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grapher Gil seung woo RAW novel - Chapter 159
159화 Destiny Of Spirits (2)
이번 CF 감독님의 스타일은 꽉 짜인 콘티대로 찍는 것이 우선인 분 같았다. 현호 형에게 얘기를 듣자니 광고주의 요구대로 안정적으로 영상을 찍어내는 스킬이 좋다고 한다.
박 감독님은 러버걸스 멤버들을 한번 훑어보더니 입을 열었다.
“이 CF는 알다시피 다양한 영웅이 힘을 모아 세상을 구한다는 주제를 가지고 만드는 영상이에요. 여러분들이 그 영웅이고 말이죠. 여기서 문제가 되는 건 배경 공간인데,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공간이라 나중에 CG로 집어넣을 예정입니다. 지금은 아무것도 없지만 콘티에 나온 배경에서 움직인다고 생각해주세요.”
곧 촬영은 시작됐다.
“바닥부터 돈 많이 든 티가 나네요.”
마 실장님이 내게 말을 걸었다. 평평한 대지가 지진이 나서 갈라진 모습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보이지 않지만, 저 앞에는 악마가 존재하고 있다.
“네 명이 의견을 모은 뒤에 뭔가 결심한다는 느낌으로 정면을 봐주면 좋겠는데.”
막내라인 4명이 박 감독님의 말에 얼굴을 끄덕였다. 난 살짝 웃음이 나왔다. 아무리 봐도 어울리지 않은 옷을 억지로 입힌 모습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들은 얼굴을 맞대고 뭔가를 얘기하다가 감독의 신호에 맞춰서 정면을 바라봤다.
“컷.”
박 감독은 머리를 긁적이며 앞으로 나와 그녀들에게 입을 열었다.
“정면을 바라볼 때 뭔가 있다는 느낌을 좀 줬으면 해요. 저어 멀리 거대한 적이 있다는 설정이니까, 저걸 물리쳐야겠다는 느낌이랄까.”
거의 배우에게 내리는 지시로 들린다. 막 성인이 된 이 녀석들이 이 명령을 어떻게 소화하느냐가 문제겠지.
“컷.”
예상대로 CF 감독의 기대치보다 한참은 낮은 연기력을 선보이고 있다. 박 감독님은 한숨을 내쉬면서 이걸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난 옆에 있는 마 실장님을 향해 입을 열었다.
“마 실장님, 얘들한테 이렇게 설명해 주세요. 지금 음악방송에서 1위 후보로 선정된 상태고, 저 앞에는 2주 동안 1위를 차지한 라이벌이 있다고 생각하라고요.”
저런 친구들에게는 유치하지만 그들의 감정을 조금이라도 끄집어낼 수 있는 예시가 필요할 때도 있다. CF는 나중에 음악과 화면 편집으로 떡칠을 한다고 해도 최소한의 연기력은 필요다고 생각한다. 마 실장님은 내 말을 듣고 그녀들에게 얘기를 전달했고, 뭔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촬영은 시작됐다.
다행히 이번에는 쓸만한 영상이 나왔는지 박 감독님과 스탭들은 뭔가를 얘기하고 있었다.
“길 이사님 원포인트 레슨이 제대로 먹혔네요.”
“다행이에요. 주눅 들지 말고 잘해줬으면 좋겠네요.”
다정이와 하연, 유아가 다음 씬을 향해 몸을 풀고 있었다. 다음 장면은 정면을 향해 활을 쏘고, 총을 쏘고, 주문을 외워야 한다.
큐 사인이 떨어짐과 동시에 그들의 움직임이 시작됐다. 셋 중 가장 발군의 움직임을 보인 건 총을 지닌 하연이였다. 그녀는 총을 쏘는 연기를 함과 동시에 그 총을 돌리고 총집 안에 넣는 연기를 훌륭하게 해냈다. 그리고 자리에 쓰러지는 오버 액션까지··.
“컷!”
이럴 줄 알았다. 박 감독님은 하연이에게 다가가 입을 열었다.
“제가 러버걸스에게 원하는 것은 명연기가 아니에요. 연기는 조금 어설퍼도 하연 씨 매력이 보여야 합니다. 이 콘티는 그것 때문에 만들어진 거라고요. 카메라 각도와 배경까지 고려해서 만들었으니까 이번에는 잘해봅시다.”
하연이가 이렇게 혼날 줄 알았다. 그래도 상황 설정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모델에게 좀 더 자유를 주는 감독님이었다면 적당히 살렸을 거라는 아쉬움이 든다.
“영웅들의 대서사시를 완성하자. Destiny Of Spirits.”
다정이와 하연, 유아의 촬영이 끝나고 방패로 뭔가를 막아낸 효미가 이렇게 말을 했다. 30초 광고 1개 버전만 찍는 거라, 그리 많은 촬영이 필요하지 않은 것 같다. 효미는 두 번 만에 오케이 사인을 받는 발군의 실력을 보여줬다.
마지막 장면은 강풍이 불어오는 바람 사이를 걸어가는 여덟 영웅의 모습을 찍는 것으로 촬영은 마무리가 됐다.
“이제, 나의 시간인가.”
게임 속의 대사를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앞에 있는 건 현실에서는 입고 다닐 수 없는 의상을 착용한 가요계의 보석들. 게임광고가 또 들어오지 않은 이상 더는 이런 의상을 착용할 기회는 없을 것이다.
“이거 괜찮네요, 신생 쥬얼리 회사라 이런 시도도 해볼 수는 있는 거겠죠. 하지만, 결과물이 좀 유치하게 나온다면 저희도 어쩔 수는 없습니다.”
“저기, 오빠 그 사람은 누구죠?”
사제복을 입어 성스러운 느낌까지 나고 있는 유아가 내게 물었다.
“아아, 내가 오늘 불렀어. 이분은 쥬얼리 쪽 홍보를 담당하시는 분이야.”
“그런 분이 왜?”
“아마 오늘 말고는 기회가 없을 것 같아서. 이런 옷차림으로 액세서리를 찍으면 괜찮지 않을까 생각되지 않아?”
“아니요! 왜 이런 옷을 입고 그런 화보를 찍어요?! 왜요? 저희가 뭐 잘못했나요? 아니, 생각해보면 그때 잠깐 말을 안 한 거 때문에 그러시는 거예요? 우와! 쪼잔해.”
“고작 그런 이유겠냐! 그냥 나는 이런 의상을 앞으로 입을 일이 없을 테니까 좀 더 많은 사진을 남기고 싶은 마음에서 이런 일을 벌인 거야. 게임 회사 측하고도 얘기가 됐고 말이지. 다행히 광고 촬영 후에 이 스튜디오 일정이 비어있더라고.”
“으악 정말 본격적인가 보네. 언니! 얘들아!”
상황 설명을 하지 않은 건 미안하지만, 허락해주지 않을 거잖아. 나도 결과물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기 때문에 좀 두렵기도 하고 말이지. 그나저나 이런 컨셉의 화보를 잘도 허락해주다니. 그것도 돈까지 주면서 말이지.
“러버걸스면 젊은 층에 어필하기 좋은 모델이죠. 게다가 길승우 사진작가님이야 요즘 이쪽에서 가장 주목받는 사람 아닙니까. 솔직히 우리 쪽에서 두 분한테 촬영 요청하려면 광고비를 감당하지 못해요. 그런데 먼저 제안이 들어온 데다가 사정까지 봐주시니 이건 해야지요.”
잡지사 편집자님을 통해 소개를 받은 분이셨다. 편집장님 말로는 이걸 거절하는 신생 회사가 세상에 어디에 있겠냐는 말을 꺼냈다. 갑작스러운 제안이라 좀 걱정했는데 다행이다.
“오빠, 정말 이러실 거예요!”
“음, 어디 보자. 팔찌나 머리핀을 꽂으면 어울릴 것 같네요. 뭔가 언밸러스하지만 옷 자체가 현실에 존재하지 않은 옷이라 은근히 어울릴 것 같기도 하고요.”
쥬얼리 쪽 직원분은 효미를 보더니 차분하게 말을 했다. 그 말에 나를 향해 달려들던 효미가 멈췄다.
“··저기요?”
“긴 귀 분장하신 분은 딱 어울릴만한 귀걸이가 있습니다!”
계속되는 직원 분의 말에 러버걸스 멤버들은 제자리에 굳어 내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덕분에 난 한발 물러서서 촬영 준비를 할 수 있었다.
“효미야. 얼굴이 좀 화나 보인다.”
“실제로 화 난 건데요.”
“자, 효미야. 이번 촬영의 관건은 그거야. 지금 착용한 액세서리를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거니까, 결코 웃음거리가 되어서는 안 돼.”
“비겁하다. 바로 일 얘기로 넘어가고. 알았어요, 제가 뭐 어떻게 하면 되죠?”
“지금 네가 코스프레한 캐릭터는 자기를 희생해서라도 동료를 지키고 싶은 성품을 가졌어. 지킨다라는 느낌이랄까? 네가 무명 시절 리더로서 그룹을 지켰듯이 말이야.”
“··비겁해.”
“어두운 밤, 모두가 잠든 밤에 달빛을 보면서 마음을 다잡는다는 느낌으로. 검을 바닥에 찍고 살짝 고개를 올려서 하늘을 바라봐. 오, 잘한다.”
생각보다 표정이 좋아서 좀 놀랐다. 인물의 내면, 모델의 내면과는 상관없이 겉모습을 찍는다는 느낌으로·· 모델이라기보다는 캐릭터를 재현한다는 느낌으로 찍는다면 좋은 결과물이 나올 것 같다.
“살짝 움직이자. 지금 촬영 포인트는 알고 있지?”
어떻게 보면 지금 작업은 날로 먹는 작업이다. 모든 칭찬과 비난은 코스프레를 하는 러버걸스 멤버들에게 있기 때문이다.
“지금 감정 그대로 천천히.”
난 다만 상황에 맞춰서 빛을 조절하고.
“표정이 어중간하다. 짓고 싶은 표정을 완성해봐. 머릿속에 있는 캐릭터를 끄집어낸다는 생각으로.”
어떤 사진가는 사진을 찍을 때마다 기도하는 마음을 가진다고 한다. 멋진 피사체들이 눈앞을 지나갈 때 그들의 몸짓이나 눈빛이 함께 사진에 녹아들기를 염원하면서 말이다. 그 마음이 지금 내 마음이다.
“이 모습으로 웃음거리가 안 될 수 있을까요?”
다정이가 한숨을 쉬며 내게 물었다.
“지금 네 모습은 엘프야. 너도 들어봤을 거 아니야. 엘프.”
“저도 영화 봐서 알아요. 예쁘고 오래 살고 귀 큰 요정 아니에요.”
“네가 코스프레하는 캐릭터는 악의 기운이 세상을 삼키고 있자, 이를 막기 위해 고립된 마을에서 나온 심지가 강한 인물이야. 네가 이 그룹의 멤버로 어떤 역경도 이겨낼 거라는 결심을 한 것처럼 말이지.”
“아··.”
“지금 네가 서 있는 장소는 너에게 있어서 가장 편안한 장소이자, 그리운 곳을 기억나게 하는 장소이기도 해. 힘든 시간이지만 그곳에 잠시 머물면서 심적인 여유를 되찾는 중이고.”
이내 다정이가 자리에 앉고 눈을 감았다. 생각보다 좋은 느낌이다.
“지금 있는 장소는 공기가 아주 맑아, 숨을 내쉴 때마다 상쾌함을 느끼는 거지.”
코스프레한 인물을 찍는 건 생각보다 재미있는 작업이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찍는 것 같다고 할까. 물론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피사체를 모델이 담당하긴 하지만, 미지의 영역을 건드리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다리 방향을 조금 바꿔보자. 지금 느낌은 아주 좋아.”
처음에는 황당해하던 그녀들은 점차 몰입하고 있었다. 아니, 사실 이건 나만의 생각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참고 노력하고 있는 거일 수도 있겠지.
일곱 명의 컨셉 촬영이 끝나고 난 그들을 불러모았다. 마지막은 좀 특별하게 가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내 의견에 기뻐하며 내 의견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
러버걸스의 팬클럽 회원인 성채는 새로운 사진 두 장이 뜬 걸 알고 얼른 클릭해봤다.
“와, 이건 뭐야? 게임광고 찍었나 보네. 아이고 중세시대 배경이네. 게임인만큼 좀 유치하지만, 이것도 러버걸스가 걸어온 길의 발자국이라고 생각하고··. 응?”
성채는 같은 배경에 같은 인물, 거의 같은 포즈로 찍힌 두 개의 사진을 보다가 화들짝 놀랐다. 이게 자기만의 느낌인지 아니면 특별한 건지 알기 위해, 그는 팬클럽 커뮤니티에 두 개의 사진을 올렸다.
– 러버걸스 요즘 유행하는 게임광고 찍었나 보네.
– 이런 유치한 컨셉도 돈만 있으면 다 됩니다. 대체 이 게임과 러버걸스가 어떤 연관성이 있다는 건지 모르겠네
– 소속사는 왜 이 광고 찍게 했나요?
– 저기요, 두 사진 확대해서 표정 좀 보세요.
┖헉, 저 발견
┖저도 발견
– 뭐야 뭐야? 무슨 비밀이 숨겨져 있나?
– 중간에 한 명 바뀐 건가?
– 연기력이 다르네! 앞 버전은 광고 컨셉이라면 뒷 버전은 우리 러버걸스 느낌
– 씹소름이다, 인형에서 인간이 된 느낌이랄까
– 그냥 얼굴마담인 줄 알았는데 다들 노력한 흔적이 고스란히 보인다
┖ 이게 프로지.
┖그냥 뜬금없이 나오는 것보다 이렇게 뭐라도 했다는게 기쁘네요
– 우리 효미는 정말 여기사라는 느낌이네요
┖단장급 표정
┖모든 책임감을 짊어지고 있다
– 다정이는 뭔가 고고해 보인다
┖ 귀가 왜 이렇게 어울리지?
– 우리 유아는 이제 성직자의 길로 가나요, 저런 성스러운 분위기를 가질 줄이야
– 진짜 마지막에 활짝 웃는 사진 너무 좋다, 게임 캐릭터에서 러버걸스로 뒤바꿨다는 걸 누가봐도 알 수 있어. 이거 누가 찍었나요?
┖길승우 사진작가님
┖러버걸스와 길승우 사진작가의 조합은 믿고 볼 수 있다고 할까
마지막 미소 사진은 정말 레전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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