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ck Me Up! RAW novel - Chapter 309
311. 잔불(1)
시리스 아젠트하임은 눈을 떴다.
“…..”
안개가 가득한 하늘.
회색빛으로 바래진 들판이 펼쳐져
있었다.
시리스는 들판 위에 쓰러져 있는 한 여자를 보자마자,이 장소가 꿈
속이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상태가 안 좋을 때마다 이 악몽을
꾸고는 했으니까.
‘또 여기인가.’
시리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한번 악몽이 시작된 이상,멈출
방법은 없었다.
끝날 때까지 지켜보는 수밖에. “쿨럭…… 쿨럭!”
여자는 격렬하게 기침했다.
그럴 때마다 피가 쏟아져 가슴을
물들였다.
다 찢어지고 헤진 가죽 갑옷.
본래 깨끗했던 금발과 하얀 피부
는 피와 먼지로 더러워져 있다.
‘저 여자는……;
시리스 자신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가 여신과 ‘
계약’을 맺기 전.
안개의 땅,니플헤임이 멸망하기 얼마 전의 풍경이었다.
“키헤핵!”
가래가 끓는 듯한 웃음소리.
쓰러진 그녀의 앞에는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온몸에 나 있는 문신과 창백한 회 백색 피부,이마 양쪽의 뿔.
‘백귀족(白鬼族).’
니플헤임 전역을 통치하고 있던 지배자들이었다.
저들은 인간보다 훨씬 우수한 신 체 능력과 포악한 성정,쥐를 방불 케 하는 번식력으로 대륙 곳곳에 뿌 리를 내렸으며,결국 이곳의 모든 종족을 지배하기에 이르렀다.
이곳에서의 인간은 피지배자에 불 과했다.
아니,그 이하의 존재.
가축.,
백귀족의 주 식재료는 인육이었다.
“너 따위가 나한테 이길 수 있을 것 같았나?”
뿔이 돋은 사내가 풀밭 위의 검을 짓밟았다.
시리스가 몇 년을 들여 어렵게 구한 낡아빠진 철검.
과직.
남자가 밟는 것만으로 철검은 두 동강이 나 부러졌다.
“너희는 약해. 무식하고,느려. 명 예가 뭔지도 모르지. 너희 인간들은 그냥 살아있기만 한 쓰레기야. 우리 에게 죽기 위해 태어난 버러지일 뿐 이라고.”
예전의 시리스는 반박하지 못했다.
떨리는 눈으로 눈앞의 남자를 바
라보고 있을 뿐.
‘저 남자는……
아버지의 원수였다.
심심하다는 이유만으로 그녀의 아 버지를 찢어 죽인.
시리스는 정체불명의 괴물이 쳐들 어 와 마을이 혼란한 틈을 타서,남 자에 대한 복수를 시도했지만 실패 했다.
“파편이란 것들이 쳐들어온다고, 세상이 망해간다고,앞뒤 분간이 안 가는 거냐? 복수? 키하하학!”
퍽!
남자가 여자를 걷어찼다.
그녀는 피를 토하며 몇 바퀴나 뒹 굴었다.
“그 검술은 뭐야. 기사 흉내? 개돼 지가 천박하게.”
“하악……!”
그녀의 입에서는 거친 숨소리만 홀러 나왔다.
남자는 뱀처럼 긴 혀를 내밀더니 단검을 꺼내 들었다.
“어디, 해체를 시작해보실까.”
“예쁜 비명을 들려달라고. 나는 사 냥감을 쉽게 죽이지 않거든. 일만 번 포를 뜰 때까지 살아있던 적도
있었지.”
날이 선 단검이 그녀의 허벅지에 가 닿았다.
여자의 눈빛이 공포로 물들었다. “부드러운 허벅지부터 잘라주지.
그 다음은 종아리. 다음 차례는 엉 덩이야. 네가 비명을 지르는 모습을 보면서…… 갓 베어낸 싱싱한 살점 을 맛있게 먹어주마.”
칼날이 허벅지에 살짝 파고들었 다.
이윽고 살결을 도려내려는 찰나.
“……그만!”
그녀가 울먹이며 입을 열었다.
“뭐라고?”
“그만…… 멈춰다오……. 내가…… 잘못했다……
“말이 짧은데.”
“자…… 잘못했습니다……
그녀의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 렸다.
“죽이려고 할 때는 언제고,이제 와서 잘못했다? 인간 따위가 우리에 게 칼날을 들이밀었다는 소식이 전 해지면,너희 마을은 몰살이야.”
“죄송합니다! 제가…… 눈이 멀어 서……! 실수를……!”
“카하하학! 아비의 원수에게 목숨
을 구걸한다는 거냐?”
과거의 자신을 보고 있던 시리스
는 눈을 감아버렸다.
그럼에도 여전히 악몽은 진행되고
있었다.
“다시 한번 말해봐라. 뭐라고?” “살려…… 주세요……
“부탁하는 태도가 영 아닌데. 무릎
을 꿇어야지.”
그녀는 황급히 자세를 정돈하더 니,무릎을 꿇었다.
무릎이 돌조각에 찔려 피가 났으 나 신경도 쓰지 않았다.
“엎드려라,가축.”
넘죽.
여자가 엎드렸다.
남자는 만족한 듯이 웃고는 흐트 러진 그녀의 금발에 발을 올렸다.
“아버지의 복수? 기사 흉내라도 내고 싶었던 거냐?”
“아닙…… 니다.”
“너희 인간은 명예가 없어. 우월한 문명이 있는 것도 아니고,모시고 있는 신도 없지. 우리가 죽으라면 죽고 살라면 사는 돼지 새끼들인 거 야. 벌레와 비슷한 쓰레기. 그런데, 그 벌레가…… 감히 나의 몸에……!”
사내가 여자의 머리를 세게 짓밟
았다.
그녀는 부르르 떨고 있는 채로 꼼 짝도 하지 못했다.
“결정했다, 인간. 우리의 여신에게 너를 제물로 바쳐주지. 마침 신선한 인간의 심장이 필요했거든.”
“그, 그런……!”
“안심해라. 살아있는 채로 심장을 꺼내면 금방 죽을 테니까.”
여자의 눈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추하구나.’
예전의 자신을 보며 시리스는 입 술을 깨물었다.
저 여자는 복수가 실패하자,두려
움에 진 나머지 굴복하고 만 것이 다.
’명예가 없어.’
당연한 일이었다.
이곳의 인간들은 아무 교육도 받 지 못한다.
백귀족에게 잡아먹히기 위해 길러 지는 가축이었다.
때로는 먹기 위해.
때로는 즐기기 위해.
때로는 자신들의 영역 다툼에 고
기 방패로 쓰기 위해서.
‘니플헤임.’
아무 희망도 없는 땅.
그녀가 살던 이 대륙은 1년 내내 짙은 안개가 끼어 있어 앞을 제대로 분간할 수 없었고, 1년의 반절 이상 이 겨울인 데다 날씨 또한 황량하기 짝이 없었다.
’살아있는 지옥.’
이곳의 인간들은 죽기 위해 태어 났던 것이다.
‘알 수 없었다.’
우정이 무엇인지.
사랑이 무엇인지.
동료와의 유대가 무엇인지.
살아있다는 느낌이 어떤 것인지, 당시의 그녀는 깨닫지 못했다.
가축과도 같은 존재.
남자의 말이 정답이었다.
시리스의 복수는 어설픈 흉내일 뿐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종종 기사에 대 한 이야기를 들려주고는 했으니까.
이야기 속의 기사는 멋지고 명예 롭고 아름다웠다. 그 이야기에 혹해 시리스는 되지도 않는 복수극을 꾸 몄던 것이다.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
“키하하핫! 아하하핫!”
남자는 시리스를 질질 끌어 데려
가고 있었다.
목적지는 들판에서 멀지 않은 쌍 둥이 여신의 신전.
그곳에서 그녀를 산 제물로 바치 려 하는 것이다.
“네 심장을 바치면 여신님도 좋아 하실 거야. 영광으로 알거라! 아무 나에게 주어지는 기회가 아니니까. 너는 위대한 우리 종족의 앞날을 위 해……
「제물은 필요없다고 하지 않았 나.」
남자가 발을 멈추었다.
멀지 않은 곳, 한 소녀가 사내를
굽어보고 있었다.
“뭐야,웬 돼지 새끼가…… 「이곳에서 인간은 돼지 새끼라
불리는 모양이군. 한때는 뫼비우스 에서도 수위를 다투는 곳이었건만. 영원한 불의 땅,니플헤임도 어지간 히 쇠락했구나.」
소녀는 피식 웃더니 남자에게 다 가왔다.
남자가 혈관이 돋은 눈을 크게 떴다. “죽고 싶은……
「눈깔아. 죽기 싫으면.」
소녀의 눈동자가 섬뜩한 빛을 발
했다.
남자는 서 있는 채로 부들거리더 니,갑자기 소녀 앞에 납작하게 엎 드렸다.
“설마…… 헬라님!”
「여기서 내 이름이 헬라였던가.」 “그렇습니다,여신이시여! 이 누추
하신 곳에 무슨 용무로 오셨습니까!” 「간단히 말하지. 너희 세계는 멸
망해가고 있다. 길어도 일주일 내로 수확자가 대륙에 들이닥치겠지. 너 희는 못 막아. 자체 무력이 형편없 어. 단합도 안 되어 있고. 한 마디 로 쓰레기 같은 세계야.」
“그게 무슨……:
「신탁을 못 들었던 거냐? 세계를 되살리고 싶다면 나와 계약을 하라 고 했을 텐데. 그게 너희 영응들의 일 아닌가?」
남자는 눈을 깜빡거렸다.
‘여신’이라고 불린 소녀는 냉소를 머금었다.
「제사장이라고 해서 와봤더니, 영웅이라 불릴 만한 인물조차 아니 었던가. 일반 무력은 인간보다 뛰어 난 것 같은데…… 기껏해야 원시 문 명이로군.」
“여신님! 무슨 말씀……
퍽!
뿔이 달린 남자의 머리가 허공을 날았다.
뒤이어 푸른 피가 잘린 남자의 목 에서 뿜어져 나왔다.
“히이 익!”
공포에 질린 여자가 정신없이 물 러났다.
이윽고 소녀의 시선이 여자에게 향했다.
厂……1 성.」
소녀가 짧게 말했다.
「기껏해야 2성인가. 아주 잘 쳐
봤자 3성도 안 되나. 인재가 없어. 여긴 이미 죽어버린 세계였군. 폐기
하는 편이 낫겠어 ] “당신은…… 누구,십니까?” 「교육도 못 받은 것 같고. 여기
인간들은 다이런 원시인 수준이 냐?」
눈앞의 소녀는 보통 존재가 아니다. 여자는 부들부들 떨기만 할 뿐이
었다.
물론,지금의 시리스는 소녀의 정 체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자애의 여신.’
픽 미 업을 만든 뫼비우스 사의 회장이며,만신전의 대표이기도 했다.
시리스의 마스터,로키가 머물었던
타오니어에서는 소녀를 ‘텔’이라고 불렀다.
「재밌는 생각이 났다.」
문득,소녀의 입이 휘어졌다. 흥미로운 장난감을 발견한 것처럼. 「당첨이 있으면 꽝도 있어야지.
이런 함정이 한둘쯤 섞여 있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영웅 진영은…… 그 래! 너희 인간으로 해주마. 백귀족 에게 당해왔던 설움을 맘껏 풀어 보 도록.」
“..<?,,
「복수할 기회를 주겠다는 거야. 사실 너희를 몬스터로 해도 되겠지만,
그러면 전력 차이가 너무 심하거든. 토끼와 사자의 대결이야. 게임이 안 되지.」
여자는 여신의 말을 이해하지 못 했다.
게임이니 뭐니,세상 물정을 모르 던 당시의 그녀가 알아들을 수 있을 리 없다.
에메랄드 빛깔의 눈을 끔뻑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큭! 크크크큭! 이거 재밌겠군. 어떤 운 없는 마스터가 너희를 떠맡 게 될까. 어느 누가 이런 인간이 되 다만 가축들을 끌고…… 지옥 같은
임무들을 헤쳐나갈 수 있을까. 기대 되는데. 너도 궁금하지 않나?」
"……"
「아,그래. 너에게 서비스를 해주 마. 쓰레기 계정이라도 고위 영웅은 하나쯤 있어야겠지. 돈을 뽑아먹으 려면 최소한의 명목은 있어야 한다 이 말이야. 어디 보자,4성 정도가 적당하려나? 상태창 눈속임만 적당 히 하면 속일 수 있을 것 같은데.」
여자는 한 발짝 물러섰다.
말뜻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저 소녀가 음험한 생각을 품고 있다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이리 와라,나의 아이야.」
"시,싫어……
「왜 싫지? 영웅이 될 기회를 주 겠다는데. 4성,4성이야. 다른 차원 에서는 고위급 인물이 아니면 이런 등급은 못 받는다고.」
"오지 마!"
「언제부터 가축한테 거부권이 있 었지?」
그녀의 발걸음이 멎었다.
소녀는 느긋한 동작으로 여자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네 이름은?」
"4, 47번……
「음? 이름이 숫자인 거냐?」
"아빠는 시리스라고…. 불
렀……:
「좋아,시리스 양. 성은 당연히 없겠지. 내가 멋진 걸로 하나 정해 주마. 아젠트하임은 어때? 어감 좋 지? 초기 직업은 기사로 해줄게. 나 름 메이저 직업이거든.」
"기 … 사……
「명예에 살고 명예에 죽는 직업 이지. 네가 좋아할 것 같은데. 물론, 넌 되다 만 쓰레기일 뿐이지만. 아 까 벌레처럼 엎드려서 목숨 구걸하 던 거,잘 구경했다.」
o…. o o
「어떤 불행한 마스터가 너를 영 입하게 될까. 나라면 몇 번 쓰고 버 릴 것 같은데. 합성당하지 않도록 열심히 해봐. 하핫,하하핫.」
소녀는 제멋대로 폭소를 터뜨리기 시작했다.
「웃겨 죽겠군! 이 계정은 아무도 못 써. 쓰레기 중의 쓰레기. 버러지 중의 버러지! 어떤 마스터가 이런 조건을 이겨낼 수 있을까? 만약 그 게 가능하다면…… 이 몸이 손수 신 이라고 불러주겠다. 아하핫! 아하하 하하하하!」
항상 악몽의 결말은 이렇다.
소녀의 웃음소리로 끝나는 것이
다.
"……하아."
시리스는 눈을 떴다.
익숙한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니플헤임 13층,그녀의 숙소였다. '오늘도.1
몇 번째인지 모른다.
마스터가 떠난 뒤,시리스는 매일
밤마다 악몽을 꾸고 있었다.
벌컥.
시리스는 침대 옆 테이블에 놓인 물을 들이켰다.
시원한 물이 식도로 흘러 들어가 자 정신이 한결 뚜렷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