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ck Me Up! RAW novel - Chapter 286
288. 또 하나의 끝 (3)
90 층.
타오니어 최후의 임무.
할 일은 명확했다. ‘타오니어의 검’
이라 불리는 비공정과 함께 검은 구멍 내부로 진입하는 것. 운이 좋다면 수적 열세를 극복할 만한 기회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운이 아주 좋다면 말이지.’
단순히 운이라고 말할 정도가 아니다. 수천,수억만 분의 일. 거기에 수천만
배를 더해도 승리의 가능성을 장담할 수 없다. 이건 틀림없는 기적의 영역 이었다.
그리고,
나는 기적 따위는 믿지 않는 인간이 었다.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쭈욱.
88층과 89층 임무는 간단하기 그지
없었다.
여태껏 그래왔듯 황도에 침입해온 파편들을 격퇴하면 그만이었다.
게다가,그 수가 86층보다 훨씬 적 었기에,용병의 도움을 거의 받지 않 고서도 무난하게 처리할 수 있었다.
추위와 허기에 피난민들이 하나둘 쓰러지고,용병들이 부상과 질병으로 죽어가는 와중에도,’타오니어의 검’ 이라 명명된 비공정은 꾸준히 건조되 었다.
튼튼한 장갑과 효율 좋은 무기는 엄 두조차 낼 수 없었다.
이미 86층 방어전에서 대기실과 황 도군의 공중 병력은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기에,
기껏해야 다 부서져 가는 낡은 비공
정의 부품들을 활용하여 건조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플로어90
[임무 유형 – 불명]
[목표 – 알 수 없음]
나는 시야 오른쪽에서 점멸하고 있는 임무창을 바라보았다.
알파 제로의 설명이 맞다면,이번이 타오니어의 마지막 스테이지였다.
임무의 유형과 목표는 알 수도 없다. 어떤 부가적인 설명도 없이 작은 홀 로그램 창 하나만 떠을라 있었다.
임무에 진입한 암케나는 약간 당황 한 것 같았지만,이내 마음을 다잡았 는지 조작을 이어갔다.
출발 전,안내문에 떠오른 이번 임 무의 특징은 언제든 후발대를 내보낼 수 있다는 것. 따라서 90층에는 1파 티의 정예 세 명만이 선발대로 출발 했다.
‘뭐,지원군이라고 부를 수도 없지.’
연이은 공략에 수많은 영웅들이 목 숨을 잃었다.
고층 등반에 써먹을 만한 놈들을 추 려봤자,백 명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타오니어의…… 검.”
제나가 중얼거렸다.
그녀의 목소리에서 착잡한 감정이 묻어났다.
그야,이름만 거창하지,실속은 하 나도 없었으니까. 지휘 캠프 앞에는 반파된 소형 비공정 한 대가 덩그러니 놓여 있을 따름이었다.
“이걸로 구멍에 들어가서 그 파편인가 뭔가 하는 것들의 대빵을 붙잡는다는 거죠.”
“기본 계획은 그러하다. 차원검의 힘을 응용한다면 통로 속에서도 형체 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야. 나머지는 우리들에게 달려 있느니라.”
“그런데 파편들에게 대장 같은 게 있어요? 만약 있다고 해도,그 놈을 처리하면 침입이 끝나나요?”
프리아는 침묵했다.
벨키스트의 입이 호선을 그렸다.
“아니라는 거군.”
“해보지 않으면 모른다.”
“방법이라는 게 결국 자살 돌격이오?”
벨키스트는 뒤를 힐끔 보았다.
그곳에는 비공정에 탑승하게 될 용 병들이 대기 중이었다.
그러나 피와 먼지로 더럽혀진 그들의 갑옷은 군데군데 찌그러져 있었다. 창 과 칼은 녹슬었으며,눈에는 빛이 없
었다. 숫자라고 해봐야 백 명 내외. 이 어진 침입에 다시 사상자가 나온 것 이다.
“차라리 거점을 옮기는 편이 어떻소. 이제 여긴 아무것도 없지 않나. 무의 미한 돌격보다는 훨씬 나을 것 같구려.”
“벨키스트.”
나는 낮게 말했다.
벨키스트는 나를 돌아보더니 쓴웃 음을 지엇다.
“뭐,황녀 나으리가 있는 이곳도 이 렇게 된 마당에 갈 장소가 어디 있겠소. 실언한 것을 사과드리지. 황녀님 말씀 대로 그것밖에 방법이 없군.”
“이해해줘서 고맙구나.”
“그런데 우리가 구멍으로 가면,여기
사람들은……
“필요 없는 질문은 하지 마.”
나는 무뚝뚝하게 말한 뒤,비공정과 이어진 계단으로 향했다.
“문이 열리고 있어. 잘못하면 시작 하기도 전에 끝날 거다.”
파직.
잿빛 구름의 저편,하늘에 거대한 균열이 퍼져나가고 있었다.
구멍이 열릴 때의 전조였다. 균열의 크기로 보아 이번 침입의 규모는 특대. 돌입 타이밍을 놓치면 틀림없이 실패
한다. 늑장을 부리다가는 들어가지도 못한 채 전멸할 수도 있었다.
“시간이…… 없는 것 같다.”
프리아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윽고 그녀는 결심한 듯한 표정을
짓더니,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나는 뒤의 두 명을 돌아보았다. “우리도 가자.”
수 미터를 뛰어오른 벨키스트가 갑 판에 착지했다.
제나는 주먹을 꽉 쥔 채 바닥을 바 라보고 있었다.
“미련 갖지 마. 이번 임무가 마지막 이야.”
나는 제나의 귀에 속삭이듯 말했다.
“제가 듣기로는,임무는 100층까 지……:
“아니,이게 끝이다. 살아남는 것만 생각해. 이곳이 끝난다고 우리도 죽는 게 아냐. 대기실로 살아서 돌아가겠다는 마음으로 움직여라.”
“하지만.”
제나가 나를 올려보았다.
눈꼬리 끝이 젖어 있었다.
“이곳은 아버지와 제가 나고 자란 고향이란 말예요.”
“그 어떤 결말이라도 죽는 것보단 낫다. 명심해.”
제나는 이마를 감싸 쥐더니,계단을 밟고 천천히 올라갔다.
그 뒤로 용병들이 탑승하기 시작했다. 하나같이 생기없는 표정과 몸짓. 싸우 기도 전에 사기는 이미 바닥이었다. 요슈 같은 리더가 그들을 다독여야 했지만,이제 이곳에는 그럴 만한 인 재도 남아 있지 않았다.
“한.”
갑판 위의 프리아가 나를 불렀다.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나.
파직. 파지직.
하늘의 균열이 뚜렷해지고 있었다. 미적거릴 여유는 없겠지.
한달음에 갑판에 올랐다. 기계식 계 단이 접히고는 비공정이 부양을 준비 했다.
“황녀 전하아아!”
비공정이 땅에서 살짝 떠올랐을 때, 합창과도 같은 외침이 울려 퍼졌다.
시선을 돌리자,발착장 근처에 옹기 종기 모여 있는 피난민들이 눈에 띄 었다.
“부디,부디…… 승리를!”
“믿겠나이다,전하!”
“타오니어에 빛을 가져오소서!”
그들은 쉰 목소리로 부르짖었다.
프리아는 부드럽게 웃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들의 기대에 부응하도록,최선을 다하겠다.”
타오니어의 검이 부양하기 시작했다.
3m, 5m. 10m..
프리아는 허리춤의 칼집에 손을 얹은 채 입을 열었다.
“너무 슬퍼하지 말거라. 시작이 있 으면 끝도 있는 법. 그대들은 충분히 잘 싸워주었어. 나는 그대들과 함께 싸울 수 있었던 것을 영광으로 생각 하느니라.”
“……황녀 전하.”
[※경고!] [‘혼돈’,’절망’,’원념’이 강림하기 시 작합니다!]쨍그랑!
수십 미터 크기의 균열이 폭발했다.
이윽고 나타난 것은,악마의 아가리와 같은 구멍.
그 속에서 무수한 수의 파편들이 꿈 틀거렸다.
마치,배수로에서 수천,수만 마리의 바퀴벌레가 동시에 튀어나오는 것 같 았다.
나는 하늘을 가리는 검은 군세를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혼돈의 파편 Lv.113] X 3153 [절망의 파편 Lv.108] X 2913 [원념의 파편 Lv.121] X 3689이거,계산에 실패했나.
예상보다 놈들의 수가 훨씬 많다. 랜덤 특성은 발현되지 않았지만,물량
그 자체만으로 압도적이었다.
“만 마리는 훌쩍 넘는 것 같은데요.” “걱정 마라. 재네 목표는 우리가 아
니거든.”
구름을 이룬 파편들은 황도 쪽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용병 한 명이 다급하게 외쳤다. “황녀 전하!”
“여신의 숨결을 뿌려라.”
반짝이는 파란 가루가 배의 뒷꽁무
니에서 흩날리기 시작했다.
어차피 황도의 함락은 막을 수 없다.
그렇다면,최소한 곱게 죽을 수 있게 해줘야겠지. 가루는 거센 바람을 타고 황도 전체에 흩뿌려졌다.
“오빠!”
“왜?”
“저기……!”
[혼돈의 파편 Lv.113] X 13942 [절망의 파편 Lv.108] X 11964 [원념의 파편 Lv.121] X 15531거대한 구멍이 꽉 들어차 있다.
벨키스트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대체 몇 마리나 있는 거지?” 좌르르르르!
파편들이 꾸물거리며 각지로 퍼져 나갔다.
타오니어에 남아 있는 땅을 먹어치 우러 가는 것이다.
‘이걸로 끝장인가.’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언젠가 이때가 올 줄은 알고 있었다. 뻔히 예정된 결말. 하지만,적어도
지금,이 순간만큼은…….
“최후의 최후까지.”
스릉.
프리아가 검을 치켜들었다.
“우리는 저항한다!”
타오니어의 검이 가파르게 가속하기
시작했다.
내구성이나 무장은 갖다 버렸지만, 속도만큼은 떨어뜨리지 않았다.
프리아의 눈에서 선명한 광채가 일 렁 였다.
허리까지 뻗어 있던 은발이 흔들리 더니 황금빛으로 번쩍였다.
[다중차원검 ‘루스라다’가 각성합니 다!]우우우우우응!
프리아의 검이 눈부신 섬광을 발했다. “나아가라!”
비공정에 몰려오던 수백 마리의 파 편들이 빛에 지워졌다.
흡사 해일이 치고 나가듯,빛의 파 도가 파편을 집어삼켰다.
[혼돈의 결정 Lv.322] X 531 [절망의 결정 Lv.315] X 287 [원념의 결정 Lv.311] X 377그오오오!
결정까지 등장했군.
놈들은 구멍 안쪽에서 여기를 엿보는
중이었다.
제나가 프리아에게 헐레벌떡 뛰어 갔다.
“황녀님,수가 너무 많은데요! 일단
빠졌다가 다시 가요! 그 능력이 무적 은 아니잖아요!”
번쩍!
차원검으로부터 터져 나온 빛이 수백 마리의 파편을 한 번에 소멸시켰다.
그 속에서 타오니어의 검이 옆으로 회전하며 전진했다.
“그대들은 힘을 아껴두거라. 통로로 들어가면…… 나의 능력도 반감될 것 이다.”
“그,피가……!”
울컥.
프리아의 입술에서 핏물이 흘러내 렸다.
나는 혀를 찼다.
“프리아 말이 맞아. 지금이 아니면 안 돼.”
“…….”
“점점 더 수가 많아질 거다. 구멍으로 들어갈 거라면서. 그럼 무리를 하는 수밖에 없어.”
“……알았어요.”
우우우우웅!
황금빛에 둘러싸인 타오니어의 검은, 파편들을 밀어 헤치면서 구멍 속으로 나아갔다.
‘이게 네가 선택한 길이라면……:
그 길을 따르는 수밖에 없다.
“키앗! 키아아앗!”
[오염된 리자드맨 Lv.74] X 15 [오염된 고블린 Lv.59] X 19 [오염된…….]갑판 위,난데없이 몬스터가 불쑥 솟아났다.
아마 파편들이 변신한 것이겠지. 그 목표는 생각할 필요도 없다.
프리아는 차원검을 치켜든 채 파편을 몰아내고 있었다.
“전투 준비.”
비프로스트를 빼들었다.
그와 동시에 제나와 벨키스트, 용병 들이 각자 무기를 뽑았다.
나는 모두에게 들리게끔 중얼거렸다. “어떻게 싸워야 할진 말 안 해도 알
거야. 프리아부터 지켜. 그 다음이 배다. 다른 놈들은 무시해도 돼. 방해되는 놈들만 집중적으로 처리해라.”
‘이렇게 된 이상,후발대가 필요한 데……:
병력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나는 마스터의 조작창을 살폈다. 나와
비슷한 생각이었는지 암케나도 출전 창을 불러오고 있었다. 대기하고 있던 공격대를 편성한 뒤,출전 버튼을
[복구중…….] [서버에 오류가 생겨 접속이 끊겼습 니다. 잠시 기다려주세요.]순간,암케나의 화면에서 노이즈가 번쩍였다.
‘…또.,
튕겼다.
그것도 90층 진행 도중,구멍 진입을 앞둔 이 시점에서.
‘아니.’
일부러 인가.
나는 피식 웃었다.
구멍 내부의 풍경을 외부인인 암케
나에게 보여줄 수는 없을 테니까.
뭐,상관없다.
이것이 마지막 임무.
일단,계약은 계약이야.
임무가 허락하는 한,나는 끝까지
싸운다.
[비공정 ‘타오니어의 검’이 ‘???’에 진입했습니다!]마침내,우리가 탄 비공정이 구멍 안으로 파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