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grapher Gil seung woo RAW novel - Chapter 57
59화 겨울 왕국으로 (1)
“정말 딱 한 번만 살려주라. 응, 부탁 좀 하자.”
언루트의 화보촬영 전날 아침, 갑자기 회사로 찾아온 친구의 등장에 유수민 대표는 머리가 아파졌다. 이번 화보촬영은 그동안 고생한 언루트 멤버들에게 휴식 시간을 줄 겸해서 넉넉히 일정을 잡아놨는데 이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 PD인 친구 한 명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래도 이번엔 좀 곤란해. 이미 숙박이나 항공 쪽도 다 잡아놔서 방송 스텝 끼어들 여지가 없어. 야, 그리고 어떻게 하루 만에 방송 협조를 구하냐.”
“그러기에 미리 얘기해줬으면 좀 좋아. 요즘 아이돌 여행은 핫한 아이템이라고.”
“유효 기간 다 지난 것 같은데.”
“스테디셀러 몰라, 스테디셀러. 인기 있는 아이돌의 해외여행이면 케이블 쪽은 다 달라붙을 거다. 그냥 여행 프로그램도 먹히는 시대인데 언루트 정도의 아이돌이 함께 가는 여행이면 반응이 대단할 거라고. 항공편이나 숙박은 걱정하지 마. 내 알아보니까 어떻게 맞출 수는 있겠더라고. 넌 그냥 허락만 하면 돼.”
“그냥 온전히 화보 촬영에만 집중하고 싶은데··.”
“야, 우리 방송국이 언루트 데뷔했을 때 어떻게 해줬냐. 신인 때 바로 음악 프로그램에 넣어줘, 제일 먼저 신인상 줘, 프로그램 예능에도 불러줬잖아.”
유수민은 친구의 말이 사실이었기에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당시 친구인 PD는 케이블 방송사 내에서 꽤 힘을 지녀 그의 그룹을 이곳저곳에 꽂아주곤 했다. 유수민 대표가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자 PD는 입을 열었다.
“그리고 우리 국장한테 말해서 여비 빵빵하게 받아올 테니까 같이 좀 가자.”
“좋아, 일단 나는 좋은데 허락 좀 맡고.”
“야, 대표가 된다는데 누구한테 허락을 받아. 벌써 재계약 걱정하는 거야?”
“아니, 그쪽이 아니라, 사진작가님 때문에.”
PD는 유수민 대표의 말에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대체 대표가 왜 사진사에게 허락을 받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이고, 길 작가님. 저 유수민 대표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그리고 좀처럼 보이지 않은 저자세로 전화를 하는 그의 친구를 보며 PD는 사진작가의 정체에 대해 더욱 궁금해했다.
***
나와 에브리아는 공항 내에서 언루트와 스탭과 합류하기로 했다. 그녀에게 이번 여행이 방송에 나간다고 알려주자 그녀는 몹시 기뻐하며 메이크업에 공을 들였다. 우리는 버스를 타고 공항으로 향했는데 에브리아는 잠을 설쳤는지 버스를 타자마자 깊게 잠이 들었다. 그 모습이 귀여워 보여 난 셔터를 눌렀다.
“길승우 작가님! 여기에요. 언루트 멤버들은 팬들이 너무 몰려서 출국장으로 미리 들어가 있어요.”
얼굴이 익은 여성 코디 한 명이 날 발견하고는 다가와 말했다. 그리고 에브리아를 보더니 감탄사를 내뱉었다.
“와~, 이 분이 우리 공주님이죠. 정말 예쁘시네요. 이건 티켓이에요. 길승우 작가님은 비즈니스석이에요. 언루트도 이번에 처음으로 비즈니스석에 타고요. 아, 정말 대표님이 요즘 돈 팍팍 쓰시는 거 같아요.”
나 역시 생전 처음 구경하는 비즈니스석 티켓을 바라봤다. 그리고 코디에게 말했다.
“이 친구랑 자리 바꿔줄 수 있어요?”
“네? 네? 왜요?”
“공주님이잖아요. 오늘부터 촬영 있는 거로 아는데 좋은 컨디션 유지해야지요.”
코디는 실장님께 말해보겠다며 출입구로 우리를 안내했다. 출국장에 들어가니 언루트 멤버들이 의자에 나란히 앉아있는 모습이 보였다.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었는데 맞은편에 팬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카메라를 들고 열심히 그들을 찍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후와, 출국장 들어오려면 보안검색에 출국심사까지 해야 되지 않나요? 팬들이 엄청나네.”
“진짜로 따라가는 애들도 있고 수수료 버리고 표 환불하는 애들도 있어요. 점점 심해져서 걱정이에요. 애들 숨은 쉬어야 할 것 같은데.”
코디는 언루트 멤버들과 같이 있는 실장을 호출했고 신 실장은 나를 보고 달려왔다. 난 꾸벅 인사를 하고 입을 열었다.
“난리네요.”
“네, 비밀리에 간다고 했는데 세상에 비밀은 없나 봅니다. 그런데 정말 비즈니스석 저 모델분한테 양보하시려고요? 대표님이 싫어하실 텐데. 겨우 2시간 반인데 힘들게 뭐가 있겠어요.”
“아, 맞다. 방송 얘기 들으셨죠?”
난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번 여행에 방송 팀이 합류한다는 얘기를 어제 대표님에게 들었다. 일정에 크게 방해는 되지 않는다고는 하지만 신경이 쓰이는 건 사실이다.
“일정에 큰 변화는 없겠죠?”
“네, 자기네들이 알아서 찍는다고 들었는데 아직 만나보질 못해서 걱정입니다. 일단 모에레누마 공원에서 만날 예정입니다.”
난 모든 걸 내려놓은 듯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언루트의 멤버들을 보여 실장님께 물었다.
“아직 쟤들은 모르고 있죠?”
“네, 방송사에서 말하지 말아달라고 하더라고요.”
카메라 없이 자유를 느끼고자 했던 그들의 희망이 무너지는 순간을 볼 수 있겠구나.
조금의 기다림이 끝나고 우리는 비행기에 탑승할 수 있었다. 에브리아 역시 비즈니스석은 처음 타보았는지 꺄악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난 다른 곳이라고 말을 해줬더니 조금 실망한 표정을 지었지만.
“형, 형. 저분이 이번에 우리랑 찍는 모델이에요? 되게 예쁘다.”
“몇 살이에요? 뭐요? 정말 실제 나이가 그렇다고요? 아니, 뭐랄까 그 나이로는 보이지 않는다고 해야 하나? 그렇다고 예쁘지 않은 건 아니에요.”
난 언루트 멤버들에게 잘 좀 챙겨달라는 말을 남기고는 자리로 향했다. 난 창 바로 옆에 앉고 내 옆에는 신 실장님이 앉았다. 곧 비행기가 뜨고 난 창 너머로 하늘을 바라봤다. 이렇게 하늘만 바라보고 있어도 지겹지 않을 것 같다.
“길 작가님. 길 작가님!”
난 신 실장님의 소리에 잠을 깼다. 내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두리번거리니 승객들이 짐을 챙기고들 있었다.
“굉장히 피곤하셨나 봅니다.”
아니, 그렇게 피곤하지는 않았는데 잠을 너무 자버렸다. 산치토세 공항에 도착한 우리는 흥분된 마음으로 공항 밖으로 나섰다. 신 실장은 언루트 멤버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첫 번째 촬영 전에 뭐 좀 먹자. 근처에 괜찮은 회전초밥집 예약했으니까 마음껏 먹어.”
모두의 환호 속에 우리는 공항 밖으로 나섰다.
“추워!!”
“너무 춥다!”
러시아보다 위에 있고, 1년에 130일이 눈이 오는 지역답게 엄청 추웠다. 바깥으로 나오자마자 몰아치는 한파에 모두 놀랐다. 커다란 승합차 두 대로 우리는 공항을 떠났다.
***
회전 초밥을 마음껏 먹고 모에레누마 공원으로 도착하자 방송팀이 우리를 반겼다. 언루트 멤버들은 카메라를 보고 신 실장을 원망스러운 듯 바라봤지만, 실장은 애써 그 눈빛을 외면했다. 실망하고 있는 언루트의 모습을 카메라맨이 신나게 찍고 있다.
홍 피디라고 자신을 소개한 남자는 환한 표정을 지으며 이번 촬영 컨셉을 우리에게 말을 해줬다.
“이번 여행 코스는 최대한 안 건드릴 생각입니다. 일단 여행 중 벌어지는 예상치 못한 상황을 이겨내는 멤버들의 휴먼드라마가 됐으면 하는 마음이에요. 멤버들 간에 새로운 모습도 발견하고 뭐 이런 거 최대한 방해 되지 않게 촬영할 테니 힘써줘요.”
피디의 말에 언루트 멤버들은 장난스럽게 야유를 하고 있었다. 옷을 갈아입는 동안 난 오늘 촬영을 위해 일단 공원을 돌아볼 예정이었다. 겨울에 이곳이 사진을 찍기 좋다는 말은 들었는데 어떤 점이 좋은지 눈으로 확인해야 했다.
“저, 뭘 찾고 계신 거죠?”
카메라를 든 VJ가 날 쫓아오며 말을 하고 있다.
“음, 찾는다기 보다는 확인하는 거에요. 저도 여기는 처음이니까 글이나 사진으로 본 장면을 구현할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서요.”
“좀 돌아보니까 어때요?”
“많이 걷지 않아도 다채로운 장면을 찍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지금 제가 있는 곳에서 빙글빙글 돌기만 하면 눈이 쌓은 동산, 피라미드 건물, 신비로워 보이는 숲. 이 세 가지 배경이 다 나올 수 있네요.”
“촬영에 문제는 없을까요?”
난 하늘을 보며 얼굴을 찌푸리고 입을 열었다.
“지금 눈이 조금 오고 추워서 빨리 찍어야 할 것 같네요. 오래 찍었다가 컨디션에 문제가 생길지도 모르거든요. 그리고 생각보다 눈이 많이 쌓여있네요. 특별한 촬영을 빼고는 모두 기다란 부츠를 신겨야할 것 같습니다.”
“촬영 컨셉은 뭔가요?”
“겨울의 설원에서 이뤄지는 동화 속 장면을 생각하고 있어요.”
“여기 눈이 없을 때 오면 유리 피라미드도 있고 꽃들도 예뻐서 좋은 색감이 난다는데 좀 아쉬운 마음은 없으신가요?”
“눈 쌓인 공원의 모습도 충분히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저에게 비밀병기들이 있잖아요. 겨울 왕자들이 아쉬움을 메꿔주겠죠.”
돌아가는 길에 VJ는 카메라를 내려놓고 내게 말을 걸었다.
“역시 방송 출연이 있으셔서 그런지 자연스러우시네요.”
“자연스럽긴요. 정신없이 말을 했는데요. 근데 방송팀 구성이 굉장히 적던데 괜찮나요? 갑작스럽게 방송 결정이 났다고 들었거든요.”
“어쩐지 며칠 전에 급박하게 우리를 찾더라고요. 우린 방송사 소속이 아니라 외주업체 소속 VJ입니다. 저희가 취재, 촬영, 편집, 조명 모두 혼자서 해요. 그래서 미리 고백하는데 방송에 통일성이 없을 겁니다. VJ들 간에 개성이 서로 다르니까요.”
스텝들이 모여 있는 곳에 돌아오자 멋지게 옷을 차려입은 언루트 멤버들과 에브리아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 난 그들에게 다가가 입을 열었다.
“자, 시작하자.”
처음에 찍을 컷은 멤버 단체 샷. 신비로운 겨울 숲 속에서 걸어 나오는 모습을 찍는 컨셉 이었다. 모두 자리를 잡고 내 신호 맞춰 나를 향해 천천히 걸어왔다.
“표정이 너무 굳었다. 유군아, 아무리 추워도 티는 내지 말자. 크게 웃지 말고, 오히려 지금은 무표정한 것이 좋아. 그래·· 표정은 좋은데.”
난 촬영을 중지하고 실장에게 다가갔다.
“신 실장님. 얼음 구할 수 있나요?”
“구할 수는 있겠지만 왜죠?”
“날씨가 너무 추워서 애들이 숨 쉴 때마다 하얀 김이 나와요. 얼음 물고 있다가 촬영 직전에 뱉으면 안 나오거든요. 한 명이면 괜찮은데 다섯 명이나 되니까 계속 사진에 찍히네요.”
언루트 멤버들은 내 말을 듣고 야유 소리를 내며 입을 열었다.
“우우우, 추운데 옷 얇게 입고 촬영시키는 것도 힘든데 얼음을 먹으라니.”
“길승우 사진작가는 반성하라! 반성하라!”
난 그들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열 내다가 몸에서 열이 올라 하얀 김이 눈에 띄면 내가 어떻게 할 것 같니?”
그들은 내 말에 야유를 멈췄다. VJ는 그 모습을 카메라에 담으며 웃음을 보였다. 얼음이 공수되고 다시 촬영은 시작됐다. 그들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긴 촬영은 독이 되기 때문에 촬영에 집중했다. 등급보다 높은 사진이 찍혔다는 문구가 몇 번 나와 난 촬영을 끝내고 다음 촬영을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첫 촬영이 빨리 끝났는데 아쉬움은 없으세요?”
“이번 촬영은 촬영 전에 계획을 철저하게 해서 괜찮습니다. 머릿속에 그려놓은 상황대로 모델들이 잘 움직여 줬어요.”
두 번째 촬영은 에브리아와 멤버 간의 단체 또는 개인 컷. 촬영 준비가 끝나고 에브리아는 걸친 겉옷을 벗었다. 민소매인 하얀 드레스를 입은 에브리아가 붉은 부케를 들고 내 앞으로 나왔다. 대체 저 의상은 누구 아이디어인 줄 모르겠다. 날씨도 이렇게 추운데 민소매라니. 그나마 드레스의 길이가 길어서 다행이다.
“자, 준비 끝났으면 찍습니다. 가완이부터 가자! 에브리아 손을 잡고 동산을 향해 걸어가는 모습이야. 가완아 살살 밟아 생각보다 깊으니까.”
영하의 날씨 속에 우리들은 성공적인 화보 촬영을 위해 애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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