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ck Me Up! RAW novel - Chapter 278
280. 임무 유형,정복 (6)
눈을 뜨자,머리를 후벼 파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
나는 바닥에 엎어져 있는 상태였다. 흐릿해진 이성을 일깨운 뒤,나는
양팔로 땅을 짚고 천천히 몸을 바로 세웠다.
겨울바람과도 같은 싸늘한 추위가 전신을 감싸고 돌았다.
기억을 되돌렸다.
80층 임무를 수행하던 도중이었다. 타오니어의 메인 보스,황자를 제재
하기 위해 본사가 개입했고,그 순간 프라이오스는 기다렸다는 듯 차원검을 휘둘러 이변을 일으켰다.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나.’
만약 놈에게 우리와 싸울 의지가 있
었다면,이런 식으로 흘러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필드의 상태를 미리 조작하고,초월 종을 배신한 것.
그리고 본사 측의 세력을 끌어들이는 것까지. 모두 계산되어 있었던 것 같다.
일단,나는 몸 상태를 살폈다.
다행히 큰 상처는 없었다. 비프로스 트도 허리춤에 매달려 있었다.
지금 당장 적이 튀어나온다고 해도 싸울 수 있었다.
‘……여긴.’
주위를 둘러보았다.
낯설기 그지없는 광경이 눈앞에 펼 쳐졌다.
칠흑처럼 어두운 공간. 마치 커다란 도화지에 검은 크레파스를 덧칠해놓은 것 같다. 나는 끝이 보이지 않는 곳
위에 발을 디디고 서 있었다.
이곳은 마치 꿈 안인 것처럼, 조금의
현실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0000차원 – ???]흘로그램 메시지가 떠올랐다.
0000차원.
화면에 쓰인 글자를 보고서야, 나는 이곳이 어딘지 알 수 있었다. 1 서버.
혹은,그곳에 가까운 장소.
‘이런 식으로 올 줄은 몰랐는데.’ 나는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어떤 일이 벌어져도 냉정을 유지할 수 있도록.
뚜벅.
선명한 구두 소리가 울려 퍼졌다. 스릉. 검을 뽑아 들면서 소리의 근
원지로 향했다.
그곳에는 멍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프리아가 서 있었다.
“……한.”
“다친 곳은?”
“없다.”
“내 쪽으로 와. 여긴 안전한 장소가 아냐,
프리아는 고개를 끄덕인 뒤 내게 총총
걸어왔다.
황금빛 눈동자에서 불안한 감정이 엿보였다.
“이곳은…… 대체 어디인가?” “글쎄.”
나는 혀를 찼다.
이 장소를 굳이 표현하자면 한 단어 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우주.’
그러나 이곳은 정상적인 상태가 아 니다.
어둠 속,간간이 엿보이는 별들은 그림자에 잠겨 있었다.
마치,죽은 것처럼.
“이탈은 성공한 것 같구나.”
나는 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검을
겨누었다.
장막 속에서 한 사내가 걸어 나왔다. 은빛 예복을 입은 채,여유로운 미
소를 짓고 있는 미청년.
제국의 황자인 프라이오스 알 라그
나였다. 그는 원래 붉은 붕대로 전신 을 칭칭 동여매고 있었지만, 지금은 4 층의 승급식에서 봤던 정상적인 외양 을 유지하고 있었다.
나는 검을 겨눈 채 상황을 한 번 더 체크했다.
할기온과 연락이 닿지 않는다. 제나
와 벨키스트,다른 영웅들도 보이지 않았다.
이곳에 있는 것은 오직 세 명. 나와 프리아,그리고 저놈뿐.
“싸움은 질렸다고 하지 않았나. 너 희와 싸우러 온 게 아니야. 검을 내려 다오.”
황자는 부드럽게 웃었다.
나는 코웃음을 쳤다.
“질렸다는 놈이 이런 일을 벌이나?”
“거기에 계속 있었다면 너와 나,둘 중 누군가는 반드시 죽었을 거다. 텔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는 꼴이 될 뿐 이야.”
그건 부정할 수 없었다.
영웅들이 전멸하거나,보스가 죽기 전까지는 임무는 끝나지 않을 테니까.
그렇다고 해도,저놈은 너무도 수상 하다.
“시간이 얼마 없어. 어떻게든 벽을 찢었지만,곧 우리는 튕겨 나갈 거다. 그 안에 끝내야겠지.”
“뭘 끝낸다는 거냐?”
프라이오스는 입을 열었다.
“이곳은,경계(境界)라고 불리는 장 소다.”
“다중 차원 우주인 뫼비우스의 끝이자,
또 다른 우주와 맞닿은 벽이야.” 프라이오스가 위를 을려보았다. 그곳에는 어둠이 무한하게 펼쳐져
있었다.
“이 게임의 메인 서버가 위치한 곳 이자,모든 것이 시작된 출발점이기도 하지.”
“메인 서버?”
“너희가 이 세계를 ‘게임’이라고 부 른다는 것은 나도 알고 있다. 너는 마 스터의 소유물인 _영웅’이고,나는 그 대적자인 ‘몬스터’. 프리아는 중립 세 력인 NPC지. 우리 세 명 모두 그저 장난감이잖은가?”
프라이오스는 피식 웃었다.
나는 놈의 설명을 머릿속에서 되짚
어 보았다.
“여긴 1서버로군.”
“그중에서도 핵심 구역이지.” 황자가 등을 돌렸다.
그리고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따라와라. 보여줄 게 있다.”
놈의 뒷모습이 멀어져갔다.
‘이런 상황은 예상하지 못했는데.’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놈이 평범한 몬스터와 다르다는 사
실은 진작에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룰을 깨버리다니.
“가야 하지 않겠나?”
프리아가 나를 보며 속삭였다. “나도 알고 싶다. 오라버니가 저렇게
변해버린 이유를.”
회사 측에서는 난리가 났을 것이다. 일개 몬스터가 필드를 탈출한 것으
로도 모자라 게임의 핵심 데이터에 접근했다.
심지어 수십만 시청자들이 보고 있는 와중에.
놈의 목적이 게임을 엿 먹이는 거라면, 반쯤은 성공했다고 할 수 있었다.
“한.”
프리아가 나를 불렀다.
나는 한숨을 깊게 내쉰 뒤,발을 움 직였다.
“알았다,알았어.”
여기 있어봤자 바뀌는 건 없으니.
나는 프리아와 함께 황자를 뒤따라 갔다.
“프리아.”
황자는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말했다.
“……예.”
“우리가 속한 우주,뫼비우스가 무 수한 차원들이 겹쳐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느냐?”
“어릴 적,전하께서 알려주시지 않 았습니까?”
“잘 기억하고 있구나. 우리 타오니 어는 우주의 아주 작은 일부일 뿐이다. 그렇다면…….
황자가 발을 멈췄다.
“일억 개의 차원이 동시에 멸망한다면, 그 원인은 무엇이겠느냐?”
“그것은…… 정체불명의 적이 침략
“그들은 왜 뫼비우스를 침략했을까?” 프리아의 표정이 굳었다.
황자는 낮은 목소리로 설명을 이어
갔다.
“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굳이 이런 곳까지 을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 뒤에야 자신의 운명을 선택할 수 있 는 것이다.”
“운명 말입니까.”
프리아는 시선을 돌렸다.
위와 아래,오른쪽과 왼쪽.
끝없는 어둠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그 가운데,흐릿한 회색 점들이 반 짝였다.
“탄생한 생명은 언젠간 무로 돌아가게 된다. 작게는 풀 한 포기,인간부터 크게 보면 바다와 하늘,별과 우주에 이르 기까지 말이다.”
황자는 걸어가다가 다시 한번 멈춰
섰다.
그리고 먼 눈으로 위를 보았다. “우리의 고향,뫼비우스는…… 수명이
다했다.”
“그게,대체…… 무슨 말씀…… 황자가 나를 돌아보았다.
“한,너라면 이해하고 있을 테지.” “엔트로피인가.”
“지구에서는 그렇게 부르는군.”
얼핏 들어본 적 있었다.
엔트로피,열역학에서 나오는 용어로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에너지는 전환 과정에서 ‘무조건적으로 손실’된다고 한다.
“그래서,지구 이야기를 꺼냈던 거냐?”
“떠올려주니 고맙군.”
아직도 기억난다.
황좌에 앉아 지구본을 돌리는 놈의 모습이.
“물론,네가 몸담았던 곳이 멸망하 려면 수십억 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 하겠지. 하지만 여기는 아니야.”
“이제야 알겠나? 텔이 했던 짓을? 그 대가가 무엇인지도…… 알 수 있 겠나?”
황자가 검을 내리그었다.
과칭 ! 우리를 둘러싸고 있던 무형의
벽이 깨져나갔다. 그 너머,
[혼돈의 파편 Lv.113] X 2568318134 09136598134813409…….끝이 아니다.
[혼돈의 결정 Lv.322] X 95381395138 9413948139561301……. [절망의 결정 Lv.315] X 8955012348 14819750123491813……. [원념의 결정 Lv.311] X 5587118111 23816797593493599…….눈으로는 인지할 수 없었다.
우주의 공허 바깥쪽에는 무한이 꿈 틀거리고 있었다.
“저들은 ‘수확자’라고 부른다. 우리 보다 아득한 상위 차원에서 왔지. 목 표는……
“뫼비우스를 원래의 흐름으로 되돌 리는 것?”
철컥.
프라이오스가 검을 칼집에 집어넣 었다.
언제 그랬냐는 둣,경계를 감싸고 있던 파편과 결정들이 사라졌다.
아니,단지 보이지 않는 것인가. “프리아. 네가 여덟 살이 될 무렵,
나는 네게 작은 강아지를 선물해주었지. 하지만 그 녀석은 한 달도 버티지 못 했어. 그때 네가 한 말을 기억하느냐?” “되살리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게 옳은 일이라고 생각하느냐?” 프리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혼란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숙
였다.
“받아들이기 쉬울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조차도 많은 시간이 필요했 으니까. 천천히 생각해 보거라.”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우주의 수명이 끝났다?’
뫼비우스에 남겨진 엔트로피는0.
모든 은하와 별의 빛이 꺼졌으며, 우주는 공허로 가득 찬 쓰레기장이 되어버렸다.
텔이 이걸 억지로 되돌렸다는 말인가?
“뫼비우스의 이번 대 관리자가 쌍둥이 여신이 아니었다면,다른 결말이 났을 지도 모르지.”
나는 눈을 꾹 감았다. 지나친 정보
에 두통이 밀려왔다.
그 속에서 누군가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 세계에는 아무 희망도 없어.’
텅 비어버린 눈으로 중얼거리는 시
리스.
그 녀석은,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건가.
그렇다면 설명할 수 있다.
유르넷의 태도가 갑작스레 바뀐 이
유도.
시리스가 나를 억지로 쫓아내려 하는 이유도.
“텔의 목적은……
“설마,지구 침략이나 힘을 얻겠다
따위의 시시한 이유라도 생각하고 있 었나? 뫼비우스를 관장하는 쌍둥이 여신,텔과 이카르의 이명은, 각각 순 수와 자애다. 문제는…… 너무 철딱서 니가 없었다는 거지.”
프라이오스는 쓰게 웃더니 걸음을 옮겼다.
그 뒤를 프리아가 비틀거리며 따라 갔다.
‘혼란스럽군.’
모바일 게임이 사실은 실제로 존재 하는 세계였다.
게임이 만들어진 목적은 멸망한 우 주를 되돌리기 위해서였고,우주가 멸
망한 이유는 수명이 다했기 때문이다. 논리가 지나치게 비약되고 있다. 평범한 인간일 뿐인 내가 받아들이기는 힘든 정보였다.
‘예측은 하고 있었다.’
쉽게 받아들이기 힘들 거라고. 하지만 이건…….
‘우주의 운명?’
하,헛웃음이 나왔다.
생존 게임까지는 좋다 이거야. 하지만,스케일이 너무 크잖아? 감
당하기 힘들 정도로.
나는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진정하자,아무것도 안 끝났어.
80층은 진행 도중이었고,아마 곧 본사 측의 인원이 들이닥칠 것이다.
거기서 뭐든,일이 생기겠지. 냉정을 되찾지 않으면,상황에 휩쓸
리고 만다.
나는 뼈가 으스러지도록 주먹을 쥐 었다. 그리고 황자의 뒷모습을 쫓아갔다.
‘불안정한 게임 서버.’
픽 미 업의 인기가 급격히 하락한
원인이었다.
갑작스런 서버 튕김,반복되는 점검과 각종 버그들.
오픈 초기,쾌적한 운영으로 유명했던 픽 미 업은 언젠가부터 버그의 대명
사로 조롱받게 되었다.
‘전부 하나로 이어지는군.’
나는 걸음을 멈췄다.
필드의 가장자리,누군가 서 있었다. 프라이오스도 프리아시스도 아니 었다.
소녀는 새하얀 소복을 입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검은 머리칼. 공허한 시선으로 앞을 바라보고 있
었다.
’닮았다.’
내가 알고 있는 누군가와.
닮은 정도가 아니라 본인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그러나 소녀에게서는 조금의 생기도 엿보이지 않는다.
밀랍 인형을 연상케 하는 분위기. “이 소녀가 바로,텔의 여동생인 이
카르
“…….”
“픽 미 업의 서버 컴퓨터지.” 소녀는 황자의 목소리에도 반응하지
않았다.
그저 앞을 바라보고 있을 뿐. 황자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 수명도 얼마 안 남았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