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ck Me Up! RAW novel - Chapter 4
4. 튜토리얼(2)
나는 비척거리며 일어섰다. 뒤로도 갈 수 없다. 옆으로도 갈
수 없다. 길은 앞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건 저 괴물과 싸우라
는 뜻이냐?
[‘한(★)’이 패닉에서 벗어났습니다!]
오냐!
싸워주마. 그리고 꿈인지 뭔지 몰 라도 나를 여기에 보낸 놈의 면상을 깨버리고 말겠다.
심호흡을 했다 몇 번이고 심호흡 을 했다. 그래도 속이 가라앉지 않 자 혀를 강하게 깨물었다. 쌉싸름한 피 맛이 배어났다.
상황 파악.
파악해라.
여기가 어디인지를.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이유 같은 건 나중에 생
각해도 좋다. 꿈에서 깨어난 다음 천천히 둘러봐도 된다.
‘’그렇다면……
나는 주위를 살폈다.
불타는 집들. 내려앉은 민가. 도망
치는 주민들. 그 뒤를 고블린들이 쫓아가고 있다. 나는 이 장면을 어 디선가 본 적 있다. 본 정도가 아니 다. 아직까지도 생생히 떠올릴 수 있었다.
픽 미 업 (Pick me up).
이곳은 픽 미 업의 프롤로그 스테
이지 였다.
불타는 마을 필드. 훨씬 사실적이
고 세부적이긴 하지만 이건 ‘배경’이 었다. 연극의 뒷 그림 같은 것이다. 저쪽에서도 여기를 간섭할 수 없고 여기서도 저쪽을 간섭할 수 없다.
왜 내가!
꾸물꾸물 올라오는 부정적인 생각 을 가라앉혔다.
화풀이는 깨고 나서 해도 돼. 나는 오른손의 철검을 한 바퀴 휙
돌렸다.
오른 어깨가 무게로 뻐근해졌다. 적은 한 마리.
배경 상 마을의 고블린은 수백 마 리지만 ‘필드’에 있는 고블린은 단
한 마리뿐이다. 나머지는 없는 놈 취급하면 된다.
언덕 아래,철모를 눌러쓴 고블린 한 마리가 눈을 희번덕거렸다. 칼날 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다.
“케특!”
“만들 거면 좀 대충 만들든가
.. VI
그래픽이 좋은 정도가 아니다. 픽 미 업은 모바일 게임이야. 절대 이 런 그래픽이 아니다. 입가의 송곳니 와 빨간 눈,피부에 돋은 우둘투둘 한 돌기. 시뻘건 피.
왜 이리 사실적인 거냐.
[‘한(★)’이 공포를 느낍니다! 모 든 능력치가 30% 감소합니다.] [Tips/공포 내성치가 낮은 영웅은 공포를 자주 느낍니다. 주의하세 요.]아무리 대범한 성격의 소유자라도 다짜고짜 이런 장소에 떨궈놓고, 검 한 자루 들려서 괴물과 싸우라고 하 면 무섭지 않을 리 없다.
하다못해 K-2라도 들려주든가, 총이라도 쏴 갈기게!
서 있기만 했는데도 다리가 후들
거린다.
눈앞이 까마득해지며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입에서 더운 숨이 샜다.
저 칼에 맞으면 아플까?
여기서 죽으면 현실에서도 죽어? 아니면 꿈에서 깨?
“망할……
시험할 생각은 없다. 더럽게 아플 테니까.
나는 피가 섞인 침을 퉤 뱉었다. 고블린의 덩치는 나보다 작다. 기
껏해야 중학생 정도. 팔다리도 얇고 가늘었다. 근육으로 따지면 그렇게
힘은 없을 것이다. 초등학생이든 중 학생이든 칼침 맞으면 한 방에 가겠 지만.
더군다나 나는 경사진 언덕의 위 에,고블린은 아래에 있다.
지형은 이쪽이 유리하다!
“개 놈아!”
나는 언덕을 달려나가며 발길질을 했다.
선두에 있던 고블린이 가슴에 발 차기를 맞고 아래로 뒹굴었다.
고블린이 뒹굴면서 칼을 휘둘렀 다.
긴장하지 마. 눈 깜빡이지 마. 끝
까지 봐라! 못 보면 뒤지는 거다! 뒤로 한 발짝 물러나자 코앞을 칼
날이 스치고 지나갔다. 가슴에 차가 운 얼음덩이가 내려앉았다. 좀만 늦 었다면.
“이 우라질 게!”
철검을 집어 던졌다. 검자루가 철 모에 맞아 팅 소리를 냈다. 고블린 이 비틀거렸다. 나는 그대로 뛰어들 어 놈을 덮쳤다.
나와 고블린은 한 데 섞여 쓰러졌 다.
“뒤져,이 새끼야!”
나는 마운트 포지션을 잡고 고블
린의 얼굴을 후려쳤다.
양 무릎으로 어깨를 고정시킨 채
주먹으로 코를 갈겼다. 뚜둑 소리가 나며 고블린의 코가 주저앉았다. 피 가 왈칵 튀었다.
머리에 불이 붙은 거 같다. 고블린 에 올라탄 나는 미친 듯이 주먹 질을 했다. 철검 같은 건 잊어버렸다. 한 방 한 방에 온 힘을 다해서. 주먹이 부서져라 주먹질을 했다.
그러기를 몇 분.
“하아,하아……
나는 고블린에게서 떨어져 대자로 엎어졌다.
피투성이가 된 고블린은 살짝 꿈 틀거리더니 움직임을 멎었다.
[스테이지 클리어!] [’한(★)’, 레벨업!] [보상이 지급됩니다. 우편함을 확 인해주세요.]다시 한번 시야가 홱 돌았다.
눈을 떴을 때,나는 하얀 방에 있 었다.
피로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 다. 온몸에 난 잔 상처도 없었다. 엉 거주춤 일어났다. 피로 대신 허탈감
이 몰려왔다.
[마스터,다음 스테이지를 진행하 기 전에 동료를 뽑아볼까요? 메뉴의 ‘소환’ 탭을 터치해주세요! 처음의 특별 서비스! 고급 소환 1회를 위한 500젬을 드립니다.] [탈칵, 두루루루.] [투콰카캉!] [이셀 : 아니, 이 느낌은?!] [!★! Super! ★! Rare !★!] [마스터 ‘암케나’님이 영웅 ‘셰이 (★★★★)’를 습득하셨습니다!]이 메시지는 또 뭐야?
설마.
나는 방문을 열고 광장으로 나왔 다. 굳게 잠겨져 있던 철문 중 ‘소환 소’의 문이 열려 있었다.
미,미친.
진짜 소환된 건가?
[마스터는 운이 좋으시군요! 뽑은 영웅을 확인해봐요. 메뉴의 ‘영웅’ 탭을 터치해주세요.]나는 떨리는 발걸음으로 소환소 문에 들어갔다.
넓은 방 가운데에 검은 마법진이 새겨져 있다.
그 위에 여기사가 서 있었다. 얼마 뒤,시야의 일부가 반짝이며 능력창 이 떠올랐다.
[셰이 라다스테리(★★★★) Lv. 1 (Exp 0/10)]
[클래스 : 기사(Knight)]
[힘 : 18/18]
[지능 : 10/10]
[체력 : 16/16]
[민첩 : 20/20]
[보유 스킬 : 전투 논리(Lv.l),
중급 세검술(Lv.l),기사의 마음가 짐 (Lv.l)]
기사는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화 려한 판금 갑옷을 입은 채 눈을 감 고 있었다. 허리에 매달린 은빛의 레이피어가 빛을 받아 번쩍였다.
여기사가 눈을 떴다.
“소환됐나.”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린 여기사는 마법진 위에서 뚜벅 걸어 나왔다. 그녀는 우두커니 서 있는 나에게 눈 길을 던졌다.
“너는?”
“하,한서진.”
“한서진? 이상한 이름이구나. 나 는 셰이 라다스테리. 기사다.”
셰이는 무심히 대답하고는 소환소 를 나갔다.
이럴 때가 아니지. 나는 머리를 휘 휘 털고는 셰이를 따라나섰다. 셰이 는 광장 중앙에서 근처를 둘러보는 중이었다.
“흐음,이런 곳인가. 이해했다.”
무얼 알았는지 고개를 끄덕이는 셰이.
걸을 때마다 갑옷의 연결부에서 찰그락대는 소리가 났다. 나에게는
조금의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다.
[소환한 영웅으로 파티를 구성해 볼까요? 히어로 박스의 영웅을 파티 구성 칸에 드래그 앤 드롭,마스터 만의 파티를 만들어보세요!] [‘한(★)’과 ‘셰이(★★★★)’가 파티가 되었습니다!]머리가 빠르게 돌아간다.
이해할 수 없는 일 투성이였지만 몇 가지 분명한 점은 있다.
자꾸 눈앞에 떠오르는 이 창은 ’픽 미 업’의 튜토리얼을 진행하는 요정,
이셀이 출력하는 메시지라는 것. 오 래전 일이지만 그쯤은 기억하고 있 다. 또한,지금의 대기실을 조종하 는 주체는 내가 아니라는 것. 홀로 그램 커서는 자기 멋대로 움직이며 메뉴를 선택했다.
그리고 방금,내가 겪은 고블린과 의 전투는 픽 미 업의 튜토리얼을 알리는 첫 전투였다는 사실이다. 탑 의 각 층은 랜덤 스테이지지만 단 하나, 고정된 무대가 있다면 튜토리 얼. 튜토리얼에서는 언제나 불타는 마을과 고블린이 등장한다.
그렇다면 이곳은…….
개 같은.
최악의 가능성이었다.
[파티를 구성 했다면 출격합시다!] [두 번째 미션,스타트!]다시 한번 시야가 반전되었다.
눈을 떴을 때,익숙한 풍경이 망막 에 비쳤다.
불타는 마을. 도망치는 사람들. 언 덕 아래에서 몰려오는 고블린 무리 들.
뒤로 손을 뻗자 투명한 벽이 만져 졌다. 나갈 수 없는 것도 마찬가지
였다.
단 한 가지 차이점은,
“버러지들!”
셰이가 허리춤으로부터 세검을 뽑 아 들었다. 송곳과 같은 칼끝이 첨 예하게 빛났다.
고블린은 한 마리가 아니었다.
“케특, 케르르르특!”
언덕 아래,무려 다섯 마리의 고블 린이 다가오는 중이었다.
피처럼 붉은 눈동자가 나와 여기 사를 번갈아 포착했다. 내 손에는 뭉특하고 낡은 철검이 들려 있다. 더군다나 가죽을 덧댄 판금 갑옷을
맵시 있게 차려입은 셰이와 달리 후 줄근한 셔츠와 바지를 입고 있다.
왜 저 여자는 플레이트 메일에 세 이버고 나는 낡아빠진 철검이야!
”초보자로군. 자세가 안 돼 있어.”
”처음이니까!”
어쩔 수 없다.
셰이는 엉거주춤 서 있는 나와 달 랐다. 왼손을 허리춤 뒤로 돌리고 오른손에 쥔 세검을 고블린에게 겨 누었다. 살짝 숙인 하체는 강한 탄 력을 머금고 있다. 초보자인 내가 봐도 깔끔한 자세였다.
고블린들이 산개 대형으로 퍼져
다가왔다. 사거리에 닿으면 즉각 검 을 휘두를 기세였다.
한 명이라면 저번의 방법으로 어 떻게든 될 거 같지만,다섯 명이라 면…… 어떻게 해야 되지? 마땅한 수 가 떠오르지 않는다.
“캬오!”
선두에 있던 고블린 한 마리가 달 려왔다. 야위었지만 근육질의 팔이 꿈틀거린다. 피를 머금은 칼이 휘둘 러졌다.
번개처럼 뛰어나간 셰이가 칼을 비껴내더니 고블린의 목젖에 검을 찔러넣었다. 그 즉시 뚫린 구멍에서
피가 울컥 솟았다.
코에 확 와 닿는 피 냄새에 정신이
아찔해졌다.
“캬르르특!”
“약하긴!”
셰이는 고블린의 칼을 흘리며 세 검으로 목젖을 뚫었다. 한 합에 한 마리씩. 팔다리나 몸통도 아니다. 직경 5cm도 안 되는 좁은 틈에 정확 히 세검을 찔러넣었다.
놀랍도록 무서운 솜씨였다.
잠깐,이렇게 멍 때려도 되나.
어느새 고블린 세 마리가 땅바닥 에 몸을 눕히고 있다.
내가 이곳에서 한 일이라곤 구경 밖에 없었다.
이 전투가 끝나면…….
이런 개 같은!
나는 철검을 앞세워 달려들었다. 네 마리째의 고블린을 처치한 셰이 가 몸을 비꼈다.
“한 마리는 네게 맡기마.”
맡기고 자시고!
이 싸움이 끝나면 튜토리얼의 마 지막 단계가 기다리고 있다.
마지막 단계에서 무얼 하느냐고 하면,영웅 합성을 한다. 영웅을 소 모해 다른 영웅의 경험치를 올리는
바로 그 과정이다.
그리고 지금,대기실에 있는 사람
은 나와 셰이뿐이다.
호흡이 가빠진다.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았다. 지금 내 얼굴을 향해 휘둘 러지는 고블린의 칼보다 더 무서운 것은 전투가 끝난 직후 일어날 결과 다.
꿈이라고?
이런 리얼한 꿈이 어딨어!
허리를 숙이자 잘린 머리카락이
몇 가닥 휘날렸다. 나는 고블린의 품 안으로 파고들며 철검을 깊게 찔
렸다. 고기를 뚫는 둔중한 감촉이 전해졌다.
노린내가 코를 자극했다.
주위의 열기로 피부밑 온점이 바 싹 익어갔다.
칼끝 너머로 맥박치는 내장의 두 근거림도,생명 하나를 죽였다는 실 감도 흐릿하게 느껴졌다.
[스테이지 클리어!] [‘셰이(★★★★)’,레벨업!] [보상이 지급됩니다. 우편함을확인해주세요.] [MVP – ‘셰이(★★★★)’]
광장으로 돌아왔다.
[마스터,영웅들이 전투를 훌륭하 게 해냈군요. 마지막 튜토리얼이 기 다리고 있습니다. 영웅을 강화하는 방법, 합성! 문을 오픈합니다!] [메뉴의 ‘합성’ 탭을 터치해주세 요.]덜커덕.
합성소의 문이 열렸다.
’X됐다.’
냉정하게 생각하자.
이곳은 그래픽이 실사화되었다는 점을 빼면 픽 미 업의 대기실 초기 구조와 판박이다. 어찌된 영문인지 몰라도 나는 이런 곳에서 깨어나 버 렸다. 게임 설치가 되었고 튜토리얼 을 시작했다.
[어이,너!]뇌에 직접 파고드는 듯한 목소리 가 들려왔다.
나는 위를 바라보았다. 팔뚝만한 크기의 소녀 한 명이 공중을 날아다 니고 있었다. 까만 원피스를 입은
소녀의 등 뒤에서 잠자리 같은 날개 두 쌍이 펄럭였다.
[빨랑빨랑 안 들어가? 마스터가 기다리잖아!]
소녀는 내게 삿대질을 했다.
검은 머리를 양쪽으로 땋아 내린
소녀. 동글동글한 이목구비와 젖살 이 빠지지 않은 뺨. 나는 이 모습을 본 적 있었다.
“.이 셀?”
[그래, 나는 이셀…… 이 아니라,
너,너,내 이름을 어떻게 알아?] 당연하지.
이 튜토리얼을 했었으니까. [아무튼 합성소에 가! 기다려주는
것도 한도가 있어.]
“가면 어떻게 되는데?”
[합성을 할 거야.]셰어는 먼저 합성소에 들어갔는지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광장에 우두 커니 나 혼자 서 있었다.
나는 외쳤다.
,’안 가,시발!”
<5화〉