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grapher Gil seung woo RAW novel - Chapter 160
160화 노력의 한계?
모르는 번호로 연락이 온 건 화요일 저녁이었다.
– 안녕하세요, 작년에 모임에서 본 강희나라고 합니다. 혹시 기억하고 계시는지요.
기억할 수밖에 없다. 유일하게 그 모임에서 날 상대해준 인물이었기도 했고, 이 여자 때문에 아주 곤란한 상황 일보 직전까지 가기도 했었다. 내가 이분에게 연락처를 내어줬던가?
“네, 당연히 기억하죠. 그동안 잘 계셨죠?”
긴 침묵이 흐른다. 내가 뭔가 이상하게 말했나? 아니, 지금 내가 한 대답은 어떤 관점으로 봐도 정상이었겠지.
요즘 활약상에 대해서 알고 있어요. TV나 잡지를 보면서 길승우 씨의 사진이 나오는 걸 보면 저하고 모임에서 얘기를 나누던 그 사람인지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무슨 소리에요. 그냥 요즘 일이 잘 풀린 작업도 몇 있고, 실력보다 기회가 많이 주어져서 그런 겁니다.”
– 다름이 아니라, 제게 시간을 좀 내주실 수 있나요?
갑작스러운 데이트 신청인가? 하아, 요즘 들어 이런 연락이 가끔 온다니까. 나에 대해서 잘은 모르지만, 유명세라고 할까? 그런 거 때문에 다가오는 여성들이 조금 있다. 만약 내가 혼자라면 괜찮겠지만, 지금은 사랑스러운 여친님이 있기 때문에 이건 거절해야겠다.
“죄송한데, 제가 여자친구가 있어서··.”
– 네? 아니아니, 그런 의미가 아니에요. 전 길승우 씨를 남자로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다고 할까. 꺄악! 어떻게 해. 아니 그게 그렇다고 길승우 씨가 이상하다는 게 아니라, 전 그냥 사진에 대해서 조언을 받고 싶어서요.
이제는 내 차례인가? 통화를 멈추고 이대도 잠적해버리고 싶은 심정이다. 아니 요즘 몇 번 그런 일이 있어서, 또 그런 일인 줄 알고 과잉행동했던 나 자신이 원망스럽다.
“아아! 그렇군요. 하하핫!”
– 하하하.
핸드폰에서는 어색한 웃음소리가 들린다. 분명 뭐 이런 왕자병 걸린 녀석이 다 있나 생각하겠지.
희나 씨와는 모레 점심쯤에 만나기로 약조를 하고 난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쪽팔림에 바닥을 뒹굴었다.
“길승우 씨는 어떻게 사진을 잘 찍게 되셨죠?”
그녀와 나는 세 시쯤 회사 주변 카페에서 마주했다. 그녀의 모습은 전과는 달리 생기가 없어 보였다. 그때는 협회장의 거짓 섞인 말에도 환호하는 모습이었는데 말이다.
“좋은 사람을 많이 만났기 때문이죠.”
“아니, 그 전부터 사람들 눈에 띄는 사진을 찍어오셨잖아요. 그건 재능인가요?”
카메라 덕분이라고 하기에는 이 여자분이 납득하지 않을 것 같구나. 난 할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인정하기는 부끄럽지만, 재능의 일종이라고 볼 수 있겠죠.”
“사실 제가 길승우 씨를 뵙자고 한 건 제 사진을 한번 봐줬으면 해서예요.”
“이름 기억은 안 나지만 스튜디오에서 어시로 일하신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어요.”
“네?”
“잘렸다고요. 저 같은 건 재능 없으니까 한시라도 빨리 다른 길을 찾아보라고 하더라고요. 저보다 더 재능있는 사람들도 일거리가 없어서 쫄쫄 굶고 있다면서 말이에요.”
생각보다 심각한 상황인가 본데. 잘은 모르겠지만 인생 최악의 상황에 왜 나를 찾아온 걸까?
그녀는 한숨을 내쉬다가 뭔가를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전 사진을 좋아해요.”
왜 가만히 있지? 뭐라도 대답해줘야 하나?
“··저도 좋아합니다.”
“아악, 이게 아니라. 전 남들처럼 일찍 사진에 대해 흥미가 있지는 않았어요. 전 사진과는 관련 없는 디자인학과를 나왔어요. 하지만 취미 삼아 찍은 사진에 누군가 관심을 가져줬어요. 그리고 조금이지만 인정을 받아서 본격적으로 이 세계에 도전하기로 마음을 먹었고 말이죠. 근데 지금은 아무도 제 사진을 좋아하지 않아요. 심지어 같은 스튜디오 사람들조차 말이에요.”
“그랬군요.”
그녀는 탁자에 사진 몇 장을 꺼내 내게 보여주었다.
“전 사진이 잘 나올 때까지 몇 장이고 찍었어요. 늦은 만큼 더 공부하고 찍어야겠다는 생각에서 얼마나 많은 서적을 읽고, 사진을 봤는지 몰라요.”
사진의 점수는 안타깝게도 낮았다. 굳이 카메라 시스템의 힘을 빌리지 않더라도 알 수 있는 사진이다. 누군가를 흉내를 낸 것 같은 사진은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어설프더라도 사진가의 색이라도 들어있으면 좋으련만, 그마저 없었다.
“제가 이 사진에 관해서 얘기를 해주시길 바라는 건가요?”
“네, 실력 하나로 성공적인 커리어를 이어가시는 분이잖아요. 편견 없이 제 사진을 평가해 주실 분이 길승우 씨 밖에 없어서요.”
그러고 보니, 이 아가씨는 전에도 학벌 때문에 피해를 봤다고 했었지. 난 좀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일단, 전 아직 다른 사람의 사진을 평가하기에는 경력이 한참이나 모자란다고 알려주고 싶어요. 그래도 여기까지 찾아와서 부탁하셨으니까 솔직하게 말씀드릴게요.”
그녀는 기대에 찬 눈빛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난 차마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사진을 보며 입을 열었다.
“··부족해요. 솔직히 말해서 프로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사진입니다. 희나 씨의 독특함이랄까, 특징이랄까·· 그런 게 사진에 하나도 보이지 않아요.”
“그럴 리가 없어요. 그 사진은 제가 가장 훌륭하다고 생각되는··.”
“무슨 말을 하려는 지 알겠어요. 어떤 사진작가의 사진을 보고 영향을 받아 찍었다고 생각돼요. 하지만 이런 식으로 흉내에 그친 사진을 보고 일거리를 맡기는 클라이언트는 별로 없을 겁니다.”
일부러 기술적인 문제나 구도상의 문제는 지적도 하지 않았다. 그쪽은 공부를 한다면 언제든지 향상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정말·· 제 사진이 형편없나요?”
그녀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다. 하지만 도저히 이런 사진으로 이 세계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난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그녀는 고개를 떨궜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내가 이럴 자격이 있는지 생각이 들었다. 나 역시 카메라가 없었다면 언젠가 저런 모습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최소한 희나 씨는 열심히 노력을 했다고 한다. 내 예전 모습을 봤을 때 과연 남 앞에서 당당히 노력했다고 말을 할 수 있을까?
··아닐 것이다.
“희나 씨, 고개 드세요.”
난, 남의 꿈을 끝장낼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 아니다.
“여기 있는 사진으로 평가했을 때 그렇다는 소리입니다. 많은 사진을 찍어왔겠죠?”
그녀는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그래, 고작 몇 장의 사진으로 남을 판단할 수 있을 만큼 난 대단한 사람이 아니다. 사진이란 게 선천적인 재능보다는 후천적으로 쌓이는 무언가에 의해 결정된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래요. 일단 그 사진을 볼 수 있을 만큼 봅시다. 많이 노력하셨잖아요.”
노력하면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동화 속의 얘기를 믿는 건 아니다. 최소한 앞의 사진가는 나처럼 되고 싶다는 얘기까지 했다. 최선을 다해서 그녀의 사진을 봐주는 수밖에 없다.
***
며칠 뒤 난 저녁 늦게 시간을 내어 희나 씨를 만났다. 난 모니터에 그녀가 내어준 외장 하드를 연결하고 하나하나 보기 시작했다. 무언가 희망적인 얘기를 해주고 싶다. 다행스럽게도 내게는 사진의 수준을 가름하는 능력이 있었기 때문에 빠른 속도로 사진을 살피기 시작했다.
“뭐 좀 드세요, 그렇게 벌 받는 것처럼 있지 말고.”
“지금 뭔가 먹으면 체할 것 같아요.”
난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 사진을 살펴봤다. 사진 대부분을 다 보고 내가 낸 결론은··.
“인물 사진 쪽은 아무리 봐도 장점을 못 찾겠어요.”
“··역시 그런가요.”
실망스러운 그녀의 말에 나는 살짝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근데 의외로 풍경사진 쪽에서 괜찮은 사진이라고 생각되는 게 몇 개 있어요. 이거랑 이거, 그리고 이것도. 전부. 그리고 이건 집에서 키우는 고양이인가요?”
“네, 제 반려묘에요.”
“이 사진들도 좋아요. 특히 고양이를 찍은 사진 중에는 정말 좋은 것도 몇 개 있고요.”
“정말인가요?!”
희나 씨의 사진을 보면서 가장 많이 느낀 것은 노력이라고 해야 하나, 끈기라고 해야 하나·· 그런 점이 보이는 사진이 많았다. 내가 고른 풍경사진을 예로 들자면 이 장소에서 적어도 이틀 이상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일단 제가 보기에는 그렇다는 소리예요. 제 말이 정답은 아니죠.”
사진에는 우연성이라는 개념이 존재한다. 우연성이란 사진이 가진 독특하고 우수한 특성이면서 가장 어려운 특성이라고 할 수 있다. 피사체의 한순간을 담아내는 능력이라고 말을 할 수 있는데, 많은 사진작가가 이를 위해 큰 노력을 한다.
나 같은 경우는 피사체를 관찰하고 그녀와 교감하면서 우연성을 끄집어내는 편이다. 크게 말하자면 남들과는 다른 관찰력으로 피사체를 보고 사진을 찍어낸다고 할까?
“그래도·· 감사합니다. 처음이에요, 사진계 쪽 사람이 제 사진이 좋다고 해주신 건 말이에요.”
희나 씨 같은 경우는 그 우연성을 얻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한 것이 보인다.
“사진을 보면서 생각했어요. 적어도 희나 씨 같은 경우에 멋진 풍경을 찍기 위해 한 자리에서 얼마나 버텼는지, 얼마나 많은 시도를 했는지 알 수 있었어요. 전 흉내도 못 내죠. 게다가 피사체를 집요하게 찍어대는 끈기라든지 그런 건 놀랍기만 하네요. 그러므로 이런 사진을 건질 수 있었던 겁니다.”
난 사진을 하나 들었다. 바다를 배경으로 일몰 시각에 역광으로 찍은 사진인데 새 일곱 마리가 날아가는 사진이었다. 이 사진에서 새가 빠졌다면 그저 그런 사진이었겠지만, 새 일곱 마리가 절묘하게 위치해서 구도 면에서 참신해 보이는 그런 사진이었다.
어떻게 보면 우연에 우연이 겹쳐서 만들어낸 사진이다. 그렇지만 난 희나 씨가 이 사진을 위해 같은 장소에서 수없이 많은 사진을 찍어댔음을 알 수 있었다.
“희나 씨의 장점은 끈기예요. 보통 다큐 쪽에서 이런 기질을 가진 사진가들이 많습니다. 불행하게도 상업사진 쪽에서는 큰 도움이 되지 않죠. 짧은 시간에 클라이언트의 요구에 맞춰서 좋은 사진을 찍어내야 하니까요.”
“다큐 사진··.”
“풍경사진 같은 경우 많은 공모전이 있는 거로 알아요. 저 같은 경우는 학생 때 한 번도 입선조차 못 했지만.”
“제가 할 수 있을까요?”
“전 모르죠. 희나 씨가 할 수 있을지, 없을지 전 알지 못해요. 하지만 적어도 이 사진이 좋다는 거 정도는 알 수 있어요.”
희나 씨가 갑자기 고개를 숙이고 몸을 떨고 있다. 훌쩍이는 거로 봐서 울고 있는 거 같은데,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저기, 희나 씨?”
한동안 훌쩍이던 희나 씨가 겨우 고개를 들었다. 눈이 붉게 충혈돼 있었다. 근처에 앉아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이쪽으로 모인다. 아니야! 그런 거 아니라고!
“감사합니다. 바쁘실 텐데 저한테 시간 내주셔서요. 길승우 씨는·· 저를 구원해 주셨어요. 정말 모든 것을 포기하고 이 길로 들어섰는데 길이 보이지 않아서··. 직장에서도 버림받고 모든 걸 내려놓아야 하는 상황에서 희망을 주셨어요.”
“희나 씨가 노력해준 덕분에 이렇게 말할 수 있던 겁니다. 나중에 저를 원망할지도 몰라요.”
“절대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저, 끝까지 해보겠습니다.”
난 희나 씨의 감사 인사를 받고 있는 게 부끄러워서 자리에서 먼저 일어났다. 희나 씨는 몇 번이나 고맙다고 말하면서 혹시라도 나중에 성과를 얻게 되면 연락하겠다는 말을 남겼다.
조금은 이상한 밤이었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사진에 관해서 얘기하고, 그것으로 인해 사진계에 계속 남을 힘을 얻었다는 것이 자랑스럽기도 하고 어색하기도 했다.
분명한 것은 예전의 나는 강희나 씨보다 모자란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이 카메라 덕분에 난 발전할 수 있었고, 많은 사람이 내 사진을 좋아해 주고 있다. 언제까지 이 카메라가 나와 함께할지 모르겠지만 있는 힘껏 사진을 찍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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