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ck Me Up! RAW novel - Chapter 146
146. 안녕(1)
눈을 떴다.
회색빛의 하늘이 비쳐왔다. 익숙한 풍경. 대기실의 숙소였다.
나는 눈을 깜빡였다.
몸의 상처는 온데간데없었다. 수백 조각으로 갈라졌던 뼈도,온
갖 구멍에서 피를 토해내던 혈관도, 한계까지 찢어져 있던 근육도 언제 그랬냐는 듯 멀쩡해져 있었다.
살아남았다.
결국, 죽지 않았다.
‘이런.’
쓴웃음을 지으며 허리를 일으켰 다.
아무 통증도 들지 않았다. 평소처 럼 멀쩡했다.
단지 머리 한쪽이 조금씩 저릴 뿐 이었다.
침대 옆에 고이 놓여 있는 칼집을 벨트에 걸친 뒤 방을 나왔다.
1파티 숙소의 응접실은 비어있었 다. 시계를 보았다. 오후 2시 45분.
30층을 클리어하고 나서,한창 파 티를 준비하고 있을 시간이었다.
‘전후 파티였나.’
그때는 생존자가 꽤 많았다.
20명 가까이 살아남았으니까. 지금은 어떨까. 일일이 살피지 못
했지만,내가 신전을 가는 와중에도 사망 메시지는 계속해서 떠올랐었 다.
나는 광장으로 나왔다.
당연히, 파티 준비는 되어 있을 리 없다.
3층 광장은 텅 비어있었다. 열려 있는 보관소의 문으로 이셀이 날개 를 파닥거리며 수레를 옮기는 중이 었다.
[아,로키!]수레를 밀던 이셀이 다가왔다.
[일어났어? 깜짝 놀랐다니까! 안 죽은 게 용했어. 몸은 괜찮아?]“보다시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죽지만 않는다면 그 어떤 상처라 도 회복된다.
“그건 유품이냐?”
나는 수레를 들여다보았다. 손수레에는 다양한 물건이 들어
있었다. 옷가지부터 시작해서 편지 와 곰 인형,철제 컵,바느질 도구에 서 책에 이르기까지.
[응. 마스터가 보관하라고 명령했 거든.]이셀은 머리를 긁었다.
[그래 봤자 물품들의 주인은 몇명 안 돼. 여덟 명? 다른 애들은 보 관소에 못 들어가.]
“죽은 숫자는?”
[열세 명.]나는 혀를 찼다.
공격대의 절반 이상이 죽어 나갔 다.
파티 따위를 열 여유는 당연히 없 었던 것이다.
‘보관소에 들어가는 건 여덟. 나머 지 다섯 명은……;
그들은 무엇도 남기지 못한 채 서 서히 잊혀진다.
어쩔 수 없었다. 보관소의 자리는 한정되어 있으니.
[따라올래? 지금 문은 열려 있는 데.]“그래.”
나는 이셀을 따라 걸어갔다.
보관소의 입구는 광장의 외딴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수레를 밀고 들어가는 이셀의 뒤 를 쫓아갔다.
들어가자마자 무언가 독특한 향이 풍겨왔다.
맡아본 적 있다. 익숙하면서도 낯 설었다. 납골당의 향기였다.
내부도 비슷한 구조였다. 기다란 목제 진열장이 늘어서 있고, 진열장 의 칸마다 유품이 놓여 있었다.
“나더러 어떡하란 말이냐!”
누군가의 고함이 들렸다.
나는 시선을 옮겼다.
보관소의 구석에서 키샤샤가 주저
앉아 있었다.
“이건 전사다운 죽음도 뭣도 아니 지 않나……. 이럴 거였다면……
키샤샤는 눈물을 방울방울 홀리면 서 중얼거렸다.
“나를 혼자 남기고…… 너희들 은..,,
웅크려 있던 키샤샤와 눈이 마주 쳤다.
키샤샤는 눈물을 닦았다. “그대인가.”
“몇 명이나 살았지?”
“나 혼자야. 전부 죽었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내가 부족했던 것이야. 나를 믿고
따라와 준 일족을,나는 제대로 이 끌지 못했다.”
“나는……
키샤샤가 머리를 저었다.
“괜찮다. 원망하지 않아. 네가 아
니었다면 우리는 진즉에 전멸했겠 지. 너한테 맡긴다고 내가 결정했었 어.”
“혼자 있고 싶구나.”
키샤샤는 동족의 유품 앞에서 가
만히 앉아 있었다.
나는 등을 돌려 다음 칸으로 나아
갔다. 에디스와 로데리크,그리고 다른 두 명의 뒷모습이 보였다.
’2파티에도 희생자가 있었군.’ 항상 목을 움츠리고 다니던 소녀
가 보이지 않았다.
리리니라고 했었나. 이셀이 진열
장의 위 칸에 바느질 도구와 곰 인 형을 수납하고 있었다. 그 소녀의 물건인 듯했다.
나는 그들의 뒷모습을 잠깐 지켜 보다,다시 걸음을 옮겼다.
가장 왼쪽의 진열장. 복도의 구석
에 카티오를 제외한 1파티의 멤버 들이 모여 있었다.
”일어나셨소?”
기척을 눈치첸 벨키스트가 돌아봤 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표정. 침착하 기 그지없었다.
“궁수 꼬마가 추모식을 해야 한다 고 강력히 주장하더군. 훈련하고 싶 었…
네리사가 벨키스트의 정강이를 걷 어 찼다.
벨키스트가 눈썹을 찌푸렸다.
“무슨 짓이지? 아프잖나.’’
“눈치도 없는 새끼.”
벨키스트는 대꾸하지 않고 팔짱을 꼈다.
“선배라고 해도 신이 아니오. 싸우 다 보면 희생자가 나오는 것. 일일 이 연연하다간 끝이 없겠지. 이럴 시간에 더 강해지는 게 마법사 여자 를 위한 길이라 생각하오.”
“하루면 되잖아요. 하루면.”
제나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옆에서 같이 목숨을 걸고 싸웠다 구요. 그리고 저희를 지키기 위해 죽었어요. 이런 일도 못 해주나요?”
“그런 의미가 아니다만.”
벨키스트는 인상을 구겼다.
“오빠, 이리 와요. 언니도 기다렸
을 거예요.”
“죽은 사람은 기다릴 수 없…… 윽!”
네리사가 벨키스트의 명치에 주먹 을 먹였다.
벨키스트는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이건 좀…… 아픈……
“사서 매를 벌어,이 자식은.” 나는 벨키스트를 지나쳤다. 진열장의 맨 끝의 위쪽,사각형의
유리 안에 이올카의 유품이 담겨있 었다.
모피 코트와 고급 털목도리,화려 한 부채. 연구를 대가로 내가 선물 해준 것들이었다. 평소에 잘 손질했 는지 전부 말끔한 상태였다.
마스터였다면 보관소에서 영웅 생 전의 영상과 일러스트를 볼 수 있지 만,나는 영웅일 뿐이다. 그 어떤 신 호도 눈앞에 떠오르지 않았다.
“35층에 다시 갈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제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진열장을 열더니 하얀 편 지봉투를 꺼냈다.
”언니의 유서예요. 오빠가 제일 먼
저 읽는 게 좋을 거 같아서 남겨뒀 어요.”
“나더러 읽으란 거냐?”
“당연하죠. 언니도 그걸 바랄걸
요.”
나는 별말 없이 봉투를 뜯었다.
내 기억으로 이 유서는 20층에 출
전하기 직전에 작성했던 것이다. 다소 시간이 지났지만,별 상관은
없겠지.
나는 봉투를 뜯으려다 말고 손을 멈췄다.
낯선 기분이었다. 이 세계에 왔다 는 것을 실감한 뒤,나는 누가 죽든
상관하지 않겠다고 결심했었으니 까.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어떻게 되든 나아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지 금은.
‘……거참.’
나는 봉투에서 편지를 꺼냈다. 꾸깃꾸깃한 종이를 펼친 뒤 읽어
갔다.
<어,이거. 유서 맞나요?〉
<유서를 쓰고 싶은 기분은 아닌
데!〉
상당한 악필.
휘갈긴 듯한 글자였다.
<유서는 죽을 사람이 쓰는 거 맞 죠? 저하고는 관계없겠네요! 전 절 대 안 죽어요. 무조건 살아서 돌아 갈 거예요. 그러니까 이건 그냥 낙 서예요. 제 마음대로 쓸 거라구요. 어차피 아무도 읽지 않을 테니까 요.〉
<야! 한 이스라트!>
<멍멍이,말미잘,똥개! 바보! 멍
청이! 바보! 죽어!〉
<처음에 볼 때부터 마음에 안 들
었어. 왜 날 이렇게 괴롭혀? 이 자식 아, 나도 본가에서는 오냐오냐 자랐 어. 허구한 날 놀리고,못살게 굴고! 이상한 일은 잔뜩 시키고. 반드시 복수한다 이거야! 나, 천재 마법사 이올카를 우습게 본 대가를 똑똑히 치르게 해줄 거야!〉
<메롱,약오르지,까꿍!>
’까꿍’ 옆에는 찌그러진 원이 혀를 내민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사람 얼굴을 그린 것 같은데,꽤나
알아보기 힘들었다.
< 야!〉
<좀만 잘해달라구!〉
유서는 거기서 끝이었다.
나는 편지를 접었다.
”다 읽었어요? 무슨 내용이에요?” “쓸데없는 낙서만 적어놨는데.” 나는 웃고는 제나에게 편지를 건
넸다.
제나는 편지를 읽어내리다가,
……언니.”
진열장에 머리를 묻은 채 흐느끼 기 시작했다.
“먼저 간다.”
나는 빠른 걸음으로 보관소를 빠 져나왔다.
광장을 지나쳐 숙소의 방으로 향 했다. 문을 걸어 잠근 뒤 의자에 앉 았다.
‘……하아.’
생각 이상으로 아프다.
내가 겪어왔던 그 어떤 고통보다.
머리가 터질 것 같이 저려왔다.
” 이 셀 »
[어?]빛과 함께 이셀이 나타났다.
“죽은 영웅은……
나는 입을 다물었다.
몰라서 묻는가. 살아날 수 없다. 픽 미 업의 랭커였던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살아날 수 있어.]이셀이 가슴을 내밀었다.
[100층까지 클리어하면 말야. 멸망한 세계가 새로 만들어진다구. 영 웅들은 거기서 새 삶을 사는 거야. 기억은 잃게 되겠지만.]
“그러냐?”
[그렇다구. 이사님한테 직접 들었 어.]“알았다.”
나는 손을 내저었다.
이셀은 내 근처를 한 바퀴 돌더니
빛이 되어 사라졌다.
‘처음 알았군?
몰랐던 사실이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 마스터.〉
눈을 떴다.
왼손에서 반지가 검은빛을 발하고 있었다.
"유르넷인가."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어떻게든 됐지. 각성도 했고."
<느껴집니다. 예전보다 한층 성 장하신 것 같군요.〉
그렇지.
필수 관문이라 일컬어지는 한계 돌파에 성공했다.
나는 피식 웃었다.
< 마스터.〉
"뭐냐."
<니플헤임으로 돌아오시지 않겠 습니까? 마스터의 그런 모습은 보고 싶지 않습니다.〉
"웃기는 소리를. 이제 와서 도망치
란 거냐?"
<저는 단지…….〉
"두 번 다시 그런 말은 하지 마
라."
유르넷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나는 말을 이었다.
“미안하군. 상태가 별로인 것 같
아.”
<이해합니다. 저도 그럴 때가 있 었으니까요.〉
나는 기억을 떠올렸다.
니플헤임의 다섯 명이 처음부터
같은 파티였던 것은 아니다. 각자
다른 파티에서 동료의 수많은 죽음 을 경험했다. 그 와중에 하나로 합 쳐졌던 것이다.
<마스터,극복하실 거라 믿고 있 습니다.〉
"당연하지. 나를 뭘로 보고." 하루의 후퇴일 뿐이다.
내일이 되면, 내일이 된다면……. 나는 잊는다.
'아니.’
묻는다.
묻는 것이다.
다시는 떠오르지 않도록, 가슴의
깊은 곳에.
"아무것도 바뀌지 않아. 나는 탑을 올라갈 거다."
<예. 마스터가 탑을 정복하실 그 날을,저희는 고대하고 있나이다.〉
"알면 됐어."
<부디 편안한 휴식을.>
유르넷의 목소리가 끊겼다.
나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잠시 후,
[픽 미 업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암케나가 접속했다.
[로딩이 끝났습니다.] [TOUCH !(선택)]메인 화면으로 들어선 암케나는 곧장 대기실의 화면을 움직였다.
내가 앉아 있는 장소가 확대됐다. 암케나는 다음 조작을 이어갔다.
[선물 상점!] [5,000골드로 '군마 조각상'을 구 매합니다.] [3,000골드로 '화관'을 구매합니다.] [1,000골드로 '꽃목걸이’를 구매 합니다.]
'음?'
[아이템 합성을 시작합니다!] [선택 재료 – 군마 조각상,화관,꽃목걸이] [완성 아이템 – 알 수 없음] [합성하시겠습니까?] [Yes(선택) / No] [쿠당탕탕탕!] [요정 파워!] [Good! ] [합성 완료!] ['애도하는 군마 조각상’을 획득하 셨습니다.] ['애도하는 군마 조각상'을 '한(★ ★ ★)’에게 선물합니다!]
눈앞에서 빛이 흔들리더니 군마 조각상이 떨어졌다.
나는 조각상을 낚아했다. 말의 머 리에는 백색 화관이,목에는 꽃으로 만든 목걸이가 씌워져 있었다.
'애도하는 군마 조각상?'
암케나는 내 반응을 지켜보려는
듯 화면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나는 어이가 없어져 웃음을 터뜨
렸다.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이런 짓을 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 나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터벅터벅 걸어가 진열대 위에 군
마 조각상을 올려놓았다.
조각상 중에서도 유달리 튀는 모
습이 었다.
'……애도.'
너는 게임 속의 영웅을 추모할 수 있는 건가.
로키였던 나는 그러지 못했다. 임 무 도중 죽어간 영웅들을 소모품으 로 취급했을 뿐.
'재밌군.'
배치를 바꿔놓았다.
중앙의 애도하는 군마 조각상 옆 으로 다른 조각상들이 질주하고 있 었다.
[보관소의 기록을 재생합니다.] [선택 영웅 一 '이올카(★★★)']이올카의 일러스트와 상태창이 떠 올랐다.
이올카는 특유의 자신만만한 웃음 을 띠고 있었다.
아무런 변화도 없는 그 화면을 암 케나는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기다려라.’
오래 걸리지 않아.
100층까지. 아주 잠깐의 인내였
다.
암케나가 접속을 끊고 밤이 깊어 져 새벽이 지날 때까지,
나는 그녀의 그림을 지켜보고 있 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