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ck Me Up! RAW novel - Chapter 310
312. 잔불(2)
시리스는 침대를 청리한 다음,니 플헤임의 흑색 정복으로 갈아입었다.
‘오늘도 일이 많아.’
짝.
시리스는 초췌해진 자신의 뺨을 두드렸다.
하루의 시작이었다.
[이게 다음 안건이야!]책상에 앉아 업무를 보던 시리스의
옆에 서류 뭉치가 쌓였다.
서류를 배달해준 것은 붉은 머리의
요정. ’니셀’이라고 불리는 이 요정은 로키가 게임 속에 떨어지기 전 니플 헤임을 관리하던 담당자였다. 니셀 은 시리스가 픽 미 업에 대한 것을 알기 위해 니플헤임을 떠날 때도 함 께했으며,대기실로 복귀한 다음에 도 곁에서 일을 돕고 있었다.
[요즘 상당히 바쁜 것 같아.] “상황이 바뀌어서 그렇겠지.”시리스는 무뚝뚝하게 답하고는 서
류를 읽어나갔다.
주요 내용은 그녀가 예상하던 그 대로였다.
니플헤임의 영웅들 증 일부가 전 역을 희망한다는 것.
‘그 일 이후로.… 많은 게 달라졌다.’ 1서버에 있던 본사가 무너지고 서
버간의 문이 닫힌 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니플헤임
의 마스터였던 로키가 경계에 자기 자신을 가둔 다음.
생존 투쟁을 이어가던 대기실의 처지는 180도 바뀌었다.
임시 대표인 시젤의 지휘 아래,
뫼비스의 직원들이 세계를 복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대규모 작업에 으레 있을 법한 자 잘한 충돌은 어디에도 없었다. 마치 이때를 기다려왔다는 듯이,불과 며 칠도 안 되어 수천,수만의 차원이 되살아났다. 현재 복구된 차원의 명 단 속에는 니플헤임과 타오니어도 섞여 있었다.
‘전역 신청서인가.’
시리스는 깃털펜에 잉크를 묻혀 서명란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넣었다.
니플헤임의 마스터 대행,시리스 아젠트하임. 이들의 전역 희망서는
수리되었고,곧 해당 영응들은 차원 문에 의해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다.
‘한때,생지옥이었던 니플헤임은 …
바뀌었다.
여전히 날씨는 춥고,하루종일 안 개가 끼어 있었지만,새로 태어난 세계에서 백귀족은 멸종된 상태였 다. 임무에서 수정된 역사가 그대로 적용되었기 때문이었다. 전역 희망 자들은 고향으로 돌아간 뒤,주인 없는 땅에서 개척을 시작할 것이다.
[저,그런데,시리스.]서명을 이어가던 시리스 옆에 니 셀이 내려섰다.
[마스터는 어떻게 할 거야?]“….”
[뫼비우스 직원들에 의하면,거기 혼자 남았다고 하는데.]시리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서류를 점검하는 그녀의 손놀림이 빨라졌다.
[또다른 소문으로는,마스터가 인 간일 때의 기억을 잃었다나 봐. 우 리를 떼어놓고 간 것도 그런 이유가 아닐까? 아무래도 걱정 돼. 다시 알 아보는 게…….]“……그만.”
시리스가 깃털펜이 들린 오른손을
멈췄다.
무뚝뚝한 목소리가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마스터의 바램이야. 나한테 그 선 택을 번복할 권리는 없어.”
[그 말,진심으로 하는 거야? 마 스터를 이대로 내버려 두겠다고?]시리스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마스터를…… 쫓아간다?’
무슨 명목으로.
그녀는 실패했다.
앞뒤 상황을 제대로 파악 못하고, 희망이 없다는 사실에만 눈이 멀어 판단을 그르치고 말았다.
‘염치도 없구나.’
그녀의 마스터는 시리스에게 실망 했을 것이다.
마스터 앞에서 고개를 들고 서 있 을 자신이 없었다.
[마스터를 볼 얼굴이…… 없다는 거야?]“내게 실망하셨을 거야. 그럴 만한 짓을 했으니까.”
시간을 되돌리고만 싶은 심정이었다. 그때의 자신과 만난다면 머리가
울리도록 뺨을 후려갈겼을 것이다. 정신 차리라고.
‘마스터에게 되도 않는 선택을 요
구했어.’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았다. 스스로의 감정에 치우쳐, 그녀가
바랐던 선택을 마스터에게 강요했을 뿐이다.
정작 가장 중요시해야 할 마스터 의 의사는 고려되지 않았다.
‘내가…… 실패했다.’
마스터가 떠난 것도 무리는 아니
었다.
이기적이었던 그녀에게 질려버렸 을 테니.
만약 어떻게 마스터를 찾아간다고 해도,욕만 먹고 쫓겨날지 모른다.
경멸과 혐오의 시선이 돌아올지도 모른다. 마스터에게 미움받는 일은 그를 지구로 돌려보내겠다고 결심했 을 때 각오했지만…… 지금은 그 각 오가 깨끗이 사라져 있었다.
‘왜 그런 생각을 했을까.’
냉정하지 못했다.
마스터를 위해, 니플헤임을 위해 싸워왔던 모든 것이 부질없어졌다는 사실을 깨달아서였을까.
우연히 알파 제로와 놈의 부관을 만나 진실을 전해들었을 때,그녀는 거기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
‘조금 더 침착해야 했다.’
그녀가 차분하게 대처했다면 이런 결말은 나오지 않았을 수 있었다.
마스터와 웃으며 이야기를 나눌 날이 왔을 수도 있었다.
이런 식으로 헤어지는 게 아니라. ‘나는 바보야.’
소중한 기회를 날려먹었다.
그 실수에 대한 대가는 마스터가
고통 속에서 세월을 보내게 된 것.
백 번을 죽어도 되돌릴 수 없는
잘못이었다.
‘얼마가 걸리든. 마스터가 을 때까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용서를 비는 수밖에 없다.
다행히 니플헤임에는 대기실을 유 지할 만한 원동력이 남아 있었다.
시리스의 레바테인과 같은 U 등 급의 아이템,비프로스트. 로키가 쓰 던 검이자, 마스터의 간섭력이 담겨 있는 결정체였다.
업무가 끝난 뒤,시리스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니셀이 다른 13층 멤버와의 회담 을 제의했지만 그럴 만한 기분이 아 니었다.
‘꿈을 꾸고 있었나.’
시리스는 거울을 바라보았다.
그곳에 비치는 것은 흑색 제복을 차려입은 채,그녀를 노려보는 금발 의 여인.
‘저건 가짜다.’
자신은 원래 진짜 기사도 아니었다.
대표이사,텔에 의해 명목상 급조 된 모방품.
로키의 능력에 기대어 크게 성장 했지만 정작 마스터가 사라지자 아 무 역할도 하지 못했다.
“나는……
“네가 어떻다는 거냐?”
시리스는 뒤를 돌아보았다.
잿빛 코트를 차려입은 청년이 벽
에 기대고 있었다.
짧게 뻗친 회색 머리칼과 냉막한
인상. 13층의 서열 3위,리디기온. 감정 없는 눈동자가 그녀를 향했다. “또 이러고 있군. 마스터가 떠난 지
일주일이 넘었다. 아직도 자책이나 하면서 시간을 보낼 셈인가? 네가 서브 마스터 직위를 달고 있는 게 게으름 피우라는 이유는 아니었을 텐데.”
“언제 왔나.”
“당장 결정을 내려라. 우리에게 여 유는 없어. 이 시간에도 마스터는 고통받고 계신다.”
시리스가 고개를 수그렸다.
리디기온은 그녀를 바라보며 혀를 찼다.
“시리스 아젠트하임.”
“……알아.”
“알고 있나? 너는 막중한 실수를 저질렀다. 내가 말했지. 마스터에게 모든 걸 알리고 판단을 맡겨야 했다고. 그런데 네놈은 어쩌자고 했나. 마스 터를 압박해서 강제로 돌아가게 만 들어? 수틀리면 베기까지 하겠다? 기가 차서 웃음도 안 나오더군.”
리디기온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이게 그 결과다. 마스터는 우리를
버렸어.
“우리 목표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거였나? 그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땅 말이지. 돌아가서 무얼 할 셈인 가. 지금까지의 생활을 모두 버리고 새 인생을 살아볼 생각이냐?”
시리스는 눈을 감았다.
고향 대륙으로 돌아갈 생각은 전 혀 없었다.
시리스와 그녀의 동료들은 80층을 도전하기 전,목숨을 걸어 맹세했으 니까.
“마스터는 아무것도 없던 우리에
게 전부를 주셨다. 새로운 고향. 기 적과도 같은 승리. 살아가야 하는 이유까지. 지금 와서 맹세를 휴지조 각으로 만들지는 마라.”
스릉.
리디기온의 허리춤에 걸려 있던 칼집에서 태도가 반쯤 뽑혀나왔다.
시리스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의 말은 정곡을 정확하게 찌르고 있었다.
_그렇다면.’
한심한 자신보다,앞일을 생각하고 있는 저 청년이 그녀의 자리에 더 어울릴지 모른다.
시리스는 입술을 물며 입을 열었다.
“리디기온,나는……!”
“아직 내 말은 안 끝났다. 끝까지 들어.”
철컥.
리디기온이 칼날을 집어넣었다. n예전,너를 보며 생각을 많이 했
었지.”
팔짱을 낀 채 자세를 바꾼 그의 얼굴에는 묘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왜 마스터께서는 너한테 리더를 맡겼던 걸까. 어울리는 인재가 많았 을 텐데. 분석력으로 따지자면 유르 넷이 있지. 그 여자가 없다면 우리
의 작전 계획은 제대로 세워지지 않 았을 거다. 네 지휘력이 유달리 특 출난 것도 아니야. 우리 모두를 압 도할 만큼 강하지도 않아. 그런데 마스터께서는 너를 선택하셨다. 한 번의 고민도 없이. 왜 그런지 알고 있나?”
이번에도 시리스는 대답하지 많았다. 묵묵히 머리를 수그리고 있을 뿐
이었다.
“네 실패는 이게 처음이 아니야.”
“너는 완벽하지 않아. 나도,유르 넷도,우리 모두와 마스터까지. 실수
하고 실패하지. 하지만 중요한 건 실수가 아니다. 거기서 무엇을 배우 느냐.”
리디기온이 말을 이었다.
“한번 실패했다고,일이 이렇게 되 었다고,여기서 포기할 셈인가,시리 스?”
“하지만……!”
“변명은 필요없어. 넌 여기,2만 영응들이 머물고 있는 니플헤임의 대표다. 스스로의 처지를 자각하도 록. 네 자리는 남에게 함부로 넘겨 줄 만한 게 아니다.”
리디기온이 품 속에 감추고 있던
물건을 휙 집어던졌다.
그것을 낚아채자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타오르는 불의 형상이 양각되어 있는 칼집.
그녀의 마스터가 열과 성을 다해 서 만들어준 U 등급의 무기,레바 테인이었다.
“아무렇게나 방치되어 있더군. 마 스터가 선물해준 무기를 소홀히 다 루지 마라.”
“안 된다는 말은 집어치워. 네가 책임을 느낀다면,우리 모두가 만족
할 만한 방법을 가져와. 일시적인 대책은 필요없어. 마스터를 완전하 게 구할 방법을 생각해내. 그게 네 가 짊어지고 있는 의무다.”
시리스는 두 발짝 물러섰다.
마스터를 완전히 구할 방법을 떠 올리라고?
리디기온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 다.
“네가 니플헤임의 서브 마스터로 서,그리고 13층의 대장으로서 명령 한다면,우리는 불구덩이 속이든,지 옥 속이든 뛰어들 각오를 하고 있 다. 우리의 그 각오를…… 헛된 것
로 만들지 말아다오.”
“……”
“너를 믿고 있겠다.”
리디기온은 벽에서 등을 일으켰
다.
그리고 시리스를 힐끗 돌아본 뒤, 방을 빠져나갔다.
‘마스터를…… 구할 방법.’
시리스는 멍하니 선 채로 떠올렸
다.
그녀의 마스터가 처하고 있는 상 황을.
무한에 가까운 힘을 얻게 된 로키 는 현재 경계에서 고독한 싸움을 이
어가고 있다.
그 권능에 대한 대가로 마스터는 기억을 포함한 인간성을 거의 잃어 버린 상태. 시리스가 바로 앞에 있 다고 해도 알아볼 수 없겠지.
그녀가 가장 두려워했던 것도 그 사실이었다.
모든 기억을 잃었다면 쫓아가봤자 무슨 소용이 있을까.
내 목소리가 닿기나 할까.
이야기를 나눠볼 수나 있을까.
아니,그 전에…….
로키가 있는 곳에 갈 수 있는지부 터 장담할 수 없다.
‘내가 저지른 실책을…… 만회할 수 있다면/
이미 실패해버린 그녀에게 한번 더 기회가 주어진다면.
“마스터.”
시리스는 중얼거 렸다.
방금 전까지 전신을 잠식하고 있
던 우울감은 어디에도 없었다. ‘방법을 찾는 것이 나의 의무._ 없다면 만들어내서라도.
시리스는 이를 악물었다.
잇몸에서 피가 배어나왔지만,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리디기온의 말이 맞아.’
마냥 기다리는 건 그녀의 성미에 맞지 않는다.
필요한 게 있다면 쟁취한다.
그것이 시리스가 로키의 영웅으로
서 살아왔던 방식이었다.
‘누군가 마스터를 구할 방법을 알
고 있다면……:
갑자기,시리스의 뇌리에 한 명의 인물이 떠올랐다.
“니 셀!”
[바로 여기,등자앙!]화륵!
한 줄기 불꽃과 함께 요정이 나타 났다.
니셀은 시리스의 얼굴을 보더니, 평평한 가슴을 두드렸다.
[좋아,뭐든 팍팍 말해!]“알파 제로의 연락처는 받아뒀겠지?” [알파 제로…… 아! 그 변태 할아
범을 말하는 거구나! 정보를 알려주 는 값으로,시리스가 입던 팬티를 달라고 했었지? 그래서 결국 그 팬 티는……?]
스릉.
레바테인의 날이 뽑혀나왔다.
[노,농담이야. 농담! 농담입니다!] 니셀은 허둥거리며 손을 내저었다. 그리고 표정을 바꿔,양 팔을 빙빙 휘둘렀다.
[원격 통신,갑니다!]삐리리리. 찰칵.
10초도 지나지 않아 대상자가 통 신을 받아들였다.
머릿속에서 음성이 울려퍼졌다. 〈당신이군요.〉
그러나 그녀가 알던 것과는 전혀 다른 목소리였다.
시리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 노망 할아범은 어디 있지?” 〈현신께서는…… 영면하셨습니다.〉 “영면이라.”
현신 (賢神).
‘시리스쟝…… 팬티…… 핥짝……
그 새끼가 현자의 신이라고.
시리스의 오른손에 힘이 들어갔다.
“너는,그 할아범의 옆에 있던 부 관인가?”
〈예. 첫 만남에서도 소개했지만, 시젤이라고 합니다. 현 뫼비우스 회 장의 대행으로서 영웅들의 복귀 사 업을 추진하고 있지요. 니플헤임에도 저희 직원 몇몇이 파견나갔을 겁니다.〉
“말 안 해도 알아. 공문을 봤으니까.”
〈그런데…… 그 명망 높은 니플헤 임의 서브 마스터께서 직접 연락을 주셨다는 것은…….〉
시젤은 잠깐 통신을 끊더니 말을 이었다.
〈마스터 로키에 관한 일이겠군요.〉
“…..”
〈언젠가 연락이 올 줄 알고 있었 습니다. 저는 그에게 목숨을 빚졌습 니다. 그 남자는 저의 숙원을 이루 어진 은인이기도 하죠.〉
“그럼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다. 나는 마스터를 구할 수단이 필요해. 사소한 거라도 좋아. 알고 있는 거 라면 전부 알려다오.”
〈아시다시피,마스터 로키는 임계 점을 넘어섰습니다. 지금쯤 망령이
되어 있겠지요. 그의 자아를 되돌리 는 일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거의? 단정하지 않는다는 건,방 법을 안다는 거냐?”
시젤은 부정하지 않았다.
“당장 말해라.”
〈일단 저 혼자만의 힘으로는 어렵 습니다. 저는 신격으로서의 자격을 잃었으니까요.〉
“그래서?”
〈도우미가 필요합니다. 마스터 로 키와 가까우면서도 상당한 권능을 가진. 운 좋게 알맞은 자를 한 명 물색해 놓긴 했습니다만…….〉
“그게 누구지?”
〈당신도 아실지 모르겠군요.>
시젤이 말했다.
〈그는 타오니어의 전 마스터인, ‘암케나’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