 섰기 때문이었다.
“어쩔 수 없는 일로 가수를 그만두게 됐지만, 가수는 저의 오랜 꿈이었어요. 얘기 들으셨겠지만, 모종의 사건으로 절대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기가 겁이 났어요. 지금도 그렇고요.”
“노래를 어떻게 만드시게 된 거죠?”
“가수를 관두고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갔어요. 그리고 밤마다 무대 위에서 노래를 부르는 제 모습을 상상했죠. 매일매일 그런 날이 반복되니까 무대 위에서 부를 노래에 대해서 생각하게 됐어요. 다른 가수의 노래는 제 것이 아니잖아요. 온전한 제 노래를 가지고 싶었어요. 그래서 상상 속의 나를 위한 노래를 떠올리게 됐죠.”
“그런데 왜 작곡가로 활동할 생각을 했어요?”
“제가 부족해서죠. 자기 자랑이 심하다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는데, 제가 만든 노래가 너무 좋은 거예요. 근데, 전 무대에서 노래를 부를 수 없는 사람이고··, 이럴 바에는 다른 누군가에게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게 무슨 노래죠?”
“란 제 데뷔곡이죠. 제 팬들은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릴 거라는 의미로 이 노래를 받아들이고 있겠지만, 여기에서 말하는 ‘너’는 예전의 저예요. 과거의 나를 기다리는 현재의 내가 부르는 노래죠.”
가수는 자기의 노래를 부를 때 가장 좋은 표정을 하지만, 그게 안 된다면 자기 노래를 얘기할 때가 아닌가 싶다.
“아, 제 얘기 듣고 있죠? 연습 촬영이라고 하지만 이렇게 갑자기 찍으면 어떻게 해요.”
“잘 듣고 있습니다. 뭐 어때요, 정식 촬영 전에 이렇게라도 면역력을 기른다고 생각하세요.”
이번 작업은 내가 했던 보통의 작업과는 달랐다. 시간을 훔쳐낸다고 할까? 자연스러운 모습의 시간을 사진에 담아내는 것이 목표다. 난 결과물을 확인하면서 웃음을 지었다. 자연스러운 사진이 나온 점도 있지만, 그 와중에 내 색이라고 할만한 특징들이 고스란히 녹아있기 때문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꾸미고 나오는 건데.”
“하하, 그냥 연습이라고 생각하시면 편해요.”
그 특징이란 내가 보는 그대로의 모습을 사진에 담으면서 사진 속의 피사체가 원래 그들의 방식으로 있게 한다는 점이다. 리얼리티가 살아있어서 사진 틀 밖의 풍경도 궁금해지고, 이 다음에 어떤 모습일지도 궁금해한달까. 물론 이건 내 자만심 섞인 상상일 수도 있다.
“지금까지 찍은 사진 중에 어떤 사진이 가장 마음에 들어요?”
“이제 역으로 제게 질문을 하시는 건가요?”
“저만 말하는 게 불공평하다 싶어서요.”
“전 이 사진이요.”
“예쁜 외국인이네요. 모델인가 봐요. 와 근데 뭐지? 둘 간에 뭐가 있어 보여요.”
“왜 그렇게 보여요?”
“연기치고는 표정이··, 뭔가 이 모델 주변에 하트가 가득 차 보이기도 하고. 맞죠?”
“뭐가 맞아요?”
“둘이 연인?”
난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라비 씨는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짓다가 다시 사진을 보고는 나를 바라봤다.
“길승우 씨도 음악을 했다면 좋은 노래를 만들었을 것 같아요.”
“왜요?”
“감정을 담아내는 작업을 잘하시잖아요. 다른 사람에게 그 기분을 전달할 수 있게 말이에요. 그나저나 신기하네요. 전 그냥 사진이란 게 객관적인 줄 알았는데, 굉장히 주관적인 작업이란 걸 이 사진을 보고 알게 됐어요.”
이런 식으로 내 얘기도 좀 하면서 점점 서로 간의 거리는 줄어들기 시작했다. 다시 만날 때마다 사진 속에서 그런 점이 느껴졌고, 다섯 번째 만나는 날 난 그녀에게 말했다.
“오늘로 공개할 사진은 다 찍었어요.”
그녀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난 다시 그녀를 향해 말했다.
“놀라지 않네요.”
“바보도 아니고, 얘기 도중 그렇게나 사진을 찍어대면 누구나 알 수 있어요. 그리고 저 몰래 사진 보고 얼마나 음흉한 웃음을 지었는 줄 아세요?”
“음흉하다뇨! 사진이 잘 나와서 그런 표정 지은 거죠.”
“정말, 감사해요. 아마도 길승우 씨 말고는 이렇게까지 시간과 정성을 쏟을 사람은 없었을 거예요. 진짜 따뜻한 배려라는 게 이런 거구나 느낄 수 있었고요.”
라비 씨의 말에 난 고개를 저었다. 나 역시 이번 작업을 통해서 좀 더 사진에 대해서 잘 알게 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최근 제한된 시간 안에 최선의 결과를 뽑는 작업 방식에 피로해져 있는 상태기도 했다.
“혹시 다음에도 제 사진 공개할 일 있으면 부탁드릴게요. 길승우 씨라면 이제 편하게 찍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지금 라비 씨와 나와의 관계는 사진가와 피사체를 뛰어넘어 뭔가 신뢰와 애정이 녹아 들어있음을 알 수 있다. 뭐랄까 좀 더 인간적인 관계를 형성했다고 해야 하나?
이런 관계는 처음이 힘들지, 차후 작업을 할 때는 더 좋은 결과가 나온다는 것을 난 알고 있다. 러버걸스가 그렇고, 언루트가 그렇듯 말이다. 그들은 내 앞에 설 때 무한대의 신뢰를 바닥에 깔아놓고 촬영을 시작할 수 있게 한다.
그리고 오늘 그런 사람이 한 명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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