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ck Me Up! RAW novel - Chapter 256
258. 레퀴엠(4)
나는 디렉터라는 놈을 살펴보았다.
새치가 군데군데 섞인 짧은 머리에 흐리멍덩한 표정. 눈빛에서는 이지를 찾아볼 수 없다.
이 녀석이 정말 픽 미 업을 총괄하 는 개발자가 맞는 건가. 이런 장소만 아니었다면 구라치지 말라고 진즉에
뒤통수를 후려쳤을 것이다.
“시리스쟝……
“일부러 저러는 거냐?”
나는 관자놀이에 손을 올렸다.
시젤이 헛기침을 했다.
“본의는 아니십니다. 건강이 좋지 않으신지 라.”
“몸이 안 좋으면 저렇게 된다?”
“물론……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시젤은 안타까운 눈으로 감독을 바 라보았다.
“사내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선,이 렇게 되어야만 했습니다. 어설픈 연극은 통하지 않으니까요. 진짜로 미쳐버리
는 수밖에 없었지요. 그렇지 않다면, 당신을 이곳에 초대하는 일도 불가능 했겠죠.”
초대.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시젤이 디렉터의 어깨에 손을 을리 더니 말했다.
“업무실 뒤편에 작은 방이 있을 겁 니다. 원하시던 도라도의 엔딩은 거기서 관람하실 수 있습니다.”
뒤를 보자,아무 장식도 없는 금속 문에 눈에 띄었다.
“돌아오신 뒤에 디렉터님과의 시간을 마련하도록 하지요. 특수 약물을 복용
하면,10분 정도는 제대로 된 대화가 가능하실 겁니다.”
시젤이 내게 허리를 숙이고는, 휠체 어를 끌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역시 다른 의도가 있었군.’
이곳에 오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그야 모를 일이지.
나는 어깨를 으쓱한 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차가운 공기.
나는 숨을 한껏 들이마셨다.
5평도 안 될 법한 작은 방에는,셀
수도 없을 정도의 많은 모니터가 설 치되어 있었다.
사방의 벽과 천장까지. 수백 개의 크고 작은 모니 터에서는 제각기 다른 노이즈가 송출되는 중이었다.
“…….”
그리고 방 가운데에 놓여 있는 소형 테이블 위,
낡은 비디오테이프 하나.
나는 비디오테이프를 집어 살펴보 았다.
테이프 겉면 스티커에는 ‘#EL CID, DORADO’란 글자가 쓰여져 있었다.
엘 시드.
전 랭킹 1위이자,유일하게 픽 미 업의 모든 스테이지를 클리어한 마스터.
그리고 본인 스스로가 영웅이기도 한 유저.
엘시드는 모든 임무를 클리어한 뒤 갑작스레 돌변해,근처의 영웅들을 깡 그리 잡아먹으며 서버의 벽을 넘어왔다. 랭킹 2위였던 무련도 희생자 중 하나 였고,조금만 상황이 안 좋았다면 니 플헤임도 희생자 명단 한 축을 담당 할 수도 있었다.
놈의 목적은 단 하나였다.
1서버에 가는 것.
’1서버에 뭐가 있지?’
듣기로 1서버에는 뫼비우스의 본사 가 있다고 한다.
그곳에서 무얼 하려고 했는지는,비 디오를 보면 알게 될 것이다.
나는 심호홉을 한 뒤 비디오테이프를 재생기에 집어넣었다.
척. 치지직.
모든 모니터에서 일제히 노이즈가 걷혔다.
뒤이어 변두리의 모니터로부터 차 례차례 영상이 재생되기 시작했다.
도라도의 저층 임무.
이 광경들은 역천의 서에서 본 적
있다.
나는 시선을 돌렸다. 방 정면의 대형
모니터에서는 주요 장면들이 연출되고 있었다.
주요 임무와 동료와의 이별,연이은 각성과 치열한 싸움.
동료를 수없이 잃었고,본인도 죽을 위기를 몇 번이나 겪었지만,결국 엘 시드는 승리했다.
도시를 침략하는 몬스터들을 물리 쳤고,산처럼 거대한 대형 몬스터를 격퇴했으며,몬스터로 변한 과거의 영 웅들에게도 승리했다. 뒤이어 NPC 연합군과 함께 80층대에 진입,대륙 곳곳에서 몰려오는 적들과 맹렬한 전 투를 이어갔다.
[혼돈의 파편 Lv.113] [절망의 파편 Lv.108] [원념의 파편 Lv.121]일명 파편 시리즈.
80층 이상부터 고정적으로 출몰하는
정체불명의 무속성 몬스터였다. 물리와 마법 속성이 전혀 통하지 않
으며,정해진 특성이 따로 없어 매 임 무마다 공략법을 다시 짜야 했다. 여 기서 무수한 랭커들이 좌절했었지.
‘형체도 없고._
어떨 때는 고블린의 모습으로.
어떨 때는 대형 드래곤의 모습으로. 어떨 때는 흐물거리는 거품의 모습
으로.
‘감정도 없지.’
이 녀석들에게는 정신 공격이 통하 지 않는다.
공포나 혼란,용기와 고양과 같은 상태 변화도 없다.
그저 주위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을 먹어치우고,탐식할 뿐.
나는 앞을 보았다.
정면의 대형 스크린.
영상에서는 도라도의 영웅들이 파
편들과 악전고투를 벌이고 있었다.
[플로어8080층 스테이지.
수천에 이르는 파편 군단이 들이닥 쳤으나,이번에도 결국 엘 시드의 승리.
다음 임무도 마찬가지겠지. 이미 결 과는 정해져 있다.
나는 대형 스크린에 시선을 옮겼다. 저층 임무의 영상을 송출하던 소형
모니터들이 점점 꺼지기 시작했다. 가운데의 스크린에서는 80층 이후의
영상들이 연속해서 재생되었다.
81 층. 82층. 83중.
점차 층수가 올라간다.
폐허가 된 도라도에서,엘 시드와
그의 동료들은 끊임없이 파편들과 맞 서 싸웠다.
84 층.
85 층.
86 층.
도라도에 속한 민간인 NPC들의
99%가 사망했다.
그럼에도 영웅들은 싸워나갔다. 여전히,파편들은 끊임없이 나타났다.
87층.
현 니플헤임의 도달 층수였다.
이번 도라도의 임무는 니플헤임과
비슷했다.
사방에서 몰려드는 파편들을 처리 하는 것.
그 수는 만 단위를 훌쩍 넘어간다. 엘 시드는 병력의 반절을 잃고 87
층을 뚫었다.
임무를 거칠 때마다 상처투성이가 되었지만,그들은 멈추지 않고 다음 층을 향해 나아갔다.
88 층.
89 층.
그리고
번쩍!
대형 스크린에서 눈 부신 빛이 일더니 내 몸을 집어삼켰다.
나는 대처할 사이도 없이 영상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눈을 떴다.
폐가 썩는 듯한,유독성 공기가 기 도를 타고 들어왔다.
[플로어 ??.] [임무 유형 – ???] [임무 목표 – ???] [※알림] [‘도과도’의 마지막 임무입니다.]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풍경이 점차 시야에 들어왔다. 끝없이 펼쳐진 광야.
벌판에는 풀 한 포기도 나 있지 않 았다.
사막처럼 쩍쩍 갈라진 땅. 생기라고는 조금도 눈에 띄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내젓고는 걸어갔다. 얼마쯤 걸었을까.
[황금향의 정복자]
[라스칸다 엘 시드 Lv.254]
그 평원의 가운데,엘 시드가 있었다.
엘 시드는 두 자루 검을 바닥에 꽂은 채,숨을 몰아쉬고 있다.
늑대털 망토는 피로 젖은 지 오래였고、 몸에서는 상처가 없는 곳을 찾아볼 수 없었다.
‘이게 마지막 임무라고?”
나는 벌판을 거닐었다.
환상일 뿐이겠지만,짙은 피냄새가 코를 간질였다.
걸으면서 근처를 둘러보았다.
엘 시드가 자랑하던 정복의 군세.
황금색으로 빛나던 갑옷은 온데간 데없고,모두 고기토막이 되어 벌판 이곳저곳에 나뒹굴고 있었다.
“흐하핫!”
나는 옆을 보았다.
[울부짖는 폭풍]
[키르자크 델라허 Lv.99]
판금 갑옷을 입고,대검을 걸친 노 인이 허허롭게 웃고 있었다.
엘 시드 토벌전에서 나타났던 놈의 최측근.
‘참렬’이라 불리는 키르자크였다. “고작 이런 결말인가 그래. 그동안
뭘 위해 달려왔는지 알 수가 없게 되 었구만.”
“아직 안 끝났어요.”
옆에 서 있던 까무잡잡한 살갗의 여
자가 단검을 돌렸다.
[내달리는 뇌전]
[렐테아 드 고르 Lv.99]
이 여자는 렐테아.
역천의 서에서 최중요 인물이자,도
라도의 주요 삼인방 중 하나였다.
_다른 사람은……;
없다.
필드에 서 있는 것은 엘 시드와 키 르자크,그리고 렐테아.
이렇게 세 명뿐.
본래 이곳에 세워져 있던 도시와 궁
전은 무너졌으며,시민들은 모조리 죽 었다.
그들을 조력하던 수많은 NPC들도, 동료 영웅들도,위용 높은 도라도의 비공정 함대도 모두 먼지로 돌아갔다.
“우리는 속은 게야. 그 여신이…… 우리를 속였어. 어리석게도 꾐에 빠진 거지.”
“아직 모르잖아요! 이번 임무를 끝 까지 깨고,100층까지……
“도라도는 이미 멸망했네. 이번이 마지막이야.”
노인,키르자크가 중얼거렸다.
“보면 모르겠는가. 아무것도 없어.
백성들도,동맹들도,발을 디딜 영토 마저도 없어졌네. 우리는 복원을 위해 80층을 뚫어 여기까지 왔지만,이제 와서 돌아보면 층수가 높아질수록 도 라도는 멸망의 길로 빠져들고 있더 군.”
쿵.
키르자크가 대검을 땅에 박았다. 그리고 검면에 등을 대고 미끄러지
듯 주저앉았다.
“……엘.”
렐테아가 엘 시드를 돌아보았다. 그는 눈을 감은 채 그 자리에 서 있
었다.
“너도 끝이라고 생각해?”
“아직 끝이 아니야. 대기실에서 우 리 동료들이 기다리고 있어. 돌아가서 재정비하면 돼. 너만 살아있다면,토 벌대는 언제든 꾸릴 수 있어.”
렐테아가 중얼거렸다.
“전 저번의 세계에서 약속했어요. 무슨 수를 쓰더라도 도라도를 되살리 겠다고. 그걸 위해서 여신과 계약한 거예요. 아저씨도 그렇잖아요. 그런데 이제 와서 포기한다고요?”
“난 이제…… 지쳤네.”
키르자크가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이 끝없는 싸 움을 이어가야 하는가? 정녕 도라도 를 위해서인가? 나는 모르겠구만.”
키르자크의 시선이 하늘로 향했다.
나는 그 시선을 따라갔다.
거기에는…….
[혼돈의 파편 Lv.U3] X ??? [절망의 파편 Lv.108] X ??? [원념의 파편 Lv.121] X ???단순히 천이나 만 따위의 숫자가 아 니었다.
그야말로 무한. 측정할 수 없는 숫
자의 파편들이 구름 너머에서 우글거 리고 있었다.
놈들은 기묘한 신음을 내지르면서 하늘을 가득 채우듯이 배회했다.
“그렇다면,우리는 대체 뭘 위해 서……
렐테아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뭘 위해서 싸웠던 거지?” “여신에게 직접 물어봐야 하지 않겠
는가? 요즘 들어 응답이 없네만,허허 허허.”
렐테아가 주저앉았다.
“일어나.”
작은 중얼거림.
엘 시드는 피에 젖은 얼굴로 두 명을 돌아보았다.
“나는 황금향의 왕으로서 맹세했다. 너희들에게 고향을 되돌려주겠다고. 고작 이 정도로는 포기하지 않아.”
“하지만……
“바꾸면 돼. 지금껏 몇 번이나 그래 왔듯이.”
엘 시드가 빙긋 웃었다.
“이곳에 처음 왔을 때의 난,겁 많고 이기적인 놈일 뿐이었지. 하지만 변했 어. 너희들이 이렇게 만든 거야.”
엘 시드는 쌍검을 치켜들었다.
그가 천천히 검을 내리그었다.
우우우웅.
빛의 소용돌이가 만들어지기 시작 했다.
7성의 힘은…… 이 정도인가.’
임무 중에 강제로 탈출구를 만들다니. 나는 헛웃음을 들이켰다.
“돌아가자. 우리들의 안식처로.” 렐테아가 고개를 끄덕이더니,먼저
소용돌이로 들어갔다.
“정말…… 가능하겠나?”
키르자크의 반문에 엘 시드는 말없이
웃을 뿐이었다.
이윽고 키르자크도 퇴장했다.
“후우.”
혼자 남은 엘 시드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설마 이런 식으로 끝날 줄이야.” 엘 시드가 이쪽을 돌아보았다.
그 눈동자에는 내 모습이 비치지 않
았지만.
“여길 보고 있겠지. 여신이든,다른 누구든.”
“나는 포기하지 않아. 게임이 이렇 게 끝난다면,무슨 일을 해서든 내가 바꾼다. 그것이 나의 맹세야.”
콰직.
엘 시드가 검을 을려 벴다.
차원의 소용돌이가 빛이 되어 사라 졌다.
“그 전에……못다한 임무는 깨야겠지.” 쨍그랑!
벌판에 펼쳐져 있던 무형의 벽이 박살 났다.
그제서야 배회하고 있던 파편들이 지상으로 낙하하기 시작했다.
엘 시드는 쌍검을 하늘로 겨누었다.
“나의 검은……:
[각인,’정복하는 자가 발동합니다!]우우우우우웅!
필드에 거대한 진동이 일었다. 몬스터와 영웅들의 시체에서 빛의
입자가 뿜어져 나오더니,엘 시드에게로 빨려 들어갔다.
“운명을 정복한다.”
콰르릉!
뇌전과 폭풍이 몰아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