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grapher Gil seung woo RAW novel - Chapter 48
50화 눈 오는 날
아침부터 눈이 펑펑 오고 있다. 어제 새벽부터 내린 눈은 아침 출근길을 교통지옥으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다행스럽게 지하철을 탄 터라 늦지는 않았지만, 출근길에 너무 힘을 뺀 듯했다.
“안녕하세요.”
출근 시간에 아슬아슬하게 도착했건만 미선 선배만 자리를 지키고 나머지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난 내 자리에 짐을 내려다 놓고 미선 선배에게 물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늦나 봐요. 오늘 출근길 장난 아니더라고요.”
“아니야, 오늘 선생님하고 영효 선배는 작업 때문에 야외 촬영하러 나가셨어. 이렇게 멋진 눈이 내리는 데 가실 것 같았어. 덕분에 오늘 스케줄 모두 취소됐어. 급한 스케줄이 아니라서 다행이었지. 아마도 선생님은 사무실에는 들어오지 못할 거야. 경훈이도 오늘 출장 있어서 어떻게 될지 모르고.”
“에? 경훈 선배 출장 있어요?”
“어느 돈 많은 사모님이 눈 오는 날 반려견과 자기를 사진에 담고 싶다고 불렀다나 봐. 오전 스케줄 취소됐다니까 그쪽으로 바로 간다고 연락 왔더라고.”
“그럼 오늘은 우리 할 일 없는 거네요.”
“흐음, 너만 없을걸. 나도 좀 있다가 나가봐야 해. 저번에 찍은 화보 촬영에 추가할 것이 있다고 하더라고. 근데 촬영장이 외부 스튜디오라서 좀 있다 나갈 계획이거든.”
결국엔 잠시 후에는 나 혼자서 일도 없는 스튜디오를 홀로 퇴근 시간까지 지켜야 된다는 말이다. 미선 선배는 멀뚱히 서 있는 날 보며 입을 열었다.
“요즘에 너한테 일 많이 들어오고 있잖아. 소속사한테 연락해서 오늘 할 수 있으면 해.”
“그럴까요? 근데 당길 수 있는 일이 있을까 모르겠네.”
미선 선배마저 나가버리자 스튜디오 직원분 세 명과 나만 덩그러니 남아있다. 난 곧 마실장님께 전화를 걸었다.
– 네, 길승우 작가님 무슨 일이십니까?
“죄송한데 오늘 스튜디오 스케줄이 갑자기 취소가 돼서 시간이 남게 됐어요. 지금 할 수 있는 일 없을까요?”
– 음, 글쎄요. 연말이라 스케줄 조정이 쉽지는 않을 텐데·· 일단 몇 군데 연락 넣어보겠습니다.
난 통화를 마치고 창밖을 바라봤다. 새하얀 함박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정말 군대에 있을 때는 끔찍한 광경이었는데 지금은 예쁘다는 생각마저 든다. 이래서 사람은 간사하다는 거다. 난 카메라를 손에 들고 밖으로 나왔다. 사무실에만 있기에는 아까운 풍경이기 때문이었다.
“음, 생각보다 잘 안 나오네.”
난 결과물을 보며 중얼거렸다. 눈이 질감이 생각보다 안 나온다. 측광이나 사광에서 오는 빛을 받은 눈을 찍어야 하는데 햇빛이 가려져 있어 생각보다 어렵다. 난 카메라를 내려다 놓고 하늘을 바라보며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정말로 얼마 만에 보는 하늘인지 모르겠다. 근 한 달간 정신없이 달려왔기 때문인지 하늘을 볼 여유조차 없었다. 생각지도 못한 여러 일이 생기고 지나간 것 같다.
“다시 시작해보자.”
난 카메라의 렌즈로 흩날리는 눈을 바라보며 겨울의 풍경을 사진으로 담아내기 시작했다. 촬영 중 마실장님께 연락이 왔다. 당길 수 있는 스케줄이 없다는 소식이었다. 무리한 부탁드려서 제가 더 죄송하다는 말을 남긴 뒤 난 사무실로 돌아와 결과물을 확인했다.
애매했다. 자기 작업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부족하고 내 생각도 담겨있지 않았다. 난 사진을 보면서 이 풍경에 어울리는 모델 한 명만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인물을 통해서 눈 내리는 풍경을 표현한다면 잘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난 핸드폰을 켜고 전화번호부를 살펴봤다. 관계자들 번호나 연예인들 번호가 수두룩하지만 정작 전화를 걸만한 상대가 없었다. 이 나이 되도록 정기적으로 연락하는 여자 하나 없는 나를 탓해야지 누구를 탓해야 하나.
모델 연락처라고는 딱 한 명뿐이었다. 저번 케이블 방송에서 작업을 같이했던 최나연 씨. 하지만 지금 갑자기 나와 달라고 하면 나올 확률도 낮을뿐더러 페이 문제도 있다. 결국 난 통화 버튼을 누르는 것을 포기하려고 할 때 효미의 번호가 떴다. 얘가 무슨 일이지?
“여보세요?”
– 승우 오빠 맞아요?
“효미 씨 맞아요?”
– 목소리만 듣고 알아맞히시네요.
“제가 얘기 나눈 여자가 손에 꼽을만하거든요. 그리고 번호 받은 여자는 세 손가락 안에 드니 당연히 기억하죠. 와, 근데 무슨 일이세요?”
– 그냥 시간이 나 생각나서 연락했어요. 부담스럽지는 않으시죠?
부담이 되기는, 시간이 남는 아이돌한테 연락오고 있다고 세상에 자랑하고 싶다.
“부담은요, 영광이죠. 마침 저도 쉬는 중이거든요.”
– 오늘 쉬는 날인가 봐요. 집이세요?
“아니에요. 회사이기는 한데, 일이 없어서 놀고 있어요.”
– 정말요? 잘됐다. 저 오늘 촬영이 취소돼서 오늘 하루 비거든요. 회사 구경 가도 돼요?
“네? 저야 좋죠.”
주변에서 ‘꺄아아’하는 소리가 들린다. 분명 다른 애들이겠네. 나머지도 다 같이 올 생각인가? 초대해도 되나 모르겠다, 내 회사도 아닌데. 정 안 되겠다 싶으면 나가서 맛있는 거나 먹어야겠다.
– 그럼 지금 갈게요. 정 스튜디오죠? 저, 새로 생긴 숙소가 근처라서 금세 갈 수 있어요.
“혼자 올 건가요?”
– 네? 왜요?
“아니, 다 같이 오면 뭐라도 준비해야 할 것 같아서요.”
– 혼자 갈 거예요.
뭔가 당찬 여자 느낌이다. 그러고 보니까 얘는 처음부터 나한테 잘해주기는 했지. 혹시 나한테 마음이 있는 걸까? 아니면 그냥 고마운 마음에 챙겨주는 걸까. 전자라면 좋겠지만 오기 전까지는 모르겠다. 난 설레는 마음에 뭔가 먹을 것을 준비하다가 머릿속에 뭔가가 덥석 떠올랐다.
***
효미 씨가 도착하자마자 난 그녀와 인사를 나누었다. 효미 씨는 짙은 와인색 블라우스에 검은 스커트를 입고 코트를 걸친 모습이었다. 약간 오피스룩 같기도 한데, 단정한 효미 씨의 이미지가 어울렸다. 서로의 안부를 묻다가 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요?”
“그럼요. 뭔데요?”
“오늘 하루 제 모델 해주시면 안 될까요? 효미 씨가 온다고 하니까 이것저것 찍어보고 싶은 것들이 생각나서요.”
“정말이요? 저야 영광이죠. 승우 오빠가 직접 찍어 주신다는 데.”
“음, 컨셉은 눈 오는 날 데이트에요.”
“··데이트요?”
효미 씨가 조심스럽게 내게 묻고 있다. 난 그녀가 오해할까 봐 손을 내저으며 입을 열었다.
“아, 물론 진짜 데이트는 아니고 그런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사진을 찍는 거예요. 괜찮겠어요?”
“아··네.”
난 그녀와 함께 밖으로 나왔다. 아직도 하늘에는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효미 씨는 눈 내리면 무슨 생각 해요?”
“음, 예쁘다? 걷고 싶다. 그런 마음이 드는 것 같아요.”
“그럼 예쁜 효미 씨가 눈 오는 거리를 걷는 모습 하나 담아볼게요.”
난 배시시 웃는 그녀와 살짝 떨어져 카메라를 손에 쥐었다. 그리고는 눈길을 걷는 효미 씨를 향해 셔터를 눌렀다. 뭔가 추워서 그런지 표정이 경직된 거 같다. 난 그녀를 향해 입을 열었다.
“효미 씨 우리 철길에서 사진 찍었던 날 기억해요?”
“네, 기억하죠. 우리한테는 잊을 수 없는 날이잖아요.”
“그때 효미 씨가 나한테 김밥을 젓가락으로 주는데 어휴 얼마나 떨리던지. 태어나서 연예인이 주는 음식을 처음 받아봤거든요. 근데 제가 차마 못 받아먹고 스스로 먹었잖아요. 나중에 얼마나 후회했는지 몰라요.”
효미 씨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등급을 초과한 사진이 찍혀 보너스 포인트가 지급됩니다]“손 모으고 하늘 한 번 쳐다봐주실 수 있어요? 하늘에 뭔가 효미 씨가 좋아하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고요. 돈도 괜찮아요.”
“돈 그렇게 좋아하지 않아요.”
“하하, 알겠어요. 지금 저 보면서 항의하는 듯한 표정 귀여워요. 아, 그렇다고 얼굴 가리기는 없기.”
확실히 인물이 하나 추가된 것만으로 눈 오는 풍경을 내 기준에 맞게 담을 수 있는 것 같다. 인물을 통해 세상을 본다는 말이 있는데 이게 비슷한 건지도 모르겠다. 사진에 효미 씨가 가진 분위기와 그녀를 감싸고 있는 차가운 공기, 그녀의 표정이 만들어내는 소리까지 담기는 것 같다. 야외 촬영을 마치고 난 그녀를 한 식당으로 데리고 갔다.
“와, 여기 예뻐요. 좁긴 하지만 되게 정감 있는 분위기다.”
“선생님이 여기 오뎅 국물 좋아하세요. 스테이크 썰까 생각해봤는데 아무래도 효미 씨가 못 드실 것 같아서요. 여기 초밥도 맛있거든요. 에구, 볼이 빨개요. 너무 오래 있었나 보다.”
“그래도 조금만 먹을게요. 아직 활동 중이라 많이 먹으면 곤란해요.”
난 국물을 숟가락으로 떠서 먹는 그녀를 향해 셔터를 눌렀다. 그녀는 날 보며 눈을 흘겼다.
“이런 거까지 찍으면 어떻게 해요.”
“미안해요. 저절로 카메라에 손이 가서. 근데 방금 그 표정 되게 좋았어요.”
“계속 칭찬해주시면 저 진짜인 줄 알아요.”
난 그녀에게 몇몇 포즈도 요구했다. 책을 들고 있는 사진, 벽에 기댄 사진, 눈 내리는 창밖을 바라보는 사진을 찍는 것이 가능했다. 너무 내 욕심만 부린 것 같아서 난 그녀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찍고 싶은 사진 있어요?”
“음, 같이 한 장 찍었으면 좋겠어요.”
난 삼각대로 카메라를 고정한 뒤에 그녀의 옆에 앉았다.
***
“언니 어땠어요? 고백했어요?”
“뭐 하고 놀았어요?”
“승우 오빠 오늘 할 일 없다는 거 듣고, 모든 일을 미룬 채 막무가내로 나간 보람은 찾았어요?”
효미는 동생들의 아우성을 뒤로하고 방으로 들어가 조용히 코트를 벗었다. 그제야 분위기를 조금 짐작한 동생들은 조용히 그녀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막내 예정이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효미에게 물었다.
“승우 오빠, 여자 친구 있다고 해요?”
“그런 거 아니야··”
“그럼 언니 같은 스타일 별로라고 해요? 말도 안 돼. 승우 오빠 눈이 하늘 꼭대기에 달려 있나 보다. 언니 같은 여자 세상에 없는데.”
“··말도 못 했어.”
“왜요? 왜요, 언니?”
“일에 엄청 빠져 있더라고. 연애는 생각도 없나 봐. 사진만 찍다 왔어. 정말로 사진만.”
그때 효미의 핸드폰에 문자가 왔다는 알람이 울렸다. 그녀는 우울한 얼굴로 메시지를 확인했다. 예정은 메시지를 확인하는 효미의 얼굴이 급격하게 변하는 것을 목격했다. 우울했던 표정이 환하게 변한 이유가 궁금한 예정은 다시 효미에게 물었다.
“뭐에요?”
“그냥 사진들이야.”
“뭔데요. 좀 보여주세요. 이상한 사진이에요?”
“자, 그냥 오늘 찍은 사진 중에 하나야.”
효미는 길승우에게 온 사진을 예정에게 보여줬다.
“와, 무슨 영화 속 장면 같아요. 역시 승우 오빠.”
승우가 찍은 그녀는 눈 내리는 하늘을 바라보며 입을 살짝 벌린 채 환하게 웃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좀처럼 보여주지 않는 그런 표정이었다. 그리고 다음 사진은 용기를 내서 팔짱을 낀 효미와 경직된 표정으로 정면을 바라보는 승우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 있었다.
[최고의 사진과 최악의 사진을 뽑아서 보내요. 오늘 정말 고마웠어요]효미는 다시 한번 메시지를 읽고, 사진을 보고는 혼자만의 감정이라고 생각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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