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grapher Gil seung woo RAW novel - Chapter 54
56화 수준 차이
난 드라마 ‘아이스크림’ 촬영장에 와있었다. 같은 소속사인 언루트의 가완이의 특별 출연 때문이었다. 이 드라마는 젊은 층을 겨냥한 로맨틱 코미디물로 오랜만에 화제성 면에서 선전하고 있는 드라마였다. 언루트의 센터이자 가장 인물이 출중한 가완이는 불타오르는 화제성에 기름 역할을 하기 위해 투입되었다고 한다. 내 임무는 기사에 쓰일만한 사진을 찍는 것. 단순하지만 어려운 작업이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사진사 길승우입니다.”
난 촬영장으로 먼저 달려가 스탭들에게 인사를 했다. 나나 가완이는 어떻게 보면 이 드라마의 손님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이들에게 잘 보이는 것이 중요하다. 특히 나 같은 경우는 가완이의 전속 사진사나 다름없기 때문에 다른 분들이 피해를 보지 않게 잘 행동해야 했다. 하지만 이런 나의 인사에도 불구하고 촬영장 스탭들은 떨떠름한 표정이다.
“자, 촬영 들어갑니다.”
오늘 가완이가 맡을 역할은 오래된 연인 사이를 종결하고 싶은 여자 주인공과 엮이는 남자다. 여자 주인공은 연하인 가완이의 적극적인 공세에 남자 주인공과 이별할 생각을 하게 되지만 떠나지 말아달라는 남자 주인공의 말에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온다는 뭐 그런 내용이다. 오늘 가완이는 여자 주인공과 첫 만남, 우연한 재회, 데이트와 고백 장면을 찍을 예정이었다.
“근데 가완아 너 연기 잘하냐?”
“잘한다는 소리는 못 들었어요. 작년에 웹 드라마 찍기는 했는데··”
“근데 뭘 믿고 너한테 이렇게 분량을 많이 줬데?”
“저도 미치겠어요. 처음에는 카메오 수준이었는데 갑자기 특별 출연으로 바꿨단 말이에요. 하아, 이걸 어떻게 하지.”
가완이는 투덜거렸지만 차 안에서 이 녀석의 리딩을 볼 때 그럭저럭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문제는 나다. 촬영이 시작되면 자리싸움을 해야 한다. 영상 카메라 옆에 붙어서 촬영하는 것이 제일 좋지만, 그 옆에는 촬영기사와 조수, 조명 조수, 조감독, 피디 같은 분들이 빼곡하게 붙어계신다. 곧 가완이의 촬영이 시작될 것 같아 날 슬그머니 영상 카메라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촬영 들어갑니다. 배우분들 나와주세요.”
가완이는 다행히 별 어려움 없이 첫 번째 씬을 NG 없이 마쳤다. 문제는 나였다. 사람들과 접촉이 있다 보니 무의식적으로 날 툭툭 건드리는데 그때마다 사진이 흔들렸다. 게다가 조명기사가 캐치라이트를 주고 있어서 빛 확보도 어려웠다. 스튜디오 안에서 편하게 찍는 환경이 그리웠다.
“이야, 가완 씨 연기 잘하네. 걱정했는데 아주 좋아요. 이제 원 샷 땁시다. 가완 씨부터.”
첫 번째 촬영은 망했다. 와 이건 촬영 기술이나 내 문제가 아니다. 경험 부족에 현장 부적응으로 인한 결과였다. 스틸 컷을 찍을 때 자리싸움에서 밀려나면 카메라 옆에서 못 찍고 다른 곳에 가서 자리를 잡고 찍어야 하는데 좋은 사진을 찍을 확률은 꽤 낮다. 난 한숨을 쉬다가 아껴뒀던 아이템을 꺼냈다.
오랜만이구나 황금 왕좌. 무슨 드라마 촬영 현장에서 널 쓸 줄은 몰랐단다. 이 정도의 무기가 있어야만 오늘 촬영을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다. 다행히 카메라 옆 말고도 두 곳이 붉게 반짝였다.
내가 자리를 옮기자 스탭 중 한 명이 이상한 얼굴로 날 바라봤다. 스틸 샷 안 찍고 어딜 가냐는 얘기겠지. 다음 촬영 장면은 가완이가 호텔 종업원인 여자 주인공의 실수에 옷이 젖는 장면이다. 난 우습게도 촬영에 들어가기 전 가완이가 여자 주인공을 사랑스러운 눈으로 보는 장면을 사진에 담을 수 있었다. 실내 촬영이 끝나고 우리는 야외로 이동했다.
“컷! 다시 갑니다. 가완 씨 좋아하는 사람과 야외 데이트인데 너무 선수 같아요.”
피디가 점점 요구하는 게 많아진다. 제법 연기를 하니까 욕심이 생겼겠지. 특별 출연치고는 과분한 연기를 하고 있는데 말이다. 겨우 오케이 사인이 나자 살짝 웃음 지은 여자 주인공이 가완이의 어깨에 손을 얹고 귀에다가 말하는 모습을 사진에 담았다.
[등급을 초과하는 사진이 찍혀 보너스 포인트가 지급됩니다]다음 장면은 데이트가 끝난 후 가완이의 고백에 마음이 흔들리는 여자 주인공의 씬이다. 근데 왜 이곳이 좋은 자리일까. 난 여자 주인공의 뒤통수를 렌즈로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여자 배우분 때문에 가완이 얼굴도 보이지 않는다. 이런 곳에서 뭘 찍을 수 있다는 거지. 하지만 그런 의심은 조금 뒤에 풀렸다. 여자 배우분이 눈물을 흘리면서 살짝 옆으로 빠져줬다. 그리고 그 뒤에는 일그러진 가완이의 얼굴이 보였다.
“뭐 좋은 사진 좀 건졌어요?”
촬영 초에 유난히 날 건드리던 촬영 기사 조수 한 명이 내게 물었다.
“운이 좋아서 몇 개 건졌네요.”
난 그렇게 말하며 열 개 정도로 추린 베스트 샷을 그에게 보여줬다. 그는 인상을 쓴 채 사진을 보다가 날 쳐다봤다.
“이거 어떻게 찍은 거죠? 카메라 바깥에서만 찍으셨는데·· 어떻게.”
“뭐 운이 좋았죠.”
“아이고, 이건 운으로 치부할 게 아닌데.”
어느새 옆에 다가온 촬영 기사님이 내 사진을 보며 말했다. 그는 사진을 좀 볼 수 있냐고 내게 물었고 난 고개를 끄덕였다.
“와, 사진을 지금 본 게 좀 아깝네. 진작 봤으면 사진사님 옆에 보조 카메라라도 놓는 건데. 이 각도에서 더 멋지게 나온 거 같네. 종근아, 보고 배워라. 좋은 장면을 영상에 담으려면 이분처럼 남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각도에서 찍어 버릇해야 하는 거야.”
“아이고, 아닙니다.”
“허허, 난 그냥 아이돌 소속사에서 직원 한 분이 나온 줄 알았더니 사진사셨네. 진작 알았으면 얘기 좀 하는 건데. 사진만 봐도 현장이 잘 느껴집니다.”
“아직 배우는 단계라서요.”
“나중에 얘기 좀 하죠. 젊은 사람치고는 센스가 굉장해서 그럽니다.”
난 촬영 기사님의 명함을 받고 인사를 한 뒤 가완이에게 갔다. 가완이는 활짝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괜찮았던 거 같죠?”
“멋졌어. 너 가수 말고 배우 하라고 주위에서 그러겠더라.”
“형, 사진은요?”
“잘 나왔어. 저것 봐, 신 실장님 엄청 좋아하고 계시잖아.”
가완이 역시 사진을 보고는 엄지손가락을 내밀었다.
저녁 늦게 일이 끝나서 난 곧장 집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핸드폰을 확인해보니 라는 곳에서 메시지가 와 있었다.
[스튜디오 V입니다. 메시지 확인하시면 이 번호로 연락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중요한 얘기입니다.]라면 현재 한국에서 가장 잘나가는 스튜디오다. 규모도 매우 커서 본사 건물과 스튜디오 건물 몇 개가 있는 거로 알고 있다. 그런데 이곳에서 나한테 무슨 일이지? 같이 작업하는 게 있나?
– 길승우 작가님 연락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 네. 무슨 일이시죠?”
– 저희 쪽에서 길승우 작가님께 좋은 제안을 하고 싶어서요.
“무슨 제안이요?”
– 혹시, 스튜디오를 옮길 생각 없으십니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 난 시큰둥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전혀 없습니다.”
– 저 제안을 들어보시면 생각이 달라지실 겁니다. 우리는 유망한 사진작가들에게 최대한 많은 연봉과 기회를 부여하는··
“저기 말씀은 감사한데, 전 옮길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보수도 만족하고 지금 상황에 아주 완벽히 행복해하고 있습니다. 이런 전화하지 말아 주세요.”
난 전화를 끊고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나 정말 많이 컸구나. 이제 이런 곳에서 연락도 다 오네. 난 콧노래를 부르며 집으로 향했다. 집으로 들어가자 군식구 에브리아가 ‘어서 오세요.’라는 말을 했다. 내가 어머니를 바라보니 한국말을 좀 알려주고 있다고 말하셨다. 에브리아와는 며칠 후 언루트와 함께 화보집을 찍을 예정이었다. 몸을 씻고 TV를 틀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눈처럼 하얀 화이트 파이.”
뭐야? 다시 찍은 건가? CF가 엎어진 줄 알았던 난 TV에 빈아 씨의 모습이 나와 당혹감에 빠져있었다. 그러나 곧 현장보다 몇 배는 더 좋은 표정을 하는 빈아 씨의 모습을 보고는 잘됐다 싶었다. 축하할 일이다. 그러고 보니 여기서 보수가 계약보다 꽤 들어왔다.
식사를 하고 좀 쉬고 있는데 과자 광고 때 연락처를 주고받았던 김민기 씨가 연락해왔다.
“네, 길승우입니다.”
– 저번에 같이 작업했던 김민기입니다. 기억하시죠.
“그럼요, 며칠 지나지도 않았는데. CF 재촬영한 모양입니다. 지금 TV에서 봤어요.
– 아, 잘 해결됐습니다. 모두 길승우 씨 덕분이죠. 하하. 따로 감사하다는 말 남겼어야 했는데 요즘 좀 바쁜 시기라 늦었습니다.
”괜찮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죠?”
– 다름이 아니라 이번에 JR그룹 자동차 CF를 찍게 됐습니다. 지면용 사진으로 길승우 씨를 섭외하고 싶어서요. 물론 소속사에도 얘기해뒀습니다만 직접 제안을 하고 싶어서 연락드렸습니다.
“아, 저야 영광이죠.”
JR 자동차는 지면 사진이면 광고 사진 중에는 가장 노출이 많은 사진일 것이다. 어차피 광고 사진이야 기획적인 면은 클라이언트 측에서 다 짜 줄 테니 난 요구에 맞춰서 최선을 다하면 되겠다는 생각을 가졌다.
– 음, 참고로 말씀드리면 길승우 씨는 저희 CF 감독님이 적극 추천을 하셨습니다. 길승우 씨는 지면 광고를 찍을 예정이에요. 가족, 아이, 여자, 남자, 스타일 정도로 주제를 분류해서 모든 걸 맡길 생각입니다.
“··네? 제가 정하는 건가요?”
– CF 감독님이 지면 광고는 사진사의 역량에 맞춰서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셔서요. 다음 달 중반쯤에 촬영을 할 계획이고요. 촬영 컨셉을 제 메일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저희가 좋다 나쁘다고 평가는 하지 않을 겁니다. 다음 달 중반에 만나서 컨셉 촬영을 위한 회의도 할 생각이고요.
“일단, 알겠습니다.”
– 결심이 서면 이번 주까지 꼭 연락 주십시오. 페이는 최고 수준으로 지급될 겁니다.
역시 대기업이라 그런지 지면 광고도 요란하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기회이긴 하다. 내 주제에 이런 기회를 차버리는 건 안 되지. 난 일단 하는 쪽으로 마음을 굳혔다.
***
김민기는 장현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길승우 씨한테 연락드렸습니다. 아마 할 것 같아요. 근데 찍기 전에 알려야 하지 않을까요?”
“뭘, 알려. 뭐 이미 다른 작가가 사진 진행하고 있다는 거?”
“네. 알리지 않으면 말이 나올 것 같아서 그럽니다.”
“솔직히 난 그분 사진 다 그렇고 그렇거든. 뭔가 특별함이 없어. 그러니까 글로벌 광고로 가면 다 잘리는 거지. 내수용이잖아.”
“하지만 적어도 한국에서는 알아주시는 분입니다.”
“개뿔, 다 젊을 적 인맥으로 연명하는 사람인데. 이번에 찍는 것도 위에서 내려온 오더 아니야. 그 사람으로 하라는.”
“그렇기는 합니다. 그러니까 더더욱 말해야 하지 않을까요?”
“아니, 말하지 마. 그리고 한번 느껴보라고 해야지.”
“뭐를요?”
“수준 차이를.”
장현호는 길승우가 찍은 사진들을 보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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