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ck Me Up! RAW novel - Chapter 305
307. 라그나로크 (12)
붕괴가 시작되었다.
쿵!
도시 전체가 무너질 듯 흔들렸다. 그리고 검은 구멍으로부터 무수한
수의 파편들이 뛰쳐나왔다.
[혼돈의 파편 Lv.113] X 13253 [절망의 파편 Lv.108] X 17643 [원념의 파편 Lv.121] X 12289끼아아악!
듣는 이의 정신을 망가뜨리는 비명.
수확자들은 하늘 전체를 뒤덮으며 에덴으로 낙하하고 있었다.
〈발사! 발사하라!〉
방위군 측에서도 반격하기 시작했다.
빌딩 곳곳에 세워진 대형 무기들이 화염을 내뿜었다.
선두에 있던 수천 마리의 파편이 일제히 증발했다. 하지만 그보다 수십 배는 많은 수의 파편들이 빈자리를
메꾸었다.
‘그러게 도망가라니까.’
한 시간은 버틸 수 있다더니 순
구라잖아.
구멍에서는 파편들이 끊임없이 쏟 아져나오는 중이었다.
[혼돈의 파편 Lv.113] X 113253
[절망의 파편 Lv.10幻 X 117643
[원념의 파편 Lv.121] X 112289
이미 십만 단위.
야경이 발하고 있던 빛이 놈들의 그림자에 의해 가려졌다.
‘저놈들은 일부일 뿐.’
십만이나 백만,천만 따위로는 놈 들의 숫자를 계산할 수 없다.
저것이 나의 진정한 적. 전 우주 를 뒤덮고도 남을 종말의 군세였다.
“도망칠 준비는 하고 있냐?”
〈대부분의 시민들을 피난선에 태 웠습니다. 하지만,서버의 문을 열기 위해선 시간이…….〉
뒤를 돌아보았다.
에덴의 외곽,수백 미터 크기의 대형 비공함이 출항을 기다리고 있 었다.
“걱정 마라. 문은 내가 열어주지.”
나는 검지를 튕겼다.
하늘의 끝자락에서 황금빛 마력이 피어오르더니,거대한 차원문이 열 렸다.
“저 문으로 들어가. 2서버로 빠져 나갈 수 있을 거다. 문이 닫히기 전 에 도망쳐라.”
<……예.〉
"약속할 수 있겠지? 세계를 한 번 더 되살리겠다고."
〈저의 영혼을 걸어…… 맹세합니다.〉
"좋아."
파편들이 도시의 첫 번째 수비진 과 부딪쳤다.
온갖 미사일과 기관포,빔 무기가 난사되었으나 그것도 잠시,놈들은 수 킬로미터에 달하는 영역을 한순 간에 소멸시켰다. 마치 메뚜기 떼가 옥수수밭을 먹어치우는 것처럼.
■많군.’
나는 하늘을 올려보았다.
[혼돈의 파편 Lv.113] X 763253 [절망의 파편 Lv.108] X 587643 [원념의 파편 Lv.121] X 492289구멍이 보이지도 않아.
이제 인간의 감각으로는 파악할
수 없다.
[혼돈의 결정 Lv.32幻 X 5843
[절망의 결정 Lv.315] X 3111
[원념의 결정 Lv.311] X 4289
한때 1서버라 불렸던 도시는 앞쪽
에서부터 사라져가고 있었다.
[로키,후배들을 데려왔어!]
도로의 한중간.
맨홀 뚜껑이 열리더니,작은 소녀가 뛰쳐나왔다.
타오니어의 담당 요정이었던 프레이. 이윽고 맨홀으로부터 빛의 기둥이
솟구쳤다.
수많은 요정이 뭉쳐 있는 것이다. "금고는?"
[겨우 찾았어. 젬이 한가득 쌓여 있더라구. 시젤님에게 넘기도록 할게!]젬.
유저들의 지갑을 털어 만들어진 간섭력의 결정이었다.
세계를 복구하는 데 필수적인 연 료가 되어주겠지.
[냐아아아아아아!]수십만 이셀들은 잠깐 공중을 배
회하더니 대피용 비공정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끝난…… 거야?]"그래. 끝났다."
텔은 죽었고 회사는 무너졌다.
또 하나의 전쟁이 마침표를 찍은
것이다.
[이제 파편들과 싸우는 거구나.] 프레이가 싱긋 웃었다.그리고 날개를 펄럭이며 내게 날
아오려 했다.
[로키,앞으로도 함께…….]"아니."
나는 오른손을 펼쳤다.
차원검이 손아귀에 쥐어졌다.
등 뒤의 땅을 가로질러 그었다.
우우웅!
황금빛 장벽이 나와 프레이 사이를 가로막았다.
[어라?]
"수고 많았어,프레이. 너도 네 삶을 찾아가. 시젤이 도와줄 거야."
[무슨 뜻이야, 그건. 로키,로키!] 프레이는 쏜살같이 날아와 날개를
펼쳤지만,곧 장벽에 몸을 부딪쳤다. [이거 열어줘! 나를,나를…… 버
리지 않겠다고 했잖아!]
[장난. 장난이지? 내 진짜 몸을 만들어준다고 했잖아. 버리지 않는
다고 했잖아! 로키! 로키이이이이! 이러지 마,나는 쓸모가 있단 말야. 너와 함께,나는,너와 함께……!]
나는 차원검을 굳게 쥐었다.
황금빛 칼날이 검은색으로 바뀌었다. [제발,제발…….]
"미안하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앙!]주저앉은 프레이가 울음을 터뜨렸다. '바보 같긴.'
넌 나한테 속은 거야.
나는 검은 광채를 발하는 차원검을
한 번 더 내리그었다.
황금빛 장벽이 까맣게 물들었다.
등 뒤의 풍경은 보이지 않았다.
차원이 완전하게 분리된 것이다.
그오오오!
파편들이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벽을 뚫으려 했지만,제자리에서 헛돌 뿐이었다.
당연하지. 나를 죽이기 전까지는 아무도 여기서 못 나가.
"기아아아악!"
도시를 거의 먹어치운 파편들은,
하늘 위에서 소용돌이처럼 맴돌기 시작했다.
"270만 년이라."
내가 파편들을 처리하기 위해 걸
리는 시간이었지.
사실,그건…….
"거짓말이야."
말이 될 리 없다.
그것밖에 안 걸린다고.
2,700만 년?
2억 7,000만 년?
아니. 아니야.
나는 눈을 감았다.
귓가에 속삭이던 텔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무한의 시간 속에서,영원의 싸움을 이어가게 될 거야.'
우주가 끝날 때까지.
'누구도 널 기억해주지 않아.’ 잊혀진 채로.
무엇도 느끼지 못하는 채로.
망령이 되어 스러져간다.
'이것이…… 내가 바란 결말인가?' 모르겠다.
이제는 알 수 없었다.
예전의 내가 어떤 생각으로 그런
얼토당토않은 계획을 세웠는지 떠올릴 수 없었다.
내 인생의 파노라마는 거의 다 비 어 버렸다.
불타버린 앨범처럼,추억의 대부 분이 사라졌다.
"로키."
나의 이름.
다른 이름도 있었던 것 같은데. 잊어버렸다.
"뛰어넘은 자여."
나는 옆을 돌아보았다.
거의 뒷골목 저편,한 노인이 비
틀거리며 걸어 나왔다.
"알파 제로인가."
"그 호칭은 더 의미가 없을 것 같군. 르카디스라고 불러주게."
많이 늙었다.
처음 봤을 때는 초로의 중년이었 으나,지금은 임종을 앞둔 노인처럼
보인다.
"도망치라고 했잖냐. 왜 남은 거지?" "이 몸은 살 만큼 살았어. 추한 삶
을 더 이어봤자 무엇하겠나."
쿨럭.
노인이 기침했다.
입가 사이로 피가 새어 나왔다. '그러고 보니 말을 더듬었던 것 같
은데:
몸은 쇠약해졌으나,눈빛은 어느 때보다 뚜렷했다.
회광반조(回光返照)라는 말이 있지. 죽기 직전의 힘을 끌어쓰는 것 같
았다.
"텔이 그렇게 된 것은 나의 탓이네."
노인은 부러진 벤치에 앉았다.
회한 어린 음성이 노인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나는 만신의 전대 대표일세. 우주의 끝을 관측한 후,그 아이들에게 책 임을 넘겼지. 더없이 순수하던 아이 들이야. 그 누구보다 자신의 생명들을 사랑했었다네."
"……"
"나의 일그러진 욕망이……. 이런
비극을 만들었던 게야."
르카디스가 눈을 감았다.
나는 피식 웃었다.
"그래서 어쩌겠다는 거냐. 되돌리 기라도 하려고?"
"한번 일어난 일은 되돌릴 수 없어. 우주의 섭리 아닌가."
주름투성이의 눈이 나를 비추었다.
"하지만 자네는 그 흐름을 거스르려 하는군."
노인은 하늘을 올려보았다.
그 위에는 파편의 무리가 꿈틀거 리고 있었다.
"자네가 흐름을 거스르려 할수록, 저들은 더욱 강한 존재가 되어 되돌 아올 걸세. 오를 수 없는 폭포와도 같아. 우리 만신들도 모든 힘을 다해
저항하려 했지만,처참히 실패했던 것이야. 저들은…… 진정한 무한(無 限)이라 할 수 있겠지."
"….."
"우리 뫼비우스와 자네가 속했었던 지구,그 외의 무수한 우주들에는 공통된 법칙이 있지. 예전의 나는 어리석기 그지없었어. 감히 흐름을 거스르려 했었지."
노인이 눈을 내리깔았다.
"나는 시스템을 만들 때 그것을 뛰어넘고 싶었어. 현신(賢神)이라 불리는 나의 모든 지식을 쏟아부었지. 그런데 결과는 어떠한가. 보다시피,
이렇게도 추하게 끝난 것이야." 쓴웃음이 노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우리 뫼비우스가 살아있는 한,저
들은 무한이 되어 들이닥치겠지." "무한이 라."
"아무리 자네의 힘이라도•…“: "놈들이 무한이라면."
나는 망토를 그러쥔 채, 하늘 전
체를 감싸 안은 혼돈을 응시했다. "정말 무한이라면…… 재밌는 싸
움이 되겠군."
시험하고 싶었어.
당장이라고 움직이고 싶어 손이 근질거렸다.
"누가 나더러 그랬지. 무한의 잔이 라고. 그럼 저 녀석들은 어떨까. 방 패를 뚫는 창과 뚫리지 않는 방패의 대결. 어떤 결과가 나올지 궁금하지 않나?"
"허나 그 세월은……:
"끝은 있어."
나는 오른손을 내밀었다.
"승패는 존재한다."
좌르르.
용비늘이 펼쳐지며 검의 형상을 짜올렸다.
"나는 승산 없는 싸움은 안 해."
"….."
"운명? 신? 무한? 헛소리 마라. 그딴 시시콜콜한 말은 안 믿어. 내가 믿는 것은……
내 손에 들린 검.
그리고,
꺾이지 않는 의지.
"저놈들한테 졌으면 나불대지 말고 찌그러져. 싸우는 데 방해가 되니까."
"……자네는."
"되돌릴 수 없다고,누가 정했지?"
"포기하라는 거냐? 어차피 안 될 거니까,이길 수 없으니까,그만두라 는 거냐?"
후회하지 않아.
나는 여기에 선 것을 후회하지 않 는다.
지금껏 싸워왔고,앞으로도 싸울 모든 시간 속에서.
"을 거면 오라고 해. 나는 걸어오는 싸움은 안 피해."
그오오오오!
파편의 괴성이 울려 퍼졌다.
그 눈 이 나를 포착했다.
,잘 봐라.'
너희의 적이 여기 있다.
'똑똑히 알아둬.’
나는 너희의 룰을 무너뜨릴 것이다.
전 우주에 걸쳐 정해진 법칙? 그딴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
내가 하고 싶으니까 한다.
"이번 전투가…… 다른 우주의 존 립에 영향을 줄 수도 있다네."
"그래?"
"뫼비우스와 연관된 우주가 흔들 릴 수 있어. 그들에게 자네는 '악'이 라 불리겠지."
"그거 잘 됐군. 응원받는 건 딱 질 색이야."
타오니어의 한 명을 지키기 위해 다른 세계의 수만 명을 죽인다.
상관없어.
어느 누군가에게 나는 증오와 모 멸을 받을지도 모른다.
역시 상관없다.
"후…… 후후……
르카디스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노인의 몸이 빛으로 흩어
지기 시작했다.
"뛰어넘은 자여."
"….."
"정녕 자네는 넘어서려 하는가." "넘어서는 게 아니야."
나는 말을 이었다.
"이기는 거다."
이건 놈들과 나의 전쟁이다.
언젠가 결과는 나온다.
그 승패를 나는 자신할 수 있었다. '이기는 건……
나야.
내가 이긴다.
수십억 마리의 파편이든,수천만 마리의 결정이든.
눈깔 새끼와 그 뒤에 버티고 서 있는 미지의 존재들까지.
남김없이,한 마리도 빠뜨리지 않고 토벌한다.
더 이상 건드리지 않을 때까지. 콰릉!
땅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고층 빌딩이 쓰러져 혼돈의 틈새 사이로 사라져갔다.
도시는 완전히 모습을 잃었다. 「뛰어넘은 자여.」
육신을 잃은 르카디스는 빛의 결 정이 되어 있었다.
「자네의 패도를 지켜보도록 하지.」 이윽고 그 빛이 나의 심장에 빨려
들어왔다.
현신의 결정이.
〈떠나기 전,알려줄 게 있다네.〉 "뭐냐?”
〈자네의…… 패도…… 에는…….〉 나는 놈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더듬거리던 르카디스가 말을 이었다. 〈시리스쟝…….〉
한 마디를 남긴 채 알파 제로는 소멸했다.
나는 어이가 없어져 웃고 말았다. 마지막에 노망이 난 것 같았다. '시리스?'
들어본 듯한 울림이었으나,기억은 나지 않았다.
뭐,상관없겠지.
이 싸움에 밤낮의 구분은 없다. 먹을 일도,잠을 잘 일도,쉴 일도
없을 것이다.
인간의 껍질을 쓰고 있을 필요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오오오!
파편들은 하늘이 내려앉을 정도로 비명을 질러댔다.
먹어치울 상대를 찾고 있는 모양 이지.
촤륵.
나는 용린검을 늘어뜨렸다.
반쯤 무너진 빌딩의 벽을 타고 올
라갔다.
기아아아악!
수십만 마리의 파편 떼가 나를 향 해 몰려들었다.
'내가 죽기 전까진.’
그 누구도 여기서 나갈 수 없다.
이카르가 있었을 때의 사고는 일
어나지 않을 것이다.
여기,내가 서 있는 I경계_를 제외
한다면,파편들은 뫼비우스 어디에 서도 모습을 드러내지 못할 것이다.
나는 망토를 펄럭였다.
황금의 물결이 망토의 자락을 타고
퍼져나갔다.
'이곳에서는……:
나는 왼손을 펼쳤다.
황금빛 광채가 도시 아래를 뒤덮
었다.
'바깥보다 수십만 배 빠른 속도로.'
시간이 흘러가겠지.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비틀린 시공으로 인해 차원이 어긋날 것이다.
누구도 빠져나갈 수 없고 누구도 들어올 수 없다.
이곳은 뫼비우스와 완전히 격리되 어 별개의 공간으로 취급받을 것이 다.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 차원 선 상의 경계.
"알아둬라."
스릉.
나는 적에게 용린검을 겨누었다.
신이니 뭐니 하는 것들이 어디선
가 나를 보고 있겠지.
"나의 이름을."
이건 선전 포고야.
내가 너희에게 보내는 선물이었다. '시작해볼까.'
쾅!
나는 빌딩 끝을 박찼다.
오른손의 용린검이 길게 뻗어 나
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