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grapher Gil seung woo RAW novel - Chapter 95
95화 어나더 클라스 (2)
며칠 뒤에 난 에브리아와 함께 경기도 외곽에 위치한 럭셔리한 호텔로 향하고 있었다. 내가 운전대를 잡고 옆에는 에브리아가 콧노래를 부르며 밖을 쳐다보다, 날 쳐다보다 그러고 있다. 난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에게 물었다.
“걱정 안 돼?”
“같이 하잖아. 맞아?”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승우 믿어.”
“아니, 촬영을 나 혼자 하는 거 아니잖아. 어제도 일찍 자라고 하니까 늦게 잤지? 밤에 마루로 나오는데 방 안에서 웃는 소리 다 들리더라.”
“잔소리 싫어. 낮잠 많이 잤어.”
“··아, 그러면 다행이긴 한데.”
난 에브리아의 대답에 말문이 막혔다. 낮잠을 잤다는데 뭐.
성혜 씨의 주도로 촬영 날짜는 빨리 잡혔다. 쇼핑몰 쪽에서 내가 부탁한 소품과 의류를 준비해오고, 은경 씨에게 부탁해서 오늘 하루 에브리아 메이크업을 해줄 사람도 부탁했다. 옷에 따라서 화장이 바뀌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아, 그리고 성성커플(내가 지은 이름이다)이 결성된 이유에 대해서도 그제 알아냈다. 성태가 집 안에만 있다가 현기증을 느끼고 비틀대던 어느 날 ‘이러다가 죽겠구나’라고 생각해서 근처 헬스장으로 가서 생기게 된 인연이었다. 자세한 얘기는 해주지 않았는데 성혜 씨가 그곳에서 곤란한 일을 겪고 있는 와중 성태가 그 일을 어떻게 해결해줬다고 한다. 둘이 마주 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데 무슨 일인지는 짐작도 가지 않는다.
“저기야?”
에브리아가 멀리 보이는 커다란 건물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호텔은 미선 선배가 추천해준 곳 중 하나였다. 호텔 정원에 벚꽃나무가 많이 있어 봄에 가장 사진이 날 나온다고 했다. 게다가 호텔 내부 인테리어도 멋져서 좋은 사진을 많이 건질 수 있을 거라고 했다.
“응, 저기야.”
물론, 난 어제 이곳을 방문했다. 나 같은 초보자에게 사전 답사가 필수다. 눈으로 직접 봐야 기획한 대로 사진이 찍힐지, 바꿔야 할 것은 없는지에 대한 계산이 나오기 때문이다.
“반갑습니다. 전 조아홀릭 공동대표인 전흥수입니다. 여기 이쪽은 정보영 씨고요. 오늘 촬영을 맡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반갑습니다. 길승우라고 합니다.
차에서 내려서 호텔 로비로 가자 내 얼굴을 아는지 남녀 두 분이 내게 다가와 인사를 했다. 내가 인사를 하자, 여자분이 날 보고 웃으며 입을 열었다.
“성혜 언니한테 길승우 작가님 섭외됐다는 얘기 듣고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작가님이 찍은 사진은 거진 다 봤어요. 러버걸스 뮤직비디오부터 잡지 화보, 그리고 언루트 앨범 재킷하고 사진집까지. 아 사진집은 너무 좋아서 구매까지 했어요. 어머, 그러고 보니까 여기 이분 겨울 공주님이시네? 맞죠?!”
거의 내 팬 수준이다. 난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거리자 그녀가 ‘꺄악’소리를 지르며 에브리아의 손을 잡았다.
“그럼, 오늘부터 겨울공주님이 우리 브랜드 단독 모델?”
“일단은 1년··.”
“어머, 웬일이야! 저 그냥 외국인 온다는 말만 들었거든요. 잘됐다! 야, 흥수야 이제 우리 잘되는 것만 기다리면 돼.”
보영 씨의 말에 남자분이 흥분한 그녀를 잡고 입을 열었다.
“야, 일단 옷을 잘 만들어야지. 성혜 누나가 이렇게 좋은 판 깔아주셨는데, 그래도 성공 못하면 이거 다 우리가 만든 옷이 형편없기 때문일 거야.”
“얘는 무슨 초치는데 뭐 있다니까, 됐어. 길승우 작가님 오늘 잘 부탁드려요. 첫 번째 촬영은 어디서 하죠?”
난 보영 씨의 말에 프린터로 뽑은 종이를 건네주었다. 어제 현장 답사를 하고 내가 생각한 촬영 순서를 적어놓은 곳이다. 촬영장마다 입을 옷도 적어놓았으니 큰 문제가 될 것은 없어 보인다.
“그래! 내가 이런 사진가분을 원했다니까. 저번에 우리 찍었던 사람 생각나? 그냥 되는대로 막 찍고, 다시 찍어달라는 말에 불쾌한 표시 팍팍내고, 그리고도 모자라서 준비해 온 옷도 다 소화 못 시키고 다 찍으려면 추가 수당 달라고 했잖아. 역시 성공하는 사진가분은 다르다는 걸 이 종이 하나로 느낄 수 있다니까.”
아니 이런 건 다 하는 거로 알고 있는데 어지간히 이상한 사람을 골랐나 보다. 흥수 씨가 우리를 보며 입을 열었다.
“오늘 촬영할 호텔 방에서 모델분이 촬영 준비를 하면 될 것 같습니다. 507호로 가시면 됩니다. 아, 메이크업해주시는 분은 미리 그곳으로 가 계세요. 얘도 따라갈 겁니다. 모델분이 의상 착용할 때 도움을 줄 수 있을 겁니다. ··아마도.”
불안한 듯 내뱉은 마지막 말이 신경이 쓰인다. 우리는 함께 오늘 촬영할 507호로 들어갔다. 여자 셋은 방으로 들어가고 우리는 거실에서 뻘쭘히 그들을 기다려야 했다.
“아, 내가 만들었지만, 너무 예쁘다. 섹시하면서도 우아하고··, 이렇게 여성여성한 옷을 만들다니. 흥수야, 나 저거 피팅도 거의 안 했어. 그냥 딱 맞더라니까. 정말 모델에 따라 옷이 달라진다는 말이 맞구나.”
“보영아·· 사진 찍으시는 데 방해되잖아.”
에브리아는 레이스 원피스에 시나몬 색 니트를 입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생각보다 볕이 잘 들어서 별다른 조명 없이 괜찮은 사진을 뽑아낼 것 같다. 하지만 오늘은 좀 더 특별하게 찍고 싶다. 저번 뮤직비디오 때 썼던 아이템을 써봐야겠다.
내 이름을 사람들에게 인식시켜 준 사진을 찍을 때 썼던 아이템이다. 쇼핑몰 사진에 쓰기엔 아깝지만 에브리아가 모델이니 한번 힘을 줘봐야지.
“자, 여기 보고. 표정은 시크하게. 무표정으로. 표정 좋아.”
에브리아 하고는 개인 작업을 많이 한 터라 별다른 지시 없이 내가 원하는 표정과 포즈를 자연스럽게 지어준다. 정말 난 그냥 셔터만 누르면 될 정도다.
에브리아는 소파에 앉기도 하고 일어서서 주위를 살피기도 하며, 신발을 다시 신기도 했다. 그리고 그런 행동을 할 때마다 자기가 찍히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다는 듯 포즈는 완벽했다.
“그 포즈 좋다. 천천히, 천천히 움직여줘.”
한 번의 촬영이 끝나고 결과물을 확인하기 위해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생각보다 좋은 사진이 많이 나왔다. 옷 하나에 내가 찍은 사진 열 장 이상이 첨부될 거라고 했으니 A컷이 꽤 나와 줘야 하는데··.
“와·· 완전 대박. 거짓말 안 하고 이런 사진 보게 되면 나 변태처럼 사진을 탐닉하면서 하루를 보낼 거야. 이게 프로의 솜씨구나.”
“사진 충분해요?”
“장난쳐요?!”
보영 씨는 사진에서 눈을 떼지 않고 소리쳤다. 좀 부족할 수도 있지, 그거 가지고 저렇게 예민하게 굴 건 또 뭐냐.
난 투덜거리며 다시 에브리아를 불렀다. 다른 포즈도 한 번 시도를 해봐야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보영 씨가 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뭐 하세요? 아! 제··제가 장난치냐고 했던 말은 사진이 다 훌륭한데 뭐가 부족하냐는 말이었어요. 오해하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아? 된 건가요?”
“장난쳐요! 아, 아니 제 말은 이런 사진 찍어 놓고도 부족하다고 묻는 게 장난치는 거 같아서요. 무슨 예술작품 같아·· 이거 그대로 전시해도 될 것 같아. 신이여, 이게 정말 제가 만든 옷입니까.”
결론적으로 말해서 괜찮은가 본다.
몇 가지 촬영을 마치고 자켓 촬영을 위해 우리는 밖으로 나왔다. 보영 씨가 불안한 눈빛으로 날 보며 입을 열었다.
“이 옷은 좀 불안하니까 작가님 마음에 안 드시면 넘기셔도 돼요. 원피스 위에 입을 차분한 재킷을 만든다고 했는데, 어떻게 보면 인민군처럼 보이기도 해서··. 어머, 웬일이야.”
보영 씨는 에브리아가 재킷을 걸치자 소스라치게 놀라며 외쳤다. 난 에브리아를 보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아무리 봐도 그냥 예쁘기만 한데 뭐가 이상하다는 건지 알 수 없다.
“그냥 진행해도 될 것 같은데요.”
“하세요. 이건 찍으셔야 해요. 와, 이게 이렇게 사람 차별하는 옷이었나?”
에브리아는 검은 원피스 위에 회색 재킷을 입고 정원에 별장처럼 지어진 건물에 기댔다.
“옆모습 찍을 거야. 팔 한쪽 걷자. 그게 더 예쁘게 나오겠어. 보영 씨, 소품 중에 들만한 가방 좀 준비해주세요.”
난 가방을 에브리아 옆에 내려다 놨다. 몇 장을 찍고 난 에브리아의 정면으로 자리를 옮겼다. 에브리아는 바닥에 놓은 가방을 옆으로 메고 한 손으로 머리카락을 매만지는 모습을 연출했다.
“그 포즈 좋아, 손 잠깐 멈추고. 자, 이제 벽을 따라 걸어가.”
재빨리 자리를 옮겨 에브리아의 모습을 사진에 담았다. 그녀는 고개를 살짝 돌려 먼 곳을 응시하기도 하고 옆을 보면서 손으로 벽을 쓸기도 했다.
“훨씬 좋아졌어. 찍으면서 점점 실력이 는다.”
그렇게 준비해 온 촬영을 모두 마치게 되자 보영 씨는 나를 연예인 보듯 부담스럽게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정말로, 정말로 고마워요. 요즘 들어 내가 옷을 못 만드는 게 아닌가 하는 자괴감에 빠져있었는데 오늘 촬영으로 전 깨달았어요. 옷은 문제가 없는데 모델 쪽에·· 아! 아! 왜!”
흥수 씨는 보영 씨의 귀를 잡아당기며 말을 막았다.
“우리는 모델한테만 어울리는 옷을 만드는 게 아니야. 그리고 요즘 부진한 건 사실이다. 정신 차려.”
“야! 사진 못 봤어?”
“사진은 너무 좋더라. 사진 속 세계만 어디 동떨어진 느낌이 날 정도로 말이야. 그래서 난 더 걱정돼.”
“뭐가?”
“사진 속의 모델 착샷 보고 옷을 구입한 고객님이 실망할 모습이··.”
사진에 대해서는 만족하고 있으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귀한 아이템까지 쓰면서 만들어낸 사진인데 부디 이들에게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
***
며칠 뒤에 보영 씨로부터 연락이 왔다. 내 사진 덕분에 매출이 미친 듯이 늘고 있다고 하면서 정말 감사하고, 다음에 또 부탁한다는 말이었다. 그렇게 이 쇼핑몰 일은 이대로 진행을 하면 될 것 같았다.
변화가 일어난 건 그로부터 일주일쯤 지난 시점이었다.
[위에 첨부한 사진 보셨죠? 전 진짜 화보 보는 줄 알았음.모델 미모도 미쳤지만 사진도 미침]
– 이건 옷을 팔겠다는 게 아닌 것 같네 ㅋ
┖ 화보 찍으려고 쇼핑몰 부업하는 듯
┖ 옷이 안보인다..
– 진심 이건 대박이다, 물건을 파는 건지 사진전을 하는 건지
– 모델도 장난 아니네, 사람인가요? 천사인가요?
┖ 본 듯한 얼굴인디… 어디서 봤지?
┖ 천국에서
– 저 모델은 세상 살맛나겠다, 세계적으로 먹히겠어. 저런 애는 누가 데리고 가냐
– 굳이 흠을 잡자면 발가락이 못생겼을 것 같음.
– 상품사진 찍으랬더니 화보를 찍어왔어 ㅋㅋㅋ
┖ 옷을 팔고 싶은 거야, 사진을 팔고 싶은 거야?
– 이거 쇼핑몰 주소가 어떻게 되나요?
– 사진이 정말 좋긴 한데, 이런 모델이면 막 찍어도 예쁘겠다. 클래스가 달라
┖ 한국 활동하면 꼭 귀화해라
– 실제로 보면 숨도 못 쉴 것 같겠다
– 신고하겠음! ·· 혼인신고. 옷이고 나발이고 모델만 보인다.
– 근데 쇼핑몰 사진으로는 영 아닌 듯, 모델이 너무 예뻐서
┖ 여기 마누라가 옷 사서 좀 아는데 지금 엄청 잘나가요.
┖ 마눌님이 입으셔도 옷 예쁜가요?
┖ 묻지 마요 ㅠ.ㅠ
인터넷에 사진이 퍼지면서 쇼핑몰 쪽으로 모델과 사진 관련해서 문의가 너무 들어온다는 소식이 내게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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