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grapher Gil seung woo RAW novel - Chapter 18
19화 촬영장에서··(3)
내가 슬비 씨를 처음 보았을 때, 그러니까 처음 슬비 씨의 말투를 들었을 때 두꺼운 가면을 쓰고 카메라 앞에 서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가졌다. 선생님의 사진은 그 가면은 진짜 얼굴처럼 포장해서 찍은 거고 내가 찍고 싶은 사진은 가면을 벗기고 본 모습을 찍고 싶다고나 할까? 가면 밑의 얼굴이 어떻게 나올지는 나도 모르겠다.
“자, 바다를 향해서 걸어가 주세요. 시선은 카메라를 향해서.”
일단 굴려보자. 사람은 본래 힘들면 본 모습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슬비 씨는 잠시 망설이다가 얼굴에 두꺼운 가면을 두른 채 나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바다로 향했다. 난 사진을 정신없이 찍으면서 뭔가를 기대했다. 아까부터 가끔씩 센 파도가 오고 있다. 슬비 씨가 나를 향해 시선을 두고 있을 때 다가오는 파도를 보지 못하면··
“슬비야 조심해!”
갑작스러운 파도에 슬비 씨가 뒤로 넘어졌다. 어느 정도는 예상했던 바다. 그래도, 넘어질 줄은 몰랐는데, 그냥 물에 좀 젖을 줄 알았지.
“씨이! 이게 뭐야! 다 젖었잖아!”
좋아, 생각보다 아주 좋다. 렌즈를 통해 슬비 씨의 모습을 본 나는 정신없이 셔터를 눌렀다.
“자, 그대로! 얼굴은 여길 향하고!”
뭔가에 씌운 듯 난 그녀를 향해 소리치 듯 말했다. 그 기세 탓인지 아이템 탓인지 슬비 씨는 주저앉은 상태로 날 바라봤다. 그래, 조금은 가면이 벗겨졌다.
“움직이지 말고! 손 그대로!”
[등급을 초과한 사진이 찍혀 보너스 포인트가 지급됩니다.]선생님에게 허풍쟁이로 인식되고 싶지는 않다. 뭔가 가능성이 있다는 것 정도는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게 이 억지 촬영의 기회를 만들어주신 일에 조금이나마 보답할 수 있는 길이니까.
“손을 머리에 살짝 올려요.”
[등급을 초과한 사진이 찍혀 보너스 포인트가 지급됩니다.]슬비 씨의 얼굴엔 웃음기가 사라졌다. 날 쏘아보는 모습이 묘하게 섹시하게 느껴졌다. 내 착각이고 만족일지도 모르지만 방금 전까지 해변을 뛰놀던 소녀 같은 모습은 온데 간데 사라진 것처럼 보인다.
“몸 방향은 그대로, 시선을 저를 향해 주시고, 천천히 일어나세요.”
[과 , 특성이 순간 융합되어 커다란 효과를 발휘했습니다.] [등급을 초과한 사진이 찍혀 보너스 포인트가 지급됩니다.]드디어 건졌다. 터질 줄 알았어. 쓸 만한 사진이 찍혔다는 문구에 조금은 안심이 됐다. 생각보다 괜찮은 모델인지, 아이템 덕분인지 슬비 씨는 흐트러짐 없이 내 말에 잘 따라와 주고 있었다.
“자, 이쪽을 향해 천천히 걸어오세요. 네! 네! 좋아요!”
계속해서 기분 좋은 문구가 뜬다. 근데 내가 있는 곳으로 너무 가까이 오고 있는데?
“저기, 거기서 그··”
“야! 너 뭐하는 짓이야! 오빠! 왜 보고만 있어! 수건! 수건 얼른 가지고 와!”
그 순간 최고조였던 집중력이 산산이 깨져버렸다. 아깝다, 좋은 사진을 더 찍을 수도 있었을 텐데. 내가 카메라를 내려놓자 매니저가 가져온 수건을 두른 슬비 씨가 몸을 툭 치고 지나갔다. 착하네, 좀 더 성격 있으면 싸대기라도 갈겼을 텐데.
“야야야! 너 무슨 짓 한 거야! 그런 돌발 상황이 오면 모델부터 챙겨야지 사진을 찍고 앉아있어!”
미선 선배가 후다닥 내게 다가오며 말했다. 난 머리를 긁적였다. 원래 의도했다고 사실대로 고백하면 매장당할 분위기다.
“좋은 표정이 나와서 그냥 정신없이 찍었어요.”
“너 이 바닥에서 찍히면 앞으로 너랑 작업하겠다고 할 유명인들 아무도 없을 지도 몰라. 어휴 애가 정말 뭘 모르네.”
미선 선배가 계속 나를 향해 쏘아댔다. 난 멋쩍게 웃으며 가만히 있는 수밖에는 없었다. 솔직히 이 상황에서 연예인 눈치 보느라 사진 못 찍으면 그게 더 손해라는 생각이 드는 내가 이상한 걸까?
“됐다. 사진 좀 가져와 봐.”
“에휴, 선생님도 그러는 거 아니에요. 사진이 아무리 중요해도 연예인들은 챙겨줘야 한다고요. 초보자한테 갑자기 촬영 현장을 맡겨도 되는”
난 강한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미선 선배의 잔소리를 피해 노트북으로 사진을 옮겼다. 그리고 내가 찍은 사진을 넘겨보던 선생님은 어느 순간 넘기는 행동을 관두고는 한참 동안 화면을 바라봤다.
“나왔구나. 이거지? 네가 말한 게.”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원한 사진은 아니었다. 사실 내가 뭘 원했는지도 모르겠다. 사진 속의 슬비 씨는 물에 흠뻑 젖은 채 얇고 야릇한 미소를 짓고는 정면을 보고 있었다. 손은 머리 위에 살짝 얹어져 있어 몸의 굴곡이 적나라하게 들어났는데 석양의 빛이 근사하게 음영을 만들어 준 덕분에 노골적이지 않아 보인 사진이었다.
“··이미지 변신 제대로 하겠네요.”
영효 선배가 말했다. 미선 선배도 경훈 선배로 노트북 주위에 모여들어 내가 찍은 사진을 지켜보고 있었다. 미선 선배 역시 어느 순간부터 말을 멈추고 사진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정만종 선생님 우리 얘기 좀 합시다. 다시 생각해보니까 이건 아닌 거 같아요. 촬영 현장을 사전에 말도 없이 초짜한테 넘기는 건 아니죠. 이 점에 대해서 우리 소속사는 강력하게 항의··”
슬비 씨에게 된통 당했는지 얼굴이 붉어진 매니저가 우리를 향해 다가오면서 얘기하다 선생님의 손짓에 말을 멈추고 다가왔다.
“이··이거 슬비 사진이에요? 방금 찍은 거죠?”
“좀 색다른 모습도 연출하고 싶었는데 이 녀석이 좋은 의견을 내줘서 기회를 줘봤네. 난 애초에 정해놓은 생각이 있어서 이런 사진은 찍지 못했을 거야.”
“괜찮네요. 음, 괜찮아요. 성인 이미지 변신한다고 벗는 거 보다 이런 사진 몇 장이면 되겠어요. 생각보다 훨씬 괜찮은 게 나왔어요.”
“첨언하자면 화보집에 쓸 이미지는 아니야. 화보 촬영 전에 다른 작가들이 찍은 사진들 봤는데 거기다가 이 사진 집어넣으면 밸런스가 완전히 깨질 거네.”
“그렇게 되겠네요. 다른 사진보다가 이 사진보면 이 사진 밖에 기억에 안 남겠어요. 아, 다른 사진이 형편없다는 건 아닙니다. 이 사진이 너무 이질적이라서 그럴 거라는 소리입니다.”
“나도 아네.”
“나중에 이런 이미지로도 촬영 가능합니까?”
“해답지가 눈앞에 있는데 재현하지 못하면 그게 이상하지.”
선생님의 말에 매니저는 뭔가를 생각났는지 수첩을 꺼내 뭔가를 열심히 적기 시작했다. 저어 멀리 슬비 씨가 이곳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항의하라고 보낸 매니저가 조용히 뭔가를 적고 있으니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 챈 것 같다.
“오빠! 뭐하고 있어! 찜찜하단 말이야. 얼른 샤워하고 싶어!”
“슬비야, 일로 와봐.”
“뭔데, 무슨 일인데. 몸 끈적거려서 미치겠다는데 왜 안 와.”
“이 사진 좀 봐.”
슬비 씨는 얼굴에 불만이 가득한 채 이곳을 향해 걸어왔다. 솔직히 지금 모습도 몇 장 찍고 싶은데 이 상황에서 그랬다가는 큰일 나겠지. 슬비 씨도 사진을 보자마자 시선을 고정한 채 말없이 가만히 서있다. 그러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게 나야?”
“방금 그 난리 때 찍은 사진이야. 어때?”
“내가·· 아닌 것 같아. 맘에 안 들어. 하지만··”
슬비 씨는 조금 머뭇거리며 사진을 다시 바라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하지만 계속 보고 싶은 사진이기는 해.”
***
서울로 돌아가는 스튜디오의 차 안에는 세 명만이 자리를 하고 있었다. 운전을 하는 한경훈과 뒷좌석에 앉은 정미선과 배영효. 그 셋뿐이었다.
“무슨 얘기를 하고 있을까? 너한테 스튜디오를 물려줄 테니 준비해라. 뭐 이런 얘기?”
미선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녀는 정만종 선생님이 길승우에게 술이나 한 잔 하자며 내일 가자는 말을 듣고는 좌절 중이었다.
“설마.”
배영효는 미선의 말에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선생님 표정 못 봤어요? 무슨 연인을 보는 표정 같았다고. 대체 걔는 뭐야? 걔하고 나하고 어떤 차이가 있기에 경험도 없는 애가 그런 사진을 찍어 댈 수 있지?”
“재능··이란 건가?”
“태어나서 그런 애 처음 봐요. 사진에서 재능도 중요하지만 기술이나 경험은 무시 못 한다고 생각했는데 완전히 틀렸어요. 걔 나이가 몇 인줄이나 알아요? 24살이에요. 24살. 대체 어떤 괴물이 되려는 거야.”
“성급하게 판단하지 마, 그냥 얻어걸린 걸 수도 있어.”
“처음부터 작정하고 찍은 거 알잖아요. 차가운 시선으로 굴리면 좋은 사진이 나올 거라는 말, 저 사실 비웃었거든요. 이렇게 말해주고 싶었어요. 얘야, 사진에 사진가의 마음이 투영되려면 한참은 노력해야 한단다. 근데 이건 뭐.”
“오늘 내가 걔 사진을 보고 무슨 생각이 드는 줄 알아? 쉬워.”
“네?”
“사진이 쉽다고. 사진만 보고 매니저 건 슬비 씨건 잠깐 보고 사진이 좋다는 걸 인정했잖아. 작년에 내가 사진전에 나갔을 때 심사위원들한테 왜 이 사진이 좋은 지에 대해서 설명한 적이 있었어. 그랬던 내가 부끄러워지더라고. 걔가 전에 찍은 사진 기억나지?”
“기억나죠.”
“노골적인데 직설적이야. 근데 그게 먹혀.”
“더 웃긴 건 뭔 줄 알아요? 몇몇 사진을 빼면 결과물은 형편없어요. 얼마나 형편없냐면 동네 사진사를 데리고 와도 이거보다는 잘 찍겠다는 느낌? 근데 그 형편없는 사진 가운데 몇 개가 특별해요. 특별해도 너어무 특별해.”
“이건 내 생각인데 걔 선생님 말하는 거 하고 조금 비슷한 거 있지 않아?”
“맞아요. 가끔씩 선생님이 뜬구름 잡는 얘기하잖아요. 그런 얘기를 처음부터 꺼내더라고요.”
“천재는 천재끼리 통하는 언어가 있는 걸까?”
“무슨 외계인들을 보는 기분이에요. 승우는 좋겠네. 옆에 더 굉장한 외계인이 있어서. 복도 많아.”
정미선은 챙겨왔던 캔맥주를 뜯어 입안으로 흘려 넣었다. 유난히 맥주 맛이 쓰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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