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ck Me Up! RAW novel - Chapter 322
324. 경계의 왕 (1)
눈을 떴다.
아주 오랫동안,꿈을 꿨었다. 꿈에서 나는 무한의 적들과 싸우
고 다시 싸우고,또 싸웠다.
적을 아무리 죽여도,내가 수십
수백 번이나 지쳐 쓰러져도 꿈은 끝
나지 않았다.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던 꿈. 그리고 그런 꿈의 풍경조 차 까마득해질 즈음, 아득한 곳에서 불꽃이 보였다.
날카로운 통증.
쨍그랑.
나는 가슴에 꽂혀 있던 단검을 내 던졌다.
검은 피가 홀러나오던 구멍이 순 식간에 메워졌다.
“……나는.”
부서져 있던 기억들이 메워지기 시작했다.
“한서 진.”
지구의 내 이름.
이곳에서는 타오니어의 황자인 한 이스라트이자…….
‘로키.’
고개를 들었다.
쓰러진 채 죽어가고 있는 누군가 의 모습이 보였다.
더러워진 금발. 단정한 제복이 피 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시리스.
파편화된 기억들이 차츰 맞춰지기 시작했다.
저 여자는 시리스 아젠트하임. 내가 니플헤임에서 가장 신임하던 1서버의
리더이자,서브 마스터였다. 분명 내 기억으론…… 저 녀석은 대기실에 남겨두고 왔을 텐데.
기억의 괴리가 심하다.
내가 자신을 잃고 있었던 동안,
꽤 많은 일이 있었던 것 같다.
주변 상황을 파악하기로 했다. 이
곳이 어디인지. 나는 왜 이곳에서 눈을 떴는지. 그 전에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이 여자는 왜 여기서 죽 어가고 있는지.
하나.
둘.
셋.
‘그렇군.,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기어코 따라왔나.’
오지 말라고 몇 번이나 떼어 놓았 건만.
장벽의 존재가 있는 이상, 시리스 혼자 이런 일이 가능할 리 없다. 니 플헤임의 다른 영웅들,혹은 타오니 어의 녀석들까지 관련되어 있을 가 능성이 높았다.
펄럭.
나는 망토를 휘날렸다.
경계에 떠돌고 있던 마력이 과거 의 풍경을 내게 보여주었다. 이곳에
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눈앞에 생 생히 재생되었다. 마치 파노라마를 보는 것처럼. 예상과 꼭 들어맞는다. 기어이 억지를 부린 것이다.
“넌 뭐 하는 놈이냐?”
시리스를 내려보았다.
답할 상태가 아닌 듯했다. 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내가 이성을 일시적으로 되찾은 것도 이 녀석의 짓이었다.
[로키.]“요정인가.”
[응,초면이구나. 니셀이라고 해.] 시리스 위,붉은 머리의 요정이날개를 펄럭였다. 니플헤임의 담당 요정 이겠지.
[우리가 여기 온 이유는…….] “나와 함께 싸우고 싶다 이건가.” 일일이 설명할 필요 없어. 바깥에서는 다른 13층 멤버들이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경계의 오염에 저항할 수 있는 시
리스가 단독으로 이곳에 침투했겠지. 나를 설득하기 위해서.
우우웅.
손을 내젓자,시리스의 허리춤에 매달려 있던 비프로스트가 떠올랐다.
비프로스트의 칼집을 움켜쥐었다.
내부에 있는 데이터를 읽어 들였다. 그제야 진상을 알아챌 수 있었다. 이 녀석들이 어떤 의도로 이곳에 찾 아왔는지. 내게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
“멍청한 놈들.”
편하게 살라고 배려해줬더니,되 지도 않는 일을 벌이고 있다.
[로키.] [이대로라면,넌 다시 이성을 잃고 말 거야.]“딱히 신경 안 써.”
내가 선택했다.
스스로 책임져야 할 일이겠지.
‘쫓아내려 했지만……:
말재주로 나를 설득하려 했다면
바로 쫓아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억지로 협박
을 하다니.
‘이 녀석은 곧 죽는다.’
용린검에 심장을 관통당했다. 생명의 불이 급속도로 꺼져가는
중이었다. 설사 심장의 구멍을 메운 다고 해도,간섭력을 지나치게 남용 했다. 존재 자체가 사라져버릴 정도로.
물론,나는 시리스를 살릴 수 있 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내가 가진 무한의 잔과 연결시키
는 것. 시리스는 불의 힘을 영원히 잃게 되겠지만 적어도 목숨은 부지 할 수 있다.
‘이게 너의 설득인가.’
내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시리스는
죽는다.
이건 설득도 무엇도 아니다. 반강 요에 반협박.
자신을 죽이기 싫으면 계약을 하 라니.
‘하아.,
나는 이마를 감싸 쥐었다.
냉정한 녀석인 줄 알았는데 이런
바보일 줄이야.
서브 마스터를 맡기는 게 아니었다. [로키,강요는 안 해. 시리스가 죽
어도,바깥의 모두가 버려져도,우리 는 네가 내리는 결정을 기쁘게 받아 들일 거야.]
니셀이 나를 바라보았다.
[한 가지는 알아줘. 너는 그 아이들을 배려해서 두고 갔다고 생각할 지 몰라도,사실은 전혀 달라.]
니셀의 날개에서 별가루가 반짝였다. 뒤이어 툭,작은 요정이 쓰러지듯
바닥에 내려앉았다.
보자마자 그 요정의 정체를 나는
알아챘다.
‘프레이.’
무릎을 굽혔다.
양손에 들어올 정도로 작은 소녀. 세상 모른 채 곤히 잠들어 있다. [네가 에덴에 남겨둔 동료야. 너는
싸움터에 끌어들이기 싫어서 내버려 뒀겠지만, 이 아이의 꼴을 봐.]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오염이 심각하게 진행된 상태. ‘떠나지 않았단 건가.’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별안간,프레이의 눈꺼풀이 파르
르 떨렸다.
그 커다란 눈망울이 나를 비췄다.
[로…… 키……?]믿을 수 없다는 둣 깜빡이는 눈.
소녀는 벌떡 일어나 내 팔에 달라 붙었다.
[로키! 로키! 여기 있었구나!]“…….”
[가지 마! 미안해,내가 잘할게! 그러니까 제발,나를 버리지 마! 미 안해,미안해,로키……. 내가 잘못 했어. 그러니까…….]몇 번이나 웅얼거리던 프레이는 이윽고 다시 잠들었다.
잠든 프레이의 통통한 뺨을 타고 눈물 한줄기가 흘러내렸다. 나와 프
레이를 번갈아 바라보던 니셀이 입 을 열었다.
[너는 이곳을 지옥이라 생각해 프 레이를 버리고 왔겠지만…….]니셀이 가슴에 손을 얹었다.
더 지옥이었던 거야. 나는 알 수 있 어. 같은 곳에서 자라고, 태어났고, 너와 함께했던 요정이니까. 시리스와 나도,다른 영웅들도 똑같아. 그걸 위해서 … 우리는 전부를 걸고 널 만나러 왔어.]
나는 프레이를 바닥에 천천히 내 려놓았다.
“그래서,여기서 나랑 같이 썩겠다 는 거냐?”
[응.]“내가 누구와 싸우는지 알고는 있나?”
[우주의 혼돈 그 자체잖아. 각오는 되어 있어.]“그 각오가 언제까지 갈까? 10년? 100년? 1000년? 그리고,너희가 이 전쟁에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하나?”
[쓸모 있을 거라고 확신해. 너의 힘을 나눠준다면. 개인보다 동료를. 동료보다 맹우를. 하나 된 힘은,네가 늘 우리에게 강조해왔던 거잖아.]니셀이 말을 이었다.
[니플헤임의 잠재력이 충분하다는 건 네가 가장 잘 알지? 계기만 주 어진다면,각자 자신 몫을 잘 해낼 수 있어. 기나긴 싸움 속에서 그 영웅 들은 너의 방패가 되고,칼이 되고, 창이 되어줄 거야.]II II
••••••
[혼자 버티는 건 그만둬. 무리하지 않아도 돼. 지쳤을 때,우리에게 기 대도 괜찮아.]니셀은 나를 보며 눈을 찡긋했다.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겉만 번지 르르한 말을 늘어놓고 있다.
‘지구로 쫓아낼 땐 언제고.’
이제 와서 같이 싸워주겠다? 앞뒤가 달라도 너무 다르잖아. [음냐……. 로키…….]
나는 프레이를 내려보았다. 인정한다. 이건 나의 실책이야. 떼어놓을 속셈이었으면 조금 더
신경을 기울여야 했다.
이런 식으로 자신을 망쳐놓을 줄
은 몰랐다.
‘하나 된 힘.’
나는 가슴을 움켜쥐었다.
이 안엔 끝없는 힘이 담겨 있었
다. 내가 억겁의 세월 동안 끌어모 은 막대하고 순도 높은 간섭력. 아
마 이 힘을 순간적으로 방출한다면 나는 육체마저 잃어버릴 것이다. 신 의 한계를 넘은 신체라 해도, 도저 히 버틸 만한 출력이 아니었으니.
‘이 힘을…… 나누라는 건가.’
이 녀석들이 감당할 수 있을까.
7성 이상의 힘이다. 내가 그러했
던 것처럼 그들도 자신을 잃어버릴 지 모른다.
[쓸데없는 걱정이야.]내 속마음을 파악한 듯,니셀이
빙긋 웃었다.
_내가 니플헤임을 받아들이면…… 그 전보다 약해질 수도 있다.
불필요한 짐을 떠안게 되는 것이다. 지킬 것이 생기게 되니까.
나는 위를 을려보았다.
아득한 어둠이 펼쳐져 있었다.
저 너머에는 무한의 적들이 도사
리고 있겠지.
“넌 어떻게 생각하냐?”
왼손에 뭉툭한 감촉이 느껴졌다. 닳다 못해 반쯤 바스러진 군마 조
각상.
‘보고 있었다.’
처음부터 느꼈다.
위에서 내려보는 듯한 녀석의 익 숙한 시선을.
지직. 지지직.
암케나의 조작창은 잡음이 가득했다. 형편없는 화질. 몇 초에 한 번씩
버퍼링이 걸려 화면이 끊기기 일쑤 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암케나는 접속 을 끊지 않았다.
‘저 녀석은 알고 있을까.’
게임 속 세계의 진실을.
아마 모르겠지. 이곳이 어디고 내
가 왜 싸웠는지 지레짐작만 할 뿐, 앞으로도 알 길이 없을 것이다. 서 로 사는 세계가 너무 다르니까. 줄 거리를 알 수 없는 영화를 보는 심
정인지도 모른다.
“대답할 리가 없군.”
나는 피식 웃었다.
그럼 그렇지.
[전투 상점을 개방합니다.] [응원용 형광봉(1회용,50젬)을 선택하셨습니다 . 구매하 시겠습니까?] [Yes(선택) / No]
음?
나는 눈을 깜빡였다.
불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형광봉?’
왜 뜬금없이.
[구매 완료!] [액정을 좌우로 슬라이드!] [영웅에게 마스터의 응원을 보여주세요!]
번쩍!
보라색 섬광이 허공을 물들였다.
뭐 하는 거지.
암케나는 형광봉을 위아래로 흔들 었다.
희미한 불빛이 흔들리며 공중에 궤적을 그렸다.
빛의 궤적이 천천히 움직인다. 하나하나,신중하게.
허공에 문자를 쓰는 것처럼.
[한.]어둠 속.
보라색 빛이 글자를 그렸다. [행복해줘.]
이내 빛의 문자는 환상이 되어 흐 려져 갔다.
[FIGHTING!]형광봉이 사라진 뒤,
나는 가만히 서 있었다.
뒤에서 니셀이 나를 지켜보고 있
었다.
“행복해줘?”
어이가 없어진 나는 웃었다.
‘행복 하라고?’
그게 어떤 느낌인지 잘 모르겠는데. 이곳에 떨어진 다음부터는 싸움과
투쟁의 연속이었다.
죽을지,살지도 몰라 아등바등할
뿐이었는데 행복은 개뿔.
“네가 할 소리냐.”
쯧쯔.
나는 혀를 찼다.
네가 더 게임을 잘했으면 일이 스 무스하게 풀릴 수도 있었잖아.
행복. 그 단어는 내게 외국어처럼
들렸다.
니셀의 제안을 받아들여도,받아 들이지 않아도 과연 행복이란 게 있 을지.
‘하지만……:
무작정 혼자 싸우는 것보다,
옆에 누군가 있는 게 더 재밌을지 도 모르겠다.
스릉.
비프로스트의 칼집이 바닥에 떨어 졌다.
묵빛 대검날에 새겨진 마법어가 황금색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하얀 털망토가 바람을 받아 거세
게 휘날렸다.
“온다고 한 게 몇 놈이야?”
나는 검을 뽑아 든 채 말했다.
[1 만 5천 명 정도?]“자살 희망자가 더럽게도 많군.” [괜찮아. 네 힘을 받으면,죽어도
죽지 않을 테니까!]
“쓸모없으면 쫓겨날 줄 알아.”
[응!]니셀이 눈가를 닦았다.
나는 웃고 나서 비프로스트를 늘
어뜨렸다.
빙글.
대검을 한 바퀴 돌린 뒤 아래에
꽂았다.
묵빛 검날이 경계의 음침한 바닥 에 깊이 박혔다.
‘열려라.’
나는 중얼거렸다.
화아아악! 그 순간,꽂힌 검날으로 부터 찬란한 황금빛 마력이 흘러나 왔다.
섬광은 어두운 경계를 한순간에 밝히며 오염 구름을 불태웠다. 끝을 모르고 퍼져나가는 눈부신 광채. 그 속에서 나는 뒤의 말을 읊었다.
‘차원의 틈.’
기이이잉!
황금빛 선이 이어지며 허공에 차 원문을 그렸다.
뒤이어 차원문 바깥쪽에서 낯익은 그림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리디기온, 여기에.”
냉막한 인상의 남자가 내게 한쪽
무릎을 꿇었다.
리디기온. 전신이 선혈에 젖어 있 었지만,언제나 그렇듯이 적의 피였다.
“마스터! 찾았슴다!”
파지직!
번개와 함께 니하쿠가 뛰어올랐다. 땅에 날렵히 착지한 니하쿠는 나
를 보며 배시시 웃었다.
“……마스터.”
안개 속에서 백발의 여자가 걸어 나왔다.
유르넷 시드. 그녀는 나와 눈을 마주치더니 고개를 숙였다.
마지막으로.
“아론?”
“예.”
창을 든 사내가 머리를 긁적였다. “집에 안 갔냐?”
“형님의 싸움이 끝나기 전까지는, 저도 남을 겁니다.”
“멍청한 놈.”
“그게 제 장점 아닙니까.”
아론은 쑥스럽게 웃었다.
손에 들고 있는 창은 5신기 중 하
나인 루인.
나는 뮤덴이 은퇴했다는 것을 직 감할 수 있었다.
“마스터,무사해서…… 다행…… 입니다.”
무감정을 고수하고 있던 유르넷의 표정이 이내 무너졌다.
그녀는 울먹이는 듯한 얼굴로 내 게 다가왔다.
“저는…… 마스터에게 용서를…… “안 해도 돼. 너한테 도움은 많이
받았다.”
쨍그랑.
나는 발밑의 단검을 걷어찼다. 이것도 유르넷의 작품이겠지. “시리니!”
니하쿠가 헐레벌떡 뛰어갔다. 그곳에는 시리스가 쓰러진 채 죽
어가고 있었다.
먼저 이것부터 해결해야겠지. “마스터,시리니를……!”
“울음 뚝 그쳐. 가만히 보고 있어라.” 니하쿠를 지나쳐 시리스 옆에 꿇
어 앉았다.
뚫린 가슴의 구멍에서 피가 흘러 나오고 있었다. 나는 오른손을 쥐었
다. 농도 높은 간섭력이 손아귀에 모여들었다.
‘계약.’
나의 심장을 이 녀석과 연결하는 것이다.
축복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오히 려 저주에 가깝겠지.
‘뭐,그렇다고 해도.’
내가 키운 영웅을 버려둘 수는 없지.
나는 시리스의 가슴에 손을 집어 넣었다.
당장이라도 숨이 끊어질 것만 같다. 불의 힘이 아니었다면 진즉에 죽었 겠지.
여기.
손을 움켜쥐었다.
두근.
찢어진 심장을,빛이 연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