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grapher Gil seung woo RAW novel - Chapter 43
45화 만취의 행운
난 간단한 짐을 챙기고 오늘 광고 관련 회의가 있는 회사로 향했다. 소속사에서 추천해준 일거리는 과자 광고. 오늘은 나와 메이크업 아티스트, 그리고 광고 아트디렉터님이 모여서 내일 찍을 광고에 대해서 논의할 계획이었다.
“··잘 오셨습니다. 아트디렉터 김민기라고 합니다.”
아트 디렉터 분은 30대로 보이는 젊은 남자분이셨는데 온몸에 힘이 없어 보였다. 내가 바라보자 그는 ‘어제 거의 철야로 일을 해서요’라고 하며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우리에게 광고의 컨셉을 설명한 파일을 나눠주고는 입을 열었다.
“음·· 내일 찍을 광고는 이걸 홍보하기 위한 겁니다.”
그는 두 개의 상자를 내게 줬다. 하나는 하얀색의 달콤한 화이트 크림이 든 파이, 다른 하나는 검은색의 초코 크림이 든 파이였다. 김민기 씨는 입을 열었다.
“컨셉은 간단합니다. 광고 모델 빈아 씨가 일인이역으로 두 개의 쿠키를 번갈아 가며 홍보합니다. 하얀 드레스를 입은 빈아 씨가 밝은 모습으로 화이트 파이를, 검은 드레스를 입은 빈아 씨가 고급스러운 분위기로 블랙 파이를 먹는 겁니다. TV 화면에는 이런 식으로 두 명의 빈아 씨가 번갈아 나오다가 나중에는 같이 나오게 됩니다.”
난 고개를 끄덕거리며 아트디렉터님이 준 파일을 살펴봤다. 근데 난 뭘 찍어야 하지? 동영상 촬영 중에 사진을 찍으면 되나?
“광고 촬영 후에 사진 촬영이 있을 예정입니다. 컨셉은 이와 같습니다.”
아, 난 동영상 촬영이 끝난 후에 시간을 따로 가져서 사진을 찍게 되는구나. 난 화면에 뜬 광고의 컨셉을 바라봤다. 한 화면에 두 명의 빈아 씨가 파이를 손에 든 사진이었다. 특별한 포즈도 아니었다. 메이크업 아티스트님은 아트디렉터님과 착용할 의상에 대해 의논하고 있었다.
“일인이역이니까 대비를 분명하게 주는 것이 좋겠죠?”
“너무 차이 나게 할 필요는 없습니다. 방금 말씀하신 스모키 화장은 너무 과한 면이 있어요. 그냥 옷과 헤어스타일에 차이를 두는 정도가 좋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알겠어요. 근데 조금 전 컨셉을 보면 하얀색은 순수함을 강조하고 검은색은 고급스러움을 강조한다고 들었는데 좀 겹치지 않나요?”
“아니요, 잘못 들으신 것 같네요. 밝은 모습이라고 했지 순수하다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두 가지의 드레스 모두 시스루 룩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너무 야하지 않은 거로요. 그리고 길승우 씨.”
갑자기 아트디렉터 분이 내게 말을 걸었다.
“네.”
“제가 승우 씨를 추천한 건 인물의 다른 면을 잘 잡아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기대에 부응하는 사진을 찍어주시길 바랍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밝다, 어둡다가 아닙니다. 우울하거나 무거운 표정으로 먹는 과자에 흥미가 생길 일은 없어요. 혹시 생각나시는 컨셉 있습니까?”
“일단은 직접 모델분을 봐야 감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아트디렉터분은 수긍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입을 열었다.
“알다시피 빈아 씨가 스케줄이 많아서 사전 미팅 시간을 조율할 수 없었습니다. 대신 내일 촬영 시간을 길게 잡아놨으니까 내일 만나서 얘기하죠.”
반나절은 예상하고 왔었는데 예상보다 일찍 끝났다. 다시 스튜디오로 가기에는 시간이 애매했다. 난 핸드폰을 꺼내 지금 열리고 있는 전시회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 눈에 띈 전시회는 패션사진의 대가의 전시회였다. 그는 유명 잡지와 작업하면서 자기의 색깔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작가였다. 와, 이런 작가의 전시회가 지금 열리고 있다니 생각지도 못했다. 난 얼른 발걸음을 옮겼다.
마침 현장 예약이 가능한 도슨트 투어도 있어. 난 얼른 예약을 마치고 기다렸다.
“안녕하세요. 오늘 안내를 맡게 된 성유나입니다.”
나를 비롯한 네 명의 사람들은 성유나 씨의 안내를 받으며 사진을 감상하기 시작했다. 첫 사진부터 수위가 장난이 아니다. 전라의 모델이 하이힐만 신은 채 포즈를 취하고 있다. 하지만 보는 사람이 당혹할 정도로 당당한 모습이 인상적이다.
“말씀드렸다시피 그의 사진은 아직도 예술이냐 외설이냐는 논란에 빠져있습니다. 하지만 반대론자들도 그의 사진이 단순한 상업사진에서 벗어나 자기만의 문화코드를 내재한 것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소파 위에 옆으로 누운 여자의 하체만을 찍은 사진이 눈에 보였다. 그녀는 구두와 스타킹을 신고 엉덩이를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지금의 시점으로 볼 때 그리 어색함을 느끼지는 못할 겁니다. 왜냐하면, 현재의 패션사진들이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이죠. 이 사진의 발표 시기는 70년대입니다. 얼마나 많은 논란거리를 만들었는지 예상하시겠죠?”
노출이 심한 수영복을 입은 거대한 여자가 수영장을 내려다보고 있는 사진이 보인다.
“그는 변태의 제왕이라는 악평을 듣기도 했지만 패션사진을 예술의 경지로 올려놓은 천재라는 상반된 평도 존재했습니다.”
유명 패션 잡지에 사용됐다고 하는 여러 사진도 보았다. 80년대 스타들이 헐벗은 채 눈앞에 펼쳐진다.
“그는 결코 돈 때문에 사진을 찍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심장발작으로 병원에 다니던 시절에도 작은 카메라를 손에 쥐고 의사며 간호사며 문병 온 사람들까지 사진 속에 담을 만큼 열정적인 사람이었죠.”
설명을 들으며 난 생각했다. 이 사람은 대체 어떤 철학을 가지고 있기에 여자의 신체를 이런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을까. 마침 도슨트의 입에서 그 의문에 대한 답이 나오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그가 남긴 말을 하고 싶네요. ‘카메라는 나에게 적당한 거리감을 제공해 주었다’ 그의 누드 작품이 많은 논란을 이끌었지만, 지금에 와서 예술로 인정받은 것은 그의 이런 사고방식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런가, 이 사진작가에게는 피사체에 대한 적당한 거리감이 그 답이었나 보다. 하지만 난 그 말이 부족한 것 같아 사진작가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여자분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혹시 아신다면, 이 작가분이 어떤 철학을 지니고 사진을 찍었는지 알 수 있을까요?”
여자분은 날 보더니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분은 사진에 대한 이론적이고 철학적인 면이 사진사가 셔터를 누른다는 데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셨어요. 일종의 변비 현상이 일어난다고 말씀하시며 나중에 가서는 사진작가들은 사진은 찍지 않고 철학적 명상만 하게 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며 걱정하셨죠.”
한숨만 나온다. 뭔가 좀 알겠다 싶으면 그 반대의 예가 나오고 있다. 감각이냐, 철학이냐, 이론이냐, 기술이냐, 온갖 물음이 머릿속에 떠돌기 시작한다. 결국은 자기 마음대로 찍는 것이 최선인 듯싶다가도 그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
“아·· 물 좀.”
“옜다.”
익숙한 목소리인데 아버지나 형은 아닌 남자 목소리라 난 정신이 번쩍 들었다. 눈을 떠서 일어나니 정만종 선생님이 날 바라보고 계신다. 머리통을 열고 얼음물을 부은 것 같다.
“기억은 나니?”
난 고개를 저었다. 전시회를 본 후 여러 물음에 대한 답이 나오지 않아 답답한 마음에 술을 좀 마신 건 기억이 나는데 그 이후에 기억이 없다. 이래서 사람은 안 하던 짓을 하면 안 된다는 거다.
“혹시 제가 실수했나요?”
그냥 술을 너무 마셔 집에 가기엔 늦었고 귀소본능으로 사무실에 와 조용히 잠이 들었길 기대하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술 마시면 다 그렇지. 나도 술을 좋아해서 알아. 답답한 마음 같은 거 풀기 위해 소리도 지르고 대들기도 하고 그러는 거지. 그래도 끝까지 선생님이라는 말을 붙여주기는 하더구나.”
··눈을 감았다.
“난 일단 네가 사진을 어떻게 찍냐에서 왜 찍어야 하냐는 물음을 가졌다는 거에 대해서 칭찬을 해주고 싶구나. 방법론적인 얘기는 제외하고 말이야. 난 그런 물음을 가졌다는 것 자체가 사진에 대한 긴 여행에 첫발을 내디뎠다고 생각하거든.”
“··제가 그런 말을 했었군요.”
“네 말을 듣고 나도 반성을 많이 했다. 나이가 들고, 유명해지고, 제자가 생기고 나니까 너무 내 생각을 강요한 것 같아서 말이야. 그래, 사진에는 정답이 없지. 순간의 끌림 때문에 셔터를 눌렀는데 그게 잘못됐다고 말한 건 내 잘못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 사진에 정답이 어디에 있겠어.”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널 비난하는 게 아니다. 나도 소싯적에는 카메라 하나 목에 메고 미친 듯이 사진을 찍고 다녔어. 조금이라도 끌린다 싶으면 손이 먼저 갔지. 그때는 초상권 개념도 없을 때라 길거리 돌아다니면서 이런저런 사람들 찍어보고 배우고·· 그렇게 성장했던 것 같다. 필름 값 벌기 위해서 별짓을 다했었지.”
정만종 선생님은 옛날 생각이 떠오른 듯 살짝 웃음을 지었다. 난 머리를 부여잡고 대체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하기 위해 애썼지만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이거 병 아니야.
“사회적으로 윤리적으로 손가락질을 받더라도 다 네 선택이고 운명이겠지. 앞으로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래서 말인데 네게 제안할 게 있구나.”
“으·· 죄송합니다.”
“아니다, 사과할 일이 아니야. 난 말이지, 네가 좀 특별하다고 생각해. 다른 애들과는 다른 뭔가가 있어. 이미 높은 수준에 올라와 있는데 뭔가의 제약 때문에 제대로 끄집어내지 못한다는 느낌이랄까. 그래서 형세에게 교육을 맡긴 거고. 난 이 결정이 틀렸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앞으로 더 배워야하는 것도 맞고.”
“네, 김형세 교수님께는 정말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제가 제대로 실천을 못해서 문제지만요.”
“오늘 네 말을 듣고 형세에게 배우면 분명 실력은 늘겠지만 네가 가진 그 ‘무언가’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사진가의 개성이란 건 중요하지. 그래서 내가 전에 승우 너에게 자기 작업을 찍고 벅찬 일을 맡으라고 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였다. 찍다 보면 알 수도 있으니까.”
“··찍다 보면 알 수도 있다.”
“나 같은 경우는 찍다 보니까 뭔가를 느끼게 됐고 찍다 보니까 느낀 것을 사진에 담을 수 있게 됐어. 이런 감각은 이론적으로 배운다고 해서 할 수 있는 종류는 아니라고 생각이 들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내가 일주일에 이틀을 쉬는 건 아직도 사진을 몰라서야. 사람을 만나서 얘기하고 찍고, 풍경을 만나고 찍는 일을 반복하고 있지. 따라올 수 있겠니?”
“네? 그래도 될까요?”
선생님 곁에서 같이 사진을 찍을 수 있다는 건 내게 엄청난 기회다. 현재 내가 가장 가지고 싶은 건 선생님이 세상을 보는 시야를 느낄 수 있는 특성. 그걸 얻기 위해서는 10번을 같이 협업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어있다. 지금은 겨우 1번을 한 상태. 얻기 힘들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이런 기회가 온다니 행운이다.
“곁에서 보고 뭔가 배울 수 있다면 좋겠구나. 내가 가진 지식을 전해주는 건 서툴지만 잘 보여줄 수는 있단다.”
“진짜 영광입니다.”
난 깨어나 처음으로 술을 마시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문득 앞으로 몇 시간 뒤에 있을 광고 촬영이 생각이 났다. 이런 몰골로 나타나면 분명 퇴출각이다. 난 선생님께 사정을 말씀드린 뒤에 집으로 향했다. 날은 춥고 컨디션도 엉망이지만 왠지 정신만은 상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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