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grapher Gil seung woo RAW novel - Chapter 178
177화 나아감
한 중년의 남자 배우가 책상에서 일어나 화면 쪽으로 터벅터벅 걸어오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여기 사라져가는 한 문화가 있습니다. 찰나의 순간을 영원으로 남기고 싶은 인간의 욕망이 만들어낸 것. 바로 사진입니다]그리고 사진의 발명 과정을 간단하게 되짚어 준다. 그리고 유명한 작가들의 사진이 하나씩 지나간다. 사진계의 거장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전설적인 보도 사진의 대가 로버트 카파, 인물 사진의 대명사 유서프 카쉬.
[한 장의 사진은 세상을 바꾸기도 하며]AP통신에서 찍은 베트남전의 울부짖는 소녀가 나왔다. 이 사진으로 반전 여론이 고조됐다.
[한 장의 사진은 한 인물을 평생을 담아내기도 하고]아서 사스가 찍은, 현재는 ‘아인슈타인의 메롱’이라고 불리는 사진이 나온다.
[한 장의 사진은 인간의 욕망을 부추이기도 합니다]패션 잡지의 사진이 나왔다.
[사진이 가진 힘은 점차 평가절하되고 있지만 영상이 주가 되어가는 지금도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곳처럼 말이죠.]그리고 나오는 제이필터의 건물.
“와씨 나 무슨 사진 다큐 보는 줄 알았네. 처음엔 잘못 틀었나 생각이 들었어. 무슨 소속사 소개를 이따위로 해줘. 누구 생각이야 저거.”
김훈철은 제이필터 뮤직 대표진이 모인 곳에서 TV를 보다가 투덜거렸다. 그리고 곧 자신의 실수를 알아채고 고개를 돌리니 아니나 다를까 불쾌한 표정으로 그를 쏘아보는 유수민 대표와 얼굴이 마주치고 말았다.
“김훈철이! 내가 저렇게 해달라고 했다. 사진하고 우리 소속사하고 얼마나 접점이 많아. 그쪽 PD하고 이거 가지고 얼마나 싸웠던 줄 알아?”
김훈철은 급하게 사과를 하고는 조용하게 옆에 있던 마현수를 향해 입을 열었다.
“저런 이상한 기획 어쩌다가 통과된 거야?”
“방송국 측에서 대표님이 하도 주장하니까 의외로 병맛일 것 같다면서 통과시켜줬습니다.”
“의도는 성공했네. 너무 성공했어.”
“그런데 공중파에서 소속사 소개를 위한 방송 시간을 편성해줬는데 이렇게 나가면 좀 곤란하지 않을까요?”
“대표님이 좋다는 데 어쩔거야.”
[지금은 아시아의 대표 아이돌이 된 러버걸스. 항상 꽃길만 걸었을 것 같은 그들도 아픔이 있었습니다. 아이돌이 만들어지고 3년. 그들은 해체 위기에 다다릅니다]다시 화면이 바뀌면서 마현수가 소파에 앉아 입을 열었다.
[그때는 해체가 기정사실이었죠. 당시 소속사 사정이 그리 좋지 않아 이번 활동이 실패하면 해체하기로 이미 내부에서는 얘기가 된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컴백 뒤 반응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이미 해체 후 방향까지 계획되고 있었고요.]그리고 나오는 러버걸스의 사진 한 장.
[하지만 이 한 장의 사진이 러버걸스의 앞날에 커다란 역할을 했죠. 당시 노래는 크게 치고 올라가지 못했지만, 인지도를 크게 상승시켜줬습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은 이 이미지로 러버걸스를 기억해주시고 말이죠. 그리고 1달 뒤에 더 큰 기적이 일어납니다]그리고 화면에 나오는 러버걸스의 뮤직비디오.
[이 당시에는 뮤직비디오를 찍을 예산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까 그 사진을 찍은 사진작가분이 우리 애들 화보를 찍어주셨어요. 사진이 너무 잘 나와서 어떻게 활용할까 하는 궁리를 하다가 아껴놓았던 곡에 사진을 이용해서 뮤직비디오를 만들어보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대박이 난거죠]김훈철이 옆에 있는 마현수를 향해 입을 열었다.
“아껴놓은 곡 아니지 않아? 그거 녹음했다가 별로라고 나중에 정규 앨범 낼 때나 끼워 넣자고 했던 곡이었잖아.”
“방송이니까 저렇게 말한 거야.”
다시 러버걸스의 모습이 화면에 나왔다. 1위를 하고, 콘서트 장에 모인 수많은 관객이 보였다.
[그 뒤 러버걸스는 순항을 계속합니다. 그 후 낸 정규 앨범은 그해 앨범 판매 순위 2위라는 기록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순조롭게 일본 진출에 성공하고 각종 광고와 행사에 걸그룹으로서 최우선 순위가 되어버리게 되죠.] [그리고 제이필터 뮤직의 최고의 스타 언루트. 아시아 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그들의 인기는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들의 인기 상승에 사진이 큰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요?]언루트의 멤버 가완이가 입을 열었다.
[두 번째 정규 앨범으로 제대로 자리를 잡을 수 있던 건 길승우 이사님 덕분이죠. 앨범 표지를 찍어주시면서 컨셉이며 타이틀 곡이며 다 정해주셨거든요. 그리고 그 뒤에 찍은 화보집 하나가 대단했죠]그들의 사진집이 나오며 나레이션이 이어졌다.
[이 화보집은 국내 역사상 가장 성공한 화보집이며 일본으로 수출되어 사진 분야 서적 1위까지 하게 됩니다. 또한 SNS로 이 이미지는 세계로 퍼져 다음 앨범이 전 세계적인 인기를 구가하는 데 큰 도움을 주게 되지요]언루트의 소개 화면이 끝나고 한 그룹의 앨범 표지가 화면에 나왔다. 그리고 늘솜과 예슬이 카메라를 향해 입을 열었다.
[길승우 이사님이 우리 앨범 사진을 찍어주셨어요. 전 사진은 모르지만 그 분이 찍어준 사진을 보고 절로 감탄이 나오더라고요. 덕분에 제이필터 뮤직 소속이 되고, 많은 사람이 우리 음악을 사랑해주시게 되고··. 정말 꿈만 같아요]그리고 이어지는 나레이션.
[그룹 은 전국민적인 인지도를 얻은 가수가 되었고 제이필터 뮤직은 손을 넓혀 인디 음악계의 인재들을 하나둘씩 영입하게 되고 이들 대부분은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그리고 새로 런칭한 그룹들도 좋은 성과를 내죠. 과연 이와 같은 성공의 비결은 무엇일까요?]유수민 대표가 굳은 얼굴로 화면에 나온다.
[사진이죠. 전 지금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사진의 힘이 우리 회사를 여기까지 끌어올렸다고 말이죠]중략.
그리고 이어지는 나레이션.
[러버걸스의 성공을 이끌었다고 평가받는 이는 당시에는 무명이었던 길승우. 그는 제이필터 뮤직에서 아름답고 창의적인 사진을 찍어내며 회사를 대표하는 인물로 자리를 잡습니다. 스타 포토그래퍼가 사라지고 있는 지금 이 시점에 대중들의 입에 가장 많이 오르내리고 있죠]화면 바뀜
[운이 좋았죠. 생각해보면 제가 지금 이런 자리에 나올만한 실력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보다 훌륭한 사진작가분들이 너무 많아요 굳이 성공한 비결이라면 시대를 잘 타고난 것 같아요. 제가 찍은 사진을 많은 사람이 좋아해 주셨기 때문이죠.]“기승전길승우 이사님이네. 왠지 그럴 것 같더라.”
“근데 뭐 그럴만하잖아요. 지금까지 행보를 보면 말입니다. 솔직히 이사님 아니었으면 러버걸스도 그렇고, 푸른투명도 성공하지 못했겠죠.”
계속 길승우의 인터뷰가 이어진다.
[아, 그런 질문 많이 받고 있어요. 왜 제 인물사진은 특별한지를 묻는 질문 말이에요. 하지만 제가 생각하기에는 모든 사진작가는 똑같은 인물에게서 다른 표정을 읽어낸다고 생각해요. 사진가의 성격이나 취향에 따라서 어떤 상황에서 어떤 모습을 읽고 싶어 하는가에 따라서 인물사진이 결정된다고 보거든요.]“지금까지 우리 소속사 최다 출연이시네. 대표님 인터뷰 시간 넘어가겠다.”
러버걸스의 효미가 나왔다.
[인생의 전환점이라면 역시 한 장의 사진이 아닌가 싶어요. 네? 아니요. 러버걸스 때 사진이 아니라 한 화보 촬영 때 찍힌 사진입니다. 이 사진인데요. 뭐랄까 이 사진을 보고 어떤 음악을 하고 싶은지 마음 속으로 느껴졌다고 할까요.]“효미가 솔로로 성공하는데 저 사진이 큰 도움이 됐다고 하네.”
마현수가 중얼거렸다.
다시 늘솜이 나와 입을 열었다.
[처음에는 사진에 음악을 담아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우리가 사진을 뒤쫓는 음악을 하고 있더라고요. 뭔가 길승우 이사님 사진은 어려운 예술 작품 같아요. 볼 때마다 뭔가가 느껴진단 말이에요.]“저 친구들도 두 번째 앨범에서 더 성공했지. 이사님 사진을 음악으로 만든다고 할 때 이게 될까 싶었는데 되더라고.”
김훈철이 말했다.
다시 나오는 유수민 대표.
[지금까지 제이필터 뮤직이 거둔 성공은 한 장의 사진으로부터 시작됐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그 동력을 잃었고 말이에요. 우리 성공을 이끌었던 길승우 작가님은 지금 결혼 후 세계를 여행 중입니다. 연락도 제대로 안 돼요! 부탁인데 이 방송을 통해서 말합니다. 만약에 어딘가에서 길승우 작가님을 보신 분은 꼭 연락해주세요. 많은 식구가 작가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뭐랄까 다 보고 나니까 소속사 소개라기보다는 길승우 작가님 찾는 방송이 되어버린 것 같네.”
“어서 빨리 오셔야지. 대표님 지금도 울컥하셔서 방으로 들어가시잖아.”
김훈철과 미현수가 쓴웃음을 지으며 얘기했다.
***
여행을 가기 전에 정만종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이 있다. 자연에 먹혀버리지 말라고, 어떤 상황에서도 나만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재해석해서 사진에 담아내라는 충고였다.
“일어났어요?”
핀란드의 작은 마을에서 난 에브리아의 인사를 받으며 일어났다. 아침 7시가 넘었지만, 밖은 아직도 어두웠다. 이놈의 동네는 겨울에 사진을 찍을 자연광이 너무나 귀하다. 난 적당히 씻고 아침밥을 먹으면서 앞에 앉은 에브리아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미안해.”
“뭐가요?”
“아니, 그냥 나 때문에 잘하던 방송도 그만두고 따라와야 했잖아.”
그녀는 잠이 확 깰 정도의 미소를 지으면서 입을 열었다.
“하지만 덕분에 최고의 사진가에게 수천 번을 찍힐 수 있게 되었잖아요. 당신이 찍어준 사진 너무 좋아요. 지금도 시간이 날 때마다 몇 번이고 보고 있는걸요.”
난 처음 한국을 떠나 새로운 나라에 도착했을 때 이질적인 풍경을 바라보며 이걸 어떻게 찍어낼지에 대한 고민의 컸다. 사진은 거짓말을 하지 못해서 처음 찍은 사진은 이방인이 찍어낸 흔적이 역력했다. 그리고 그 느낌이 없어지고 겨우 만족할만한 사진을 찍어내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했다.
새롭고도 감탄을 자아냈던 풍경들도 시간이 쌓이면 결국에는 우리집 뒷산처럼 친숙해져서 또 다른 사진을 찍어낼 수 있다는 게 이번 사진 여행의 가장 커다란 수확이라고 볼 수 있다.
“오늘 날씨가 어제보다 춥다니까 따뜻하게 입어야 해요.”
난 고개를 끄덕이며 수줍게 웃어줬다. 압도당할 만큼 아름다운 풍경에 인물을 집어넣는 훈련을 하고 있다. 자연 자체도 아름답지만, 아직 그 아름다움을 사진에 집어넣기에는 내공이 모자라기 때문이다. 생경한 풍경과 인물이 어우러지게 찍는 건 어렵지만 즐거운 작업이다.
“한국에 돌아가면 지금 찍고 있는 사진을 가지고 전시회를 해보고 싶어.”
“많은 사람이 보고 싶어 할 거예요.”
“아니, 뭐 그런 것보다 나를 아는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어. 지금 이게 내가 보고 있는 세상이라고 말이야.”
난 고개를 돌리고 문을 열었다. 어두컴컴한 가운데 불빛을 받은 하얀 눈길이 나를 반겼다.
“오늘도 잘 부탁한다, 친구.”
난 새로운 삶을 안겨준 카메라에게도 인사를 했다. 그리고 힘찬 발걸음으로 저 앞에 보이는 거대한 숲을 향해 나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