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grapher Gil seung woo RAW novel - Chapter 55
57화 관찰
난 레포트와 사진을 들고 김형세 교수님의 방에 와 있었다. 원래는 일주일 뒤에나 와야 하지만 해외로케촬영 일정이 겹쳐 그 날 시간을 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김형세 교수님이 시간을 내주었고, 난 최선을 다해 레포트를 완성했다. 교수님은 내 첫 번째 레포트를 읽으시고는 나를 바라보고 입을 여셨다.
“뭐랄까, 상당히 파격적인 마무리구나. 사진에 어설프게 철학을 담아내려고 노력하는 것보다 충동과 감정에 의해 찍은 사진이 어떤 생각을 담고 있는지 알아내고 부족한 면을 보충하겠다는 말이지?”
“얼마 전에 비슷한 경험이 있었어요. 전 눈앞에 흥미로운 피사체가 있어서 찍었는데, 그게 비난을 받을 만한 일이었던 거죠. 예를 들자면 지금 눈 앞에 펼쳐진 장면을 찍는다면 좋은 사진이 나올 거라는 걸 알고 있어요. 근데 상황을 앞에 두고 생각을 해보면 그 사진은 비난을 받을 수도, 찬사를 받을 수도 있는 사진이 찍힐 거라는 걸 느끼게 됩니다. 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진사의 본능이냐 시대가 요구하는 이성이냐에 관한 싸움일까?”
“거기까지는 생각을 못했습니다. 하지만 일단 전 찍고 보자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비난을 받는다고 해도 충동을 이겨낼 만한 철학이 제게 박혀있지 않은 사진가의 잘못이죠. 전 아직 발전 중이고 미성숙한 존재인데 적립되지 않은 철학 때문에 셔터를 누르는 걸 망설인다면 더 불투명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아요.”
“일단 무슨 말인지는 알겠어. 하지만 대상이 된 피사체에 대한 존중은 잃지 않으면 좋겠구나.”
“에? 그냥 넘어가는 건가요?”
난 이대로 쉽게 넘어가는 김형세 교수님의 저의가 궁금했다. 김형세 교수님은 인자하게 웃으며 입을 여셨다.
“네가 말했다시피 아직 발전 중인 학생이니까. 충고는 나중에 해도 될 것 같아서 말이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까 궁금하기도 하고.”
많은 시간을 고민하고, 혼날 각오를 하고 쓴 의견인데 이렇게 받아주셔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두 번째는 빛의 아방가르드 포토그램의 대가라 불리는 분의 전시회를 보고 적은 레포트였다. 김형세 교수님은 레포트를 읽고는 입을 여셨다.
“사진의 특별한 능력은 오직 빛의 작용 덕분에 일순간에 기록되는 객관적인 이미지를 낳는 잠재력에서 나오는 거지. 빛에 대한 접근에 따라 하나의 풍경에서 수십, 수백 개의 이미지가 나올 수 있단다. 솔직히 지금 제출한 레포트에는 아까 같은 확실한 의견은 없구나, 너무 접근이 조심스러워.”
“말씀대로 아직 빛에 대한 접근이 어려워요. 지금 정만종 선생님께 교육을 받고 있긴 한데 희미한 실마리만 보인다고나 할까요.”
“호오, 만종이가 교육을? 어떤 교육이지?”
“그냥 빈 공간에서 빛의 흐름을 느끼라는 말밖에는··”
김형세 교수님이 어이없는 웃음을 지으시면서 의자에 몸을 기댔다.
“그 친구 교육 방식은 모르겠네. 그런데 뭐 그런 교육을 받으면서 실마리를 잡아? 너도 모르겠다.”
모든 레포트를 본 김형세 교수님께 난 요즘 가장 고민인 문제를 얘기했다.
“너무 범위가 큰 질문일 수 있는데 무생물인 물체에게 사진사의 철학을 담을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김형세 교수님은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풍경 사진이 그렇지 않니? 똑같은 풍경이지만 찍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보이지.”
“음, 질문이 잘못됐네요.”
“아주 잘못됐지. 무슨 의도로 그런 질문을 꺼냈는지는 알겠다. 요즘 광고 사진을 찍던데 그것과 관련이 있니?”
“지금까지 전 인물을 통해 뭔가를 표현하려고 했는데 무생물을 통해서도 똑같은 일을 할 수 있나 고민 중이에요. 결과물도 나쁘고.”
“일단 내가 해 줄 수 있는 조언은 관찰력이 좋아야한다는 거다. 일상적인 소재로 비범함을 만들기 위해서는 필수요소지.”
“어렵네요.”
“관찰력이 사진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라는 건 기본상식이지. 예를 들자면 처음 사진에 철학을 입혔다고 평가되는 앙드레 케르테츠는 평생 스스로를 아마추어 사진가라고 여겼다. 왜 그랬을까?”
“찍은 사진이 만족스럽지 않아서일까요?”
“일단 사진 하나만 보자.”
교수님은 컴퓨터를 뒤적거리더니 사진 하나를 내게 보여주었다. 접시 위에 포크가 올려져 있는 평범한 사진이었다. 정말 평범한 사진인데 특별했다. 난 그 이유가 뭔지 사진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림자.”
“보는 눈이 뛰어나구나. 그림자가 어떻지?”
“포크의 그림자가 포크가 ‘여기’ 존재한다는 걸 알려주고 있네요. 포크가 사진의 주인공인 줄 알았는데 그림자가 주인공이에요.”
“이게 1920년대에 그가 찍은 사진이지. 관찰력은 경이로울 정도야. 하지만 그가 스스로를 아마추어 사진사라고 여긴 이유는 그렇게 생각해야 신선한 시선을 유지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새로운 시선을 꾸준하게 유지하기 위해 스스로를 채찍질한 거지. 앙드레 케르테츠는 현대 사진의 시작점이자 사진을 기록물이 아닌 느낌을 담은 예술의 도구로의 전환점을 제시한 작가야. 그런 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관찰력이었다는 걸 기억하면 좋겠구나.”
난 집으로 돌아오면서 케르테츠라는 사진작가에 대해 많은 것을 찾아봤다. 사진의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사람인 줄은 알았지만, 작품을 일일이 보는 건 처음이었다. 1920년대에 현대인들처럼 일기를 쓰듯 셔터를 눌러 보고 느낀 것을 그대로 사진에 담았다는 점이 눈에 보였다. 더 놀라운 건 그렇게 여러 사진을 담아내면서 자신의 존재감이 드러난다는 점이었다.
“나는 무엇인가 극적인 장면이 일어나길 기다리거나 찾지 않고, 그저 보기만 한다.”
난 그의 말을 곱씹으며 여러 가지 생각을 할 수 있었다.
***
난 해외 촬영의 컨셉을 정하기 위해 제이필터 뮤직 본사로 찾아갔다. 다섯 명의 남동생들과 가는 첫 해외 촬영. 하나도 기대가 되지를 않는다. 개인적으로는 러버걸스랑 갔으면 했는데 아직 구매력이 떨어져서 다른 패션 관련 회사나 방송사 간의 협력이 없으면 힘들다고 한다.
“형, 안녕하세요.”
그런 협력 없이 해외 촬영으로 찍은 사진집을 찍을 수 있는 그룹의 리더 차혁이가 내게 먼저 인사했다. 곧이어 졸린 눈을 비비며 나머지 멤버들도 차례차례 회의실로 들어왔다. 오늘 모인 이유는 해외 촬영 컨셉을 의논하기 위한 자리. 자신들의 첫 사진집인 만큼 직접 컨셉에 참여해서 사진을 찍고 싶다고 말했다고 한다.
“너희 모두 되게 힘들어 보인다.”
난 회의실에 널브러진 다섯 명의 동생들이 측은해 한마디 했다.
“연말·연초가 정말 행사가 많아요. 진짜 우리니까 버티지.”
“겨울 관련 행사에 1순위가 우리래요. 형 덕분이죠.”
“가 이렇게 히트칠 줄은 몰랐어요. 이곳저곳에서 행사가 많이 잡히네요.”
여행지는 일본 홋카이도 삿포로. 여행지를 알고 있는 것만으로 촬영 컨셉은 쉽게 알 수 있다. 난 그나마 눈이 초롱초롱한 유군에게 말했다.
“여행지는 삿포로래. 대충 어떤 컨셉인지 알겠지?”
“온천있어요? 온천 갔으면 좋겠다.”
“온천도 있겠지만, 거기 눈 되게 많이 내려. 거기서 열리는 눈 축제는 세계적인 축제지.”
“와! 그럼 축제 보러 가요?”
“아니, 축제는 2월일걸.”
“그럼 거기서 뭐하죠?”
“아마도 예쁜 배경 바탕으로 눈밭에 구르지 않을까 싶은데. 너 공부 안 해왔니?”
유군은 초롱초롱한 눈으로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차혁이가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대충 조사했는데 아무래도 소속사에서 겨울 왕자 컨셉으로 찍으라고 노골적으로 강요하고 있는 거 같아요. 전 뜨거운 호주로 가고 싶었는데··.”
“뭐 회의할 필요 없겠네.”
“안 돼요! 형, 우리 더 이상 그 복장 하기 싫단 말이에요.”
차혁이의 말에 신호가 고개를 들며 입을 열었다.
“왜, 난 좋은데.”
“너랑 유군이는 아주 좋아하더라. 행동도 왕자같이 하고, 처음 우리가 앨범 낼 때 계획이 뭐였는지 생각도 안 나지? 짐승돌이였잖아! 파워풀한 춤과 노래로 모든 팬을 매료시킨다는 그 일념 하에 열심히 연습했던 나날을 생각해봐.”
그 말에 차혁이가 발끈하며 말했다. 난 차혁이의 말에 하나의 컨셉이 생각나서 입을 열었다.
“그럼 차혁아, 눈밭에서 웃통 벗고 김 모락모락 나는 모습 찍어볼까?”
“잠깐만요, 형. 팬들이 원하는 모습과는 다르지 않을까요?”
그때 잠자코 있던 신 실장님이 입을 여셨다.
“괜찮아. 여러 컨셉으로 찍어놓으면 좋잖아. 팬들도 여러 모습을 보고 싶어 할 거야.”
그 말에 다른 멤버들은 차혁이를 원망스럽게 바라봤다. 왜 쓸데없는 얘기를 해서 차가운 겨울에 웃통을 벗게 만들었냐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더는 내게서 쓸데없는 말이 나올까 걱정됐는지 그들은 적극적으로 의견을 말하기 시작했다. 아마도 촬영량은 겨울왕자 컨셉 반, 거친 모습 사 분의 일, 일상 모습 사 분의 일 정도로 진행될 것 같았다.
***
겨우 퇴근 시간 가까이 되어서야 스튜디오에 도착했다. 스튜디오에는 영효 선배와 경훈 선배만 자리하고 있었다. 오늘 선생님과 미선 누나는 야외 촬영 때문에 들어오지 않는다고 한다. 난 선생님과 해외 촬영을 몇 번이나 다녀온 영효 선배에게 다가갔다. 영효 선배는 작업하던 걸 멈추고 날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왜?”
“저, 3일 뒤에 저 소속사 애들하고 해외 촬영가거든요. 근데 사진을 찍는다는 목적으로 해외에 나가본 적이 없어요. 선배는 많이 나가봤잖아요. 어떻게 해야 하죠?”
영효 선배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면서 입을 열었다.
“어디로 가는데?”
“일본이요.”
“다행히 한국하고 비슷한 곳에 가네. 가본 적은 있고?”
“삿포로로 가는 게 거긴 처음이에요. 옛날에 가족들이랑 온천 여행 간 적은 있었죠.”
“음, 일단은 현실을 마주하고 인정해야 해. 아무리 많은 상상을 하고 갔어도 상상과 현실의 괴리감은 있기 마련이거든.”
이 말이 맞는 것 같다. 확실히 가기 전 예상하는 여행지의 풍경과 가고 난 후 보게 되는 여행지의 풍경은 사뭇 다르다.
“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주한 현실 안에서 자기 식대로 흘러가는 흐름을 찾는 게 중요한 것 같아. 예를 들면 현지에서 처음 보는 피사체를 찍어보고 내가 어떻게 찍고 있는가에 대해서 고찰해야 해. 가까운 나라라고 해도 색감이나 풍경이 다르거든.”
난 해외여행 경험을 떠올리며 영효 선배의 말을 곱씹었다. 말하자면 영효 선배의 조언은 해외에서도 기준이 되는 사진을 찍으면서 자기 페이스를 찾으라는 말이다. 영효 선배는 또 뭔가를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그리고 욕심을 부리면 안 돼. 아무래도 시간이 제한되니 아무리 예쁜 그림이 보이더라도 버릴 때는 버릴 줄도 알아야 하지. 모두 다 담으려고 하다가는 이도 저도 안 되는 사진이 나오거든. 그리고 이건 선생님 조언이야, 내가 한 말의 연장선인데 낯선 풍경에 집중하고 정체성을 좀 줄이는 게 좋다고 하시더라.”
“선배는 어땠어요?”
내 말에 영효 선배는 뭔가를 깊게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관찰하는 게 중요한 것 같아. 여행지의 느낌이나 빛의 흐름이나 냄새 같은 걸 기억하게 되면 좋은 사진이 많이 나오더라고.”
빽빽한 일정이 주어진 내게는 실천하기 힘든 조언이었다. 영효 선배의 말을 듣다 보면 결국엔 좋은 사진을 찍는 법은 이어진 것 같다. 관찰과 빛, 사진사의 철학. 이 모든 것이 알맞게 배치되면 좋은 사진이 나올 확률이 높아진다. 어떤 것은 홀로 해낼 수 있고 또 어떤 것은 운에 맡겨야 한다. 문득, 사진과 인생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드는 건 왜일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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