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grapher Gil seung woo RAW novel - Chapter 73
73화 대타의 품격 (1)
난 아침에 걸려온 마 실장님의 연락을 받고 좀 흥분된 상태였다. 마 실장님은 내게 급하게 의뢰가 들어왔는데 굉장히 좋은 기회가 왔다고 말을 꺼냈다. 의뢰는 곧 개봉할 영화의 포스터를 만드는 일이었다. 유명한 배우가 나오는 스릴러물로 이변이 없는 한 올해 초 가장 많은 관객이 보장된 영화라고도 말을 했다.
“이 기회에 영화계 쪽에 인맥을 넓힌다면 작가님께는 물론 우리 소속사에게도 커다란 도움이 될 겁니다.”
난 무조건 하겠다고 외쳤고 영화 관계자들과는 내일 아침 영화사에서 만나기로 했다. 난 스튜디오로 출근하자마자 정만종 선생님께 달려가 이 사실을 말씀드렸다.
“영화 포스터라··. 어떤 영화지?”
난 마 실장님께 들은 정보를 그대로 선생님께 말씀드렸다. 화려한 주연 배우들의 이름과 이미 성공이 보장된 작품이라는 말과 함께 말이다. 하지만 선생님은 씁쓸한 웃음을 짓더니 입을 여셨다.
“힘들 거다. 몹시 힘들 거야. 포스터는 네가 만드는 것이 아니야. 영화사의 입김이 세게 들어가지. 그냥 주연 배우 사진을 잘 찍는다는 거에 목적을 두거라.”
“어? 선생님도 영화 포스터 제작에 참여하시잖아요. 해외에서 상 받은 영화 포스터 제작도 하셨고 꽤 많은 영화 포스터 작업을 하신 거로 알고 있는데.”
“난 블록버스터 영화는 해본 적이 없단다. 아니, 아주 옛날에 하나 했었지. 그 이후에는 손도 대지 않고 있다. 너도 이번에 겪어보면 이유를 알지도 모르겠구나. 미선이가 나를 도와서 작업을 많이 해봤으니 가서 도움을 청해 보거라.”
선생님은 다른 때와는 달리 조언 없이 나를 내보냈고 난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방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미선 선배에게 달려가 도움을 청했다. 미선 선배 역시 내 말을 듣고는 걱정되는 눈빛으로 날 바라봤다.
“나도 그 영화 아는데, 포스터 일에 대해서는 크게 기대하지 마.”
“왜요? 내 생각을 담은 영화적 함축 장면이 많은 사람에게 노출되는 작업이잖아요.”
“일단 네 생각을 담을 수 없을 가능성이 커. 한국 영화 포스터에는 반드시 주연 배우의 얼굴이 나오게 한다는 암묵의 룰이 있어. 사진가의 개성이 나타나기 힘든 일이야.”
“아니 왜요? 이상한데 제가 본 영화 포스터에는 특이한 것도 많아요. 제가 몇 개 찾아봤거든요.”
“대부분 외국 현지 버전 포스터거나 독립영화 일 거야. 의심되면 찾아봐. 아니다. 일단 찾아보고 얘기하자. 인터넷에 조금만 검색하면 외국 영화 국내용 포스터가 쫘르르 나오거든. 다 보면 느끼는 게 있을 거야.”
난 미선 선배의 말에 곧장 자리에 앉아 국내용 영화 포스터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결과는 참담했다. 창의력 넘치는 헐리우드 영화 포스터는 국내로 들어오면 강박적으로 배우 얼굴을 들이대듯 찍어놓은 이미지와 쓸모없는 문구로 빡빡하게 채워진 촌스러운 제품 패키지 디자인으로 변해버리고 있었다.
“선생님이 뭐라고 하셨니?”
어느새 미선 선배가 내 뒤에서 서서 묻고 있었다.
“그냥 주연 배우 사진을 잘 찍는다는 거에 목적을 두라고 하셨어요.”
“응, 그런 거야. 아까 들으니까 전에 포스터가 표절 논란이 크게 나서 급하게 찍는 작업이라며. 그럼 포스터 디자이너하고 의견 나눌 틈도 없이 주연 배우들 몇 시간 후딱 찍고 일은 끝날 가능성이 커.”
“저는 영화 보고 영화의 장면을 사진 하나로 남길만한 컨셉을 짜서 찍을 줄 알았는데··.”
“그런 건 단가 적은 다양성 영화 작업에서나 가능한 일이야. 그런데 요즘은 그냥 스틸 컷으로 포스터 대체를 많이 하니까 굉장히 드문 일이지.”
난 머리를 긁적이며 미선 선배에게 물었다.
“제가 그럼 어떻게 해야 될까요?”
“일단은 주연 배우 사진을 잘 찍어야겠지. 버전이 몇 개 나올 텐데 분명 얼굴이 클로즈업된 버전도 만들 거야. 배우의 얼굴을 진실하게 찍어.”
“진실하게요? 무슨 말이에요?”
“영화 현장이 아니라 따로 연출된 사진을 찍을 텐데, 본편 영화에서 나오는 분위기로 인물 사진을 찍어내야 해. 요즘 관객들은 배우의 영화 이미지와 포스터 이미지가 다르면 귀신같이 알아내거든. 내 충고는 이 정도야. 내일 영화 관계자들하고 디자이너 만나면 너도 찍을 수 있는 허용 범위를 알게 될 거야.”
다음날, 나는 걱정을 한가득 안고 H&Y 필름으로 향했다. 난 직원의 안내를 받고 회의실에 들어가자 이미 그곳에서는 두 사람이 있었다. 한 남자가 내게 다가오더니 손을 뻗으며 말했다.
“반갑습니다. 전 기획피디 이창섭이라고 합니다. 내가 우연히 에로 영화 포스터를 보게 됐어요. 그래서 그쪽에 연락을 했더니 길승우 씨라고 하지 뭡니까. 최근에 가장 핫한 사진작가분이라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습니다. 자, 이쪽은 함께 일할 디자인 휴체 스튜디오의 홍명화 씨.”
젊은 여자분이 내게 인사를 했다. 기획피디는 한숨을 내뱉고는 우울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잘 알겠지만 지금 시간이 없습니다. 원래 작업한 포스터를 회수하고 새 포스터를 찍어야 해요. 오늘 오후에 주연 배우 세 분을 이곳에 오실 예정입니다.”
“아, 그러면 사진작가분께 설명해 드려야겠네요. 저희도 어제 급하게 컨셉을 짜느라고 명확하게는 설명이 힘들겠지만 일단 확정된 것만 보여드릴게요.”
명화 씨가 말했다. 그녀가 가져온 컨셉은 컨셉이라고 말할 것도 없었다. 세 배우의 상반신을 클로즈업한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 거였다.
“두 남녀에 의해서 일상이 파괴된 남자 주인공의 느낌을 살리고자 만들었어요.”
겁먹은 한 남자가 무표정한 두 명의 남녀 배우 사이에 서 있는 모습이었다.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그런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각자의 특징을 담은 개인 컷도 찍었으면 하고요.”
어떤 특징을 담고 싶은 건지 도저히 이해가 가질 않는다. 이대로 찍으면 되는 건가? 정말로? 내가 의문을 가지고 있을 때 기획 피디가 콘티를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리뷰 포스터는 없나요? 시사회 해서 좋은 의견 많이 받아놨는데.”
“그런 포스터를 만들어서 뭐하시게요. 어차피 반전도 있는 영화인데 그런 정보들을 넣으면 번잡스럽기만 하잖아요.”
“끄응, 그렇긴 한데. 투자자들이 원할 수도 있어서요.”
“기획피디님 저희 시간 없어요. 그런 포스터는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자고요.”
컨셉에 대해서 뭐라고 해주길 바랐던 기획피디는 아무런 의견도 없어 보였다. 난 의견을 내지 않았다. 지금 여기에서 모두를 감탄시킬 아이디어가 있는 것도 아니고 의견을 내세울 만한 위치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단 난 사진을 찍기 전에 이건 해봐야겠다 싶은 건 있었다.
“배우들 오기 전에 영화를 볼 수 있을까요?”
“네? 그건 왜죠?”
“아무래도 영화를 봐야 피사체의 감정을 더 잘 담을 수 있거든요.”
“··그래요? 편집실에 말해 놓겠습니다.”
이건 기본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 이런 요구가 특이해 보인 모양이다. 몇 시간 뒤 나는 영화를 다 보고 밖으로 나왔다.
영화는 괜찮았다. 한 남자가 우연히 알게 된 두 남녀의 알 수 없는 악행으로 인생이 나락에 빠지는 내용이었다. 중간쯤에 남자 아버지의 악행으로 인해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는 뉘앙스를 풍기지만 이건 사실이 아니었다. 결말쯤 되어서야 이유가 제대로 밝혀지며 당해왔던 남자가 반전을 꾀하는 그런 내용의 영화였다.
“영화는 재미있네.”
난 중얼거리며 가장 기억에 남은 배우들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리기 시작했다. 난 기획피디에서 두 개의 소품을 요청했다. 얼굴이 비칠 정도의 검은 대리석 테이블과 화장대였다. 그는 왜 그런 걸 준비해야 되는지 이유를 알고 싶어 했다.
“각 주인공은 모두 이중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잖아요. 그걸 표현해보고 싶습니다.”
“무슨 말인 줄은 알겠는데·· 아마도 쓰이지 않을 가능성이 높아요. 디자이너 쪽 하고도 상의를 해야 합니다.”
“추가 촬영 시간은 없잖아요. 소품만 준비해 주시면 제가 설득해 보겠습니다.”
기획 피디는 찝찝한 얼굴로 내 말을 들어주겠다고 했다.
시간이 지나고 난 촬영장에 조명 세팅을 돕기 시작했다. 자연스러운 느낌이 선호되는 추세상 거기에 맞는 조명을 세팅을 해야 했다. 그리고 메이크업을 마친 배우들이 한둘씩 들어오기 시작했다. 오늘 찍을 세 분은 모두 연기 면에서는 알아주는 인물들이었다.
천동선 씨는 세 분 중 가장 나이가 많은 40대 초반의 인물로 영화판에서 알아주는 악역 전문 배우였다. 구나영 씨는 30대 초반의 여배우로 폭넓은 감성을 잘 연기해낸다는 평을 가지고 계신 분이셨다. 마지막으로 30대 초반의 민혁진 씨는 수비적인 섬세한 연기로 호평을 받는 배우다.
“이게 무슨 날벼락이야. 어이구, 모두 고생하십니다.”
천동선 씨가 쓴웃음을 지으면서 촬영장의 스탭들에게 인사를 했다. 그는 기획피디에게 다가가 입을 열었다.
“갑자기 불려 와서 제대로 나올지나 모르겠어.”
“포스터가 그 지랄날 줄 몰랐어요. 형님이 스타트를 잘 끊어주셔야 일이 일찍 끝납니다. 부탁드립니다.”
“그런데 뭐 찍어야 되는 거야? 그냥 인상 쓰면 되는 거야? 감독님이 오셔야 되는데 지금 해외에 계신단 말이지.”
“자세한 사항은 이분들이 말씀해줄 겁니다.”
기획피디는 명화 씨와 내게 천동선 씨를 소개했고 우리는 인사를 나눴다.
“선생님은 저기에 서서 여기 컨셉대로 포즈를 잡아주시면 됩니다. 표정은 눈을 부릅뜨시고 최대한 원한이 느껴질 정도의 웃음 아시죠? 그렇게 관객이 느껴지게··.”
“어이, 잠깐만.”
명화 씨가 컨셉을 가지고 와서 급하게 말하자 천동선 씨의 얼굴이 굳어지며 말을 막았다. 컨셉이 적힌 종이에 얼굴을 처박고 있던 명화 씨가 얼굴을 들고 어리둥절한 모습으로 입을 열었다.
“왜 그러세요?”
“뭐 하는 사람인가?”
“네? 전 휴체 스튜디오 디자이너··.”
“우리 같은 사람하고 처음 일해 봐? 포스터 작업 현장 처음이지?”
천동선의 말에 그녀는 누군가 자신을 도와줄 사람을 찾는 것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난 미선 선배가 한 말이 생각이 났다.
‘몇몇 배우들은 자존심이 굉장히 세. 감독도 아닌 아마추어가 연기 지시를 하면 아마 크게 화를 낼지도 모르니까 조심해.’
아마도 저 배우분이 그런 타입인가 보구나. 명화 씨는 그의 위압감에 얼굴이 새파래진 채 겨우 입을 열었다.
“저·· 포스터 일은 처음이 아닙니다.”
“야, 얘 좀 내보내. 기본적인 예의가 없잖아. 감독도 내게 이 따위로 연기 지시를 안 내려.”
기획피디가 얼른 달려와 그들 사이에 서서 입을 열었다.
“형님, 급하게 섭외하느라 초짜 불렀어요. 이 친구는 주로 외화 전문인데 포스터 디자인 잘 뽑아내더라고요. 좀 봐주세요.”
“아니, 이건 아니지. 이런 건 사전에 얘기해야 하는 거 아니야? 뭐? 눈을 부릅뜨고 입을 어쩌라고? 그렇게 표정을 지으면 그런 감정을 전달할 수 있다고 믿는 모양이지?”
이러다가 쓸데없는 다툼으로 시간을 잡아먹겠다 싶어 난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서서 입을 열었다.
“저기, 한철진이가 처음 민상훈에게 대들었을 때 그가 느낀 감정을 다시 표현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내 말에 천동선 씨는 시선을 돌리고 이건 또 무슨 놈이냐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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