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grapher Gil seung woo RAW novel - Chapter 167
167화 보금자리 (1)
요 몇 달간 사진을 찍으면서 가장 아쉬운 점 중 하나는 내가 원하는 스튜디오를 원하는 시간에 쓰지 못하는 거였다. 많은 렌탈 스튜디오가 있지만 원하는 시간, 원하는 인테리어, 원하는 피사체가 다 갖춰지는 상태에서 사진 촬영을 하는 경우가 드물었다는 점이었다.
“스튜디오를 구하고 싶다고?”
나만의 성. 나만의 공간에서, 나만의 감각으로, 나만의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그런 것을 원한다. 그리고 이런 일은 날 잘 알고 있는 사람에게 묻는 것이 편하다. 미선 선배가 그중 하나고 말이다.
“네, 선배.”
“내가 무슨 도움을 줄 수 있을까 모르겠네. 나도 스튜디오 차려본 경험은 없어. 내 꿈이지. 일단 내가 가장 중요한 건 알려줄 수 있어.”
“뭔데요?”
“돈이지.”
“꿈이라던가, 그런 걸 말씀하실 줄 알았는데.”
“이 나이가 되니까 그런 희망찬 얘기보다 중요한 건 돈인 걸 알았거든.”
“··연애나 결혼 같이요?”
“어머, 우리 승우 사람의 폐부를 말로 찌르는 솜씨가 많이 늘었구나. 얼굴 한 번 봐야겠네.”
미선 선배의 약점을 건들자 즉각 반응이 온다. 목숨을 건 태클이었다. 한동안 보지 않는 편이 나을지도···.
“죄송해요.”
“이미 늦었어. 이 일은 나중에 제대로 얘기하자. 일단 네가 궁금해하는 걸 알려줄게. 우선 어떤 스튜디오를 차릴 건지 계획을 세우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해. 위치를 우선으로 할 건지, 인테리어 중심으로 할 건지 말이야. 가장 베스트는 둘 다 선택하는 거지. 머릿속으로 스튜디오를 어떻게 꾸밀 건지 생각하고, 구현이 가능한지 인테리어 업체와 의논하고, 적당한 매물을 고르는 게 정석 아닐까?”
“하아, 갈 길이 머네요.”
“상업 사진 쪽에서는 스튜디오를 차린 뒤에 일하는 게 일반적이야. 너처럼 인지도 있는 사진가가 스튜디오가 없는 게 이상한 거지.”
“어떻게 하다 보니까 이렇게 되어가지고요. 운이 좋았죠.”
“운이라고 생각할 필요 없어. 얼마 되지 않는 기회를 실력으로 잡은 거잖아. 실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지금의 네가 없었을 거라고.”
“과분한 평가 감사합니다.”
“진짜··, 오래간만에 전화해서 난데없이 스튜디오 타령이라니. 아무쪼록 네가 원하는 스튜디오를 구하렴. 스튜디오 완성하면 영효 선배 데리고 가볍게 한잔하자.”
“그럼요, 스튜디오 차리면 꼭 초대할게요.”
일단은 돈인가··. 현재 생각보다 많이 벌고는 있지만, 서울 시내에, 그것도 스튜디오가 몰린 지역에 스튜디오를 차리려면 얼마가 들지 예상도 되지 않았다.
“정말로 이게 사진을 판 돈으로 감당할 수 있는 비용인가.”
그리고 한 시간 뒤, 난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간단하게 대략적인 비용을 추산해봤는데 지금의 나로서 지불할 가능성이 어림반푼어치도 없는 비용이 측정됐다. 뭔가 열심히 해서 내가 꿈꾸는 스튜디오를 만들어야겠다는 결심이 산산이 무너지고 있달까. 임대하는 방법도 있지만 벌고 있는 돈을 대부분 임대료로 지급하고, 나중에 빚더미인 채로 쫓겨나는 암담한 미래가 생각이 났다.
“길승우 이사님, 무슨 고민 있어요?”
아시아의 혜성이란 뻔한 별칭이 붙게 된, 국제적으로 인지도가 상승한 그룹 언루트의 리더 치혁이가 음료수를 마시며 내게 물었다.
“차혁아, 너 얼마나 버냐?”
“··이사님, 회사 사정이 어려워요? 갑자기 개인적인 일은 왜?”
“회사 사정은 잘 모르겠는데. 그냥 알고 싶어서.”
“이 회사를 믿고 계속 갈 수 있을지 의문이 드네요.”
아마도 한국에서 가장 돈을 많이 버는 일원 중 한 명인 20대 청년을 붙잡고 하소연을 하려고 시도했지만, 돌아오는 건 회사에 대한 불만이었다.
“돈 필요하세요? 형도 꽤 많이 버는 거로 아는데.”
“나도 그런 줄 알았는데 사회는 생각보다 많은 돈을 요구하더라.”
“대표님한테 의논해보세요. 형이라면 모든 해주실 것 같은데.”
“나도 염치가 있지, 지금까지 받은 게 얼마나 많은데.”
대표님께 부탁하기에는 너무 사이즈가 크다. 내 노력 없이 얻은 스튜디오에 애정이 생기기도 힘들 거고 말이다. 일단은 적은 돈이라도 투자하는 방향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 무슨 일로 회사에 오신 거예요?”
“난 오늘 푸른투명 애들 촬영 있어서.”
“아, 우리 회사 후배죠? 바빠서 인사 한 번 못했네.”
“오랜만의 휴가인데, 넌 무슨 일로 온 거야?”
“저번에 작업하던 곡 다듬으려고요.”
이번 앨범에도 두 곡의 노래를 만든, 본격적인 싱어송라이터의 길을 걷는 차혁이가 말했다. 노래도 잘하고 춤도 잘 추고 얼굴도 잘생긴 데다가 음악적 재능까지 있는 동생이다.
난 약속 시각이 돼서 나가려고 하다가 차혁이에게 한 가지 부탁을 했다.
***
곧, 근처 스튜디오 세트장에서 본격적인 촬영이 시작됐다. 세트나 의상 같은 건 아트팀에서 충분히 검토하고 제작해서, 막상 촬영 날에는 직원 한 명과 매니저, 그리고 나만 스튜디오에 자리하고 있었다.
“자, 좀 더 표정에 신경 쓰자.”
“저기 이사님. 우린 아주 즐거운데요.”
“그러니까 그런 기분을 얼굴에서 지워야 하거든.”
싱글앨범을 내게 된 푸른투명은 앨범 이미지를 찍기 위해 이곳에 있다. 정규 1집의 예상치 못한 성공으로 그들의 입지는 점점 커지고 있었다. 국내 음원으로 한정한다면 러버걸스마저 능가하고 있었다.
··그 바람에 내 인지도가 올라간 건 덤이다.
아트디렉터 이연수 씨의 제안대로 그들은 촌티 가득한 옷을 입고 80년대 세트장 벽에 기댄 채 나를 바라보고 있다. 컨셉 상으로는 거리로 내몰린, 뭔가 사연이 있을 것 같은 과거의 여학생이라고 한다.
“우리랑 컨셉이랑 안 어울리죠?”
“너무너무 잘 어울려서 소름이 돋아. 이대로 30년 전 과거로 가면 누구 하나 이상한 점을 발견하기 어려울 정도로 말이야.”
“너무해!”
내게 한껏 야유를 퍼붓고는 둘이 마주 보고는 꺄르르 웃는다. 무표정이 컨셉이긴 하지만 놓치긴 아까운 모습이라 셔터를 누를 수밖에 없었다.
촬영 시간은 두 시간 정도로 짧은 편이지만, 이곳에서 찍은 사진 중에 두 장 정도만이 선택되는 거로 따지면 긴 시간이다.
“와우.”
옆에 있던 직원 한 명이 모니터에 나오는 화면을 보더니 감탄사를 내뱉는다. 난 직원을 보며 시익 웃고는 입을 열었다.
“괜찮죠?”
“분위기 너무 좋네요. 뭔가 촌스러운데, 그걸 넘어선다는 느낌?”
한 시간가량, 사진을 찍고는 다음 컷을 위해 자리를 옮겼다. 낡은 테이블에 마주 앉아 차를 마시는 씬이었다. 담담한 표정으로 차분한 분위기를 연출해야 한다.
“둘이 너무 친해 보인다, 약간 다퉈서 어색하다고 생각하면 좋을 것 같아. 응, 지금 표정 아주 좋아.”
예슬이와 늘솜이는 의도하지 않으면 서로에게 지닌 호감이 사진에 그대로 나타난다. 그만큼 호흡이 좋아서 한 노래를 두 명이 나눠서 불러도 마치 한 사람이 부르는 것처럼 느껴진다. 둘의 목소리가 다른데도 말이다.
“그렇다고 티 나게 표정 짓지 말고, 최대한 무표정하게.”
“그렇게 표정을 맘대로 지을 줄 알면 제가 연기를 하지, 노래하겠어요.”
뭔가 심통이 난 듯 예슬이가 내게 말했다.
“음, 그러니까 내가 부족하다고 느끼고 있는 걸 얘기해줄게. 지금 분위기는 그냥 사소한 문제로 싸운 것 같아. 노래는 한 남자 때문에 둘 사이가 어그러진 거잖아. 한 남자를 두고, 둘 사이에 미묘한 분위기가 흐르던 때 없어?”
“저 말고 늘솜이는 연애해봤는데, 제 타입은 아니었어요. 처음 늘솜이 남친 봤을 때 눈 되게 낮다고 생각했어요.”
갑작스러운 예슬이의 폭탄선언에 늘솜이가 당황하며 입을 열었다.
“그 오빠랑은 그냥 썸 탄거야! 사귄 거 아니라고.”
“웃기시네, 내가 다 봤어. 대문에서 너랑··.”
“으아아아! 으아아아!”
둘이서 하는 짓이 귀여워서 한 장 찍어야 했다. 앨범의 커다란 성공으로 사람이 좀 바뀔 만도 한데 여전히 뮤직비디오 찍을 때의 모습과 별반 차이가 없어서 안심된다.
“늘솜아, 예슬이는 뭐 없어?”
“있어요! 쟤는 같은 동아리 오빠 짝사랑하다가 차여서 며칠 동안 엉엉 울고 난리도 아니었어요. 그 오빠도 내 취향 아니었어!”
“야! 정늘솜!”
난 예상대로 상황이 진척된 것에 기뻐하며 입을 열었다.
“자, 이 기분 그대로 표정만 지우자.”
“오빠!!”
두 사람이 날 사납게 노려보며 소리쳤다. 그래도 결국 둘은 내 말을 듣고는 둘 사이의 흐르는 미묘한 불편함을 잘 표현해줬다. 사진을 위해서 두 사람의 우정을 무너트린 날 원망할 수는 있겠지만, 내가 준비한 선물을 보면 그런 마음을 쏙 들어갈 거다.
“얘들아, 너희들 언루트 좋아한다고 했지. 실제로 만난 적 있어?”
“없어요, 같은 회사라서 올 때마다 맨날 기대하는데 마주친 적이 한 번도 없어요. 우리 회사는 송년회나 망년회 안 해요?”
억울한 듯 예슬이가 말했다. 난 고개를 끄덕거리며 몇 분전에 스튜디오로 손수 찾아온 차혁이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둘은 어리둥절한 채로 차혁이를 보더니 팬클럽마냥 소리를 질러댔다.
나중에 이 장면을 둘에게 꼭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 셔터를 눌러댔다.
“차혁 군을 넣고 몇 장 찍어도 괜찮지 않을까요?”
“그렇지 않아도 그거 생각하고 차혁이 불렀어요.”
뭔가 동경하는 대상을 앞에 둔 수줍은 두 소녀의 모습을 찍고 싶어서 차혁이에게 잠시만 나와달라고 부탁했는데, 예상보다 괜찮은 사진이 찍힐 것 같다.
그리고 예상대로 셋이 포즈를 취한 뒤 몇분 만에 원하는 사진을 건져낼 수 있었다.
난 장비를 정리하면서 직원을 향해 입을 열었다.
“여기 세트 잘 꾸미셨네요, 배경이 좋아서 사진이 근사하게 나왔어요.”
“아, 우리가 직접 만든 건 아니에요. 이 스튜디오가 복고를 상정하고 만들어서 그냥 세트 몇 개만 추가했어요. 운이 좋았죠.”
난 고개를 끄덕이면서 스튜디오를 둘러봤다. 2층 가정집을 개조한 이 스튜디오는 마치 과거로 여행은 온 것 같았다.
“본래, 렌탈이 안 되는데 인맥으로 몇 시간만 빌린 거죠. 혹시 신형욱 작가라고 아세요?”
“죄송한데, 제가 견식이 짧아서요.”
“골목길 시리즈로 유명하신 분이라고 해요. 평생 모은 돈으로 80년대를 추억할 수 있는 이런 공간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보시다시피 세트도 정교하고 분위기도 좋아서 많은 곳에서 탐내는 장소예요.”
“혹시 그분 연락처 좀 알 수 있을까요?”
뭔가 내가 스튜디오를 만들 때 참고가 될 것 같았다. 적어도 확실한 컨셉으로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특징 있는 스튜디오를 만드신 분 아닌가. 시간이 된다면 조언을 구하고 싶었다.
“연락처는 알고 있지만, 용건이 있으시면 한 번 말을 걸어보세요.”
“네?”
“아까부터 저 뒤에 앉아 계시잖아요.”
난 그 말에 직원이 바라보고 있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스튜디오 직원이라고 생각했던 분이 의자에 앉아 옆에 있는 남자와 얘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난 심호흡을 하고 그곳으로 다가가 신형욱 씨에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사진 찍는 길승우라고 합니다. 미리 인사를 드려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그냥 시간이 남아서 눈에 띄지 않게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저도 미안하네요.”
신형욱 작가님은 푸근한 체형을 지닌 40대 초반의 아저씨셨다. 그는 날보며 웃음을 짓더니 입을 열었다.
“내가 요즘 연예인들을 잘 몰라서 그러는데 오늘 찍은 분들이 가수?”
“네, 같은 소속사 가수입니다.”
“전문 모델도 아닌데, 사람 다루는 법이 능숙하시네. 나이도 많아 보이지 않는데 말이에요.”
“말씀 낮추세요, 제가 한참 후배입니다.”
신형욱 작가님은 몇 번 빼시다가 이내 말을 놓기로 하시고는 입을 열었다.
“내가 명색이 사진작가인데, 인물 사진 쪽은 영 젬병이야. 오늘 길 작가 찍는 모습 보니까 본격적으로 하지 않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드네. 어휴, 난 사진 찍으면서 그렇게 즉각적으로 모델에게 이런 거 저런 거를 정확하게 요구하는 재주가 없어.”
“워낙 잘 아는 사이라서 그렇게 보인 거일 수도 있어요.”
그는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그런 거 아니라는 것쯤은 알아. 실례가 안 된다면 오늘 찍은 사진 좀 볼 수 있을까?”
“그럼요.”
신형욱 작가님은 내 사진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감탄사를 내뱉다가 얼굴을 찡그리기도 했다.
“이 사진을 보면 뭔가 내면을 파고든다는 생각이 들어. 내가 보기엔 그냥 평범하다면 평범했던 현장이었는데 말이지. 의도한 건가?”
“의도했다면 의도한 거죠. 그냥 교감이 짙으니까 렌즈 너머로 순간순간 이런 장면을 찍을 타이밍이 나오거든요.”
“젊은 친구가 대단해.”
내게 조금 호감이 생긴 것 같으시다. 난 잠깐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저 작가님, 이런 대단한 스튜디오를 어떻게 만드시게 된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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