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ck Me Up! RAW novel - Chapter 284
286. 또 하나의 끝 (1)
타오니어에 존재하는 4대 고대종 중 하나,청익왕 슈텐베르크의 본격적인 토벌은 83층이 되어서야 이루어졌다. 81층에서는 황도 근처에 잔류하고 있던 파편들을 처리했고,82층에서는 놈에게 가는 길을 뚫었다. 그리하여.
「끼에에에엑!」
몸길이만 10m.
한때 하나의 차원을 다스리던,신성 한 청조(靑鳥)였을 놈에게는 조금의 위엄도 찾아볼 수 없다.
콰직!
나는 놈의 날개 틈에 박혀 있던 비 프로스트를 비틀었다.
살과 근육이 찢기는 소리와 함께 검 은 피가 튀었다.
「끼아악! 끼아아아악!」
이제는 새라고도 부르기 어렵다. 전신의 깃털이 뽑혀나갔고,골격이
모조리 박살 났다.
슈텐베르크는 검은 피를 흘리며 추
락하고 있었다.
「미물 따위가…… 벌레 따위가…… 쿠에엑! 프라이오스으으!」
날카로운 마력 폭풍이 휘몰아쳤다.
온몸에 두른 흑룡린이 아니었다면, 한순간에 몸이 갈가리 찢겨나갔겠지.
괜히 할기온이 자신을 내보인 게 아 니었다.
명백한 상성. 슈텐베르크는 대형 마 법을 수십 번이나 연발하며 필드를 휩쓸었지만,그중 흑룡린을 뚫을 수 있을 만한 위력의 마법은 없었다.
물론,타오니어 마도학의 조종인 슈 텐베르크에게 흑룡린을 뚫을 만한 관
통력을 지닌 마법이 없지는 않았다.
일점 집중형에 특수 속성을 몇 가지
섞는다면 충분히 유효타가 가능했다. 그런 응용법은 슈텐베르크에게 누
워서 떡 먹기일 것이다.
「이 나를…… 배신! 배신하다니이이]
건방진 황자노옴! 죽여버리겠다아!」 정상적인 이성과 판단력이 있었다면
말이지.
아까부터 황자의 이름만을 부르짖고 있다. 나를 황자로 착각하고 있는 모 양이었다.
만약 놈의 판단력이 흐려지지 않았
다면,몇 배는 어려운 싸움이 되었을 것이다.
쾅! 콰과과쾅!
사대 원소의 화려한 마법들이 폭풍 처럼 몰아쳐 시야를 가렸다.
[해당 영웅은 마법 면역입니다!] [해당 영웅은 마법 면역입니다!] [해당 영웅은 마법 면역…….]간지러운 안마 수준.
나는 피식 웃고는 검자루를 꽂아 넣
었다.
검날이 근육을 찢으며 심장 근처로
깊숙이 파고들었다.
별안간,지상에서 올라온 세 줄기 섬광이 슈텐베르크를 꿰뚫었다.
제나의 지원 사격이었다. 엘 시드의 심복,참렬 키르자크의 나선 각인을 응용한 이 기술은 특수 속성 사격을 급소에 적중시킴으로써 대상에게 막 대한 피해를 줄 수 있었다.
당연히,한 번으로는 끝나지 않는다.
[스킬,’트라이던트’ 발동!] [스킬,’트라이던트”….]파파파팍!
지상에서 솟구친 수십 발의 화살이 연이어 놈의 급소에 틀어박혔다.
「쿠에에에엑!」 ‘더럽게 튼튼하군.’
할기온의 말대로,심장에 직접 치명
타를 주어야만 끝이 날 것 같다. 다만 어찌나 갈비뼈가 튼튼한지 흑
패검으로도 심장에 닿지 않았다. ‘그래서 이 짓을 하는 거지.’
상공 수십 미터.
매서운 바람이 뺨을 때렸다.
지상의 풍경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놈이 무차별적으로 마법 포격을 뿌
려댄 탓인지, 언덕과 초원은 엉망이 된 상태였다.
“좀만 참아라. 곧 끝나니까.”
나는 왼손으로 놈의 날개를 붙잡은 채
떨어져 내렸다.
충돌함과 동시에 검을 쑤셔 넣는다면 관통하는 데 충분한 힘을 얻을 수 있다.
「그라라락…….」
검은 구멍 안에서 어떤 일을 겪었는지 모르지만,이 초월종은 이미 오염됐다.
미쳐버린 것이다.
〈쉬게 해주거라.〉
할기온의 한숨 어린 중얼거림.
숨결이 닿을 정도로 땅이 가까워졌다.
충돌하기 직전,나는 전신의 용비늘을 최대 강도로 전개했다.
과아앙!
충돌과 함께 박살이 나고,뒤집히는 땅의 잔해 속에서 나는 검날을 쑤셔 넣었다.
무언가 부드러운 것을 찔러 부수는 느낌. 그 순간,나는 비프로스트가 놈의 심장을 관통했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기아악…….」
훌쩍 뛰어 물러선 뒤,나는 먼지가 걷히길 기다렸다.
얼마 안 있어,거대 크레이터에 파 묻혀 있는 놈의 시체가 서서히 드러 나기 시작했다.
이제 놈은 완전히 모습을 잃어,뼈 와 살이 무질서하게 뭉쳐진 덩어리가 되어 있었다.
[스테이지 클리어!] [이번 임무에서는 경험치가 제공되지않습니다.] [보상 – 3,000,000G,청익왕의 심장 (S)] [MVP – ‘한(★★★★★★)’]
83층도 무사히 끝났다.
“생각보다 별거 없었군.”
나무 밑동에 앉아 있던 벨키스트가 일어섰다.
이 녀석은 나와 제나가 청익왕을 처 리하는 동안 주위에 있는 파편들을 정리하는 역할을 맡았다.
“나는 먼저 돌아가겠소. 할 일이 있 어서 말이지.”
벨키스트는 내게 고개를 숙이더니, 곧 그의 몸이 빛의 물결에 둘러싸였다.
사라지기 전,무언가 고민을 하는 듯한 눈치였으나 그것도 잠시,순식간 에 녀석의 모습이 흩어졌다.
“너도 돌아가 봐.”
“오빠는요?”
“나는 마저 할 일이 있어.”
“뭐,알았어요.”
뒤이어 제나도 돌아갔다.
83층 필드의 전역은 끄트머리에서
부터 빛이 되어 소멸하고 있었다. 시야 오른쪽의 조작창을 보니, 암케
나도 대기실에서 뒷정리를 하는 중이 었다.
여기에 남은 것은 나 혼자. “그래서,할 말은?”
나는 바닥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은
다음 말했다.
오른쪽 어깨로부터 검붉은 번개가 튀어나와 익숙한 형상을 짜올렸다.
할기온의 인간형 모습이었다.
〈할 말이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지?〉 “평소라면 자기는 무적이라느니 쉬
워서 하품이 나을 뻔했다느니,자랑이 나 했겠지. 이번엔 조용하길래 뭔 일 이 있었나 해서.”
〈흐하하핫! 내가 그런 성격으로 보 였나?〉
“아니었냐?”
〈부정은 못 하겠구나.〉
할기온이 씨익 웃었다.
그러더니 오른손을 뒤로 뻗었다.
파지직!
필드의 소멸 속도가 훨씬 느려졌다.
“뭘 했지?”
〈차원의 전환 속도를 늦췄다. 잠깐은 느긋하게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
〈뭘 그런 눈으로 보느냐? 내게도 이 정도 일은 가능하다. 나도 자격을 가진 어엿한 신격이니라.〉
“너와 비슷한 놈이 저렇게 되어 있 는데.”
나는 슈텐베르크였던 것을 가리켰다.
할기온이 고개를 저었다.
〈저건 슈텐베르크의 환상일 뿐이다.
이런 그림자 세계에서 초월종은 완전히 소멸하지 않아.〉
“안 죽었다는 거냐?”
〈그렇다.〉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런 놈하고 또 싸우기는 싫은데.
〈걱정하지 마라. 이번 세계가 끝날 때까지는 더 이상 나타나지 못할 터 이니. 이토록 오염된 것을 보면,이미 본체가 무사하지 않을지도 모르겠구나.〉
“흐음.”
〈이 세계에서 우리 같은 존재들은 각종 제약을 받고 있다. 본래 힘의 수 분의 일도 발휘 못한다고 봐야겠지.
네 생각보다 신격은 강하다. 자만하지 말도록. 물론,나의 힘을 이어받은 너 라면 뛰어넘을 가능성은 충분하다만.〉
논지를 벗어난 것 같다.
본래 이 녀석이 말하려던 주제는 이
쪽이 아닐 터였다.
나는 말없이 할기온을 바라봤다. 할
기온은 입을 꾹 다물고 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시니스가 사라졌다.〉
“……..”
〈보다 정확히 말하면,80층을 클리 어한 이후,대기실에서 느껴지던 놈의 존재감이 옅어졌느니라.〉
“가 버린 거냐?”
〈그 건방진 놈과의 연결은 끊어놓지 않았지만,적어도 정신체는 이곳을 떠난 듯하다.〉
나는 80층의 기억을 되돌렸다.
프라이오스는 차원의 벽을 뚫기 전, 필드의 시간을 멈췄으나 아마 초월종 들에게는 먹히지 않았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아시니스가 숨겨진 진실을 알아챘다는 뜻일까.
〈놈이 네게 말을 남겨두고 갔다. 기 다리겠다고 전해달라더구나.〉
“뭘 기다려?”
〈그건 나도 모른다. 알아들을 수 있게
말해야지. 발칙한 놈이.〉
할기온이 투덜거렸다.
그리고 나를 돌아보았다.
〈어쨌든,슬슬 나도 가봐야겠다.〉
“……..”
〈물론,힘은 남겨두고 갈 작정이다. 네 능력이라면 마음껏 다룰 수 있겠지.〉
“어디로 가는데?”
〈정확히는 알 수 없다. 한 가지 확 실한 건,누군가 나를,아니,우리를 부르고 있다는 것이다.〉
할기온이 고개를 돌렸다.
나는 녀석의 시선을 따라갔다.
서서히 흩어지는 필드의 하늘 너머,
무수한 수의 황금색 빛이 솟구치고 있었다.
저건,파편이 아니다.
솟구치는 빛은 눈부신 궤적을 그리며
어디론가 쏘아져 갔다.
〈후후. 이 광경은 차원과 차원의 틈
에서만 볼 수 있을 것이다. 또 하나의 세계가 닫히고 있어. 제물들이 ‘해방’ 되고 있는 것이야.〉
이놈도 저놈도,여기 애들은 개풀 뜯어먹는 소리가 특기인가.
자세히 설명해 주면 어디가 덧나나. 일일이 추측하기도 지겨워 죽겠다.
〈한.〉
할기온이 나를 불렀다.
〈우리의 계약은 네가 임무를 끝낼
때까지다. 네가 임무를 마친 뒤,돌아 간다 해도 우리는 널 탓하지 않겠다. 너는 너의 의무를 다했느니라.〉
“그래서.”
〈머지않은 때, 너는 선택해야 할 것 이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 녀석도 알아겠군._
역시 속일 수 없었다.
말하는 내용을 보면 확실했다.
할기온도 뫼비우스의 진실을 깨달은
것이다.
“선택? 뭘 선택하라는 건데. 이곳에 남아서 같이 뒈질지,튀어서 구차하게 살아남을지 고르라는 건가? 어차피 망한 세상인데 선택 따위가 뭔 소용 이냐? 튀는 쪽이 맞잖아. 의리니 뭐 니, 같잖은 이유로 자살하는 건 질색 이야.”
〈흐하핫! 틀린 말은 아니구나.〉
“그런데 선택? 생체 배터리라도 되 라고?”
〈확실히,너만한 존재가 이카르를 이어받는다면 이 게임은 훨씬 완성도가 높아지겠지. 다시 한번 부흥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인상을 찡그렸다.
그리고 하늘을 가리키며 말했다. “몬스터들을 모아서 뭔 수를 꾸미는지
모르겠다만,전혀 그럴 생각이 안 들어. 너희도 텔과 똑같은 거 같은데. 나더 러 이 우주를 위해 한 몸 바쳐 죽어달 라는 거겠지?”
나는 황자의 유언을 떠올렸다. 밀밭에서 분명,그 녀석은 내게 이
렇게 말했었다.
‘황금의 권좌에서…… 우리는 다시 만날 것이다.’
지긋지긋하다. 나는 슈텐베르크의 시체가 파묻힌 크레이터로 내려갔다.
살덩어리 속에 손을 파묻고 몇 번 뒤적거리자,원했던 물건을 꺼낼 수 있었다.
펄떡거리는 초월종의 핵. 역천의 서가 없어도 이만한 간섭력이라면 7성 승 급을 노려볼 수 있다.
한 마리만 더 잡으면 된다.
란티아의 핵. 그것까지 얻는다면, 나와 유르넷의 합동 제작으로 역천의 서 모조품을 만들 수 있게 된다. 엘 시드의 유산 따위는 버려도 돼. 90층 까지 클리어한 뒤 7성 승급을 완료한 다면,드디어 이 미친 세계와도 작별 할 수 있게 된다.
지구에는 유르넷이 내게 남긴 재산이 있다.
돈이 무진장 많다 이거지. 평생 놀고 먹어도 모자라지 않다.
과금하겠답시고 뮤튜브 방송을 할 필요도 없어. 하고 싶은 게임을 마음껏 해도 괜찮다. 생존을 위협받지 않아도 된다. 느긋하게 평생을 보내는 것이다.
‘그런데 남아?’
이곳에?
좋은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는데,
영웅으로서의 삶은 고통스러운 훈 련과 전투의 반복이었다.
‘남는다고 해도 소용없어.’
아무 희망도 없다.
우주가 끝났다는데 뭘 되돌려. 경계에는 수천억 수천조 마리의 파
편들이 우글거리고 있다. 아니,단순 히 숫자로 표현할 수 있을까. 뫼비우 스가 존재하는 한 그 수는 무한이라고 봐야 적당할 것이다.
“……..”
눈을 떴을 때,할기온의 모습은 완 전히 사라져 있었다.
나는 놈이 완전히 떠나갔다는 것을 알아챘다.
‘준비가 안 됐다고 했나.’
혀를 찼다.
무슨 준비를 하라는 거냐.
몸 바쳐 뒈질 준비? 텔의 의도대로
배터리가 되어 평생을 보내다 죽는 것? 내가 태어난 곳도,
돌아갈 곳도 지구다.
그곳이 나의 고향이며,내가 살아왔고,
내가 살아갈 장소야.
이런 쓰레기 같은 곳이 아니라. ‘꺼지라고 해?
나는 침을 퉤 뱉었다.
멈춰 있던 시간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등을 돌려 눈부신 빛에 몸을 맡겼다. ‘떠날 준비를 해야겠군.’
더 이상 너희들의 어떤 장난에도 어
울려주지 않아.
시리스가 옳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