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grapher Gil seung woo RAW novel - Chapter 51
53화 빛을 찾아서
마실장은 출근하자마자 대표 유수민의 호출을 받아 대표실로 들어갔다. 최근 마실장에게는 부러울 것이 하나 없었다. 3년 넘게 그의 속을 태우던 러버걸스가 1위에 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동안의 고생이 단숨에 보상받는 나날의 연속이었다. 그 때문에 옛날처럼 대표의 호출로 인해 마음 졸이는 일은 없었다. 마실장이 대표실에 들어가자 골프채를 거칠게 휘두르는 대표의 모습이 보였다.
“마실장, 지금 내가 아주 불쾌한 전화를 받았어.”
“네? 무슨 일 때문인지.”
“김 피디가 직접 내게 연락을 해왔는데 우리 길승우 작가님을 다시 섭외하고 싶다는 말을 하더군. 나중에 다른 프로그램에 꽂아주겠다는 공수표를 날리면서 말이야.”
유수민 대표는 골프채를 거칠게 집어던지더니 자리에 앉았다.
“내가 마실장한테 뭐라고 했어. 길승우 작가님 어디 가서 불편하거나 서운한 일 없게 처리해달라고 했지. 내가 뒤에서 전력으로 서포트할테니까 최선을 다하라고 했어 안 했어.”
“죄송합니다. 제 선에서 끝내야 하는 건데··. 그렇지 않아도 전화 와서 거절했는데, 대표님께 직통으로 연락할 줄은 몰랐습니다.”
“내가 러버걸스 뜨기 전까지 굉장히 징크스가 많았거든. 근데 그분을 만나고 근심걱정이 싹 사라졌어. 왜냐! 길승우 작가님이 도와주면 다 해결되니까.”
“잘 알고 있습니다.”
“김 피디한테 가서 일 잘 처리하고 와. 그 사람하고 인연 확실하게 끊고 와. 혹시나 뒤에서 길승우 작가님 해코지할 의향 조금이라도 보이면 박살을 내놓고. 이게 어디서 우리 길승우 작가님을 떼어냈다 붙였다 할 수 있는 사람으로 알고 있어.”
마실장은 굳은 각오가 담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날 오후, 김 피디는 제이필터 뮤직의 마실장으로부터 좀 만나자는 연락을 받았다.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방송국 앞에 있는 카페로 향했다. 최근 그는 스트레스가 심했다. 하락세인 프로그램을 반등시킬 코너가 좌초 위기에 빠졌던 것이다. 그의 욕심으로 제대로 된 인물 섭외를 하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사진사가 그렇게 중요한 줄 알았나.”
그는 길가에 침을 찍 뱉으며 약속장소로 향했다. 그곳에는 러버걸스의 매니저인 마실장이 앉아있었다. 김 피디가 반갑게 손을 올렸지만, 그는 앉은 상태에서 고개만을 숙였다. 김 피디는 불쾌한 표정으로 앉으며 입을 열었다.
“뭡니까, 마현수 실장. 이제 러버걸스가 떴으니까 나정도 되는 사람은 막 대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든 모양이네.”
“뭐, 그런 뜻으로 한 행동은 아니었습니다.”
“됐고, 길승우 씨는 합류하는 거지? 이게 얼마나 좋은 기회야. 막말로 일개 사진사가 공중파 스포트라이트 받으면서 정기적으로 출연하는 경우는 이게 처음 아니요? 이런 기회는 다시는 없다고. 페이 좀 적당하게 조절합시다. 그리고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이 기회에 러버걸스 애들도 활동 중지 전에 한 번 더 얼굴 비추고, 언루트도 나와 줬으면 하는데. 서로 윈윈하자고.”
마현수 실장은 어처구니없는 김 피디의 말에 화가 난다기보다는 웃음이 났다. 김 피디는 마실장의 웃음을 다른 의미로 받아들이며 입을 열었다.
“하하, 그래. 내가 특집으로 꾸며서 잘 내보낼 테니까, 마현수 실장은 애들 스케줄을 조정해서 이른 시일 내에 자리 마련해봅시다.”
“저기, 김 피디님.”
마현수 실장은 얼굴에 웃음기를 거두고 김 피디의 눈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저희를 굉장히 만만하게 보고 계신 거 같네요. 제가 러버걸스 출현할 때 저자세로 나온 것 같지는 않은 것 같은데. 일단 결과부터 말씀드리면 길승우 작가님은 출연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스케줄 상 러버걸스와 언루트도 당분간은 출연이 힘들고요.”
“왜 이래 마실장. 뭐 우리랑 척이라도 지고 싶은 거야?”
김 피디가 으르렁대듯 소리쳐도 마실장은 표정 하나 무너지지 않으며 입을 열었다.
“혹시 오늘 연예란 뉴스 봤어요?”
“뭔데 그래.”
“그 일개 사진사가 오늘도 연예란에 올랐네요. 그것도 케이블 방송 단발 출연으로 말이죠. 이게 벌써 몇 번째인 줄 아십니까?”
김 피디는 얼굴을 찡그리며 핸드폰을 꺼내 연예 쪽 뉴스를 뒤적거렸다.
<제목 : , 디자이너 대 사진사의 대결이 펼쳐지다>
[어제 방영된 6회에서 도전자들은 포토그래퍼와 모델과 호흡을 맞추며 ‘잡지 표지 완성하기’ 미션을 수행했다. 가장 화제가 된 팀은 주옥선 씨 사진으로 화제가 됐던 길승우 포토그래퍼와 디자이너 황연희의 팀이었다.이 날 길승우는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는 황연희를 몰아새우며 미션을 완성해나갔다. 그는 처음 황연희의 표지 제안을 “공포 영화가 생각난다.”, “지금이 세기말이냐?”라고 반문하며 직접 미션을 지휘했다.
결과물은 성공적으로 그의 사진은 황연희를 미션 우승자로 만들었다. 하지만 황연희는 사진의 유일한 단점은 평범한 옷뿐이라는 심사위원의 말에 눈물을 흘려야 했다.
길승우 사진사는 마지막 인터뷰에서 좋은 사진은 함께 작업하는 이들이 힘을 합쳐야만 나올 수 있는데 그러질 못했다며 아쉬움이 많이 남는 작업이라는 평을 남기며 자리를 떠났다.]
마현수 실장은 놀란 눈으로 핸드폰을 바라보는 김 피디를 보며 입을 열었다.
“지금 케이블 쪽에서 길승우 작가님을 메인으로 하는 프로그램을 만들어주겠다는 말이 나오고 있습니다. 아니, 거의 확정적이에요. 아무리 지상파의 위력이 강해도 불과 몇 분 나오는 프로그램에 머리를 숙이면서 들어갈 필요는 없죠.”
김 피디는 불쾌한 얼굴을 하고는 입을 열었다.
“그래서 얼마를 원하는데?”
“오늘 거절하려고 이 자리에 나온 겁니다. 그거 안 해요. 당신 때문에.”
“이런 식으로 나오면 우리 방송국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 괜찮겠어?”
“뭐 방송국 소스 듣자니 다음 분기에 폐지된다고 하던데요. 김 피디님이 맡은 시점부터 쭉 하락세를 탔으니 어느 정도 책임이 지워질 거로 생각합니다.”
“야, 그건 다 소문일 뿐이야. 5년 넘긴 프로그램을 그렇게 쉽게 포기할 수 있을 것 같아?”
“그 5년의 영광을 말아 드신 분이 제 앞에 있지 않습니까. 그 소스 말인데 제법 신용 있는 곳에서 들은 겁니다. 확인해보셔도 좋아요. 그리고 길승우 작가님에 대해서 굉장히 쉽게 생각하고 계신 것 같아서 말씀드리는 건데 그분은 우리 소속사의 부적이나 다름없는 존재이십니다. 특히 대표님이 그분 안위라면 껌뻑 죽죠. 근데 김 피디님이 대표님께 직접 연락을 해서 뭐라고 하신 모양이더라고요. 지금 대표님이 몹시 화가 나 계십니다.”
“··이러면 너희한테 뭐가 좋은데.”
“적어도 길승우 작가님께 당당할 수는 있겠죠. 그리고 대표님도 만족해하실 겁니다.”
김 피디는 꼬리를 말고 커피숍을 나갔다. 마현수 실장은 핸드폰을 꺼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 길승우 작가님. 마현수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오늘 기사 보셨나 해서요.”
***
난 마실장님과 말을 나누고는 수화기를 내렸다. 정만종 선생님이 옆에서 내게 물었다.
“소속사?”
“네, 어제 제가 출연했던 프로그램이 방영됐는데 꽤 화제가 됐었나 봐요. 기사까지 떠서 제 이름이 거론되고 있다고 하네요.”
“잘 하고 있는 것 같구나.”
“아이고, 그 방송은 싸우면서 했어요. 방송했다는데 아직도 안 보고 있습니다. 그건 그렇고 여기에는 왜 올라오라고 하신 거죠? 오늘 일도 없는데.”
오늘은 휴일이었지만 정만종 선생님의 호출로 난 스튜디오로 출근했다. 정만종 선생님은 출근한 나를 꼭대기 층으로 데리고 갔다. 이곳은 공사 중인 곳으로 벽과 천장 대신에 커다란 창문을 곳곳에 설치하고 있었다. 최대한 자연광을 살려 실내작업을 하고 싶다는 선생님의 의견에 따라 개조하고 있는 곳이었다.
“승우야, 빛이란 사진에 있어서 뭐라고 생각하니.”
“누군가 그런 말을 했더라고요. 빛은 사진을 만드는 물감이라고.”
“그 말도 맞긴 하다만 빛은 사진에 있어서 절대적이지. 빛을 어떻게 이해하는지에 따라 사진이 결정된다고 생각한단다. 사진가는 화가와는 다르지. 우리는 물질을 조종하는 것보다는 에너지를 조종하는 일이 더 중요하거든.”
“음악가처럼요?”
“그래, 좋은 예구나. 사진가는 빛을 조종하는 일이다. 빛을 조종하기 위해서는 빛을 느끼고 빛을 이해하고 사진가의 방식으로 빛을 서술할 줄 알아야 한단다. 이 방은 내가 빛을 더 잘 느끼기 위해 만들고 있는 거지.”
선생님은 만족스러운 듯 방 안을 보고 있었지만, 아직 공사가 끝나지 않아 찬바람이 쌩쌩 들어오고 있다. 오늘은 인부들도 휴일이라 곳곳에 널린 자재들이 눈에 보였다.
“앞으로 며칠 동안 일이 없을 때 이곳에서 빛에 대해서 생각해 봐라.”
“네?”
잘못 들었나 싶어 난 다시 선생님께 되물었다. 여기서 뭘 어떻게 해야 되는 지 실마리도 못 잡겠는데 느닷없이 이런 소리를 하시면 곤란했다. 난 약간의 힌트라도 얻기 위해 선생님께 물었다.
“이곳에서·· 빛에 대해 생각만 하면 되는 건가요?”
“있어 보면 알 거야. 내가 예전에 미국에서 받은 수업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수업이 빛에 관한 수업이었지. 그곳에서는 한 달간 햇빛이 비치는 방에서 빛을 바라보고 느꼈지. 그리고 마침내는 빛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됐단다. 사진에 대한 시야가 단숨에 급성장하는 계기가 됐지. 너도 그런 기분을 느꼈으면 좋겠구나.”
뜻은 알겠는데 방법이 좀 그렇다. 이곳에 있다고 해서 내가 뭘 알아낼 수 있을까. 마치 종교인이 깊은 명상에 빠져서 깨달음을 얻는 수준의 일인 것 같은데. 그렇게 말을 남긴 선생님은 나만 혼자 남겨놓은 채 아래층으로 발걸음을 옮기셨다.
“춥다.”
빛을 느끼기 전에 추위를 느껴서 동사하게 생겼다. 24살의 마지막 날을 이곳에서 보내게 생겼다. 하지만 불평만 한다고 달라질 것은 없기에 난 들어오는 햇살을 맞으며 주위를 둘러봤다. 마침 인부들이 추위를 피하고자 가져온 드럼 난로가 눈에 띄었다. 난 그 물건에 시선을 맞춘 뒤에 주저앉아 한참을 바라봤다.
한참을 바라보고 있으니 빛이 이동하며 드럼 난로의 질감이 변하는 것이 느껴졌다. 확실히 빛 때문에 물건의 형태와 윤곽이 시시각각 변하고 있다. 기묘한 경험이었다. 시간은 언제나 똑같이 가고 있겠지만 내가 느끼기에는 최소 3배속으로 시간이 지나고 있는 것 같았다.
물건의 질감이 변하고 색이 변하고 심지어는 형태까지 변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난 새삼 빛의 중요함을 깨닫고 있다. 그렇게 해가 뉘엿뉘엿 질 때까지 난 그 자리에 앉아 빛을 보았다.
***
하도 추운 곳에 오래 있었더니 온몸이 얼음장이다. 난 자리로 돌아와 몸을 녹이면서 핸드폰을 확인했다. 새해에도 잘 부탁한다는 일에 관계된 사람들의 메시지가 쌓여 있었다. 작년에 캐락이와 상우 형 딱 두 명한테 왔었는데 엄청난 발전이다. 나도 단체 문자로 새해에도 잘 부탁한다고 보내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짐을 쌌다.
난 불 꺼진 스튜디오의 문을 닫고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익숙한 사람이 우리 건물 1층 계단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어? 어제 그 모델분?”
동상처럼 웅크리고 있던 모델분은 날 보더니 와락 눈물을 흘리며 내게 뛰어들었다. 난 내 품 안에 뛰어든 그녀를 토닥이며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에요?”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뭐라 말을 했다. 대충 의미가 회사가 사라졌다고 하는 것 같다. 임시 숙소는 잠겨있고 말이 통하는 사람도 없고 그래서 나를 찾아온 것 같다. 이걸 어떻게 하지? 우즈베키스탄에서 왔다고 하니까 그쪽 대사관에 연락해야 하나? 난 버림받은 강아지마냥 푹 처진 그녀를 보고 말했다.
“뭐 좀 먹었어요?”
일단은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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