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grapher Gil seung woo RAW novel - Chapter 172
172화 나만의 방식
누군가 그랬다, 공부에는 끝이 없다고 말이다. 난 미적 감각이라는 듣기에도 모호한 능력치를 올리기 위해 열심히 노력 중이었다. 그놈의 미학이라는 학문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철학 공부가 필수다. 덕분에 한평생 나와는 관계가 없을 것 같았던 이라는 학문에 손을 대고 있었다.
“너, 수능 다시 치니?”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리자, 어머니가 어이없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밥 좀 먹으라고 그렇게 말하는데 미동도 없어서 뭐 하는지 봤더니 공부라니··. 그것도 학생 시절에 그렇게 죽어라고 하지 않았던 공부를. 뭐 보는 거야? 허이고, 이게 뭐니? 뭐 이리 두껍고 무섭게 생긴 책이 다 있어?”
“그냥 사진 찍는 데 필요해서 보고 있는 거야.”
“··철학이?”
어머니가 내가 보던 책을 들고 제목을 가리키며 물었다.
“사진도 철학이 있어야 잘 찍지. 모든 다 철학이 뒷받침되어야 좋은 예술작품 소리를 듣는 거 몰라?”
“알고 싶지도 않다, 얘. 뭐 그렇게 어려운 얘기를 하니.”
확실히 카메라가 손에 들어온 이후 공부도 손에 익고 있다. 이런 집중력으로 학생 시절에 공부했으면 최소한 인서울은 했을 텐데. 기억력은 물론이고 이해도나 집중도도 월등해졌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오늘은 아버지도 늦으시고 형은 동계훈련에, 에브리아는 방송 때문에 지방행이다. 모처럼 어머니와 단둘이 밥을 먹게 생겼다.
“사무실은 잘 되어가고?”
“생각보다 찾아오는 사람들이 꽤 있어. 그 다미던가? 요즘 잘나가는 가수 한 명이 홍보를 엄청나게 잘해주고 있어. SNS는 물론이고 방송에 나와서도 몇 번이나 내 이름을 언급해줘서 초반에 자리를 잘 잡았지.”
스튜디오에서 첫 촬영을 진행했던 가수 다미 씨는 확 떴다. 어린 나이에 성숙한 음악, 앳된 외모와는 어울리지 않는 목소리를 앞세워 오랜만에 마케팅 없는 역주행을 기록하며 올해의 신인상을 향해 날아가는 중이다.
“다 우리 아들이 잘 찍은 덕분이지. 누굴 닮아서 이렇게 사진을 잘 찍을까?”
다미 씨는 앨범 재킷 사진이 고마웠는지 몇 번이고 내 이름을 언급해줬고, 덕분에 연예계 쪽 일거리는 골라서 할 정도로 많이 들어오고 있었다.
“어유, 아직 멀었어요. 난 아직도 내가 사진으로 돈 번다는 게 꿈 같아. 졸업할 때만 해도 막막했는데··.”
정말 졸업하고 아무 일도 시작조차 못 하고 있을 때만 생각하면 암담해진다. 집안 돈만 축냈을 가능성이 제일 크겠지.
“결혼은 언제 할 거니?”
“아직 생각 안 하고 있는데. 형도 있잖아.”
“네 형은 몇 년 내엔 어림도 없어 보여. 너도 그렇게 예쁜 처자가 언제까지 널 바라봐줄 것 같아. 며칠 전에는 에브리아가 네가 다른 여자 하고 만 시간 보낸다고 불안해하더라.”
“그냥 일 때문에 만나는 사람들이야.”
“아무튼,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말을 하긴 했는데, 그 애도 그렇게 있지는 않다는 거 알고 있으라고.”
“알겠어요.”
***
다음 날, 나는 아침 일찍 스튜디오로 향했다. 얼마 전부터 계속 이어온 작업이 있기 때문이었다.
“너무 전문 모델처럼 보이려고 할 필요는 없어요.”
세 달 전부터 꾸준히 이어오고 있는 신인 모델 프로젝트다. 내가 가장 자신있는 부분이 인물 쪽이라 그걸 집은 것이다. 적어도 1년 정도 시간을 두고 프로로 변해가는 모델의 변화를 찍을 예정이다.
“세정 언니가 프로필 사진 너무 잘 찍으신다고 하더라고요.”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이네요, 프로필 사진 찍어주는 대신에 제 개인 사진 작업에 도움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녀는 내가 내어준 서류를 살폈다. 신인 모델은 만족할만한 프로필 사진을 건지고, 난 내 프로젝트의 피사체를 얻고. 이런 게 공생이 아닌가 싶다.
“1년 뒤라면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모델로서 활동하고 있을 때만 촬영에 응해주시면 돼요.”
살다보면 중도에 포기하는 자는 있기 마련이니까. 그런 이들까지 끼어들게 하고 싶지는 않다. 저번에 어떤 사진작가님이 그런 모습을 담기 위해 활동하시는 걸 보고는, 그건 하지 말아야겠지 싶었다.
“음, 그렇다면 좋아요. 준비하면 되나요?”
“네, 가져오신 의상으로 갈아입으시고 준비하신 소품 있으면 이리 주세요.”
난 촬영 준비를 하면서 그녀의 얼굴을 자세하게 바라봤다. 뭔가 빤히 바라보면 대부분 부끄러워하며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에 요령이 필요하다. 소극적으로는 카메라의 렌즈를 통해서 얼굴을 보면 되고, 적극적으로는 촬영 전에 가볍게 잡담을 나누면 된다.
“밖에 춥죠. 커피나 홍차, 몸무게에 자신이 있으시면 핫초쿄도 준비되어 있습니다.”
“저 홍차로 주세요.”
“일단 프로필 사진부터 보여 드릴게요.”
난 여러 포즈로 찍은 사진을 그녀에게 보여주며 입을 열었다. 준비가 철저한 친구들은 촬영 전에 미리 체크를 해놓지만, 대부분 나만 믿고 오는 경우가 많다. 이 사진을 처음 보는 것 같은 이 친구는 후자고 말이다.
“시간 꽉 채워서 여러 가지 찍어 드릴 테니까 이 중에서 괜찮겠다 싶은 거 도전해보세요.”
“그래도 되나요?”
보통 사진을 찍다가 늘기 마련이니까 말이다.
스튜디오의 규모 탓에 의상이나 헤어, 메이크업, 소품은 각자가 준비해오기로 했다. 덕분에 난 그녀들이 어떤 모습으로 찍히기를 바라는지 예상할 수 있다. 이 친구는 순수하면서 스타일 좋게 보이기를 바라고 있겠지.
“입가에 그 점 말인데요.”
“네? 이상한가요?”
“아니요, 오히려 역으로 그 점을 좀 살리는 편도 나을 것 같아요.”
그게 더 차별화되고 말이지. 요즘은 어디선가 찍어낸 듯한 모델이 많다고 현장에서 듣는 경우도 많다. 그런 모델들은 결국에는 도태되기 마련이고, 난 내가 찍는 예비 모델들이 이 세계에서 제대로 자리를 잡기를 바라는 사람이다.
“다른 건 어느 정도 되는데, 감정선을 조금 살려본다고 생각해요.”
이 세계에서 감정 없는 모델이라는 소리는 모델로서 매력이 없다는 소리와 같다. 아직 초보라는 것을 고려해도 어떤 포즈에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 없어 보였다.
“시선을 이쪽으로 빼요. 이게 뭐냐는 표정보다는 차라리 화를 낸다고 생각해요.”
신인 모델을 내 쪽으로 보내주시는 선시연 원장님은 모델을 단점을 너무 덮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사진과 실제 촬영과의 차이가 너무 커서 좌절하는 친구들이 생겼다면서 말이다.
“입술을 조금 내밀어 보실래요? 하하, 유혹하는 표정 지으라는 의도는 아니었어요. 그냥 가볍게 삐죽 내민다는 느낌으로··, 좋아요.”
이 친구는 입술 위의 점 때문에 섹시한 이미지를 씌울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단점을 가리지 못한다면 최대한 장점을 부각시키게 찍는 게 요즘의 내 작업이다.
촬영을 대략 마치고 난 모델 분과 함께 결과물을 살펴봤다. 그녀는 오묘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뭔가 지금까지의 이미지와는··.”
“다르죠? 어때요?”
“좋은 것 같아요. 음, 근데 제가 아닌 것 같아요. 또 이렇게 찍을 수 있을지도 걱정이 되네요.”
“이런 식으로 자기 이미지를 찾아가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사진은 괜찮은 거죠? 다른 이미지 생각해둔거 있나요?”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오늘의 촬영 사진을 계기로 모델로서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지.
내 개인 촬영은 그리 오랜 시간은 걸리지 않았다. 기존 모델처럼 완벽한 모습을 바란다기 보다는 초보 모델의 어설픈 면을 잡아내는 것이 목표니까 말이다.
“이걸로 괜찮아요?”
그녀는 배경을 보고는 어리둥절해하며 내게 물었다. 그도그럴 수밖에 없는 게 벽에 하얀 종이를 붙인 단순한 배경이었기 때문이었다.
“전 그게 딱 좋아요.”
난 패션 사진을 찍는 게 아니라 초보 모델의 얼굴을 잡아내고 싶은 거다. 배경을 걱정할 때는 피사체 혼자의 힘으로 서 있을 수 없는 상황이거나, 오로지 피사체로만 집중되는 사람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울 때다.
“멍한 표정보다는 뭐랄까, 그냥 가볍게 웃는다고 생각해줘요. 지금 찍는 이 사진이 탑모델이 됐을 때 얼마나 귀여워 보일까 하는 생각을 하면 좋을 것 같아요. 아, 지금 표정 좋다.”
“작가님, 너무 예시가 너무 자세한 거 아니에요?”
이 친구는 지금 내게 있어서 이야깃거리가 충분한 피사체다. 배경이 단순할수록 가장 확실하게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겠지. 오롯이 홀로 서 있는 피사체의 본질에 대한 탐구와 표현에 집중하게 된다고나 할까.
“좋은 사진 건졌어요. 오늘 수고하셨습니다.”
***
난 스튜디오를 정리하고 잡지사로 향했다. 내가 찍은 사진 중 어떤 것이 실릴지에 대해서 편집장님과 의견을 나누기 위해서였다. 현재 여러곳에서 같이 일을 하자고 연락이 오고 있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하고만 일을 하는 중이다.
“오셨어요.”
조금 늦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마감일을 맞추기 위해서 잡지사는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모두 피곤함에 찌든 채, 열심히 손을 놀리는 모습이 필사적이었다.
“이 사진은 좀 아쉽다.”
구희양 씨는 한 사진을 가리키며 말했다.
회의실에서 에디터 한 분과 편집장, 그리고 나는 얼마 전 찍은 사진을 늘어놓고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건 저도 아쉽네요. 현장에서 효정 씨를 제대로 못 잡아냈어요.”
최근에 찍은 사진은 사진을 주의깊게 보면 항상 아쉬운 점이 뒤따른다. 이렇게 시간을 두고 내가 찍은 사진을 보면 객관적인 눈으로 볼 수 있게 된다. 난 사진을 다시 보고는 입을 열었다.
“효정 씨는 잘해줬는데··.”
효정 씨가 손가락 끝까지 신경을 쓴 B컷을 보고는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난 이 장면을 제대로 찍지 못했고, 결국엔 모델의 매력이 덜 살아있는 다른 사진이 더 잘 나왔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다른 사진 모두 괜찮아요. 최근에 효정 씨 이 정도로 찍은 포토그래퍼는 아예 없었거든요.”
“맞아요, 효정 씨도 결과물 보고 매우 만족해 했어요.”
편집장 님이 날 위로하듯 말하고, 에디터가 덧붙였다.
만능 언터테이먼트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신효정 씨는 모델로서는 단점이 많은 사람이었다. 키도 작고 얼굴선이 가늘어서 찍기가 몹시 까다로웠다. 대신에 혼자만이 줄 수 있는 특별한 분위기가 있어서 그것을 살리기 위해 노력했다.
“뭐 길승우 작가님이 있어서 사진을 꺼리던 여러 스타가 하나둘씩 문을 두드리고 있어요. 몇몇 사람들에게는 어떤 인물로 살리는 마법사로 소문이 날 만큼 평판도 좋고요. 이번 효정 씨만 해도 화보 촬영은 거의 하지 않던 분이셨는데 길승우 씨 사진 보고 먼저 연락을 하셨죠.”
그 말에 난 쓴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점점 부담을 커지는데 실력은 늘지 않아서 큰일이네요.”
“무슨 소리를 하세요. 사진이 점점 좋아지는 게 보이는데. 우리 잡지를 연예인 화보 잡지쯤으로 취급했던 관계자들이 지금은 얼마나 긴장하고 있는지 아세요? 한동안 들어오지 않았던 명품 회사에서도 연락이 오고 있어요. 다 길승우 작가님 덕분이에요.”
에디터가 날 변호했지만, 엄밀히 말하면 난 패션사진을 제대로 찍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인물을 중심으로 찍어야 한다는 부담에서 벗어나 좀 더 과감하고 매력있는 사진을 찍고 싶은데 능력 부족으로 못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힘이 없어 보이는 걸 봤는지 편집장 님이 입을 열었다.
“길 작가님은 잘하고 계세요. 어차피 사진작가에게 패션사진은 패션이란 것을 나만의 방식으로 풀어내는 해석이니까요. 저희는 아주 만족하고 있습니다.”
나만의 방식으로 해석을 한다라··. 결국엔 내 수준이 올라갈수록 사진은 변할 수 있다는 얘기와 같았다. 만약 내 미적 감각을 키운다면 더 좋은 사진을 찍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뒤, 난 한 미술관에서 다음과 같은 문구가 내 앞에 나타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여러 요인으로 인해 미적 감각이 상승했습니다] [미적 감각의 상승으로 여러 분야의 능력치를 올릴 수 있습니다] [의 완성도가 75%로 올라갑니다]다시 새로운 세계가 내 앞에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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