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grapher Gil seung woo RAW novel - Chapter 21
22화 예상치 못한 통보
11월 말. 청담동의 한 술집에서 정만종은 조용히 혼자 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이곳은 그의 단골 술집으로 사람이 많지 않아 자주 찾는 곳이었다. 입구가 열리며 종소리가 났고 벙거지 모자를 쓴 남자 한 명이 술집으로 들어왔다. 그는 두리번거리다 정만종을 발견하고는 탁자로 다가와 앉았다.
“무슨 일이야? 나를 다 찾고.”
“형세, 와줘서 고맙네. 부탁할 게 좀 있어서.”
“허허, 처음부터 본론이냐. 우리 얼굴 본지 일 년도 넘었어. 근황부터 물어야 하는 거 아니었나?”
“근황이야 뭐. 무슨 일 있으면 연락을 했거나 연락이 왔겠지.”
“일단 부탁이라니 들어나 보지. 이쪽 바닥에서 제일 유명한 작가가 뭘 부탁하려고 그러는지.”
“요즘 재미있는 애가 밑으로 들어왔네.”
“천하의 정만종이가 재미있다고 하니 나도 관심이 가네. 어떤 녀석인가?”
“나하고 좀 비슷하다고 할까? 예전의 나하고. 화가가 되겠다는 꿈 던져버리고 무작정 카메라를 잡은 나. 기억하는 가?”
“그럼, 기억나지. 뜬금없이 날 찾아와서는 카메라 좀 가르쳐달라고 한 버릇없는 후배·· 기억나지.”
“그 녀석에 대해서 더 자세하게 말하면 번뜩이는 뭔가는 있는데 애가 자기 의지로 끄집어 내지는 못하고 있네. 근데 또 그런 거 치고는 눈여겨볼만한 사진이 자주 나온단 말이네.”
“자네가 보기에 눈여겨볼만한 사진이 나와 줄 정도면 재능은 꽤나 있는 거 같군.”
“문제는 다른 사진은 허허, 이상해. 왜 A컷 말고 B컷이나 C컷도 있지 않은가. 차이가 너무 심해. 너무 이상하니까 오히려 내가 더 헷갈리고 있다네. 사진의 퀄리티가 제멋대로야.”
“사진에 대해서 기본기가 없으면 그렇게 되기 쉽지 않은가. 아니면 자신감이 떨어진다거나.”
“내 생각으로는 둘 다 같네. 그리고 뭘 찍어야할지도 모르겠나봐. 물어보긴 했는데 대답을 못하더군. 난 사실 꿈이 없는 사람들을 무시하지는 않는다네. 그건 그것대로 만족스러운 삶을 살수 있단 말이지. 근데 이쪽은 틀리다는 거 형세 자네도 잘 알지 않는 가.”
“예술 계통에서 목적의식이 없다는 건 자살 행위지. 근데 뭐하던 녀석인가? 다른 계통에 있다가 뒤늦게 카메라를 잡았다면 그럴 수도 있지.”
“사진학과를 나와서 한 달 정도 언론사 관련 일을 했었다고 하네. 그 녀석이 일한 언론사 후배가 내가 아는 놈인데 그 후배가 그곳에 있기엔 아깝다고 내게 보냈네. 처음부터 안목이 좋기에 눈여겨보고 있다가 시험 삼아 일을 한 번 시켜봤는데 제법 좋은 결과물을 뽑아내더라고. 문제는 그 다음부터야. 앞으로 뭘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네. 영효나 미선이 같은 경우는 나름대로 뭘 찍고 싶은지에 대한 꿈도 있고 내가 하는 작업을 보면서 성장하는 게 느껴지는데 이 녀석은 모르겠어. 좀 컸다 싶으면 제자리고, 이래가지고 되겠나 싶으면 또 좋은 결과물이 튀어나오고. 그래서 지금은 완전히 손을 놓고 있는 상황까지 오게 됐네.”
“흐음, 내게 부탁할게 뭔가?”
“제대로 이론 좀 가르쳐 줄 수 있겠나? 알다시피 난 완전 바닥에서 나만이 볼 수 있는 길을 찾아 위로 올라선 거라 가르칠 수가 없네. 지금도 기술 쪽은 밑에 애들한테 뒤질 걸.”
“그렇지, 자넨 자네가 지닌 특별한 시선을 토대로 사진을 완성하니까. 그런데 사진학과를 나왔다고 했지. 어디 나왔는가?”
“그건 왜?”
“자네 제자가 과거 어떤 학생이었는지 알아보려고 그러네. 내가 그래도 이쪽 교수진 사람들은 다 알고 지내거든.”
“처음 들어보는 학교였네. 제광대.”
“뭐? 그런 곳도 있던가? 잠깐만 있어보게.”
김형세는 어디에다가 전화를 하고 제광대라고 하는 곳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했다. 두어 명과 통화를 마치고 그는 정만종을 향해 말했다.
“대충 알아봤는데 거기 나왔으면 제대로 된 사진 찍기 힘들 것 같군. 수도권도 아니고 지방에 있는 전문대인 거 같은데 생긴 지도 얼마 되지 않은 거 같네. 사진학과 교수들도 내가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고. 프로필에 이거 뭐 무슨 사진을 찍었다고 나와 있는데 유명한 작품들은 아닌 거 같네만.”
“문제가 되나?”
“문제가 되지. 그런 학교들은 대부분 이름만 걸고 등록금 장사 하는 곳이 많아. 내가 생각하기에는 제대로 된 교육을 못 받았을 것 같군 그래. 음, 일단 나한테 보내보게.”
“괜찮겠나?”
“일단 청강 시키는 방향으로 가지. 지금 맡고 있는 수업 듣게 하면 될 거 같네. 그럼 그쪽 일은?”
“뭐 하고 싶으면 하는 거고, 싫으면 말겠지. 어차피 다음 달부터는 일주일에 이틀 쉬기로 결정했어. 시간은 있겠지.”
“아무튼 새로운 모습이네, 정만종이가 스승 같은 행동도 다 하고. 그건 그렇고 왜 이틀이나 쉬기로 하지? 자네 스튜디오 꽤 잘나가고 있지 않은가?”
“힘에 부쳐, 게다가 요즘 슬럼프라네. 체력은 점점 부족해지고 그 사진이 그 사진 같고. 사진으로 큰 돈 만질 수 있어서 좋기는 한데 계속하긴 힘들 것 같네. 아마도 스튜디오를 운영할 수 있는 날도 길어야 2~3년 정도겠지.”
“사진 놓을 건 아니지?”
“그럼, 이게 내 삶이라네. 스튜디오 관두면 찍고 싶은 사진 찍으러 좀 돌아다닐 생각이네.”
“아, 이제 곧 12월인데 내년부터 보낼까?”
“아냐아냐, 다음 주부터 보내게. 일단 테스트 좀 해서 수준 좀 알아보고, 계절학기도 있으니까 문제는 없을 거 같군.”
***
이곳에 온 지 한 달이 지났고, 난 점점 스튜디오의 막내로써 자리를 잡고 있다. 아침에 청소를 하고 장비를 세팅하고 외부에서 스텝들이 오면 안내도 열심히 하고 있다. 슬비 씨 촬영 이후 선생님이 촬영할 때는 보조도 못하고 있지만 이건 시간이 지나면 될 거라고 생각하며 열심히 일을 하고 있다. 슬비 씨 촬영 이후 나와 거리를 두던 미선 선배와 경훈 선배도 다행히 이제는 편하게 일을 시키고 있다.
내 사진 실력은 모르겠다. 진짜, 모르겠다. 특성이 터지면 좋은 사진이 나오긴 하는데 터질 때까지 찍어야 한다는 것이 문제다. 미선 선배가 사진을 찍을 때 가끔 내가 보조를 하는데 그럴 때마다 미선 선배는 ‘넌 정말 모르겠다’는 말을 자주 남긴다. 일단 패턴을 분석해 보면 내 사진은 인물일 때, 그리고 여자일 때 뽀록이 잘 터지는 편이다. 하지만 기껏해야 다섯 장 안팎이라 A컷에 끼워줄망정 내 주도로 뭔가를 진행하기엔 아직 멀었다는 것이 미선 선배의 평이었다.
“커피 좀 드실래요?”
난 촬영장에서 아침부터 바쁘게 촬영준비를 하느라 파김치가 되어버린 패션어시스턴트에게 커피를 건넸다. 자그마한 체구의 여자 분은 내게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는 의자에 몸을 맡기 듯 앉았다.
“혼자시던데 힘들겠어요.”
“어제부터 대행사 돌고 제품 픽업하고 우리 쪽 사람들 식사 주문하고 탈의 돕고 촬영 나갈 때마다 전쟁 치르는 거 같아요. 아, 그래도 지금은 나은 편이에요. 적어도 야외 촬영은 안하잖아요. 그냥 이 정도만 바빠도 살만할 것 같아요. 그쪽도 어시에요?”
“네.”
“힘내요, 우리.”
그녀는 나를 향해 주먹을 불끈 쥐고 말했다. 나도 힘없이 웃으며 같은 제스처를 취했다. 아침부터 촬영이라 일찍 나와 준비하느라 좀 피곤했다. 선생님과 미선 선배는 에디터와 함께 의견을 나누고 있었다.
“선생님 쫌만 더 밝게. 저거 버클 조금만 더 반짝 거리게 찍어주세요.”
“응, 알겠어.”
가방을 가진 모델을 향해 선생님이 셔터를 눌렀다. 에디터는 경훈 선배가 관리하고 있는 모니터를 보고 고개를 끄덕이고는 모델을 향해 말했다.
“혜선 씨, 드레스랑 구두, 가방 모두 좀 돋보이게 포즈 좀 취해줘요.”
난 그 말을 듣고 그런 포즈가 어떤 포즈인지 생각했다. 난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는 상황, 하지만 모델은 조금 생각하더니 가방을 낀 채 의자에 앉아 왼발을 오른 무릎에 올렸다. 난 감탄을 하며 촬영을 지켜봤다. 촬영이 끝나고 선생님은 멀리 있는 내게 손짓했다. 내가 도착하자 선생님은 미선 선배와 경훈 선배, 나를 향해 물었다.
“다음으로 화려한 프린트가 된 화이트 드레스야. 어떻게 보여야 할까?”
“자연스럽게 옷이 구겨져서 문양이 잘 드러나야겠죠.”
“치마 문양이 포인트니까 모델이 다리를 벌리면 좋겠는데요.”
“…….”
말할 게 없다. 내가 머뭇거리자 선생님은 대답을 기다리는 대신 입을 열었다.
“난 이 사진을 찍을 때 혜선 씨가 아웃사이더라고 가정을 하고 찍었어. 누구나 좋다고 여기는 것을 못마땅해 하는 자신만의 것을 찾는 그런 사람.”
선생님은 항상 이런 식이었다. 촬영을 하기 전 우리 모두의 의견을 듣고 결과물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촬영을 했는지 알려준다. 덕분에 선생님이 어떤 생각을 지니면서 사진을 찍는지에 대한 데이터는 꽤 많이 쌓였다. 문제는 내가 그런 감성을 구현할 방법이 없다는 거다. 훗날 능력치가 오른다면 모르겠지만 지금으로서는 아이템과 특성의 운빨에 기대서 몇 장건지는 것이 최선이라 답답하기만 하다.
촬영은 끝났고 난 경훈 선배와 스튜디오 정리를 도왔다. 정리를 마칠 때 쯤 선생님이 개인방에서 나와 내게 손짓했다. 뭐지? 간만의 독대라 혹시 내게 뭔가 맡기는 게 아닐까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선생님은 내 얼굴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많이 생각해봤는데, 지금 나로서는 널 가르치는데 한계가 있다. 그래서 말인데··”
아, 이건 해고 통보인가. 그래, 사진 몇 장 잘 나온다고 해서 버틸만한 세계가 아닌 거야. 알고는 있었지만 씁쓸하다. 여길 나가서라도 열심히 사진을 찍어서 성장한 다음 다시 찾아와야지.
“네·· 무슨 말인 줄 알겠습니다. 그동안.”
“너 학교 가라.”
“네?”
“내일부터 일주일에 이틀 정도. 아, 물론 최대한 편의는 봐줄 생각이다.”
“네?!”
24살의 겨울. 난 일터에서 다시 학교로 들어가라는 통보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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