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ck Me Up! RAW novel - Chapter 237
238. 엔딩 이후의(9)
불과 얼마 전,그는 단신으로 랭킹 2위에게 승리를 거머쥐었던 강자였다.
또한,만 명이 넘는 토벌대 앞에서도 결국 살아남아 여기까지 왔다. 저 녀 석이 아니었다면 누구라도 하지 못했을 일이었을 것이다.
레벨99.
어느덧 놈의 레벨은 6성 수치까지 떨어졌다.
그 정도면 차라리 낫겠지.
‘상태가 좋지 않군.’
엘 시드에게서는 예전의 기세를 찾 아볼 수 없었다.
마스코트였던 늑대털 외투에는 모 래와 먼지가 늘어 붙어있었고,몸 곳 곳에 상처를 입었다. 얼굴의 왼쪽은 이마에서 흘러내린 피로 아예 알아볼 수도 없을 정도. 그럼에도 나를 바라 보는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다.
덜컹,쿵.
놈이 탄 비공정이 브륜힐트이의 난
관과 부딪혔다.
전경 448m, 초고층 빌딩과도 높이를 겨룰 수 있는 브륜힐트에 비하면 놈이 탄 비공정은 더할 나위 없이 초라했다.
“후,힘들었지.”
엘 시드는 난간을 뛰어넘어 브륜힐 트01의 갑판에 착지했다.
그리고 옷의 먼지를 털더니,이쪽으로 천천히 걸어오기 시작했다.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세상이 넓 어졌어. 많이 발전했다. 내 동료와 칼을 섞을 법한 강자들이 이리도 많아졌을 줄이야. 덕분에 난 다시 혼자가 됐지.”
엘 시드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더니 나를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너도 마찬가지야,친구. 아무것도
모르던 그 초보가 어엿한 한 세계의 지배자가 되었구나.”
“그 이상,마스터에게 접근하지 마라.” 내게 다가오던 엘 시드의 목에 단검이
겨누어졌다.
그 뒤에서 니슬레드가 차가운 눈빛을 짓고 있었다.
저 녀석뿐만이 아니다.
갑판 위의 기둥,배 안쪽,난간 아래,
화물 뒤.
그들은 숨을 수 있을 만한 모든 장 소에서 엘 시드를 노리고 있었다.
전부 합쳐 27명.
니플헤임 소속의 ‘암살’ 특기를 가진 마스터 어쌔신들이었다.
이 정도 숫자의 어쌔신이라면,아무리 1파티의 멤버라도 방심하다간 생명이 위험할 수 있었다.
“그렇군.”
엘 시드의 시선이 이리저리 움직였다.
암살자들이 숨은 장소를 정확히 찾 아내고 있었다.
“역시 준비가 철저하게 돼 있네. 여 기서 너를 죽이는 건 힘들겠어.”
“……건방진.”
니슬레드의 단검날이 놈의 목으로
파고들었다.
얇은 혈선이 그어지며 그의 목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너정도로는 안 되지.”
엘 시드가 가볍게 발을 굴렀다. 춤을 추는 듯한 동작. 상황을 파악한
니슬레드가 오른손에 힘을 주었다. 스쳐 지나가는 것 같은 바람 소리와
함께 외투가 펄럭이더니,니슬레드가 바닥에 엎어졌다.
“윽!”
엘 시드는 묵광 처리된 단검을 니슬 레드의 목에 겨누었다.
어느새 그 손에서 무기를 빼앗은 것
이다.
“마스터,이 자는 위험……
“아니.”
별안간 엘 시드는 단검을 바닥에 떨 구었다.
“이제 죽이는 건 질렸다. 지겨울 정 도로 했지. 재미가 없어졌어.”
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내게 다시 걸어오기 시작했다. 유르넷이 말없이 나섰다.
“괜찮아. 아무것도 없어.”
50레벨에 불과한 나도 알고 있다. 저 녀석은 제대로 싸울 수 없다. “저자는 맨손도 흉기입니다.”
“가까이 있진 않을 테니 걱정 마.” 뭔 일이 생긴다고 해도 유르넷이 대
처해줄 것이다.
나는 심호흡을 한 뒤 천천히 걸어 나갔다.
“될 줄 알았더니,용케도 왔네. 죽고 싶었냐?”
“무슨 농담을. 예전의 친구와 이야 기를 하고 싶었을 뿐이다.”
엘 시드가 미소를 지었다.
“내가 언제 네 친구였어?”
“그럼 형과 동생인가?”
“더 개 같은 소리인데.”
나와 엘 시드가 동시에 멈춰섰다.
양측간의 거리는 약 10m.
발을 박차면 상대의 앞까지 닿을 수 있는 거리였다.
‘……긴장하고 있겠군.’
나는 홀껏 뒤를 보았다.
유르넷과 니슬레드를 포함한,이곳에 있는 영웅 모두가 우리를 주시하고 있다.
엘 시드가 검을 뽑는 시늉이라도 한 다면 전원이 놈의 목을 치러 달려나 가겠지.
“설마 너까지 이곳에 떨어졌을 줄은. 처음 들었을 때는 장난인 줄 알았다. 내 말을 듣지도 않던 녀석이.”
“네 말을 누가 들어줘.”
“들어주는 척이라도 했지 않느냐.”
게임 속의 캐릭터가 살아있는 것 같지 않냐는 정신 나간 질문을 하는데.
당연히 머리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었지. 뭐,그래도 한동안은 녀석의 옆에 붙어있었다.
워낙 아는 것도 많고,게임을 잘 했 으니까. 뽑아먹을 게 많았었다.
픽 미 업 초창기,세계의 유저가 한 서버에서 게임을 할 때의 이야기였다.
다른 서버로 뿔뿔이 흩어지기 전, 나는 이 녀석과 게임 내의 번역기로 팁이나 공략에 대해 이야기를 주고받곤
했었다. 내 모든 이론과 분석의 기초 는 이놈이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아무리 방법을 고쳐봐도 나는 저 녀석의 운영을 따라 할 수 없었다.
나는 철저한 계산 아래 대기실을 통 제했지만,엘 시드는…….
‘알 수가 없었지.’
녀석이 무언가를 하고자 하면,도라 도의 영웅들은 온 힘을 다해 그를 도 와줬다.
나는 영웅들에게 지시하고 명령했 으나, 엘 시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처음 봤을 때는 불법 프로그램을 쓰는
줄 알았다.
마치,마법과도 같았다.
게임 속의 영웅과 실제로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나는 흘껏 뒤를 돌아보았다.
유르넷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와 엘 시드의 대화가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게끔,방음 마법을 써준 것 이다.
“난 네 본명이 뭔지 몰라. 지구에서 뭘 하는지도 모르고.”
“나도 잊어버렸다.”
엘 시드가 빙긋 웃었다.
나는 깊게 숨을 들이마신 뒤,입을 열었다.
“돌아가라.”
“여기 있으면 개죽음이야. 네가 여 기서 날 죽여도 똑같아. 다른 마스터 들이 서버 끝까지 너를 쫓아다닐 거다.”
1차 이벤트는 실패로 돌아갔지만, 아직 뫼비우스는 공지를 내리지 않았다.
서버 어딘가에 있는 엘 시드를 잡기만 하면,여전히 역천의 서를 얻을 수 있 다고 공언한 것이다.
물론 나는 그 말이 거짓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유르넷의 말대로 놈의 그
릇이 깨졌다면 7성의 자격을 상실한 셈이 되니까. 힘들게 잡아봤자 소용없 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제 엘 시드 목숨에는 그 어떠한 가치도 없었다.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했는데. 아직 가능하지 않냐?”
“그래,아직 계약은 남아있지.” “그럼 여기서 뭐해? 그 녀석과 연락이
안 된다면 이쪽에서 연락 넣어줄게. 예전 빚을 갚는 겸 시간을 벌어줄 수도 있어. 다 헛짓거리야. 1서버 같은 헛 소리 말고 지구에서 박혀 살아. 평생 먹고살 돈도 준다더만. 이런 망게임은
다시 손대지 말고.”
나는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는,이 엿 같은 게임을 깨면 살던
곳으로 돌아갈 거다.”
엘 시드는 내 뒤에 있는 유르넷과
니슬레드,곳곳의 영웅들을 천천히 둘 러볼 따름이었다.
“저들은 너를 따르는 모양인데.” “쟤네는 재네들이고,나는 나지. 내
가 있어야 할 곳은 여기가 아니야.” “나도 마찬가지다.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엘 시드가 말을 줄였다.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네가 있어야 할 곳은 지구가 아니다?” 엘 시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멍청한 새끼.”
“너는 할 만큼 했다. 네 동료들이 바 짓가랑이라도 붙잡았나 본데,이 정도면 충분히 노력하지 않았냐? 했는데 안 된 거고. 그럼 계약 끝났잖아. 돌아가야지. 그런데 여기 남아서…… 같이 뒈지시 겠다? 그 새끼도 내가 널 죽이는 걸 바라고 있을 거다. 그 새끼 손바닥 위 에서 쌍으로 놀아날 셈이냐?”
“후후.”
엘 시드가 웃기 시작했다.
“그래,친구. 나는 그런 너를 좋아했다. 아무것도 없을 때부터 넌 당돌했지. 받아먹기만 하던 다른 유저와는 달라. 하루도 빠짐없이 날 곤란하게 했었어.”
“말 돌리지 마라.”
“난 너무 많은 것을 받았다.”
엘 시드가 미소지었다.
“우리의 모험은……
엘 시드는 뒤를 돌아보았다.
마치 동료가 서 있는 것처럼.
한때는 그랬을 것이다.
수만 명의 대군에게 돌진하던 그의 군세들처럼.
그러나 이제 그 뒤에는 아무것도 없다.
브륜힐트01의 무기질적인 갑판이 펼쳐져 있을 뿐.
“영원히.”
철컥.
엘 시드가 늑대털 외투를 펄럭였다. 동시에 그의 양손에서 검이 뽑혀 나
왔다.
뛰쳐나오려던 니슬레드에게 나는 손을 들어 올렸다.
정지 신호.
‘티소나와 콜라다.’
라스칸다 엘 시드를 상징하는 두 자
루의 장검이었다.
치열한 혈투를 겪은 여파인지,검면에 금이 가 있었고,검날 곳곳이 손상된 상태였다.
그러나 여전히 눈부신 광채를 발하고 있다.
푹
엘 시드는 두 자루의 검을 갑판에 박아넣었다.
그리고 움직이지 않았다.
“…….”
나는 그 뜻을 눈치챌 수 있었다.
‘돌아버렸군?
이해할 수 없다.
아마 저 녀석도 나와 비슷할 것이다.
내가 타오니어에 떨어졌던 것처럼, 저 녀석도 영문도 모른 채 도라도에 소환됐을 것이다.
‘많은 것을 받았다?’
나는 최초의 전투를 떠올렸다.
피와 땀,그리고 삶과 죽음이 난무 하는 전장을.
그래,아주 많은 것을 받았지.
평생 잊을 수 없는,더럽게 행복한 추억이다.
이후에도 마찬가지.
죽을 뻔한 경험을 무수하게 반복했고,
알던 누군가 피투성이가 되어 널브 러지는 꼴을 수도 없이 봐야 했다.
그 악몽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이었다.
“진심이냐?”
묵묵부답.
엘 시드는 투명한 회색 눈동자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 눈빛에서 나는 저 녀석과는 더 이상 말이 통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우웅.
내가 다시 손을 내젓자 미약한 파동 과 함께 방음 마법이 사라졌다.
‘바보 같은 놈._
예전 도와준 걸 봐서 어떻게든 목숨 줄을 붙여주려 했더니 자기가 알아서
차버렸다.
나는 은혜도 원한도 쉽게 잊지 않는다. 하지만 다 허사가 되어버렸다. 뚜벅.
나는 녀석에게 등을 돌린 채 걸어 나왔다.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네 죄를…… 네가 알고 있느냐.” 살기를 눌러 짓씹는 듯한 음성.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엘 시드가 서 있는 갑판의 반대쪽에서
누군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가슴에 ‘武’라 씌어진 도복을 입고
있다.
비단 같던 검은 생머리는 산발이 되어 있었고,흑옥 같은 눈동자에서는 증오 의 빛이 번뜩였다.
“무도하고 더러운 자. 너는 무련의 문도와 련주를 죽인 것으로도 모자라, 그들을 능욕하고 기만했다.”
위령이 칼집에서 천천히 검을 빼들 었다.
수실이 달린 청강검이 빛을 받아 반 짝였다
“고작 길을뚫기 위해서…… 너는…” 너는……:
위령은 웃는지,우는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엘 시드에게 검을 겨누었다.
“문도 중에는 검을 쥘 줄 모르는 아 이도, 옛날 이야기를 좋아하던 노인도, 어느 청년과 결혼을 약속한 처녀도 있었다. 사죄해라. 사죄하거라! 당장 그 머리를 땅에 박아,무덤에서 통곡 하고 있을 그들에게 사죄하거라!”
“나는……
엘 시드가 웃었다.
“사과하지 않아.”
위령이 나는 듯이 발을 뻗었다.
끝은 한순간.
엘 시드는 장검의 끝이 자신의 심장을 뚫는 그 순간까지,
갑판에 박아넣은 검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지옥으로 가거라.”
위령이 검을 뽑아 올렸다.
그와 동시에,엘 시드의 고개가 떨
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