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grapher Gil seung woo RAW novel - Chapter 38
40화 물아일체
초반부터 내가 나오지 않자 거실의 뜨거웠던 열기는 좀 식어있는 상태다. 아버지는 꾸벅꾸벅 졸고 계시고 형은 스마트폰을 뒤적거리며 하품을 하고 있다. 오직 어머니만이 TV에 집중하며 언제 아들이 나올지 기대하고 있는 중이다.
“아들, 저 사진 언제 찍은 거야?”
어머니는 에 쓰인 사진을 보며 물으셨다.
“10월쯤 찍었던 거 같아.”
“아니 사진을 저렇게 잘 찍으면서 왜 옛날에 가족사진은 그 모양으로 찍었을까.”
“그때는 실력이 부족했던 거지.”
드디어 러버걸스 가을빛의 사진이 지나가자 MC가 입을 열었다.
“자, 그럼 이 사진을 찍은 화제의 사진작가 길승우 씨를 소개합니다.”
“승호야, 일어나! 여보, 당신도. 승우 나왔어.”
어머니의 외침에 부자는 정신을 차리고 TV에 집중했다. 화면 속의 나는 자기 소개를 마치고 어떻게 러버걸스의 사진을 찍게 되었는지 말을 하고 있다.
“쟤네 너 쳐다보는 거 봐라.”
“야, 승우 출세했네.”
아버지는 흐뭇한 모습으로 바라보고 계셨다. 녹화할 때는 몰랐는데 러버걸스 멤버들이 내가 얘기할 때 모두 날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훈훈한 분위기는 주옥선 씨의 사진이 공개되자 깨졌다.
가족들은 대체 무슨 짓을 어떻게 한 거냐고 놀란 눈빛으로 묻고 있었다. 난 어깨를 으쓱거리고 TV를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좀 있으면 다 나와요.”
하지만 현장 영상 화면이 나올 때도 가족들의 눈은 나를 향했다. 대체 무슨 짓을 어떻게 한 거냐고.
“좀 있으면 어떻게 사진을 찍었는지 설명하는 장면이 나올 거예요.”
화면 속의 내가 어떤 과정을 통해 사진을 찍었는지 말하자 가족들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화면에 집중했다. 마침내 화면은 최일한 MC가 나를 마법사라 말하며 마무리가 됐다. 가족들이 날 보는 눈빛이 달라진다. 마치 내가 이런 애인 줄 몰랐다는 듯.
– 러버걸스는 저 사진사한테 각 잡고 절해야겠네. 소속사에서 용을 써도 안 되던 애들을 혼자서 멱살 잡고 캐리했어.
– 근데 진짜 저 정도면 사진사가 아니라 마법사 아니냐?
– 왜 SNS 프로필 사진을 왜 걸러야 하는지 오늘 똑똑히 배웁니다.
– 와 근데 사진 너무 잘 나왔다. 아무리 분장을 했다지만 영상 보니까 본판 모습 남아있던데 사진에선 아예 찾아볼 수가 없어.
– 나 원본이라고 말할 때 지렸다. 당연히 보정 작업 들어갔을 줄 알았는데.
– 지금 온 가족이 난리 났어. 처음 사진 나왔을 때 누나가 비명 지르고 장난도 아님
– 나도 저런 사진 찍고 싶다. 하루만 투자하면 저런 사진 얻을 수 있는 거잖아. 돈이 엄청 들겠지마는
– 짙은 화장에 가발 쓰고 조명 비춰서 유명 사진작가 섭외해서 얼굴하고 몸 각도만 잘 조절하면 건질 수 있는 흔하디흔한 사진이네·· 나도 찍고 싶다.
그 날 토크쇼 의 시청률은 8.3%. 8개월 만에 동시간대 1위를 차지했다고 한다. 선 공개 된 주옥선 씨의 사진이 몰고 온 시청자들 덕분이라는 평가가 많았다. 실검 차트에서는 주옥선 씨 관련 검색어가 4개나 자리 잡고 있었고 10위 끝자락엔 러버걸스 사진사라고, 날 지칭하는 단어도 올라갔다.
다음날 스케줄 관련으로 날 찾은 마실장님은 흥분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입을 열었다.
“어제 방송으로 정말 우리 애들 인지도가 급상승했습니다. 길승우 작가님이 판을 잘 깔아주셔서 늘어난 시청자들이 2부에 나온 우리 애들의 매력을 볼 수 있었어요. 지금 행사가 미친 듯이 들어오고 공중파 예능도 물밑 듯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길승우 작가님께도 좋은 소식이 많습니다.”
“저, 방송 출연은 얘기라면 좀··”
“아, 방송 쪽도 섭외가 들어오긴 합니다만 길승우 작가님 개인에게 일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연예인 쪽 화보 의뢰도 있고, 패션업체 쪽에서도 접촉이 있습니다.”
“아직 저 광고사진 쪽은 젬병이라 경험을 좀 더 쌓아야 할 것 같고, 화보 쪽이면 좀 해보고 싶습니다.”
“일단 화보 쪽은 저희 소속사부터 좀·· 의뢰비는 최고로 산정해서 드리겠습니다. 대표님이 계약만료까지 언루트나 러버걸스의 모든 일감을 맡아주시면 좋겠다고 하십니다.”
“저야 좋죠. 작업했던 친구들이니 편하기도 하고요.”
“아이고 고맙습니다. 그러고 보니 오늘 방송 있으시죠?”
“네·· 디자이너분 발목 잡지 않게 열심히 해보려고요.”
사실 걱정은 된다. 패션사진을 찍어야 하는데 혼자서 찍어본 경험이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전문가들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신예 사진사들이 모여 신인 디자이너의 사진을 찍는 거니 어느 정도는 찍을 수 있다고 생각됐다.
그리고 그 기대는 몇 시간 만에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
“왜, 내 말을 안 듣는 거죠?”
“잠깐만요, 제가 여기 찍사로 온 건 아닐 텐데요.”
“내 옷은 내가 잘 알아요. 어떻게 모델이 입으면 멋지게 보이는지 알고 있다고요.”
“물론 그렇겠죠. 근데 제출하는 건 옷이 아니라 사진이란 말이에요. 3차원을 2차원에 입히는 작업이란 말입니다. 사진은 달라요.”
제작진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이 보인다. 이런 갈등 요소는 시청률에 지대한 공헌을 하는 건쯤은 알고 있다. 사실 난 눈에 띄지 않으려고 했는데 앞에 있는 여자분이 자꾸 내 성질을 건드리고 있다.
“옷에 대해서 뭘 알아요!”
“내가 언제 옷에 대해 안다고 했습니까? 사진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잖아요.”
앞에 있는 여자분은 황연희라는 신인 디자이너분이라고 한다. 6명이 남은 현재 가장 나이가 어리고 가장 성질이 예민하다고 평가된다.
··이런 사람하고 짝을 지어줄 거면 미리 말해주면 정말 고마웠을 텐데.
내가 참가한 시점은 디자이너 분을 옷을 다 만들고 그 옷을 어떤 컨셉으로 찍는지 결정할 때였다. 연희 씨는 다짜고짜 자기가 촬영 컨셉을 다 잡았으니 그냥 찍기만 하면 된다고 말을 했다. 그래도 난 촬영 컨셉이 좋으면 넘어가려고 했다. 하지만 컨셉 설명을 듣고 이건 안 되겠다 싶어 이렇게 언쟁을 벌이고 있는 거다. 나이도 같고 경력도 비슷한데 초면부터 아랫사람 취급하는 게 짜증이 나기도 했다.
“모델분하고 사전 협의가 됐다니까요. 그냥 승우 씨는 사진만 찍어주시면 돼요.”
“싫은데요. 아니 망할 게 뻔한 사진을 제가 왜 찍어야 하는 줄 모르겠네요.”
“그런 상황 속에서 잘 나오게 찍는 게 승우 씨의 역할 아닌가요?”
“제 역할은 디자이너 분과 협의 하에 좋은 사진을 남기는 거지 기적을 만드는 게 아닙니다. 지금 연희 씨는 제가 왜 반대하는지 들으려 하지도 않잖아요.”
“그럼 묻죠. 왜 싫은 데요?”
“소품이나 배경은 나타나지도 않고, 심지어는 모델도 실루엣만 남기고 옷만 눈에 띄게 찍자는 컨셉이죠?”
“네.”
“지금 제가 뭐가 떠오르는 줄 알아요?”
“뭔데요?”
“공포 영화 포스터. 딱 공포 영화 포스터잖아요. 그것도 옛날 공포 영화 포스터네요. 어느 미친 편집자가 그딴 사진을 표지에 넣습니까? 지금 세기말이에요?”
지켜보던 촬영기사 분과 작가분이 소리를 죽이고 웃는 모습이 보였다.
“정말 패션을 몰라도 너무 모르시네요.”
“그쪽도 잡지 화보에 대해서는 아는 게 하나도 없어 보이는데요.”
“아! 정말. 피디님 사진작가 교체 안 될까요?”
피디는 촬영을 멈추고 입을 열었다.
“연희 씨 바꿀 수 없어요. 이미 바꾸기에는 늦었어요. 미션 시간 4시간 남았습니다. 빨리 진행해 주세요.”
나도 목이 타서 생수 한 병을 벌컥벌컥 마시고 있다. 이런 파트너랑 일하는 줄 알았으면 아에 시작도 안했을 것이다. 얼마 전 평화롭고 따뜻한 촬영 현장이 그립다. 연희 씨는 신경질이 가득한 얼굴로 내게 와서 말했다.
“그럼 맘대로 해요. 전 신경 안 쓸 테니까 맘대로 해보라고요.”
“그럼 저야 고맙죠. 모델분하고 옷 가지고 오세요.”
또 막상 내가 하려는 기색을 보이자 연희 씨는 태세를 바꾸기 시작한다.
“대체 저한테 왜 그러시는 거죠?”
“제가 묻고 싶은 말입니다. 촬영장 도착했더니 이상한 컨셉으로 찍기만 하라고 명령해서 몰래카메라인 줄 알았어요. 근데 지금 이게 실화죠?”
“사진작가면 작가답게 의뢰자가 원하는 사진을 찍어주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제정신인 사진작가면 이런 의뢰는 안 받아요. 받는 순간 이력에 흑역사가 생기거든요.”
싸우고 있는 와중 모델이 다가왔다. 얼굴을 처음 본 순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예쁘게 생겼지만 어떻게 꾸미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얼굴이었다. 외모가 개성이 강한 모델이라면 찍을 수 있는 컨셉이 한정되어 있지만 저런 얼굴이라면 범위가 넓어진다. 정말, 미선 선배 따라 몇 번이고 찍어본 경험이 큰 도움이 된다.
“연희 씨 잡지 표지에요. 표지 본 적 있어요? 제대로 된 패션여성지라는 컨셉을 지닌 잡지에요. 다른 잡지 표지하고는 다르다고요. 모델을 최대한 죽이고 의상을 돋보이게 하는 사진을 표지로 쓰죠.”
“저도 봤어요. 그래서 이런 컨셉이 생각났고요.”
“근데 연희 씨 컨셉은 모델도 죽이고 배경도 죽이고 소품도 죽여서 살아남은 게 의상밖에 없는 사진이란 말입니다. 가장 중요한 건 조화에요.”
“하아, 무슨 말인 줄 알았어요. 뭐 어떻게 할 건데요.”
한참 동안의 실랑이 끝에 겨우 연희 씨가 내 의견을 받아들인 준비가 된 듯했다. 근데 사실 생각나는 컨셉이란 게 없는데·· 뭐가 있는 지도 모르겠고. 그래도 믿을 만한 것이 존재한다.
“소품실로 가보죠. 오늘 쓸 수 있는 소품 보면서 얘기해요.”
“거기 별거 없어요.”
“일단 가 봐요··”
그렇게 우리들은 소품실로 향했다. 그런 우리를 촬영기사와 피디와 작가가 뒤따라왔다. 피디가 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와, 길승우 씨 대단하네. 여태껏 연희 씨 고집 꺾은 사람이 없었는데. 생각지도 못했는데 두 사람 케미가 장난 아니야.”
“피디님, 그만하세요. 무슨 케미같은 소리하고 계세요. 지금 화가 나서 죽겠는데. 이런 타입의 남자 정말 질색이에요.”
연희 씨가 피디의 말에 질색이라는 듯 말했다. 난 어서 이 촬영이 끝나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한숨을 쉬며 걸어갔다. 별거 없다던 소품실에 별에별 것이 가득했다.
“상대방이 어떤 감정을 느꼈으면 좋겠어요? 말하지만 컨셉이 아니고 감정입니다.”
“음·· 옷이 예쁘다.”
“그런 일차원적인 생각 말고요. 분위기가 어땠으면 좋을 것 같냐고요.”
“일차원적이라뇨! 음 뭐랄까 신비롭고 무섭다?”
뭔가 몽환적인 느낌으로 찍는 것도 좋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난 모델분에게도 물었다.
“저 모델분은 어떤 사진 찍고 싶어요?”
“네? 음·· 아까 화보 속에 모델은 죽인다고 하셨잖아요. 그래도 전 모델로서 너무 존재감이 없으면 싫을 것 같아요.”
내가 조금은 자신만만한 이유가 있었다. 물론 이 아이템이 없더라도 연희 씨와는 싸웠겠지만 그래도 더 자신감 있게 싸운 이유가.
“아이템 확인”
내가 지닌 아이템이 주르르 보이기 시작하고 마침내 내가 원하는 아이템이 보였다.
지난 번 썼던 가 인물에게 맞게 배경을 설정해 준다면 이번 아이템은 소품에 맞는 컨셉에 점수를 부여해주는 아이템이었다. 난 소품실을 둘러본 뒤 점수를 확인하며 컨셉을 정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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