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ck Me Up! RAW novel - Chapter 236
237. 엔딩 이후의(8)
타오니어로 귀환하는 도중,나는 유 르넷이 보낸 비공정에 갈아탔다.
이셀의 로그 조작은 끝난 상태. 암 케나는 내가 멀쩡히 타오니어로 복귀한 줄로만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오래 속일 수는 없으니,최대한 빨리 볼일을 끝마쳐야 했다.
나는 바로 근처 섹터에서 대기하고 있던 브륜힐트01로 향했다. 브륜힐트 01은 현 니플헤임 함대의 기함이기도 했다. 간이 사령실의 역할을 충분히 대신할 수 있었다.
“설마,진짜로 이겨버릴 줄은……
유르넷이 뜨거운 김이 오르는 차를 입가로 가져갔다.
후루룩.
“대단한 남자로군요,마스터와 비교할 법도 합니다. 우위는 물론…… 마스터 겠지만요.”
유르넷이 나를 보며 빙긋 웃었다.
뒤이어 유르넷의 부관,니슬레드가
테이블에 찻잔을 올려놓았다.
나는 쓴웃음을 짓고는 녹차를 들이
켰다.
눈앞에는 픽 미 업 커뮤니티 사이트의 리포터 뉴스가 떠올라 있다.
깜짝 레이드 이벤트에서 랭커를 대거 포함한 토벌단이 패퇴했다는 소식이 었다.
댓글란은 뫼비우스에 대한 비난과, 통제와 폭거를 일삼은 랭커들을 향한 욕설로 점철되어 있었다.
그도 그럴 게 토벌대의 승산은 충분 했다.
아무리 엘 시드가 랭킹 1위의 강자
라고 해도 수백 명의 랭커를 상대로는 쉽게 승리를 점할 수 없다. 그것은 무 련도,니플헤임도,다른 그 어떤 랭커 라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들은 자멸했다.
수만 명의 시청자가 보는 앞에서.
한창 레이드를 벌이던 도중,역천의 서를 누가 먹느냐에 관한 문제로 싸 움이 붙은 것이다.
그 시작은 리버티 길드의 라이브아 웃과 솔로 PVP 유저인 뚝배기박살.
말리던 랭커들도 어차피 너도 역천의 서 먹으러 왔지 않냐는 도발에 넘어가 한바탕 내전이 시작되었다.
뫼비우스 측에서 사전에 보상을 공 지했다면 이런 식의 지리멸렬한 결과는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어떻게든 합의를 봤겠지.
문제는 레이드 도중 뫼비우스가 갑 작스럽게 역천의 서를 걸어버린 것이다.
랭커들에게는 분배에 대한 문제를 논의할 시간이 없었다. 그 틈을 엘 시 드는 놓치지 않았다.
‘유대가 없다._
토벌대라고 뭉뚱그려 놓았지만,그 들은 단일 세력이 아니었다.
제각기 자신의 이득만을 바라는 하 이에나였을 뿐. 따라서 레이드는 수백
대 일이 아닌,아군과 적이 없는 난전이 되고 말았다.
여기에 사망 보호 시스템은 보너스.
부활 패널티가 있지만,일단은 되살릴 수 있으므로 그들은 한결 가벼운 마 음으로 옆의 마스터에게 싸움을 걸었 겠지.
사실 월드 레이드 도중 이런 사태가 처음이었던 것도 아니다.
그럴 때는 내가 중심점을 잡아주곤 했었다. 물을 흐리는 놈이 나오면 앞 서서 때려잡는 식으로. 이번 레이드는 보상이 보상이 었으니 내가 나섰더라도 결과는 변함이 없었겠지만.
‘운영 참 개판이네.’
조금 더 머리를 굴렸으면 엘 시드를
손쉽게 제압했을 수 있었을 텐데. 아마 뫼비우스에서는 처음에 역천의
서를 주지 않으려고 했다가, 토벌대가 밀리기 시작하니까 급하게 보상을 걸 었던 모양이다.
그 결과 토벌대의 누구도 역천의 서를 얻지 못했다.
제각기 대량의 희생자와 서로에 대한 앙금을 남긴 채 흩어지고 말았다.
그리하여 이번 이벤트는 월드 레이드 최초의 실패가 되었다.
‘시기를 잘 잡았군.’
무모한 듯 보였지만 뒤돌아 생각해 보면 완벽한 돌격 타이밍이었다.
그때 랭커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역천의 서를 어떻게 할 거냐며 회의를 하고 있었을 것이다. 회의 결과가 나 오기 전,그들이 합의점을 찾기 전에 엘 시드는 자신의 군세와 함께 랭커 들의 부대 속으로 돌격해버렸다.
자살 돌격으로 보였던 그 전술이,
승패를 결정짓는 선택이 되었다.
‘그렇다고 해도.’
아무리 놈이 최강의 랭커라고 해도,
단순한 영웅이나 몬스터의 단계를 초월한 경지에 을라서 있다고 해도,
자신이 먹어치운 영웅을 자유자재로 꺼내 부릴 수 있는 신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압도적인 전력 차로 패배가 확실한 상황에서 승리의 길을 찾아냈다고 해도.
나는 앞을 보았다.
지휘실 계기판에 홀로그램 창이 떠 올라 있었다.
놈을 가리키는 붉은 화살표는 일직 선으로 니플헤임을 향해 접근하고 있 었다.
“꿋꿋이 오겠다는 건가.”
나는 말을 이었다.
“우리의 승산은?”
“함대가 출전할 경우,100%입니다.” 유르넷이 망설이지 않고 답했다. “함대를 출전시키지 않는다면?” “100% 정도 되겠군요.”
“아예 1파티만 내보내면?”
“100%입니다.”
“그렇겠지.”
나는 녹차를 마저 들이켰다.
엘 시드의 임기응변은 훌륭했다. 순간적으로 최상의 전술을 찾아,자
신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선택을 했다. 하지만…….
한창 내전을 이어가던 토벌대 측도
상황이 안 좋게 돌아가자 마음을 바 꿔 먹었다.
이대로라면 죽도 밥도 안 된다는 사 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레이드 후반부 에서는 결국 포위전 구도가 나오고 말았다.
엘 시드는 그 공세를 버텨냈다.
버틴 것으로도 모자라 반격했다.
단 한명.
단 한 명의 영웅이 랭커 수백 명,영 웅으로 따지면 수천,수만 명의 공세를 이겨낸 것이다.
“그릇이 깨졌다고 했었나?”
유르넷이 눈을 내리깔았다.
“전투에서 그가 썼던 힘은 계정 하 나를 새로 만들고도 남을 정도였습니 다. 다만 간섭력을 과하게 사용한 나 머지,능력에 영구적인 손상을 입은 것 같습니다.”
천 단위의 정예 영웅을 소환했으며, 그들이 죽으면 되살렸다.
그 과정을 무수히 반복했다고 한다. 게다가 녀석에게는 마스터 클래스의 암살자들이 수도 없이 들이닥쳤다고 한다. 쉬지 않고 힘을 써야 했겠지.
‘그릇이 깨졌다.’
유르넷의 보고에 의하면 전투 후반
부에서는 피를 한가득 토하기도 했다고 한다.
정복의 군세 중 대다수를 잃었고, 라스칸다와 더불어 삼영웅이라 불리던 렐테아와 키르자크도 거듭된 공세에 죽었다고 했지. 엘 시드는 죽은 그들을 두 번 다시 되살리지 못했다.
“그래도 니플헤임으로 오고 있다?”
“제게는 죽여달라는 뜻으로 보이는 군요.”
유르넷이 중얼거렸다.
맞는 말이야.
내 눈에도 그렇게 보인다.
‘놈은 7성의 특징인 합성 능력을 상
실했다.’
추측이지만 거의 확실하다.
만약 합성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면,
힘을 보충하기 위해,내가 아닌 다른 랭커들 쪽으로 갔을 테니까.
니플헤임을 이겨도 간섭력을 획득 할 수 없다.
그런데도 여기로 온다고?
“이건 어디까지나 제 가설입니다만.” 유르넷이 헛기침을 했다.
“그자는 아마 이번 전투가 아니었어도
오래 버티지 못했을 겁니다. 하나의 세계를 품었다지만,맨정신으로는 그 크기를 감당할 수 없을 테니까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7성의 또 다른 특징 중 하나는 합성
효율이 엄청나게 높다는 것.
나도 비슷한 특성을 공유하고 있다.
셰이를 먹어치운 영향이 아직도 남아 있다는 거지.
‘합성을 남용하면 자아가 뒤섞일 수도 있다고 했었나.’
리디기온이 내게 했던 경고였다.
7성은 합성 효율이 높지만 그것은
희생양의 데이터를 본체에 그대로 덮 어씌우는 것과 같다. 즉,여러 명의 정 보가 뒤섞여서 잡탕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 짓을 엘 시드는 수천 명 단위로 해버렸다.
진즉에 미쳤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신과 가까운 능력으로 보였던 그 소 환술의 이면에는 무시무시한 패널티가 잠자고 있었던 것이다.
“그자는 늦어도 오늘 저녁 즈음엔 접촉 지점에 도달할 것 같습니다.”
접촉 지점은 니플헤임의 앞마당이자, 브륜힐트01이 주둔하고 있는 섹터였다.
레이드가 일어나지 않았을 때의 원래 계획은,여기서 모든 힘을 동원해서 엘 시드와 맞붙는 것이었다.
나는 여기서 니플헤임에 주둔하고
있는 전 함대와 1파티를 포함한 100 위권 이내의 전투직 영웅들을 이용해서 놈과 총력전을 벌이려고 했었다.
테이블의 왼쪽에는 황금색 인장이 박힌 서류가 놓여 있다.
모두 합쳐 다섯 장. 각기 다른 구역에 흩어져 있는 1파티의 인원을 호출하기 위한 명령서였다. 그중에는 시리스의 것도 섞여 있다. 대기실에 없다고 하 지만,니플헤임의 명운이 달린 이번 전투에서는 부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과거 일이 되어 버렸지만.’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필요 없겠지. 나는 서류를 정 리해서 테이블 아래에 쑤셔 넣었다.
여기로 오고 있는 것은 랭킹 1위이자, 최강의 7성 영웅인 엘 시드가 아니라 타고 남은 그 녀석의 찌꺼기일 뿐이 니까.
“마스터,명을 내리신다면,이곳에 도착하기 전에 그자를 처리할 수도 있습니다.”
“암살자라도 보내려고?”
“그래야겠지요. 만에 하나,엘 시드가 마스터에게 접근하면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까요.”
“냅둬라. 내가 그렇게 쫄보처럼 보
이냐. 약해졌어도 뭐가 있을지 모르지. 괜히 쪼개서 보냈다가 죽으면 우리만 손해야.”
나는 픽 웃고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놈이 끝까지 오겠다면,기다렸다가
확실히 잡는다.”
“분부대로.”
유르넷이 머리를 숙였다.
이제 내가 할 일은 없다.
녀석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 외에는. “아,그 전에.”
지휘실을 나가기 전,나는 유르넷을 돌아보았다.
유르넷이 고개를 기울이며 나를 보
았다.
“그놈 뒤에 하이에나가 달라붙어 있을 거다. 3함대 보내서 처리해. 괜찮겠지?”
“그것도 분부대로 하지요.”
유르넷이 싱긋 웃더니 재차 고개를 숙였다.
3함대는 니하쿠가 소속해 있는 특 수전 전용 부대.
숫자는 적어도 믿을 만한 정예로 이 루어져 있다. 이벤트가 끝난 뒤에도 엘 시드의 뒤통수를 치려는 벌레들을 말끔히 처리해줄 것이다.
‘내게 보내는 경고라.’
나는 텔의 웃음소리를 떠을렸다.
이제는 흘려넘길 수 있다고 생각했 지만, 화가 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나와 엘 시드가 충돌하는 것도 그 녀석의 의도대로라고 생각하니,자다 가도 눈이 뜨일 지경이었다.
‘나는 랭킹 1위도 밟아버릴 수 있으니 까불지 말라는 건가?’
그놈은 일부러 자신과 엘 시드와의 대화를 내가 들을 수 있도록 했다.
어쩌면 그놈의 목적은 나한테 있었 는지도 모르지.
일종의 과시.
나는 이 정도 일도 가능하다.
1위처럼 되기 싫으면 알아서 설설
기어라.
쾅!
나는 복도의 벽을 걷어찼다.
[으와아와오아! 왜 그래,로키! 내커피가 맛이 없어서 그래?]
뒤에서 커피포트를 나르던 이셀이
화들짝 놀랐다.
뭐,인턴 모습도 이제는 나름 잘 어 울린다.
[화내지 마! 커피 더 맛깔나게 탈 테 니까 제발 해고만은!]“해고는 무슨. 네 커피는 언제나 잘 마시고 있는데. 복사나 팩스도 완벽하고”
[그럼 왜 그러는 거야? 그 안개 마 녀가 또 일하라면서 갈궈?]’……유르넷한테 많이 당하고 있나 보네.’
나는 마저 걸음을 옮겼다.
시리스와 전임 이셀이 대기실을 떠난
지도 몇 달이 지났다.
이 녀석도 슬슬 진급할 때가 됐지. 이번 일이 끝나면 유르넷에게 넌지시
말해봐야겠다.
그리고 그날 저녁.
“준비는 완벽합니다. 설사 엘 시드가
일시적으로 전력을 되찾는다고 해도,
마스터의 몸에는 손끝 하나 대지 못 할 겁니다.”
브륜힐트01의 갑판 위.
나는 유르넷과 함께 하늘을 보고 있
었다.
넓디넓은 하늘은 황혼빛으로 물들어 있다.
하늘 저편에서 작은 점 하나가 이곳을 향해 다가오는 중이었다.
놈의 비공정은 나룻배에 가까울 정 도로 허름했다.
대포까지 갈 것도 없이 발리스타 한 발이면 산산조각 나고 말겠지.
[Danger!] [운명을 정복한 자] [라스칸다 엘 시드 Lv.99]그 위에 놈이 올라서 있었다.
600대를 넘나들던 레벨과 강대한
군세를 전부 잃은 채로. 혈혈단신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