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grapher Gil seung woo RAW novel - Chapter 17
18화 촬영장에서·· (2)
슬비 씨는 푸른색 계열, 강렬한 컬러감의 기다란 비치 원피스를 차려입고 해변에 섰다. 네크라인이 깊게 파져 가슴 라인이 그대로 들어나 조금은 야한 느낌도 들었다. 머리에는 레이스가 달린 아이보리 계열의 모자를 쓰고 선글라스까지 착용한 모습을 보니 방금 전 소리를 지은 인물과 동일인인가 싶다.
“일단 콘셉트대로 가자, 슬비는 어떻게 찍고 싶어?”
정만종 선생님이 카메라를 들고 말했다.
“제 이미지를 좀 깨고 싶어요. 막내, 순둥이, 귀여움, 뭐 이런 이미지를 탈피하고 싶어요.”
“오케이, 알았어. 일단 해변을 걸어보자. 한가하지만 즐겁게, 아무도 밟지 않은 해변에 처음 온 모습으로.”
내가 생각하기에 슬비 씨의 이미지는 본 모습을 조금이나마 보여주면 가볍게 깨질 것 같아 보이는데.
슬비 씨는 밝게 웃으며 해변을 여유롭게 걸었다. 하지만 본 모습을 조금이나마 알고 있는 내게는 되게 가식적으로 보였다. 슬비 씨는 몇 번이나 의상을 바꾸면서 선생님의 요구에 따라 포즈를 취했다.
“신발 벗고, 해변으로. 물 좀 튀기면서!”
선생님은 슬비 씨 옆에 바싹 붙어 연신 카메라를 찍어댔다. 10월 초라 바닷물의 온도가 꽤 차가울 텐데도 슬비 씨는 눈살 하나 찌푸리지 말고 선생님의 요구대로 맨발로 물이 튀기며 여유 있게 걸었다. 선생님은 그 모습을 하나라도 놓칠세라 계속 찍어대다가 카메라를 얼굴에서 떼며 입을 열었다.
“일단 여기까지. 그리고 너희들 이리 와봐.”
슬비의 매니저가 재빨리 비치 타월을 들고 슬비 씨에게 다가갔다. 나를 비롯한 사람들은 선생님 곁으로 다가갔다. 선생님은 결과물을 보여 주면서 우리에게 말했다.
“어떤 거 같아?”
사진을 본 난 충격에 빠졌다. 아니 어째서 이런 허접한 해변에서 찍은 사진이 보정도 없이 이렇게 빛날 수 있는 거지? 선생님의 사진 속의 해변과 실제로 보이는 해변의 차이가 커서 나는 몇 번이나 사진을 봤다가 해변을 봤다. 그리고 그 해변 속에 슬비 씨의 모습이 잘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을 보는 것 같았다.
“풍경하고 잘 어우러진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반사판을 달리 써서 좀 더 입체감 있게 찍어보죠. 지금 자연광을 살리는 것도 괜찮긴 한데 좀 더 인물에 초점을 맞춘 사진도 찍어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영효 형이 말했다.
“포즈가 너무 심심해 보여요. 다양한 포즈를 취하게 하면 좀 더 좋은 사진을 찍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전 옷 좀 바꾸면 좋겠는데요. 햇빛도 좋은데 컨셉보다 옷을 좀 더 많이 갈아입혀서 찍어보죠.”
미선 선배과 경훈 선배가 대답했다. 그리고 모두들 나를 바라본다. 솔직히 난 이 사진에는 전혀 불만이 없는데 너무 높은 수준이기도 하고 그래도 뭐라도 말해야겠지.
“사진 너무 좋은데 지나치게 따뜻해 보여요.”
“어떤 점에서?”
내 말에 선생님이 즉각 반응했다.
“아·· 그러니까 사진이 너무 푸근해요. 아름다운 해변에서 귀여운 소녀를 바라보는 마음이 든달까? 가슴이 이렇게 파인 옷을 입었는데도 사진 상에서는 그냥 여동생? 그런 느낌이 들어요.”
“그럼 어떤 마음으로 사진을 찍으면 좋을까?”
질문이 점점 길어진다. 사실 내가 좋은 사진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사진 속의 슬비 씨가 좀 어색해 보이는 건 아까 전에 들은 슬비 씨의 목소리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좀 굴리면서 차가운 시선으로 사진을 찍으면 어떨까요?”
“에에? 그건 아니다. 그러다가 오늘 전체 컨셉이 망가질 수도 있어.”
내 말에 미선 누나가 반대했다. 생각해보니 맞는 말이다. 선생님은 흥미롭다는 눈으로 날 바라보더니 영효 선배를 향해 말했다.
“막내 의견에 영효는 어떻게 생각하지?”
“아·· 말하는 바는 알겠는데 전 결과물 면에서는 회의적입니다. 슬비 씨가 원하는 건 긍정적인 이미지 변화인데 막내 말대로 찍었다가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주어질 수 있어요. 지금 컨셉에서 살짝 변화를 준다면 모를까.”
“일단 알겠어.”
선생님은 말을 마치고 날 바라봤다. 뭐지? 잘못 말했나?
“일단 알겠어··”
선생님은 내게 시선을 떼고 다시 한 번 중얼거리며 다시 촬영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선생님은 촬영장에 있던 매니저와 슬비 씨에게 찍은 사진을 보여줬다. 슬비 씨는 사진을 한참 보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
“비율이 좀 이상해 보여요.”
“어디가?”
매니저가 슬비 씨의 말에 의아한 듯 물었다.
“··다리가 너무 짧아 보여요. 왜 이렇게 짧지?”
“좀 길어보이게 다시 찍어보죠. 그리고?”
“이 옷 너무 야해 보이지 않나요? 너무 파인 옷을 입었나?”
하나도 야하지 않다. 하나도! 이 아가씨가 내가 찍은 라운드 걸 사진을 보면 기절하겠네.
“슬비야, 이 정도는 괜찮은 거 같은데. 바닷가에서 찍은 모습이라 자연스러워.”
“흐음, 그래?”
매니저의 말에 슬비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여전히 납득이 되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촬영은 재개되었다. 해변에서 가까이 있는 붉은 등대를 배경으로도 몇 장 찍고 모래밭에서 즐겁게 노는 모습. 해변 뒤에 자리한 소나무 숲에서도 몇 장을 찍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해가 떨어질 때 쯤 해변에서의 촬영이 한창 이뤄졌다. 그렇게 촬영이 끝나는가 싶었는데 선생님이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승우.”
“네.”
“준비해.”
난 대체 뭘 준비하라는 건지 선생님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애써야했다. 뭐 먹을 것 좀 가져다 달라는 소리인가? 아니면 소품을 준비하라는 소리인가?
“뭘 그렇게 멍하니 있어. 촬영 준비하라고.”
“··네?”
“아까 네가 원하던 거 찍어봐. 해가 질 때까지니까 시간 얼마 없다.”
선생님의 말에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랐다. 나 역시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냥 경험삼아 온 줄 알았는데 이게 무슨 날벼락이야. 아무런 준비가 안됐는데 뭘 어쩌라고. 슬비 씨도 매니저도 모두 벙찐 모습이다.
젠장, 아이템. 아이템. 뭔가 쓸 만한 아이템이 있어야 하는데. 내가 인물 사진 5등급으로 올리면서 뭘 받았지?
“아이템 사용. 카리스마, 미소 천사, 고귀한 기품.”
다 쓰자. 일단 다 쓰면 뭐가 나와도 나오겠지.
[아이템은 중복 사용할 수 없습니다.]이런 젠장. 생각해보자, 저 싸가지 아가씨가 내 말을 들을 확률은 적다. 그렇다면 이게 제일 필요하겠지.
“카리스마.”
[아이템 가 사용됩니다. 아이템의 유효 시간은 2시간입니다.]이걸로는 모자란다. 어쭙잖은 내 실력에 사진을 찍었다가는 대참사가 벌어질 것이 뻔하다. 일단 풍경 사진과 패션 사진 둘 중에 하나를 골라야 한다. 으아, 둘 다 중요한데.
“야! 뭐하고 있어!”
선생님이 나를 향해 소리친다. 그래 기본이 중요하다. 기본이 중요해. 난 아껴뒀던 사진 분야 선택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천천히 충분히 고민해서 선택하려고 했는데 다 틀렸다. 풍경 사진과 패션 사진 중에 골라야 한다.
“사진 선택 풍경!”
[풍경 사진 8등급] [풍경 분야를 선택하여서 착용할 수 있는 특성의 수가 1개 늘어났습니다. 등급이 상승하면 더 선택할 수 있는 특성의 수와 착용할 수 있는 특성의 수가 늘어납니다.] [현재 착용 가능한 특성의 수는 3개입니다.]어차피 특성을 선택하려고 모아놓은 포인트가 있다. 여러 좋은 특성이 많지만 지금 즉시 써 먹을 수 있는 특성을 선택할 생각이다. 새로 생긴 특성인 가 눈에 띄지만 지금 즉시, 유용하게 써먹을 특성은 정해져 있다.
“특성 빛의 마술사 선택.”
야외 촬영에서 빛의 중요성은 너무나도 중요하다. 어떻게 빛이 비춰지느냐, 그 장면을 어떻게 포착하느냐에 따라서 사진이 천차만별이니까. 이 정도면 기본 준비는 된 것 같다.
[본 촬영은 인물 사진에 적합합니다.] [인물 사진 5등급] [특성 : 남심올킬, 지킬 앤 하이드, 빛의 마술사]난 심호흡을 하고 카메라를 앞으로 나섰다. 매니저가 그런 날 어이없다는 듯 쳐다보다가 정만종 선생님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지금 뭐하는 겁니까? 우리 슬비 촬영을 초짜한테 맡기다니요.”
“흥미로운 사진이 나올 것 같아서 그러는데 좀 지켜봐주면 안되겠나?”
“우리가 시간이 남아도는 줄 아세요? 이거 뭔 참.”
선생님의 대답에도 툴툴거리는 매니저에게 난 다가가서 조용히 말했다.
“저기 매니저님. 아까 한 약속.”
매니저가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생각하다가 ‘아’하고 작게 신음 비슷한 소리를 냈다. 매니저는 이렇게 넘어갈 수 있겠다.
“정말 계속해? 오빠?”
슬비 씨는 웃고 있지만. ‘지금 내가 이걸 해야겠어? 어서 이거 관두게 해!’란 눈빛으로 매니저를 쏘아보고 있었다. 매니저는 나를 향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기, 슬비 씨가 허락하면 하겠는데, 나도 슬비 씨가 우기면 강행할 수 없는 입장이라.”
“자! 촬영 시작합니다! 슬비 씨 준비하세요!”
일단 지르긴 했는데 아이템 효과가 있으려나? 제발 있어라.
난 기도하는 마음으로 슬비 씨를 바라봤다. 다행히 슬비 씨는 내 외침에 탐탁지 않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매니저는 이상한 장면을 다 목격했다는 듯 그런 슬비 씨를 멍하니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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